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 지친 마음에 힘이 되어주는 그림 이야기 자기탐구 인문학 5
태지원 지음 / 가나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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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이 필요한 시대다.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서 호모 데우스가 되어 가고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혼란을 보면 정말로 위안이 필요하다.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는다. 분노와 불안이 나를 감싸고 있다. 제자리 걸음도 아니고, 이건 완전히 뒤로가는 상황이니,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게다가 사회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살기 편해진 세상이 아니라, 더 살기 힘들어진 세상이 되었다. 재화는 늘어났지만, 불평등은 심해졌고, 민주주의를 이루었다지만, 그것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토의나 토론으로 가지 못하고, 오로지 법에 의존하는, '법대로' 공정을 외치는 사회가 되었다.


안전?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인간 생활이 편리해졌다지만, 그만큼 과연 우리 삶이 안전해졌나? 산업현장에서는 여전히 안타까운 죽음들이 생겨나고, 축제 현장에서도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있으니, 마음을 위로해줄 때가 지금이다.


이때 마음에 콕 들어오는 책을 만났다.제목부터 마음에 든다. '그림으로 나를 위로하는 밤'


우선 밤이라는 단어에 끌렸다. 밤, 조용히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때. 많은 것들을 가려서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보지 않을 수 있는 때. 여기에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동적인 자기에서 정적인 자기로 돌아오는 때.


밤과 캄캄함. 캄캄하다가 불안하다가 아니라 쉬다와 연결이 되는 단어가 '밤'이 아닌가 한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때.


밤에 더해서 그림이다. 그림은 정적이다. 움직임이 없다. 이 움직임이 없는 대상을 내가 끌어와 내 맘 속에 담는다.


그림에 내 마음을 담고, 내 생각을 담는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 밤과 같은 그림에 나만의 무엇을 불어넣는다. 그러면서 그림 앞에서 나는 고요해진 나를 만난다.


그러니 그림으로 나를 위로할 수밖에 없다. 밤과 그림이다. 어떤 그림? 정할 필요가 없다. 정해지지도 않는다.


어느 순간 자신의 눈에,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이 있다. 그 그림을 가민히 보고 있으면 그림에 자신의 마음을 담고, 또 그림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게 된다.


저자도 그랬다. 그런 과정을 글로 담아냈다.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생각을 꼭 따라갈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장소에서, 자신만의 시간을 두고 그림을 보면 된다. 


그림에 자신을 담으면 된다. 그러면 위안을 받는다. 가령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와 '올랭피아'를 보자. 이 그림을 이야기하면서 작은 제목을 '부적응의 세계를 건너는 법'이라고 붙였다.


부적응의 세계. 남들은 다들 적응을 잘하는데 난 왜? 이런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과연 부적응이 남들에게 뒤떨어진 것일까?


마네는 당시 화단에 부적응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두 그림은 그를 온갖 비난에 시달리게 했다. 그러나 그가 그림을 포기했던가. 남들이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렸던가. 아니다. 그는 그냥 당시 사회에 적응하길 거부했을 뿐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을 뿐. 그렇다고 그가 세상 전체로부터 버림받았는가? 아니다. 마네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대에 부적응의 대명사였던 그 그림들이 지금은 명화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그러니 저자가 한 말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힘껏 노력해보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다. 시간이 부적응의 무게를 해결해주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노력으로도 적응할 수 없는 일이 간혹 존재하는 법이다. 부적응이 반드시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당신 내면의 규칙과 기준이 완전히 잘못되거나 틀린 것도 아니다. 살아가다 보면 나와 맥락과 문법이 맞지 않는 세상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부적응의 상태는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시기와 세상을 건너는 일. 그저 그런 일일 뿐이다.' (281-282쪽) 


난 열심히 노력했는데 잘 적응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저자처럼 이렇게 생각해도 좋겠다. 아니면 다른 그림들을 보면서 위로를 받아도 좋겠다. 


