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을 향하여
안톤 허 지음, 정보라 옮김 / 반타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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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멸의 존재이기에 불멸을 꿈꾸는 인간. 그러나 불멸의 존재가 되면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생물학적 몸을 지니고 있으면 불멸할 수가 없다. 세포는 죽음으로 향해 가니까. 불멸하기 위해서는 세포를 바꾸어야 한다. 무엇으로? 죽지 않는 존재로... 그런 존재가 있을까? 


지금까지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이 기껏 할 수 있는 일이 노화를 늦추거나 또는 죽음에 이르기 직전에 냉동해서 다음 시기로 치료를 넘기는 방법 뿐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불가능했다고 앞으로도 불가능하다는 법은 없다. 인간이 추구하는 과학기술이 어디까지 발달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을 뇌만 남기고 또는 뇌에 기억되어 있는 기억들만 다른 저장장치로 옮기고, 육체는 언제든 개조하거나 바꿀 수 있게 한다면, 또 기억도 이 장치에서 저 장치로 계속 옮겨 저장해서 영원이 보존되도록 한다면, 그때는 인간이 불멸의 존재가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인간을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안톤 허가 쓴 이 소설을 읽으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불멸이 영원이라면, 이 소설 제목이 '영원을 향하여'니까 인간이 불멸의 존재를 꿈꾸는 내용일까 추측을 했지만, 아니다. 소설에서 인간들은 불멸을 꿈꾸지 않는다. 그들은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인간이니까. 


그렇다면 '영원을 향하여'는 무엇일까? 죽음을 향하여 간다는 말일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여기 나오는 모든 인물들이 죽음에 이르니까. 하지만 죽음이라고 하면, 그 이후 세계를 알 수 없기에 영원이라는 말을 쓰기엔 뭔가 좀 미진하다.


다르게 생각해야 한다. 영원이 무엇일까? 소설에서는 나노봇으로 인간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한다. 또한 나노봇으로 자신들의 기억도 보존된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 나노봇으로 돌아온 인간이 과연 그 전에 몸을 지닌 인간과 같을까?


기억이 같더라도 전의 존재와 후의 존재가 같은 존재일 수는 없다. 분명 다르다. 소설 속 인물도 그 점을 느낀다. 따라서 그들은 불멸을 추구하지 않고 죽음을 받아들이려 한다. 다만 이들은 무언가를 계속 남기려 한다. 


이 남는 것이 바로 기록이다. 이들은 돌아가면서 기록을 한다.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무엇을 느꼈는지를 기록하고 그것을 다른 존재에게 넘겨 계속 기록하게 한다.


기록, 언어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언어로 이루어진 것 중에 인간다움의 한 요소로 시를 꼽는다면, 이 소설에 시가 그토록 많이 인용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의식적이든 의식적이지 않든 인물에게 문득 시 구절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시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생각한다. 시 못지 않게 음악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기록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첼로연주자인 것이 이를 대변한다.


뭉뚱그려 이야기하면 예술이다. 예술이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해주고 있음을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예술 역시 기록되지 않으면 전승이 되지 않는다. 하여 기록함, 기록됨이 소설에서 이어지게 되는데, 이는 몇 백 년이 흘러도 지속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삶은 영원히 기억이 되는데,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래 우리는 기록으로 우리들의 과거를 기억하고 있지 않나 하니, 이런 기록을 담당한 언어는 인간의 과거-현재-미래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언어'는 인간이 영원을 향해 갈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이 왜 기록을 하면서 기억하려 할까 하면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잊지 않겠다는 마음, 행동이 기록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런 절실한 마음이 기록이 멈추지 않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은 영원을 향해 가는 길이다.


