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일기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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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의 시간은 2024년 12월 비상계엄이 선포된 때부터 시작된다. 물론 작가는 꾸준히 일기를 썼으리라. 하지만 이 책은 계엄과 탄핵의 과정을 보여주는 일기로 채워졌다. 탄핵 결정 직후까지...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해야만 하는 일이 비상계엄이고, 비상계엄부터 시작해 탄핵에 이르는 과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노를 경험했고, 좌절도 경험했고, 이 땅의 엘리트라는 자들의 본질적인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힘을 얻기도 했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모습도 보았고,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통해서 함께하는 모습도 보았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봄이 오리라는 희망, 아니 봄을 오게 하겠다는 의지로 견뎌낸 시간들.


그 시간들.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계엄과 탄핵의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주범이 제대로 처벌받고 있지 않고 있으니까. '윤 어게인'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으니까. 비상계엄을 계몽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정말 이 나라 몇몇 사람들은 언어의 자의성을 너무 확신하고 있나 보다. 


'자의성'에 매달리면 결국 소통에 실패하고 마는데...그들의 말은 자의성에 기댈 것이 아니라 사회성에 기대야 하는데... 이들이 페터 빅셀의 [책상은 책상이다]를 읽어봤으면, 그랬으면 언어의 자의성에 매달리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알게 될 텐데.


자신의 행위를 여전히 정당하다고 우기는 자가, 교도소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보석 신청을 하는 짓을 하고 있는 현실.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으며, 엄동설한에 차가운 바닥에 앉아 있어야 했는지... 그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자신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았는지를... 지금도 우울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를...


자신이 있는 독방은 그에 비하면 너무도 편안한 곳일 텐데, 도대체 남의 고통, 남의 슬픔을 헤아일 줄 모르고 자기만을 생각하는 그런 아집을 지닌 자를 다시 오게 하겠다고, '윤 어게인'이라고... 나 참.


이 책을 읽어보자. 계엄에 놀라 지체없이 여의도로 향한 작가. 거기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처음에 다름에 낯설어 하면서 밀어내는 모습을 보이던 사람들이 다름을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변화의 과정.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챙겨주는 모습.


이런 광장의 모습. 또한 다른 광장의 모습. 혐오와 멸시의 눈초리로 쏘아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있으니... 그렇다. 지금도 우리는 몇몇의 성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큰소리 치는 현실을 보아야만 한다. 그들이 언젠가 성찰하겠지 하는 가능성을 생각하기는 하지만.


작가는 '가능성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인 세계는 얼마나 울적한가. 희망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가 너무 어려운 세계, 그 어려움이 기본인 세계는 얼마나 낡아빠진 세계인가. 너무 낡아서, 자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세계.'(171쪽)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런 낡은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비참한지... 그들에게는 배움이 없다. 그냥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생각하고 행동할 뿐이다.


이 책에 나온 일들에 놀랄 만한 일, 아니 이들에게는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는데, 혐오와 차별로 점철된 말들, 행동들...


열차에서 내려 출구를 향해 올라가는데 우리와 같은 객차를 타고 온 젊은 남성 둘이 갑자기 의기양양한 기색으로 외쳤다. "자, 이제 중공 것들 잡으러 가는 거야."(82쪽)


이들이 지금 명동에서 대림동에서 혐중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만이 아니라 혐중 시위를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으니... 도대체 왜? 차별과 혐오를 버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들에게 보이는 것은 차별과 혐오뿐인가. 아니 특정한 사람, 특정한 나라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도 있으니, 맹신에 제대로 볼 수 없는 눈을 가졌다고 해야 한다. 이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바로 낡아빠진 세계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낡아빠진 세계를 거부했다. 성찰의 힘으로, 함께함의 힘으로, 새로운 희망의 세계를 만들어가려 하고 있다. 그런 세계, 작가는 '내가 이 세계를 깊이 사랑한다'(172쪽)고 했는데, 나 역시 이런 희망이 있는 세계를 사랑한다. 가능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있고, 그 희망으로 나를 채울 수 있는 세계를.


그러니 이 일기는 작가의 희망을 보여준다. 