그림을 본다는 행위 자체는 이미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세계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그림에 자신을 담는다는 것이니까. 움직임이 없는 그림에 마음의 움직임을 불어넣는다는 의미니까. 


그렇게 그림을 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을 위로하는 행위가 된다. 다양한 상황, 다양한 고민, 다양한 그림들이 나와서 읽으면서 그림이 아니라 글을 통해서 위안을 받게 하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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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와 대화를 시작합니다 - 편견과 차별에 저항하는 비폭력 투쟁기
외즐렘 제키지 지음, 김수진 옮김 / 타인의사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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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유대인, 기독교인의 공통점은? 종교인이라고 답하면 일반적이다. 종교인보다 더 구체적으로 가면 이들 모두 유일신을 믿는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면 이들이 믿는 신은 같은(

?) 신이다. 같다고 하면 안 되겠지만, 이들의 뿌리는 같다.


그런데도 이들의 갈등은 심하다. 심하다고 하기보다는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혐오한다. 기독교인과 유대인은 서로 혐오하지 않고 잘 지낸다고? 아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유대인을 기독교인들도 혐오했다.


수많은 유대인들 학살을 생각해 보면 수긍이 된다. 무슬림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도 이슬람 교도라고 불리는 무슬림들은 많은 혐오와 편견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 또 다른 국가 사람들을 편견과 혐오로 대하고 있다. 이렇게 세계는 혐오와 편견이 넘쳐나고 있다.


단지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행동이 바로 폭력으로 나타나고, 더 심한 경우에는 전쟁으로까지 치닫는다.


사람들 사이에 장벽이 처진다. 너무도 두꺼워서 넘을 수 없는 장벽. 외부의 장벽이 아니라 내부의 장벽이다. 이 장벽은 철벽이다. 깨뜨릴 수가 없다. 그래서 편견은 더 강화되고, 편견이 혐오로 더 나타난다. 혐오는 배제를 부르고, 배제하기 위해서 폭력을 부르기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혐오는 일방이지 않다. 양방일 가능성이 많다. 아니, 가능성이 아니라 양방이다. 서로가 자신은 편견이 없고, 특정 집단을 혐오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서로가 서로를 편견으로 대하고 혐오하게 된다.


자신의 생각을 강화하는 책을 읽고, 소식을 듣고, 그런 사람들만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알아볼 수 없게 된다. 계속된 편견의 강화. 걷잡을 수 없이 번지게 된다.

 

이런 상황. 무슬림 여성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혐오 편지를 받은 사람. 협박을 받은 사람. 그런 사람이 생각을 바꿔서, 자신을 혐오하는 사람을 만나기로 한다. 그래, 그들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만나봐야겠어.


그러면서 자신에게도 혐오 감정이 있었음을, 편견이 있었음을 깨달아 간다.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사람들을 뭉뚱그려 판단하지 않게 된다.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나게 된다.


세상에 혐오가 넘칠수록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포기하지 않고 대화하는 길만이 혐오를 없애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대화를 멈추지 않고 계속하려 한다. 


이 책은 그런 과정을 담았다. 무슬림을 쫓아내려고 했던 극우민족주의자들부터, 종교인, 무슬림, 유대인, 평화운동가들까지 지속적으로 만나면서 그들과 대화를 한다.


혐오는 결코 일방향이 아님을, 혐오는 쌍방향임을, 그래서 힘들더라도 계속 대화해야 함을. 아직은 평화의 길이 멀지만, 포기하지 말아햐 한다고. 이 책의 저자 외즐렘은 말한다.


혐오와 편견은 다른 집단(종교, 민족, 국가 등)간에만 있지 않다. 같은 집단 내에서도 혐오와 편견이 작동한다. 그래서 더욱 더 대화가 필요하다. 