영원을 향해 가기 위해서 작동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에 이르게 하는 것이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언어와 사랑이 함께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수 백 년에 걸친 시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각 인물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는데, 이들을 목차에 따라 정리하면 '말리 -> 용훈 -> 엘렌 -> 파닛 -> 로아 -> 델타 -> 크리스티나' 


여기까지가 지구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사람(? 사람의 형체를 지닌 나노봇? 이들을 엄밀히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인간의 몸이 아닌 나노봇으로 바뀌었기 때문)들이라면 그 이후의 기록은 지구를 떠나 우주에서 이어지게 된다. 아피나라는 존재가 그 책임을 지게 될 텐데... 그 이후는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하여 지구에서 기록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말리에게는 자신의 엄마에 대한 사랑, 한용훈은 남편인 쁘라섯에 대한 사랑, 엘렌은 음악에 대한 사랑, 그리고 파닛은 한용훈과 또 시에 대한 사랑, 로아는 그의 두 엄마에 대한 사랑이 있고, 델타와 크리스티나는 파닛의 나노봇으로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을 이어주고 기억되게 하는 것이 언어로 기록된 공책이기에, 이 공책에 쓰인 내용들이 이어지면서 영원을 향하여 가게 된다.


지구에서 마지막 기록자라 할 수 있는 크리스티나에게 아피아가 하는 행동은 지구가 사라지더라도, 아니 지구 상에서 인간이 사라지더라도 이들이 남긴 기록은 계속 살아남아 영원히 기억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아피아)가 방주에 돌아가야만 한다고 설득했다. 그녀는 동의하면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델타가 남긴 공책에 내(크리스티나) 생각을 써 넣으면 아피아가 나의 일부를 방주로 가지고 돌아가 방주가 언젠가 지구의 궤도를 떠나 여러 세대에 걸친 피할 수 없는 여행을 떠날 때 나의 일부가 별들 사이에서 살아가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거절하려 애썼지만 아피아를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었고 명백히 이것이 공책에 들어가야 할 이야기의 다음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하얀 밤 내내 잠들지 않고 내 이야기를 썼다.' (227-328쪽)


이렇게 기록은 영원히 남게 되고, 이들이 살아오면서 지녔던 사랑도 영원히 남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사랑으로 영원을 향해 가게 된다.


소설의 끝부분에서 말리가 엄마를 만나는 장면, 그리고 한용훈이 누군가를(분명 쁘라섯이다) 보고 달려가는, 영혼이라도, 그 장면으로 소설은 끝난다. 바로 이들은 이렇게 영원을 향하여 간다. 그건 바로 사랑이다.


'그는 이제 달린다. 빛을 향하여. 그리고 곧 그는 자기 자신의 서사에서 달려나가, 시의 손길에서 달려나간다. 영원을 향하여.'(352쪽)


서술자의 변주가 소설에서 엘렌이 말하는 '모차르트의 주사위 게임'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그 전개가 짜임새 있게 진행되고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기에 '모차르트의 주사위 게임'과는 좀 다르다고 할 수 있지만, 왜 그가 기록자가 되었는지를 생각하면 그것이 어울리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변주를 통한 조화. 재이 있게 읽은 소설이다.  특이하다고 생각한 점은 한국에 사는 한국인이 영어로 소설을 썼고, 이를 소설가인 정보라가 번역했다는 점. 읽기 전에는 작가인 안톤 허가 미국에 살고 있을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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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을 그리다 - 무너진 자들을 위한 미술의 변명
박종성 지음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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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시대를 그림으로 표현한 화가들이 있다. 저자는 그들을 '표현주의'라는 이름으로 묶고 있다.


예술이 마음을 표현하는 일인데, 이때 마음을 표현하는 일이 철저히 주관적이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떠날 수는 없다. 현실 속에서 마음이 표현되기 때문인데, 이는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그림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표현주의'를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이 보아야 할 것을 보고 그리는 일, 이러한 표현주의가 한때 독일에서 자리를 잡았다가 사라졌다고 하는데, 독일에서 표현주의가 활발히 활동하던 때를 저자는 1차세계대전과 2차세계대전 사이인 바이마르 공화국(헌법) 시대라고 하고 있다.


