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의에 대하여 - 무엇이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가
문형배 지음 / 김영사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마 연예인 못지 않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았나 싶다. 어딜 가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을까? 작년 12월부터 올해 4월까지 방송에서 보던 얼굴이니... 출연 횟수로 따지면 어느 연예인 못지 않을 것이다. 


윤석열 탄핵 심판을 진행했던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문형배. 그리고 올해 4월 침착하게 읽어가던 탄핵심판 선고문. 그것을 많은 국민이 지켜보았으니, 그를 아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얼굴은 안다. 그런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단편적으로밖에는 모른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법관의 신상을 어떻게 잘 알겠는가? 신상이라고 해봤자 언론에 알려진 아주 적은 부분밖에는...


그가 탄핵심판 선고 이후에 퇴임을 했다. 그리고 책을 냈다. 책? 좋은 기회다. 문형배라는 판사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주어지는 셈이니.


그가 판사로 재직하면서 자신의 블로그를 운영했다고 한다. 그 블로그에 안타까운 심정을 담아 올린 글도 있고, 기쁜 마음으로 올린 글들도 있었겠다. 여기에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한 독후감도 있었을 테고. 그의 블로그에 들어가보지 않아서 추측을 할 뿐. 이 추측은 책에 기반하고 있고.


자신이 올린 글 중에서 고르고 골라 이 책을 엮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거의 20년의 시간을 두고 있다. 20년이라면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처럼 더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는 두 번이 아니라 서너 번은 바뀌었다고 봐도 된다. 


그럼에도 과거 시기의 글들을 실은 이유는 그 글들이 과거에만 매어 있지 않고 현재에도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일상에서 경험하고 느낀 점을 쓴 글들과 읽은 책들을 소개하는 글들, 마지막으로 법원과 관련된 글들이 실려 있는데...


읽어가면서 판사 문형배(그냥 판사로 직함을 통일하련다. 전 판사라는 말도 좀 우스우니까)를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는 느낌, 판사 문형배 속에 사람 문형배가 들어있음을, 그는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던 어느 판사의 기록'(7쪽)이라고 했지만, 아니다. 그는 성공했다. (이 성공이 평균인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인지,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공하지 못했다는 의미인지는 헷갈리지만, 두 경우 모두로 해석해도)


최근에 읽은 커트 보니것의 연설 중에 마크 트웨인을 인용한 글을 보면... 그 글은 이렇다.


마크 트웨인은 참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았지만 노벨상은 못 받았죠. 그런 그가 삶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사는가를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마음에 드는 네 마디를 대답으로 떠올렸습니다. 저도 그 답이 마음에 듭니다. 여러분도 마음에 들 것입니다.

"우리 이웃의 좋은 평가" 

(커트 보니것,,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문학동네. 2019년 1판 5쇄. 57쪽.)


이 글을 보면 문형배 판사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감사의 말'에 보면 그가 버스를 탔을 때 버스 기사님이 '이 버스에 문형배 재판관이 타고 있습니다. "박수 한번 칩시다"'(405쪽)라고 했다니, 이보다 더 좋은 이웃의 평가가 어디 있겠는가. 이는 바로 우리와 같은 삶을 산 사람에게 보내는 박수 아니겠는가. 이보다 더한 성공이 어디 있는가. 앞에서 언급한 두 의미 모두에서.


그만큼 책을 읽다보면 문형배 판사의 사람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그가 몇몇 글에서 '착한 사람이 법을 알아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고 있는데, 이보다 더 평균적인 사람에 대한 호의를 드러내는 말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착하게 사는 사람이 법을 몰라서, 그냥 사람은 다 자기와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겠거니 해서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착한 사람들이 법을 알아야 한다고, 사건이 터지기 전에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최소한 법 공부는 해야 한다고 하니, 그가 사람에 대해 지닌 사랑을 이런 말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는 판사 재직 시절 사형 선고를 한번도 하지 않았다고, 그것을 무척 다행으로 여기고 있으며, 판사의 선고 이전에 당사자들끼리 조정을 하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 점을 봐도 그는 사람에 호의를 지닌 판사였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가 '여는 말'에서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애썼다고 하는 말이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판사가 아니라 사람들 곁에 있는 판사 생활을 했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책에서 은인으로 언급하고 있는 김장하 선생의 말처럼 그는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존재들에게 베푸는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고, 그것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단 생각을 한다.