'지난 겨울과 봄은

나름으로 삶을 가꾸며 살아도 권한을 가진 몇 사람이 작정한다면 도리 없이 휩쓸리고 뒤흔들릴 수밖에 없는 작은 존재,

내가 그것이라는 걸 실감한 국면이자 계절이었습니다.

또한 나는 작아서 자주 무력했지만

다른 작음들 곁에서 작음의 위대함을 넘치게 경험한 날들이기도 했습니다.

......

훗날 이날들을 돌아보는 데 작음 보탬이 되기를 바랍니다. (189-190쪽)'라고 작가는 후기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 이 일기들은 훗날, 그땐 그랬었지, 그런 야만의 행위들을 우리 시민들이 막아냈지... 그런 일은 용납할 수 없다고... 권력을 쥔 자들이 우리들 삶을 멋대로 조종할 수 없다고. 


비록 우리들의 작은 삶들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는 가장 큰 삶이고, 이러한 작은 삶들이 모여 우리들의 삶을 제멋대로 빼앗아갈 수 없다고 외친 계엄과 탄핵이 이루어지는 기간에 겪고 느낀 기록. 기억해야만 하는 그런 기록.


마음에 잔잔하게 스며드는 위로. 이 일기는 위로다. 기억이다. 그래서 지금 국회에 있는, 또는 다름 국회에 입성하려고 하는 '국민의 힘'에 소속된 의원, 정당원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마음이 이 일기에 들어 있으니까. 


자신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마음을 이 책을 통해서라도 알게 된다면, 그렇게 된다면, '국민의 힘'이라는 정당에 속한 사람들도 진정 '국민의 힘'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하면서...


그리고 현재 국회의원인 사람들, 국회의원이 또는 정치인이 되려고 꿈꾸는 사람들, 아니 우리 모두가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작은 일기'가 아니라 '기억 일기'이고,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만드는 일기니까.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계엄'같은 짓을 벌일 정치가가 나올 수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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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하마스를 모른다 - 금기와 편견 너머, 하마스를 이해하기
헬레나 코번.라미 G. 쿠리 지음, 이준태 옮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감수 / 동녘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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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한 동정. 나라를 잃고 쫓겨난 사람들. 또는 기껏 살고 있는 곳도 온갖 검문소를 통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없는 사람들. 그 정도. 자살폭탄 테러. 이 정도. 


예전에 조 사코의 [팔레스타인]을 읽은 적이 있고, 몇 권의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피상적이다. 잘 알지 못한다. 그만큼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보는 적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정보가 적은데, 하물며 하마스에 대해서랴.


하마스 하면 테러집단 또는 무장폭력단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르는데, 더 알려고 하지 않아서 그랬는지, 아니면 하마스에 대한 정보를 쉽게 만날 수 없어서 그랬는지, 가자지구에서 선거로 하마스가 집권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어? 무장단체가 선거에서 승리해 집권을 했다고? 하면서 놀랐던 적이 있다.


그리고 지금 이스라엘은 가자지구를 초토화 하고 있다. 아예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한다.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을 봉쇄한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 폭격을 한다. 하마스가 공격을 했다는 것을 빌미로 가자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완전히 쫓아내려 한다.


그러면서 이건 전쟁이라고 한다. 전쟁? 전쟁이라 하면 조금이라도 대등하다는 느낌을 주어야 하지 않나. 하마스가 아니 가자지구에 이스라엘에 대항할 무기가 있나? 그런 군사력이 있나? 도대체 어떻게 전쟁이 되지? 이건 학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일방적인 공격, 이것은 학살이다. 그런데 학살이라고 하지 않고, 세계 강대국이라고 하는 나라들도, 유엔도 관여를 하지 않고 있다. 이스라엘의 힘이 너무 막강한가? 아니면 이들 역시 하마스를 축출해야 할 무장테러단체로만 인식하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다른 나라에서도 정보의 부족을 많이 느꼈나 보다. 또한 일방적인 정보 전달에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고.


이 책은 다섯 명의 전문가(? - 어쩌면 이스라엘이나 미국에서는 이들을 전문가로 인정 안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하마스에 대해서 비난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판은 할지언정. 그래서 하마스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지니게 하고 있는데... 이것을 이스라엘과 미국을 비롯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나라들, 또는 유대인 학살에 죄책감을 느끼고 유대인들이 하는 일에 최대한 말을 아끼는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에서는 이들은 지나치게 하마스 편이라는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마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 일방적으로 이스라엘과 미국에 대한 정보는 들어오는데도...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균형을 잡을 필요는 있다. 적어도 비판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자료들을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들과 한 대담을 엮었다.


