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읽으며 뭐야, 이거? 시들이 왜 이렇게 길어? 그리고 무슨 주가 이렇게 많아. 논문도 아니고. 그렇다고 주가 사실이냐 하면 아니다. 주는 시인이 창작한 내용일 뿐이다.
그런데 이 주가 시의 내용을 또 말해준다. 그래서 주를 안 읽을 수가 없다. 여기에 등장인물들, 시에서 등장인물을 따지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낯설다. 외국인들이 많이 등장한다. 한 나라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나라의 사람이 등장한다. 이름이 낯설기만 하니까.
이 낯선 인물들이 지구에 사는 인간을 대표한다면, 다양한 인물들은 결국 지구라는 행성에 사는 인간들을 의미하고, 이들이 아무리 다른 척을 한다고 하지만 멀리서 보면 지구에 사는 생물, 즉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는 생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생물들이 자기만이 최고인 양 다른 생물들을 무시하는 모습, 지금 이것이 바로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 아닌가. 그러한 인간들이 계속 이런 갈등을 지속하다 보면 지구에 살고 있는 인류는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겠지. 지구는 분명 그때까지도, 아마도 거대한 핵폭발로 지구 자체를 날려버리지 않는 한, 태양이 폭발할 때까지 존속할 것이다. 이 시집에 나오는 지구는 그렇다. 인간은 멸종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시들에 나오는 연도가 2444년이든지, 2888년이다. 왜 이런 년도를 쓰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런데 그냥 농담식으로 말장난을 해보면 444는 죽어죽어죽어가 되니, 인류의 멸망이 일어나는 해라고 할 수 있고, 888은 팔팔하다라고 할 수 있으니, 지구를 벗어나 저 멀리 우주에서 계속 살아가는 인류의 후손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2888년에 먼 우주에서 지구로 통신을 보내도 지구에서는 어떤 답을 할 수가 없게 되는 것. 왜냐하면 인류는 멸종되었으니까. 그런 내용으로 시집이 전개된다고 볼 수도 있는데... 로베르토 볼라뇨가 쓴 소설 [2666]이 연상되기도 했다. 완전히 다른 내용이지만 숫자의 겹침이 그러한 연상을 유발한 것인지도 모르고, 이 시집에서 반복되는 내용들이 [2666]에서 반복되는 수많은 살인 사건과 유사하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장과 거울의 방'(50-53쪽)에 보면 육십팔각형의 거울 방이 나온다. 육십팔각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시에서 표현하고 있는 육십팔각형 거울의 방은 나를 육십팔 개로 비춰준다. 내가 육십구 명이 있는 셈. 그런데 그 육십구 명이 같은 사람일까? 모두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모두 다르다. 각도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비슷비슷한 삶을 살 수는 있지만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다.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마지막 부분에 이 거울의 방에서 나온 화가와 거장이 (거장은 시인이다) 서로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에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술은 이 비슷함에서 탈출해야 하는 것이라고, 예술가들은 서로에게 그러한 자극을 주어야 한다고. '문 앞에서 화가는 거장의 따귀를 때렸다 거장도 화가의 따귀를 때려주었다' ('거장과 거울의 방' 중에서. 53쪽)고 하고 있으니... '때렸다'와 그것에서 깨우친 사람이 다시 되돌려주는 행위가 '때려주었다'라는 표현이니.
이러한 자각은 우리를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이고, 저 멀리 우주에서 바라보면 아주 작은 '창백한 푸른 점'에 불과한 곳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이곳에서 비슷하게 살아가면서도 서로를 견뎌내지 못한다면, 그 비슷함 속에서 서로의 독창성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데, 기계마저도 인간과 비슷하게 만들려고 하는 인간의 모습, 기계에 인간성을 부여하려는 인간의 모습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다양성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단일성으로 수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되는데,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엇비슷한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편 한 편의 시가 다 독특한 자신만의 내용을 지니고 있으니, 우리 삶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육십팔각형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하나로만 여기는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육십팔개의 모습은 모두 다른 모습이다. 여기에 비춰지는 존재인 나까지 육십구 명은 모두 다르다. 그렇게 우리 삶도 모두 다른 삶들이다. 다른 삶이긴 하지만 또한 비슷한 삶이기도 하다. 그러한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간다면 굳이 지구에서 다른 존재들을 무시하고 또 나의 삶과 똑같은 삶으로 끌어들이려 할 필요가 있을까?
제목이 된 '아이들 타임'(16-21쪽)에 이런 구절이 있다.
'너는 미래의 시간에 살고 / 나는 과거의 빛을 보지 ... 너의 아이는 어떤 표정을 짓는 어른이 될까' ('아이들 타임' 중에서. 20쪽, 21쪽)
자기만의 표정을 짓는 어른이 되는 아이를 바라는 것. 그런 사회, 그런 지구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