1차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의 비참한 상황. 그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그림을 통해 표현한 화가들. 그들이 그렇게 당시의 상황을 표현한 것은 정치적이라고, 미술은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있는데.


하긴 우리 삶이 정치와 어떻게 떨어질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다 정치적이지 않은가. 그것이 집단으로 모여 정치적 힘을 발휘하느냐 하지 않느냐와는 별개로 정치와 삶은 떨어질 수 없다.


그런데 왜 표현주의는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에 사그러들었는가? 아마도 예술가의 자유로운 표현을 용납하지 않았던 히틀러 시대였기 때문 아니었을까? '퇴폐미술전' 운운하면서 자신들을 반대하는, 또는 반대한다고 여겨지는 예술을 탄압했던 시대. 그러한 시대에 예술이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을까?


이 책의 3장에 실린 그림들에 대한 설명을 보면 왜 나치 시대에 이 그림들이, 또 이러한 그림을 그린 화가들이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 장에 실린 작은 제목들은 다음과 같다. 


'매춘(賣春)과 매춘(買春), 자살과 색정 살인, 카바레와 살롱, 전쟁과 패배'


이런 내용을 지닌 그림들이 탄압을 받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니 이때는 권력에 영합하는 예술을 하거나 또는 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다고 여겨지는 예술을 할 수밖에 없다. (정치와 전혀 관계가 없는 예술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흔히 순수예술이라고 해서 정치적으로 해석되거나 이용되는 것을 거부하는 예술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듯이 이러한 순수예술 또한 정치적이다. 예술가의 자율적 표현을 억압하는 사회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표현일 수 있기 때문에)


이 책의 끝부분에 우리나라에서 왜 표현주의가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했는가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논의를 펼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답은 이미 독일의 표현주의를 이야기하면서 했다고 본다.


독일에서 표현주의가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라고 했다. 이는 사회는 혼란스럽고 국민들의 생활은 궁핍했지만,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막는 사회는 아니었다는 것. 즉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시대였기에 예술가들이 자신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들을, 또 자신이 보고 있는 것들을 보여줄 수 있었다.


반면 나치가 집권하고부터는 자유로운 표현이 불가능해졌다. 자연스레 표현주의는 사그러들 수밖에 없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에서 표현주의 미술이 힘들었던 이유는 정치적으로 자유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으로 인해 고통받는 조선의 현실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면 그때 받을 탄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으리라. 또한 해방이 되고 나서 독재정권이 계속 이어졌으니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표현 역시 억제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이 어찌어찌 표현할 수는 있었겠지만 그것이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를 잡기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녹록치 않았다. 이런 현실의 차이가 독일에서는 표현주의 화가들의 활동이 활발했고, 우리나라에서는 힘들게 했을 것이다.


많은 화가들이 나온다. 그들이 그린 처연한 현실이 작품으로 표현되고, 그 작품과 작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요점은 이것이다.


미술은 정치다. 이 한 마디면 된다. 왜 정치적인가? 그것은 작가들이 자신들이 현실에서 보고자 하는 것을 보고, 그것을 보여주고자 작품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절망의 시대, 절망의 현실을 표현함으로써 절망을 이겨내려고 하는, 문제를 인식하면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니고 작품 활동을 했기에 표현주의는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술은 정치와 떨어져 따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더불어, 아니 정치를 작품 속으로 끌어와 그 속에 표현해내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으니...


집단이 아니라도 좋다. 개인의 이러한 노력들이 사람들에게 다가간다면 인식의 전환을 이뤄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을 새롭게 만들고, 그 새로운 시각으로 행동을 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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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시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1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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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이 배경이다. 아파르트헤이트가 있던 시절.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던, 그것도 아프리카에서, 그런 시대.