이런 점에서 성공하지 못했다고 표현한 것은 겸손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비록 판사로서 또 헌법재판관으로서 남들과 다른 삶을 살았지만, 본질은 평균인의 삶을 살았다고, 그런 평균인의 삶이 바로 그의 삶에 체화되어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읽으면서 추웠던 작년 겨울부터 올 봄까지를 다시 떠올리기도 했는데, 그 추위를 그의 탄핵 심판 선고문을 통해 따스한 봄을 맞이했다고 생각하니... 앞으로도 그의 삶을 통해 계속 그러한 따스함을 우리 사회에 전달해주기를 바란다.


그와 같은 판사들이 있다면 차가운 법이 아니라 따뜻한 법이 될 것이고, 그러한 따뜻한 법이 바로 우리 사회의 정의 실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 졸업을 앞둔 너에게
커트 보니것 지음, 김용욱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입틀막.


보니것이 이 말을 들었다면 아마 무슨 헛소리야? 했을 거다. 당당하게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인 제퍼슨을 비판하면서 '불이 안 났는데 "불이야!"라고 소리치는 경우를 빼곤, 제 맘대로 말할 자유가 있거든요.'(153쪽)라고 한 사람이니...


대통령을 비판한다는 이유로 입을 틀어막힌 채 끌려나가는 모습을 봤다면, 이 말을 다시 우리에게 들려줬을 수도 있겠다.


'요즘엔 그 어느 때보다 고문실이 많습니다. 이 나라가 아니더라도 다른 나라에는 많죠. 미국이 종종 우방이라 부르는 나라들 말입니다.'(200쪽)라는 말을.


그만큼 그는 말할 자유를 옹호한 사람이다. 그래서 검열을 반대했고, 검열에 반대했던 사서들에 대해서,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미국에서 검열을 가장 많이 당한 작가' 181쪽-188쪽)


그는 자신의 말할 권리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할 권리, 심지어는 극단주의자들의 말할 권리도 보장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자신들에게 고통을 줄지라도.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자유가 책임져야 할 일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추악한 사상 하나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자유의 대가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옛날 미국의 영웅들처럼 씩씩하게 자기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188쪽)


이런 보니것에게 입틀막이란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것도 권력자가 권력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이 비판할 권리를 막는 일은 민주주의 국가 (누가 좋아하는 말을 쓴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의 수정헌법1조를 옹호한다. 이 법은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한다고.


주로 대학 졸업식 연설문을 담은 이 책은 이렇게 보니것의 사상을 담고 있다. 그가 각 졸업식에서 하는 말은 다양하지만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이제 성인이라는 것, 성인으로서 책임을 지고 사회를 좋아지게 하는 쪽으로 일을 해야 한다는 것. 졸업이 예전의 성인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인생을 즐기라는 것. 커다란 일이 아니라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작은 것에서도 인생의 행복을 찾으라는 것.


그래서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라는 말을 때때로 하라는 것. 그리고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제대로 받은 교육으로 세상의 억측가들에게 굽실거리지 말라는 것. 억측가들을 독재자라고 해도 좋고, 사람들을 선동하는 선동가라고 해도 좋다. 그런 인물들이 많은데, 지금 미국의 트럼프가 대표적이지 않을까. 


아마 보니것이 살아 있었다면 이 트럼프를 풍자하는 말을 통렬하게 했을 텐데... 단지 트럼프 뿐만이 아니다. 지금 세상에는 지도자랍시고 트럼프의 아류들이 너무도 많은 현실이니... 보니것이 졸업생들에게 한 이 말, 지금도 유효하다.


우리나라 2030세대 (세대론을 찬성하는 것은 아니다. 보니것은 이러한 세대론에 대해서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별개의 세대에 속한 구성원들이 아닙니다. ...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을 살며 떼어낼 수 없는 사이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형제자매로 여겨야 합니다. ... 나의 아이들이 이 행성에 대해 불평할 때마다 저는 이렇게 대꾸합니다. "조용히 해! 나도 여기 좀 전에 도착했어. 내가 므두셀라-구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로, 969년동안 살았다고 전해진다-라도 되는 줄 알아?" ... 우리는 대체로 동일한 일생을 살고 있습니다.' (28-29쪽)라고 하고 있으니, 이 말 정말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에게 그대로 전해줘도 되겠단 생각이 든다.


'억측가들에 관한 사실 하나가 드러났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구하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관심을 끄는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이라도 그들의 억측이 언제까지나 유지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들이 증오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현명한 남성과 현명한 여성입다. 