이들의 이야기에서 새로운 점이 몇 가지 있다. 아니 새롭다기보다는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나 할까?


하마스를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독립운동 단체 중 무장독립 운동을 주장했던 단체로 본다면, 우리는 과연 하마스를 테러집단이라고, 불법을 자행하는 집단이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일제강점기, 광복군은 당연히 무장 투쟁을 했다. 우리가 자랑스레 여기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 등도 역시 무장 투쟁이다. 여기에 안중근 의사는 어떤가? 윤봉길 의사는? 일본은 테러리스트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사'로 독립운동가로 그들을 기리고 있다.


하마스 역시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을까? 이렇게만 생각하면 하마스를 그냥 테러단체라고 도외시 할 수는 없다. 


대대로 살던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니까. 지금도 기껏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만 남아 있지만, 그마저도 이스라엘리 정착촌을 건설한다고 야금야금 점령하고 있지 않은가. 2023년 이후에 가자지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생지옥과 다름 없는 곳이 되었고.


그러니 적어도 하마스가 왜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들게는 우리의 독립운동과 같은 역할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하여 이 책을 읽으면 하마스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어느 정도 알게 된다. 또한 부록에 실린 하마스 강령을 읽으면서 처음 설립되었을 때 강령과 2000년대 들어와서 수정된 강령에 차이가 있음도 알게 된다.


그들은 유대인을 무조건 쫓아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종교 전쟁이 아니라는 거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시온주의에 반대한다고 한다.


'이슬람 저항 운동 '하마스'는 팔레스타인의 이슬람 민족 해방 및 저항 운동이다. 우리의 목표는 팔레스타인을 해방하는 것이고 시온주의 기획에 맞서는 것이다.'(256쪽. 부록3, '2017년 하마스 일반 원칙 및 정책 문서'에서)


그렇다면 이스라엘에 시온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들과 공존하기를 선택한다면 하마스 역시 이스라엘과 공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즉 하마스는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아왔던 땅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 공존, 그들도 그것을 바라고 있다. 다만 국제 관계에서 평화란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오지 않으니...


올해 유엔 총회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고 한다. 성토가 이어졌다? 이게 끝이다. 유엔이 전쟁을, 학살을 멈추게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유엔에서 가장 큰 결정권을 지닌 미국이나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이 이스라엘을 멈추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마스 역시 멈출 수가 없을 것이다. 다만 지금 하마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궤멸되었는지, 지하로 민간인들 속으로 숨어들어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지...


다만 역사를 보면 베트남 전쟁을 비롯해 많은 전쟁에서 그 나라를 지키려는 사람들을 완전히 없앤 경우는 없다. 대를 이어서라도 자신의 나라를 찾겠다는 사람들이 계속 나오게 되니까. 이스라엘도 그 점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들도 수천 년에 걸친 디아스포라 생활을 했지 않은가. 역지사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겪은 역사적 상처들만 생각해도 다른 민족에게 자신들이 당한 것과 같은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되지 않는가. 이것이 이스라엘 지성인들이, 정치인들이,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국민들이 자각하고 정치적 압력을 행사해야 하지 않을까.


참 많은 생각이 들게 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신문을 보다가 우연히 [팔레스타인 시선집]이라는 책이 '접촉면'이란 출판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다. 어라? 팔레스타인, 하마스에 대한 책을 읽었는데, 다시 [팔레스타인 시선집]이라니... 읽어봐야지 하고 알라딘에서 검색을 하니, 이런 책을 찾을 수가 없다. 하아... 참... 이 책을 구입하면 팔레스타인을 돕는 기금으로 전액이 사용된다고 하던데... 작지만 그거라도 할 수 있을 텐데... 하면서 검색을 해보니... 책을 구입할 방법이 있다. (구입할 방법은 여기에 적지 않는다. 책을 홍보한다는 공연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ㅎ)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기억해야 할 몇 구절을 적는다.

