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 귀환'이라는 신 무협소설이란다. 표지 그림은.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웹을 통해 읽었고, 종이책으로도 발간이 된다고 한다.
'화산파'하면 무협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잘 안다. 검술의 명가로 알려진 무술 집단. 소호강호라는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화산파' 제자다.
이렇게 화산파는 무협소설에서 빠지지 않고 나온다. 무협소설에서 의협을 중시하는 사람들. 바로 의협을 자신의 행동 지침으로 삼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이익보다는 정의를 위해서 행동하는 사람들. 그들이 무협인들이다. 그리고 화산파는 그런 무협을 실천하는 정파의 대표이기도 했다. 검이 아닌 권을 쓰는 무당파와 함께.
그런데 '귀환'이란다. 귀환이란 다시 돌아옴이니, 화산파가 무너졌음을 전제하고 있다. 제목에선. 왜 화산파가 무너졌을까?
소설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이번 호에 실린 내용만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악한과 싸우는데 너무 힘을 써서 싸움이 끝난 후 더이상 힘을 발휘할 수가 없는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거악을 척결했는데, 작은 악들이 나와서 그들을 탄압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시 일어서야 한다. 일으켜야 한다. 그러니 제목이 '화산 귀환'이다. 소설에서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화산이 다시 일어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많은 생각이 든다. 우리는 독재라는 거악과 싸워 민주주의를 이뤄냈다고 하는데, 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지? 혹시 독재를 대신한 다른 무엇들이 민주주의를 잠식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한다.
지금 우리는 과연 독재를 물리쳤을 때 지녔던 모습을 지니고 있는가? 그렇게 질문을 한다.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화산 귀환'처럼 민주주의의 귀환을 바라고 있지는 않은지.
그동안 자신의 틀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질문을 하게 된다. 이번호에 실린 정지혜의 글 '아직 도착하지 못한 조사(弔詞)'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문상(問喪)과 조문(弔問)이라는 한자에는 하나같이 '問(물을문)'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 슬퍼하며 상주를 위문한다는 저 말에 새겨진 '묻기'란 대체 무엇입니까. 죽은 자를 기억하고 남겨진 자의 안부의 안위를 묻는 일일 겁니다. 안부와 안위의 확인은 물음을 통해 가능하다는 뜻일 겁니다. 물어야 합니다. 묻습니다.' (15쪽)
물어야 한다고. 그런데 답이 없으면? 계속 물어야 한다. 답을 할 때까지. 물음은 곧 행동이다. 물음이 곧 민주주의다. 물음이 없는 사회는 닫힌 사회다. 물음과 대답이 있어야 한다. 대답에는 또 다른 물음이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는데...
자신만의 틀을 지니고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으면 물음도 답도 없어진다. 그것을 '쪼가 있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다. 칭찬만 할 말이 아니다. 쪼는 곧 자신만의 틀이라는 뜻인데, 자신의 쪼만 유지한다면 발전이 없다.
즉, 물음이 없어진다. 대답을 하지 않게 된다. 이번호에 쓴 정문정의 글 '쪼, 나의 개성이자 한계점'은 이렇게 정지혜의 물음과 연결이 된다.
'쪼가 자기만의 개성이 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세계로는 넘어가기 힘든 제한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49쪽)
이 말은 물음이 없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표지 그림을 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화산 귀환'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귀환'을 바라고 있지 않을까?
과연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한다고. 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요구해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빅이슈 이번호는 그런 물음을 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