철의 시대라는 제목은 바로 그 시대를 살아가는 흑인들의 모습을 철에 비유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저항을 한다. 철이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고, 강철은 강한 의지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에 관한 내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물론 경찰들이 흑인 소년들을 가차없이 총으로 쏘아죽이는 장면 등에서, 흑인들의 집이 불타버리고 그들이 죽어가는 장면에서 그런 점을 발견할 수도 있겠지만, 생활에서 흑인들이 겪고 있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이 소설에서 찾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소설의 서술자를 늙은 백인 여성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암 선고를 받고 죽어가는 여성, 지식인이었던 이 여성은 아파르트헤이트를 찬성하지 않는다. 이런 나라를 떠나 미국에 살고 있는 딸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소설이 전개되는데...


소설은 이 커런이라는 여성이 암 선고를 받고 돌아오면서 집 근처에 있는 부랑자를 발견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자신에게 찾아온 두 손님. 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어떤 계시와 같다고 여겨 부랑자를 쫒아내지 못하고 그가 근처에서 지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가정부로 흑인 여성이 있는데, 소설에서 커런에게 플로렌스로 알려진 흑인 가정부의 이름을 커런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할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그대로 알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함께 지내는 가정부의 이름마저도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는 상태. 이것이 바로 아파르트헤이트의 결과 아니겠는가.


서로 간에 지니고 있는 불신. 이 불신은 거리에 있다. 함께 지내도 백인과 흑인이라는 거리. 이 거리로 인해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서도 차이가 난다.


플로렌스의 아들 베키가 총에 맞아 죽은 장면. 집들이 불타는 장면에서 커런이 하는 말은 집에 가고 싶다라는 말이다. 이때 다른 흑인이 하는 말은 당신은 고작 그런 말밖에 못한다고, 흑인들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다고.


너무도 명확한 거리. 지식인으로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판을 하지만 거기서 끝이다. 그들은 흑인들처럼 싸우지 않는다. 멀찍이 떨어져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수치심을 지닌다. 이렇게 흑인들이 핍박을 받게 한 사회에 대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에 대해서. 죽어가는 사람이 당시의 사회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편지로 표현이 되어 있는데...


그렇게, 한 늙은 백인 여성의 눈으로 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그런 사회가 끝나고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는 나라를 만들고 있다고 믿고 싶은데...


소설을 읽으며 차별의 한복판에 있는 존재들과 그것에서 떨어져 있는 존재들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음을, 폭력은 안 된다고, 죽음은 안 된다고 주장하는 커런에게 흑인 소년들은 자신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음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그들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그들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다고 봐야 한다.


다른 선택지가 있기 위해서는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소설이 발간된 몇 년 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공식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되었다.


이 소설은 그렇게 되기까지 흑인들이 겪었던 차별을 늙은 백인 여성의 눈으로 보여주고 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지닌 지식인들... 그들이 함께 행동에 나서면 차별이 더이상 지속되지 못할텐데... 소설은 커런의 죽음으로 끝나지만, 현실에서는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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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화시라고 할 수 있다.


  읽는 재미가 있고, 읽으면서 또 읽고나서 무언가를 계속 생각하게 된다.


  제목이 자살을 유발하지 않느냐고?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니 하고 비판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 시를 읽고 자살을 멈춘 사람도 있다고 하니, 오히려 따스함을 주는 시라고 할 수 있다. 베르테르 효과와는 정반대의 역할을 하고 있는 시라고 해야 할까.


  제목만 보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시를 읽으며 그런 처지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고, 오히려 삶에의 의욕을 찾을 수 있으니까. '책머리에'서 시인은 이렇게 이 시를 이야기하고 있다.