이스라엘과 서구는 팔레스타인 민족 해방 운동을 ‘하마스‘로 축소시키고, 하마스를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세력으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가자 민간인들이 겪는 고통은 ‘비극적‘이지만 하마스를 지지해서 이 사태를 자초했다고, 즉 피해자에게도 집단학살당하는 책임이 있다는 프로파간다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 P13

하마스는 정당이기도 하고, 자선 조직이기도 하면서, 군사 조직이기도 하다. - P78

저(칼레트 후룹 박사)는 이전 연구에서 이스라엘이 살해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하마스와 모든 팔레스타인 정파가 살해하는 이스라엘 민간인의 약 15배에서 20배에 이른다고 정리한 바 있습니다. 살해된 이스라엘 민간인 1명 당 15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죽는다는 거죠. 하지만 모든 언론의 논의와 논란은 이스라엘 민간인을 살해하는 팔레스타인인들만을 다룹니다. - P95

하마스에는 해방과 민족자결이라는 방향과 목표가 있다고요. 그러니 이런 것들이 달성되면 당연히 무장 투쟁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 P102

이스라엘이 집단학살로 대응한다고 해도 대다수 팔레스타인인들은 하마스를 지지할 것이며, 따라서 하마스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전면적인 집단학살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마스를 이해하는 게 중요한 이유입니다 - P113

전체 시온주의의 기획, 최소한 지금 가장 지배적인 버전의 시온주의는 유대인 중심 국가를 위해 해당 영토를 완전히 비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관점이 네타냐후나 현정부에만 국한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 하는 것 같아요. - P125

‘그날 이후‘를 위한 이스라엘의 계획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자지구 내에서 주민들이 모두 떠나도록 만들 혼란과 무정부상태를 초래해서 가자지구에 인간이 거주할 수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 P163

하마스는 이슬람 운동입니다. 이슬람교의 영향을 받죠. 이슬람에서는 누군가가 계약을 맺으면, 그 사람은 종교적 의무로서 계약 사항을 이행해야 해요. - P205

현상태는 물론 이스라엘이 우리의 조국에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죠. 그걸 받아들이진 않지만 팔레스타인 국가가 그 옆에 존재할 수 있다면 이스라엘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거예요. - P213

현재 하마스가 공식적으로 채택한 서사는, 이건 시온주의와의 싸움이지 유대인들과의 싸움이 아니라는 거예요.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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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시선집을 읽다.


개천절, 우리 민족의 탄생을 알리는 날이 있는 달. 그렇게 하나의 민족으로 수천 년을 한반도에서 지내왔다. 하나의 민족, 이것이 꼭 하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 민족이라는 개념에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 구성원이 된다. 그러니 하나의 민족이라는 말을 피의 순수성을 의미하는 말로 생각하지 말자. 하나 속에 여럿이 속해 있다.


오히려 하나의 민족이란 피의 순수성이 아니라 서로 어울리면서 공통의 무엇을 지니고 살아온 존재들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혈통보다도 문화, 함께함 등등이 어우러진 공동체. 그래서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하나의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거나 탄압하고 쫓아낼 권리가 있는가? 다른 민족이라고 해서 배타적으로 대해야 하는가? 그러면 좀더 힘센 민족이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게 된다.


어떤 민족도 다른 민족을 억압하거나 쫓아내면 안 된다. 민족끼리 이 작은 지구에서,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불리는 이 지구에서 어울리면서 평화롭게 살면 얼마나 좋을까. 그럴 때 민족은 공동체로서 제대로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한민족이라고,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배워왔다. 다른 민족을 침략한 경우가 거의 없다고... 그런 평화 민족이라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이런 우리 민족과 달리 다른 민족을 억압하는 민족이 있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억압을 멈추지 않고 있고, 세계는 그러한 억압을 멈추게 하는데 실패하고 있는데...


수천 년을 살아온 땅에서 쫓겨난 사람들, 간신히 자치지구라고 해서 가자와 서안지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도 가자지구는 봉쇄되어 고립된 삶을 살고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가자에서 살아가기 더 힘들어진 사람들. 계속 죽어나가는 사람들.


그런 가자를 완전히 점령하겠다는 다른 민족, 자기들 말로는 선택받았다는 민족, 그 선택받았다는 민족이 수천 년 동안 다른 민족들에게 얼마나 탄압을 받아왔는지, 그런 역사적 경험을 한 민족이, 세상에 내가 당한 것 만큼 보복하겠다는 심정인지, 원.