혐오와 대화를 시작한 외즐렘. 그 과정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임을 깨달아가는 저자의 모습을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어떤가? 우리 역사 편견에 사로잡혀 혐오 표현을 너무 쉽게 하고 있지 않나. 혐오 표현이 말을 넘어 행동으로까지 가지 않나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이 책에 나온 구절 중에서 계속 생각해야 할 구절을 적어본다.


'그들의(인종차별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분노는 그런 불공정을 만들어 낸 자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 평등하게 법을 해석하지 않는 지방정부나, 인턴 자리를 만들지 않는 기업들을 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 대신 그들은 분노의 화살을 서로에게 겨냥하며 상대를 비난한다.' (75쪽)


'이름, 종교,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지유권을 누리는 민주적 공동체 안에서 모두 환영받는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내 임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폭력은 대화를 대신해서 변화를 창출하는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101쪽)


'불평등은 좌절감과 적대감을 낳는다. 사람들은 견딜 수 없는 압력을 받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서로에게 달려들게 된다. 전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인종 혐오의 대부분은 불평등이 그 씨앗이 되고 있다.' (128쪽)


'민주주의 문화를 이루는 필수 요소에는 서로 다른 견해를 존중하는 태도와 열린 토론 과정이 포함된다. 이런 태도와 과정이 보장되면 우리는 폭력이 아닌 말을 사용해서 안전하게 전쟁을 할 수 있다.' (205쪽)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나와 다른 의견을 지닌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지 않는다. 그 대신, 치열한 논쟁을 한다. 설혹 취약층 사람들이 불공정한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 나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찾더라도, 그들이 보기에도 내가 하는 반대 주장이 명백히 보이도록 말이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와 독재의 차이다.' (216쪽)


'우리는 미래를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꼭 매달릴 것이 아니라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의 손을 꼭 잡아야 한다.' (4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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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 귀환'이라는 신 무협소설이란다. 표지 그림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웹을 통해 읽었고, 종이책으로도 발간이 된다고 한다.


 '화산파'하면 무협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잘 안다. 검술의 명가로 알려진 무술 집단. 소호강호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화산파' 제자다. 


  이렇게 화산파는 무협소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온다. 무협소설에서 의협을 중시하는 사람들. 바로 의협을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정의를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들. 그들이 무협인들이다. 그리고 화산파는 그런 무협을 실천하는 정파의 대표이기도 했다. 검이 아닌 권을 쓰는 무당파와 함께.


그런데 '귀환'이란다. 귀환이란 다시 돌아옴이니, 화산파가 무너졌음을 전제하고 있다. 제목에선. 왜 화산파가 무너졌을까?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 호에 실린 내용만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악한과 싸우는데 너무 힘을 써서 싸움이 끝난 후 더이상 힘을 발휘할 수가 없는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거악을 척결했는데, 작은 악들이 나와서 그들을 탄압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일어서야 한다. 일으켜야 한다. 그러니 제목이 '화산 귀환'이다. 소설에서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화산이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많은 생각이 든다. 우리는 독재라는 거악과 싸워 민주주의를 이뤄냈다고 하는데, 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지? 혹시 독재를 대신한 다른 무엇들이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한다.


지금 우리는 과연 독재를 물리쳤을 때 지녔던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 그렇게 질문을 한다.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화산 귀환'처럼 민주주의의 귀환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그동안 자신의 틀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질문을 하게 된다. 이번호에 실린 정지혜의 글 '아직 도착하지 못한 조사(弔詞)'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문상(問喪)과 조문(弔問)이라는 한자에는 하나같이 '問(물을문)'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슬퍼하며 상주를 위문한다는 저 말에 새겨진 '묻기'란 대체 무엇입니까. 죽은 자를 기억하고 남겨진 자의 안부의 안위를 묻는 일일 겁니다. 안부와 안위의 확인은 물음을 통해 가능하다는 뜻일 겁니다. 물어야 합니다. 묻습니다.' (15쪽)


물어야 한다고. 그런데 답이 없으면? 계속 물어야 한다. 답을 할 때까지. 물음은 곧 행동이다. 물음이 곧 민주주의다. 물음이 없는 사회는 닫힌 사회다. 물음과 대답이 있어야 한다. 대답에는 또 다른 물음이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데...


