'겨울'은 '봄'을 잉태하고 있다. 겨울의 혹독함 속에서 봄의 포근함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결국 봄은 오고 말 테니까.

 

  이번 호는 맨 뒤의 글에서 시작해야 한다. (이진경, 없어도 있는 동네의 아무것도 아닌 자들 이야기)

 

  제목에 나온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말에서 오디세우스를 생각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아무것도 아닌 오디세우스... 과연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나. 아니다. 지혜로운 사람, 꾀보라고 해도 좋겠고. 성공적으로 모험을 마친 사람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이 글에 나오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은 결코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무엇이나 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면 '없어도 있는 동네'라는 말에 눈길이 간다. 재일 조선인들의 삶을 다룬 시"이카이노 시집"을 다루면서 쓴 글인데... 이 시집 첫째 시 첫구절이 바로 '없어도 있는 동네'라는 말로 시작한다. (132쪽)

 

'없어도 있는'과 '있어도 없는'을 대비시키면서 글이 전개되는데... 없어도 있는 자들은 힘 있는 존재들이다. 이들은 비록 현재는 없지만 미래를 만들어가는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진경은 이 글에서 '없어도 있는 것'에 속하는 인물로 카프카, 보들레르, 마르크스, 들뢰즈 같은 사람을 언급했는데(137쪽)...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박정희와 노무현으로 대변되지 않을까 한다. 상반되게 영향을 주고 있는 '없어도 있는 사람'으로서.

 

반면 있어도 없는 자들은 분명 현재에 존재하고 있지만 미래에는 존재 여부가 불투명한 그런 존재들이다. 이진경은 '있어도 없는 것'은 있어도 존재감을 주지 못하는 것이란 말(137쪽)이라고 하고 있다. 이 말은 '있어도 없는 자'들은 사라져 가는 존재, 또는 사라져야 할 존재 취급을 받는 그런 부류들이란 말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며 이번 호 앞부분으로 돌아간다. (장영식, 영풍제련소와 민주주의, 일곱째별, 길 위의 '탈핵희망국토도보순례' 그리고 정기석, 농업이 살아야 모두가 산다)

 

주류 언론에게서 이들은 철저하게 있어도 없는 자들 취급을 당한다. 이들은 관심 밖에 있다.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주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철저하게 없는 자 취급을 당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진경의 논리를 따르면 주류 언론이 '있어도 없는 자' 취급을 해도 이들은 '없어도 있는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렇게 우리들 앞으로 나선다. 탈핵희망도보국토순례에 대한 기록을 읽어 보라. 이들은 거의 없는 자 취급을 받지만 있는 자로서 나선다. 행동한다. 그리고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분노로 마음에 상처를 받고 나가떨어지는 것이 아닌, 상처가 멍으로, 다시 치유될 수 있는, 자신을 더 강하게 해주는 경험으로 받아들인다.

 

이렇게 '없어도 있는' 사람으로 이들은 나선다. 농민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는 잘알려져 있지 않다(? 알고도 모른 체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만큼 농민들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필수 존재이면서도 '없는' 자 취급을 받았다.

 

아무리 없는 자 취급을 해도 농민들은 있는 자로 우뚝 선다. 그래서 아직까지 우리 사회가 희망이 있다. 비록 '있어도 없는 자' 취급을 하는 존재들이 있지만, 그런 취급을 받아도 당당하게 '없어도 있는 사람, 존재'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 존재들을 '삶이 보이는 창'에서 보여주고 있다.  '있어도 없는 것' 취급을 받는 존재들에게 '없어도 있는 것'이라는 존재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 또 결코 그들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그들을 볼 수 있는 창을 마련해 주는 것, 이것이 삶이 보이는 창이 하는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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