가자지구에 구호물품을 전달하려는 사람, 단체들이 타고 있는 배를 나포해 사람들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떴다.


<신문기사 링크 > 또 막힌 가자구호선단…이스라엘, 툰베리 등 500명 연행


인도적 차원에서 사람들을 돕는다는 것도 막는 민족, 그런 민족을 제재할 수 없는 세계. 이런 세계 속에서 그럼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그들이 가자지구에 들어가려 노력하고, 가자지구의 참상을 알리고 있으니.


이때 팔레스타인을 응원하고 돕겠다는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평화를 위한 움직임. 이는 이스라엘이 미워서가 아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평화를 깨고 있기 때문. 강자는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의 정책에 따라서 가자지구에 평화가 오느냐 마느냐가 달려 있는데... 열쇠를 쥐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세계는 여전히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고. 팔레스타인에도 평화가 와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번역해서 펴낸 시집. [팔레스타인 시선집] 읽으면 슬프다. 마치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저항시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


번역해서 우리에게 팔레스타인 시들을 알려준 사람들의 노고에 감사하며, 개천절에 팔레스타인에도 평화가 오기를...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민족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그야말로 '푸른 지구'가 되기를... 개천절을 맞이하여 바라는 마음.


이 책에 실린 짧은 시. 그러나 마음에 파고드는 그런 시. 아아, 이런 바람이...


가자의 개구쟁이들아


가자의 개구쟁이들아

창가 아래서 비명을 질러 대

날 한시도 가만두지 않던 녀석들아.

우당탕탕 소란으로

매일 아침을 채우던 녀석들아.

내 화병을 깨 먹고

발코니의 홀로 핀 꽃을 슬쩍한 녀석들아.

돌아와,

마음껏 비명을 내지르고

화병이란 화병은 다 깨부수고

꽃이란 꽃은 다 슬쩍 챙겨가렴.

돌아와...

돌아만 와다오...


할레드 주마. 류송 번역.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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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 에프 모던 클래식
커트 보니것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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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을 보면 다윈을 떠올린다. 다윈이 진화론을 펼치게 만든 곳. 갈라파고스. 학교 다닐 때 핀치 새에 관하여 배운 적이 있다. 고립된 섬에서 다르게 진화한 새. 이 새를 통해 진화의 고리를 발견했다고. 


그럼 소설 제목이 갈라파고스면 뭘까? 이 섬에서 일어나는 일? 진화와 관련 있는 사건?


보니것의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풍자에 놀라기도 하는데, 이번에 그는 인간의 뇌가 일으키는 사건을 문제삼고 있다. 지나치게 큰 뇌라고 하는데, 이때 지나치게 크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조차도 위협할 만큼 인간을 지배하는 뇌라는 말로 해석하면 된다.


이 소설에서 갈라파고스로 가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있다. 그런 여행을 기획한 사람들도 있고, 화려한 유람선에 (군함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부유하거나 유명한 사람들을 태우고 갈라파고스를 여행하려는 계획.


그러나 세계는 인간의 통제불가능한 뇌로 인해 위험에 빠지게 되고, 원인 모를 질병으로 대다수의 사람이 불임이 된다. 여기에 경제난으로 세계는 전쟁에 돌입하게 되고... 


하여 여행이 취소되고 폭동의 혼란 속에서 우연찮게 배에 탄 사람들이 갈라파고스 제도의 한 섬인 산타로살리아 섬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서 이제 이들은 새로운 인류의 시조가 된다. 새로운 인류로 진화하게 된다.


다윈이 갈라파고스에서 핀치 새를 보고 진화론을 생각했음에 소설은 갈라파고스의 한 섬인 산타로살리아 섬에 사람들을 떨쳐두게 된다. 남자 하나와 여자 여럿. 그리고 이들은 다시 대륙으로 나가지 못하는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니... 여기서 인류가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소설에서 보니것은 인류는 손이 퇴화하고 지느러미가 발달한 거의 어류와 비슷한 종으로 진화한다고 말하고 있다. 백만 년이 지난 후에 인류의 뇌는 아주 작아지고 손은 없어지고, 바다에 자신들의 생명을 맡기게 되는 종이 되는 것.