자신만의 틀을 지니고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으면 물음도 답도 없어진다. 그것을 '쪼가 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칭찬만 할 말이 아니다. 쪼는 곧 자신만의 틀이라는 뜻인데, 자신의 쪼만 유지한다면 발전이 없다. 


즉, 물음이 없어진다. 대답을 하지 않게 된다. 이번호에 쓴 정문정의 글 '쪼, 나의 개성이자 한계점'은 이렇게 정지혜의 물음과 연결이 된다. 


'쪼가 자기만의 개성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세계로는 넘어가기 힘든 제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49쪽)


이 말은 물음이 없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표지 그림을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화산 귀환'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귀환'을 바라고 있지 않을까?


과연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해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빅이슈 이번호는 그런 물음을 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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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1-29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잡지의 표지도, 신무협소설이라고 하는 <화산 귀환>도 흥미롭네요~^^ 화산파 말씀하신대로 무협소설에서 단골손님이죠. 화산도 중국에서 명산이라서인지 장소로서 참 자주 등장하더군요^^
그나저나 거악을 퇴치했는데 작은 악이 다시 등장한다라... 지금은 작은 악이 아니라 더 큰 악이 찾아온듯 싶어서 난감합니다. 하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어도 계속 물어야겠죠.

kinye91 2022-11-29 14:42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작은 악이 아니라 더 큰 악이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물음, 질문을 계속해야 하지 않을까 해요.

꼬마요정 2022-11-29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화산귀환은 천마라는 마교의 교주를 정파들이 합심해서 제거 했는데, 그 중에 화산파 제자 청명이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마교의 머리를 벤 뒤 죽었다가 어린아이로 환생하는 이야기 입니다. 청명이 환생하고 봤더니 화산파가 망했더라는거죠. 그래서 자신이 화산파를 재건하려고 합니다. 저도 다 안 읽어서 어찌 됐는지는 모르겠네요 ㅎㅎㅎ 힘을 합치면 아무리 큰 악이라도 제거할 수 있을 거예요!!!

kinye91 2022-11-29 21:29   좋아요 1 | URL
저도 화산귀환은 읽지 않았지만 ... 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하겠지요.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 환상문학전집 10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안정희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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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이다. 세계 SF소설의 3대 거장 중 한 사람이란다. 하인라인이라는 사람. 지금까지 읽은 작품은 없다. 아시모프나 클라크는 읽어봤는데. 그러니, 이번 참에 한번 읽어보자 하고 고른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공간적 배경은 달이다. 시간적 배경은 SF소설들이 택하고 있듯이 미래다. 그런데 이 소설이 쓰인 때로부터 100년 정도 뒤로 설정을 했다. 가까운 미래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그 미래를 앞두고 있음에도 소설 속에서 실현된 일들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 이제야 다시 달 개척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으니.


하지만 소설의 배경을 지구로 갖고 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SF소설들이 택하고 있는 시간, 공간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로 가져올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혁명에 관한 소설이다. 혁명을 조직하고, 이끌고, 혁명이 완수된 다음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달은 지구 식민지와 비슷하다. 식민지라기보다는 지구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살아가는 유형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달에서 독립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SF소설답게(? 그런 말이 통용될지 모르지만) 인간과 대화를 하는 컴퓨터가 등장한다. 우월한 능력을 지닌 컴퓨터. 이 컴퓨터와 대화를 하는 사람들.


이야기 진행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슈퍼컴퓨터의 등장 -> 컴퓨터와 인간의 교류 -> 독립을 꿈꾸는 사람들의 만남 -> 그들과 컴퓨터의 연대 -> 혁명의 조직 및 시작 -> 전쟁 -> 승리


이것이다. 달이 지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까지의 과정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결국 승리한다. 승리한 다음에는 혁명의 주역들은 빠져야 한다.