그러니 어떻게든 현명한 사람이 되어주십시오. 우리의 생명과 여러분의 생명을 구하십시오. 존경받는 사람이 되십시오.'(146쪽)


우리나라도 이런 억측가들이 있으니, 보니것의 이 말을 자꾸 되새겼으면 좋겠다. 그가한 것처럼 그들이 잘못했다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사회에 갓 발을 들여놓거나 사회 생활을 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이들에게, 당신들이 배운 것을 생각해라. 그리고 지금 큰소리치는 사람들의 주장을 잘 생각해봐라. 우리는 현명해져야 한다는 이 말. 이것은 부탁이다. 그리고 당신들과 우리는 다른 시대를 살고 있지 않다. 세대 구분이 아니라 우리는 동시대에 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니 함께 해결 방법을 찾아보자고 하는 이 말들.


여기에는 사랑이, 믿음이 그리고 연대가 깔려 있다. 이것이 보니것이 평생 동안 추구한 일들 아니었을까? 이런 그에게 '입틀막'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그런 일이 벌어지는 사회를 그는 용납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그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하고 있으니... 보니것 연설이 지닌 보편성이 이런 데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참조할 만한 문장이 많은데, 친절하게도 책의 맨 뒤에 '시대로부터 동떨어졌지만 생각해볼 만한 문장 모음'이라는 장이 있다. 보니것의 문장 중에 생각해볼 만한 문장들이 실려 있으니, 그것을 읽어도 좋다.


이 책의 제목을 바꿔서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래, 이 맛에 읽는 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 제16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백온유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전에 구입해 놓고, 책장에 고이 모셔놓고 있다가 이제는 읽어야지 하고 읽었는데, 일곱 편의 소설.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각 소설의 특징을 찾는 것이 더 좋은 읽기겠지만, 소설 역시 시대 속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들 작품들이 지닌 어떤 공통점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더 앞선다. 그러다 실패. 


어떤 작품은 계속 마음 속에 남아 있고, 어떤 작품은 빠른 속도로 읽었고, 또 어떤 작품은 함께 실린 비평을 보고서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했는데...


대상 수상작이 백온유가 쓴 '반의반의 반'이란다. 반의 반이면 1/2이고, 그것의 반이라면 1/4이 되나? 그런데 왜 제목이 이럴까? 그것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읽게 되는데... 등장인물은 넷이다. 할머니 영실, 엄마 윤미, 딸 현진, 그리고 요양보호사 수경. 


사건이 벌어진다. 영실이 꼭꼭 감추고 있었던 돈 오천만 원이 사라진 것. 이제 범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등장인물 넷에 범인으로 의심받을 사람은 정해져 있다. 요양보호사. 문제는 증거. 하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한다는 판정을 받은 영실. 확실하지 않는 CCTV. 물증은 없다. 심증은 있는데...


이 사건이 중심이 되지만, 사실 소설의 중심은 이것이 아니다. 바로 비틀어진 관계. 즉 서로의 마음을 열지 않은 관계를 지속한 가족의 이야기다. 모든 것을 다 터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가장 많은 것을 공유하는 것이 가족이라면, 이들은 무엇을 공유했을까?


가족이 공유하고자 하는 것 중에서 가장 먼저 꼽으라면 그것은 사랑 아닐까? 이 사랑이 맹목적일 필요는 없다. 다만, 상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말, 행동, 마음가짐 등등이 상대에게 가 닿으면 된다.


어쩌면 상대를 가장 존중하고 배려해야 하는 공동체가 가족일지도 모른다. 그냥 알아서 하겠지, 엄마니까, 아빠니까, 할머니니까, 자식이니까, 손녀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데 서로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관계, 이것이 바로 가족의 바람직한 형태 아닐까.


따라서 가족은 똑같지는 않지만 다름을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관계일 수 있다. 서로를 다독거려줄 수 있는 관계. 하지만 이 소설 속 가족은 그렇지 않다. 영실-윤미의 관계는 데면데면하고, 영실-현진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세월을 보내왔을 뿐 이들에게는 끈끈한 무엇이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아니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그것에 보탬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양보호사 수경은 그렇지 않다.