이런 과정을 시간 순서대로 이끌어가지 않는다. 백만 년 후라는 것을 미리 전제하고, 인류가 이미 그렇게 변했다는 것을 유령이 된 서술자를 통해 말하고,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종횡무진 왔다갔다 하면서 우리를 이끌어간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인류가 인류를 파멸에 이르는 무기들을 개발했고, 그것들이 우연히 사용될 수 있음을, 인류의 파멸이 어떤 큰 결심과 결정적인 순간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연찮게 일어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가 인류를 파멸하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뇌가 하는 역할이고, 이러한 뇌를 잘못 사용하는 인간들이 있음을 냉소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하여 그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쓰는 말을 이 소설에서도 반복하고 있다. 물론 [제5도살장]에서는 '그렇게 가는 거지.'라는 말을 쓰고 있다면 이 소설에서는 '에이, 할 수 없지 뭐.... 어쨌든 그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작곡할 제목은 아니었잖아.'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다른 지식이 아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을 예로 들고 있다. 이는 그가 과학기술이 위험하고, 인류가 반드시 추구해야 할 목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반전 사상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를 서술자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미국 해병대 출신의 서술자. 그는 스웨덴으로 망명해 배를 만들다 죽는다. 그리고 유령이 되어 인류가 파멸하고 새로운 인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백만 년을 통해 지켜본다.


이렇게 인류의 파멸과 새로운 인류로의 진화를 다루고 있지만 이 소설은 공포를 자아내지 않는다. 가볍게 웃음을 유발하면서 우리를 이대로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이것이 풍자의 힘이다.


보니것 특유의 풍자. 반전 사상, 인류를 위협하는 과학기술 만능주의, 잘못된 지도자의 위험성 등을 날카로운 풍자, 그러나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웃음으로써 잘 비판하고 있다.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비판 '백만 년 전, 사람이 하던 일을 최대한 많이 기계에게 넘기려는 그 이해하기 힘든 열의에 대해서 한마디 하자면,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뇌가 전혀 쓸모없다고 다시 한번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49쪽)라는 말.


지금 우리는 우리의 일을 모두(그렇다. 많이가 아니라 모두다) 넘기려고 하고 있다. 하다못해 인간의 독특한 영역이라는 예술까지도 넘기려 하고 있으니, 보니것이 오래 전에 비판한 모습, 우리의 뇌를 이렇게 스스로 쓸모없다고 인정하는 꼴이 아니겠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면서 이런 뇌를 가진 인간들이 능력 없고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갈 지도자를 선택하는 모습. 그것을 갈라파고스에 갈 선장을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으니... 지금 우리 사회에도 적용이 되는 말이다.


소설 속의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야 않겠지만 그럼에도 지금 이대로 가면 인류는 서로를 파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반전, 평화주의자가 된 것도 그러한 전쟁을 겪었기 때문인데, 서술자 역시 베트남 전쟁을 겪은 인물로 설정해서 소설을 이끌어가고 있으니... 여전히 세계는 전쟁 중인데...


그가 소설에서 '나는 이제 백만 년 전 내가 살았던 시대를 '바람직한 괴물들의 시대'라고 부르고자 한다. 그 시대를 살던 괴물 같은 인간들 대부분이 몸보다는 인격 면에서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이었기 때문이다'(94쪽)고 하고 있는데,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1986년이다. 과연 지금 우리는 그때보다 더 나아졌는가? 작가의 말을 반박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한 때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설 속처럼은 아니겠지만 인류 역시 파멸의 길로 한걸음 더 다가갈 것이라는 불길한 생각을 떨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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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작한 말들 - 차별에서 고통까지, “어쩌라고”가 삼킨 것들
오찬호 지음 / 어크로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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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인권, 공정, 연대.


참 좋은 말이다. 누구나 쓰는 말이고, 자신은 이것을 잘 지킨다고, 실천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많고.


이 말들에서 하나의 연관 관계를 찾는다. 굳이 찾아야?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관통하는 네 단어를 고르라면 이 넷이기 때문에, 이 넷이 제목이 된 '납작한 말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선 납작한 말들이라는 것은 입체적인 것을 눌러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에게 적용을 하면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없는 사람을 말을 통해서 하나로 규정해버린다는 뜻으로 쓸 수 있다.