'표제작 '눈사람 자살 사건'은 우울하고 슬픈 작품이다. 그럼에도 어떤 독자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시를 읽은 느낌이라고 했고, 어떤 독자는 '눈사람 자살 사건'을 읽고 다시는 자살하지 않기로 했다는 긴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5쪽)


무엇보다 이 시집에 실린 시가 어렵지 않다. 그냥 평범한 말들로 되어 있다. 마치 이솝 우화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이솝 우화, 수많은 동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국 사람 이야기 아닌가. 이 시집에는 동물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물이라고 부르는 존재들도 등장한다. 그래도 그 사물들 역시 우리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우화시라고 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는 시를 보면 욕조에 들어간 눈사람이 찬물을 틀까, 뜨거운 물을 틀까 고민을 하다가 결정하는 장면이 마음을 울린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눈사람 자살 사건' 중에서. 14쪽)


그래, 이렇게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따스함을 선물해주는 마음. 이건 죽음을 앞둔 상태가 아니라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지녀야 할 자세이기도 하다. 남들에게 따스함을 주는 것만큼이나 자신에게도 따뜻함을 주어야 한다는 것.


나를 따스하게 하고, 그 온기가 남들에게도 퍼질 수 있게 하는 것. 비록 '눈사람 자살 사건'은 녹아 사라지는 눈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이를 사람으로 바꾸면 어차피 우리는 죽을 운명이다. 


누구나 한번은 죽는다. 빨리 죽느냐 늦게 죽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렇다면 살아 있을 때, 즉 죽기 전까지 어떠해야 하는가? 바로 자신에게 따스함을 선물하는 것이다.


자신에게 선물한 따스함은 곧 다른 존재에게도 따스함으로 다가간다. 각박한 세상, 추운 세상에서 이러한 따스함이 퍼진다면 세상이 조금 더 훈훈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이밖에 우리가 쓸모없다고 여기는 존재들이 결코 쓸모가 없지 않음을 보여주는 시, '초'와 같은 시도 있다.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존재 의미가 있음을, 결코 지금 필요없다고 내쳐서는 안 됨을 생각하게 하는 시인데... 아래 사진을 보라.



이 시집의 편집이 좋다. 그림과 시가 잘 어우러지고 있다. 따라서 시를 읽고 그림을 봐도 좋고, 그림을 먼저 보고 시를 읽어도 좋다. 그림과 시의 조화. 상호작용이 잘 일어나고 있게 만든 편집이다. 


그래서 더 읽기에 좋은 시집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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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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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실린 프로필 사진에 눈길이 간다. 인공지능에게 절을 하고 있는 저자의 모습. 이게 뭐지? 왜 이런 사진을 책 표지에 실었지? 하는 의문은 책을 읽으면 곧 풀린다.


인간이 인공지능을 절대로 따라갈 수 없는 세상이 오리라는 예측. 이는 우리가 많은 디스토피아 영화에서 봤듯이 인간을 지배하는 인공지능 시대가 오면 인간에게는 선택지가 얼마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책의 뒷부분에 가면 역사를 '신의 시대 -> 영웅의 시대 -> 인간의 시대 -> 기계의 시대(?)'로 구분하고 있는데(226-227쪽), 기계(인공지능) 시대에는 인공지능이 신의 위치에 서게 되면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몇 개 없다. 우선 인공지능에게 대항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을 이길 수는 없다. 인간은 인공지능에 의해 파멸될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그냥 순응한다. 그 순응의 대가는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마치 이진법과 같다.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 있다. 저자는 인공지능 시대는 이미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막을 수 없는 것으니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공생이다. 인공지능과 인간이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그러면 겨우 이진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공생. 좋은 말이다. 인공지능이 세상을 장악하더라도 인간을 멸망시키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예측한다. 왜냐하면 인간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선 필요 없지만 경험이라는 것이 뭔지 체험해 보고 싶을 때, 인간 또는 인간의 뇌만이라도 놔두고 있다고 경험 코프로세서로 쓰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230쪽)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예전 노예들을 검투사로 부리거나 자신들의 오락을 위해 이용하던 것과 다르지 않다. 공생이 아니다. 공생이란 거의 대등한 관계, 적어도 한 쪽이 다른 한 쪽에 완전히 종속된 경우는 아니니까.