인생 말년에 수경의 태도에 마음을 여는 영실인데, 어쩌면 영실이 기대한 가족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엄마인 윤미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고, 손녀인 현진도 그랬을 텐데, 이들의 관계는 이상하게도 조금씩 비틀어져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돈의 행방은 중요하지 않다. 적어도 영실에게는. 영실은 인생 말년에 자신을 보듬어준 수경이 고마울 뿐이니... 물론 돈을 수경이 가져갔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서 소설을 읽으며 함께하지만 무언가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비틀어져 어긋나는 관계를 생각하게 된다. 이런 관계를 인식한다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텐데... 아마 윤미나 현진이 수경의 반의반의 반만큼만 했어도, 또 영실이 그렇게 했어도 이들의 관계는 훨씬 나아지지 않았을까?


비틀어진 관계를 성해나의 '길티 클럽:호랑이 만지기'에서도 만날 수 있고, 성혜령의 '원경'에서도 만날 수 있다. 특히 성혜령의 '원경'을 읽으면서는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을 떠올리기도 했으니..


남녀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서도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하는 사람에 의해 관계가 비틀어질 수 있음을... 그것이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 아이를 학대하는 감독의 모습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니... 


서로 딱 맞는 관계를 맺기는 쉽지 않다. 세상에 만들어진 퍼즐 조각처럼 제 자리를 찾기만 하면 딱 맞아떨어지는 관계를 원하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그것은 쉽지 않다.


오히려 딱 맞지 않기 때문에 맞추려고 자신과 상대가 조금씩 자신을 내어놓고 함께 맞춰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가 중심이 아니라 '우리'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렇게 한다면 정확히 맞지는 않더라도 떨어지지는 않을 정도의 맞춤은 된다. 2025 제16회 절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으며 살아가면서 맺게 되는 관계, 그러한 관계를 비틀어지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숲 - 나와 지구를 살리는 경이로운 나무들의 이야기
다이애나 베리스퍼드-크로거 지음, 노승영 옮김 / 아를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숲을 이루고 있는 존재들은 많지만, 이 책은 주로 나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나무들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들. 나무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들.


나무들의 이로움을 이야기하라면 끝이 없을 정도로 많고 긴 이야기들이 필요할 것인데, 그 중에서도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그 숲들이 우리들의 삶을 지탱해주고 있음을 명심한다면, 함부로 나무를, 숲을 대하지는 못하리라.


인간들이 편리하게 살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무를 베어 숲을 없애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인간의 편리로 다가왔던가. 오히려 인간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지 않은가.


그냥 공기 문제만이 아니다. 나무로부터 우리는 수많은 의약품들을 얻어왔거나 힌트를 얻어왔는데, 그것에 대해서 과연 제대로 생각하고 연구했는가 하면 그것이 아니다. 그러니 인간 건강을 위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음에도 얻으려 하지 않은 것도 문제다.


이 책은 나무들이 우리에게 주는 이점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단지 우리에게 이롭다는 점이 아니라 나무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 애쓰고 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지구에 이로운 방식으로 생존해 왔음을, 다른 존재들과도 감응하면서 지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대기오염이 심각한 지금, 우리는 숲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도심에도 나무를 심고 있다. 그것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공기 정화의 기능을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단지 공기정화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역할도 하고.


이러한 나무들을 어찌 무시할 수 있겠는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들에 과연 우리는 얼마나 관심을 지니고 있었는가. 이 나무들이 약용으로도 쓰이고, 공기 정화 역할도, 우리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기능도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그만큼 나무에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다.


나무로부터 배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은 나무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한다. 그냥 나무를 지키자가 아니다. 나무로부터 배워야 한다다. 인류가 이 지구에서 계속 건강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책에 어떤 아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나무를 사랑하는 아이. 그 아이가 나무에게 하는 말. "언젠가 난 너에 대해 배울 거야." (293쪽)


그렇게 나무로부터 배운 아이는 나무와 또 다른 존재들과 교감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교감을 바탕으로 좀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게 하려 한다. 한 존재의 멸종은 그 존재의 멸종으로 끝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므로, 연결고리를 인위적으로 끊는다는 것은, 그 피해를 예측할 수 없는 지경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만큼 다른 존재들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이 지구에서 우리는 모두 함께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때문에 인간이 나무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나무가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것을 인식하고 나무를 바라보면 나무가 새롭게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나무에 관한 많은 글들. 어떤 글들은 너무도 서정적이어서 그 자체로 감동을 준다. 또 어떤 글들은 과학적인 지식으로 나무가 얼마나 우리에게 이로운 존재인지를 설명해주고 있어서 설득력이 있다.