하나로 규정된다는 것, 남에게 규정당하는 사람은 주로 배제의 대상이 되거나 무시, 혐오의 대상이 된다. 사람이 사람을 수단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기본적인 인권이지만, 실제 사회에서는 꼭 그렇지 않다.


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자유, 인권, 공정, 연대를 끌어오는 사람들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말들은 납작하게 눌려서는 안 되는 말이다. 이 말들은 우리가 우리를 연결해주는, 함께 사는 사회에서 꼭 필요한 말들이다. 아니, 말을 넘어서는 실천이다.


저자는 그 점을 이 책을 통해 계속 말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이 말들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쓰는 사람이 있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이 말들이 지닌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자고. 그래서 나만이 아니라 남도 판단할 수 있는 눈 앞에 있는 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눈 앞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눈을 갖추자고. 그것이 성숙한 사회고 문화 사회라고. 다양한 사례를 들어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유, 인권, 공정, 연대에는 '관계'라는 공통점이 있다. 홀로가 아니라 관계다. 자유는 홀로와 연관이 깊을 것 같지만 아니다. 세상에 혼자 존재한다면 자유란 말조차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숨쉬는 것이 당연할 때 공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듯이.


그래서 자유란 말을 쓰는 것은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유가 꼭 필요하다는 말이다. 관계다. '자유는 '없는 자'만이 느낀다'(88쪽)고 했다. 없는 자가 있으면 있는 자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있는 자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자가 '자유, 자유'한다. 이는 자신이 다른 사람을 혐오할 자유, 착취할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혐오고 착취다. 그것을 착각하면 안 된다. 따라서 '관계'를 망각하고 내뱉는 자유라는 말은 '자유'가 아니다.


인권 역시 마찬가지다. 인권은 상대적이 아니다. 절대적이다. 하지만 아직도 '차별금지법'에 대해서 여러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인권 역시 '관계'에 해당한다. 이 관계들을 통해서 인권 개념도 다르게 쓰인다. 그러면 안 된다. 


'공정'이야 당연히 홀로가 아닌 상대를 전제하고서 하는 말인데, 이 공정을 시험으로 정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시험의 결과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공정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하나의 결과를 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관계가 개입되어 있는지, 시험을 잘 본 것이 과연 나만의 능력일까? 시험 성적의 결과는 남과 관계없는 나만의 것일까? 아니다. 이 시험 결과에는 수 년에 걸친 관계들이 걸쳐 있다. 사회, 문화, 경제, 여기에 대인관계까지. 그러니 공정은 관계일 수밖에 없다. 내 결과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 연결된 결과라는 것.


그러니 우리(이때 '우리'는 편가르기 하는, 내 편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내 편을 뜻하는 우리는 연대가 아니라 다른 존재를 억압하는 동맹일 뿐이다. 이는 연대가 아니라 배제다. 배제를 통한 자신들의 연대라고 해야 하나. 그런 관계에는 연대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 된다. 그건 담합이다.)는 연대할 수밖에 없다.


무엇을 바꾸기 위해서는 홀로가 아니라 함께여야 하기 때문에. 이때 연대는 다른 존재를 동등하게 여기는 동등한 관계의, 그리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행위를 하기 위한 관계맺기이다. 이런 연대들이 있어야 사회가 변한다.


이렇게 이 책은 개인의 책임으로 여기고 그들을 노력이 부족했다고, 또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사회를 돌아보고, 함께 사회를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이 납작한 말들이 판치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또한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면서 자신도 납작한 말을 쓰고 있지는 않았는지 살펴보자고, 그러면 그동안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고...


하여 저자의 말로 글을 맺는다. 이 말에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좋은 사회란, 바늘구멍을 통과한 '누구에게만' 주목하면 만들어지지 않는다. 바늘구멍을 넓힐 지혜와 한쪽을 개천으로 내버려 두지 않는 연대를 갖추는 동시에, 설사 개천일지라도 그게 개인의 굴레가 되지 않도록 편견을 깨야만 가능하다.'(188-189쪽)


'좋은 사회란 어떤 개인이 대단한 결심 없이 평범하게 살아도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사회다.'(1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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