혁명의 주역이 남아 있으면, 그들에게 권력이 집중될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소설은 컴퓨터는 인간과 교류를 하지 않으며, 가장 조직적이고 계획적이었던 혁명세력인 교수는 죽음을 맞이한다. 여기에 서술자로 등장하는 사람 역시 정치에서 멀어진다.


이것이 혁명이다. 혁명의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과 혁명 이후 사회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달라져야 한다. 게다가 컴퓨터는 과정에만 존재해야지, 혁명 이후에도 존재한다면, 인간의 삶이 기계에 종속되기 쉽다.


인간적인 컴퓨터의 등장, 그리고 자신들의 삶을 좋은 쪽으로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의 모습, 또한 가족 형태의 다양성, 그리고 독립.


독립해서 사는 삶.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관계를 이루면서 사는 삶. 이것은 지구 여러 나라들이 지켜야 할 모습이기도 하고, 그것이 정치에서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일방적인 힘의 논리로(그것도 무력으로) 굴복시키는 관계여선 안 된다. 하인라인은 냉전 시대에 이 소설을 썼다. 미국의 독립을 빗대어 달이 독립을 선언하는 날을 7월 4일로 잡았지만, 러시아 혁명을 빗대어 혁명가들의 조직과 그들의 비밀 결사, 또 실행을 보여주고 있다.


혁명과정에서는 비도덕적인 일들이 일어나고, 온갖 음모가 발생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어야 함을, 그리고 한 나라가 한 나라를 지배하는 일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달세계를 통해서 보여준다.


압도적인 무력 차이에도 굴복하지 않고 독립을 이뤄내는 달세계 사람들의 모습에서 세계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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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답이 뻔한 질문이다.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니. 당연한 말 아닌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런데, 이 질문 앞에 한 문장이 더 있으면 쉬운 대답이 나올 수 없다. '사람이 죽었는데'라는 문장.


  누군가에게 닥친 비극 앞에서 그냥 일상을 유지해도 될까라는 질문으로 바꿀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양, 당신은 사랑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관심도 없는 사람, 그들은 이런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죽음과 자신의 삶은 상관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은 남일뿐.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고 질문하는 사람, 그 사람은 이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그 사람은 사랑을 지니고 사는 사람. 그러니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손미 시집을 읽으면서 사람이 살아가는데 너무도 많은 죽음과 또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있음을, 우리는 죽음 속에서도 삶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슬픔을 잊지 않지만, 그렇다고 슬픔 속에만 매몰되지 않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싶다. 다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는 질문을 마음 속에 품고 있어야 한다.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밤을 두드린다. 나무 문이 삐걱댔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가축을 깨무는 이빨을 자판처럼 박으며 나는 쓰고 있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해 이 장례가 끝나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뻣가루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나왔는데 식도에 호스를 꽂지 않아 사람이 죽었는데 너와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될까. 사람은 껍질이 되었다. 헝겊이 되었다. 연기가 되었다. 비명이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는 비극. 다시 사람이 되는 것. 다시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케이크에 초를 꽂아도 될까. 너를 사랑해도 될까. 외로워서 못 살겠다 말하던 그 사람이 죽었는데 안 울어도 될까. 상복을 입고 너의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 밤을 두드리는 건 내 손톱을 먹고 자란 짐승. 사람이 죽었는데 변기에 앉고 방을 닦으면서 다시 사람이 될까 무서워. 그런 고백을 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계속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묻는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나무 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해도 될까.


손미,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민음사. 2020년. 1판 5쇄. 35쪽.


이렇게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 고민하고, 아파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도 된다. 그런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 남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죽음이 발생하고 있다. 그런 죽음과 더불어 삶이 지속된다. 하지만 억울한 죽음은 없어야 한다. 피지도 못하고 사그라지는 죽음은 없어야 한다. 그렇게 사람이 죽어서는 안 된다. 그런 죽음이 많으면 우린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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