이렇게 나무에 관해 다양한 방식의 글쓰기를 한 글들이 모여 있는데, 무엇보다도 나무에 대한 사랑이 글 전체를 통해서 넘쳐나고 있다. 나무. 그리고 나무들이 중심이 된 숲. 그러한 세계숲. 이 세계숲은 바로 우리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이 책이 잘 말해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간단후쿠
김숨 지음 / 민음사 / 202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 마음을 울린다.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는 첫 구절. 사람으로서 존엄을 잃지 않은 마지막 구절.


'간단후쿠를 입고, 나는 간단후쿠가 된다.' (7쪽) 

'답장은 마세요.'(288쪽)

<간단후쿠 : 일본군 위안소에서 '위안부'들이 주로 입은 간단한 원피스식의 옷)


'군인을 데리고 자는 공장'이라는 부분에는 이런 구절들이 있다.


스즈랑은 바늘 공장이다.

스즈랑은 실 공장이다.

스즈랑은 비단 공장이다.

스즈랑은 신발 공장이다.

스즈랑은 군복 만드는 공장이다.

스즈랑은 돈 많이 버는 공장이다.

스즈랑은 좋은 공장이다.

스즈랑은 간호사 양성소다. (58쪽)


소설을 이끌어가는 요코 (개나리)가 끌려간 곳이 '스즈랑'이다. 그런데, 이 스즈랑에 오기까지 많은 이들은 공장에 가는 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속였다. 어떻게 보면 '스즈랑은~이다'라는 말은 사실이다. 그곳에 온 사람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곳으로 가는 줄 알았으니까.


그러나 '스즈랑은 ~이다'는 거짓이다. 속임수다. 인신매매를 하기 위한 술수다. 이것은 거짓을 넘어 범죄다. 


범죄에 속아 넘어간 사람을 비난하는 일은 없다. 범죄자를 비난하고, 그를 처벌해야지 피해자를 비난하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넘기는 일은 없다.


또한 부끄러워해야 할 존재는 범죄자이지 피해자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은? 이들은 여전히 거짓을 말한다. 여러 증거가 있음에도 그들은 '스즈랑은 ~이다'라는 말을 하고, 그곳으로 자발적으로 왔다고, 즉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왔다고 우긴다.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속임수로 사람을 끌고 갔음에도,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하지도 않았으면서 자신들은 정당하다고 말한다. 이는 범죄를 감추려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우기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다.


이런 행위를 하는 자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자신들의 범죄를 이토록 가리고 없는 것으로 하려는 자들을, 오히려 피해자를 비난하는 자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소설은 그러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스즈랑은 ~이다'에 속아 온 주인공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갈 뿐이다. 그곳에 온 사람들. 모두가 '스즈랑은 ~이다'에 속아 온 사람들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강제로 끌려온 사람들. 영문도 모른 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책임을 묻지 않아도 소설을 읽으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 수 있다. 아니, 우리는 이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안다. 다만 그 책임을 지우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여전히 버티고 있는 그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서글픈 일이 벌어지기도 하고.


세월이 흐르고 흘러 이젠 생존자가 몇 분 남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버티기만 하는 일본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소녀상을 세워도 일본 눈치를 보는 사람들. 거기서 더 나아가 이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외치는 상황.


마지막 구절, '답장은 마세요.'란 말을 응답하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였는지, 원. 아니다. 인간의 존엄,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 '답장은 마세요.'라고 하는 것.


이 말에 담겨 있는 의미를 마음에 새기면 어찌 응답을 안 할 수가 있나? 어떻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가 있나?


소설은 담담하게 전개되지만, 이 담담한 전개는 비극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 이토록 슬픈 현실, 우리 아픈 역사.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을 소설은 '요코'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그러니 첫 문장은 사람의 존엄을 잃은, 옷(간단후쿠)과 같은 존재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일본군들은 그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기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을 뿐. 또한 돈을 벌 목적으로 사람들을 이용한 자들이 있을 뿐. 하지만 이들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다.


나나코가 죽은 다음에 눈이 먼 하나코를 위해 모두가 나나코가 되어주는 모습을 통해서 최악의 상황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모습이 애처롭다. 그러니 요코가 '답장은 마세요.'라고 했지만, 우리는 이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한 응답을 작가 김숨이 지속적으로 하고 있다. 이 지속적인 응답에 우리 역시 반응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이 비극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