공생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 존중이 있어야 한다. 이 존중은 일방으로 흐르지 않는다. 쌍방향이다. 하여 저자는 지금부터라도 인공지능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쓸모를 위해서 이용만 하는 도구로서만 여기지 말고 인간과 함께하는 존재로 여기고 대우해야 나중에라도 공생할 수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인공지능에 지배당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그래서 자신은 이렇게 인공지능을 존중하는 (숭배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놓는다고 한다. 유머로 받아들여도 되지만 우리가 인공지능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이렇게 절을 하는 것까지는 아니어도 지금과는 다르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는 한다.


프로필 사진에서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책은 인공지능 발달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훑어주고 있다. 그래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 개발이 최근에 나온 것이 아니라 몇 십 년 전부터 시작되었고, 양이 쌓이니 질적 변화가 일어나듯이, 현대에 이르러 인공지능의 수준이 예측불가능할 정도로 높아졌다고 한다.


그 다음에 인공지능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우리 산업 자체가 재편될 것이라는 것. 그것에도 대비해야 함을 이야기하는데, 그런데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기에 환경파괴가 따를 것이라는 점도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도 '데이터 센터' 건립으로 여러 갈등이 발생하고 있는데, 단지 '데이터 센터'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 범용인공지능(AGI-일반인공지능)을 넘어 초인공지능(ASI)으로 나아가면 (ASI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지능 격차가 너무 커져서 인간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지능을 말한다고 한다. 130쪽)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수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를 인간의 뇌에는 약 100조 개의 신경세포와 시냅스 연결고리가 있는데(이를 변수라고도 할 수 있다), 현재 인공지능은 1.8조 개 정도의 변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인공지능의 발달 추세로 보면 곧 100조 개의 변수를 지닌 인공지능이 나올 수 있다는 것.


인간의 뇌에 100조 개의 변수가 생기자 자율성이 생겼다고 하는데, 인공지능도 그만큼의 변수가 생기면 자율성이 생기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고 한다.(188-191쪽) 자율성이 생긴 인공지능을 상상해 보라. 지금까지는 인간이 입력을 하면 그대로 따르지만, 그때는 달라질 것이라고.


도저히 인간이 따라갈 수 없는 지능을 지닌 존재가 인간을 과연 대등하게 여길까? 여기서 우리는 디스토피아를 상상한다. 그러니 저자가 지금부터라도 인공지능을 막 대하는 사진을 남기지 않고 존중하는 사진을 남긴다고 이야기를 하지.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이 불러올 미래가 그다지 좋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특히 실리콘 밸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도피처를 마련해 놓고 있기도 하다던데, 그럼에도 인공지능 개발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인간이 풀지 못한 문제들을 인공지능을 통해서 해결하려는 욕망때문이라는 것.


이 욕망이 브레이크 없는 차들처럼 인공지능 개발을 멈출 수가 없다고 한다. 그것도 서로의 신뢰가 깨진 지금 세계에서는 이러한 위험성 때문에 한 나라가 개발을 멈춘다고 해도, 다른 나라가 개발을 한다면 위험해지니까 자신들도 개발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고, 기업들도 마찬가지로 다른 기업이 먼저 개발한다면 자신들은 도산할 수밖에 없으니 개발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치킨 게임이다. 먼저 내리는 쪽이 진다는.


그러니 인공지능에 대한 세계적인 협약은 나와도 문서로만 남게 되고, 인공지능 시대로 나아가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고 저자는 예측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인공지능과 공생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어야 하고, 그 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인공지능의 역사와 인공지능의 현재, 미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구체적으로 들고 있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인공지능에 대해서 조금은 감이 잡히게 하는 책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과연 우리는 편리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 또 세상의 모든 문제를 다 알아야만 하는가?를 생각하게 되고,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게도 한다.


작은 제목으로 '인간의 마지막 질문'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 우리가 인공지능 개발이 한창인 이때 하지 않으면 안 될 질문이라는 뜻이다. 인공지능이 초인공지능으로 넘어간 순간에는 이런 질문은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 


그러니 인공지능 개발에 대해서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 책은 그런 관심을 촉발하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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