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뜬금없이,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빅이슈] 이번 호를 읽다가.


  기부문화. 연말이 되면 참 많은 액수를 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돈이 많은 사람들은 억대의 돈을 기부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부한 사람들 명단이 언론을 통해서 공개된다. 좋은 일이다. 있는 돈을 나눠 쓰는 일.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돌아다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대중교통을 이용할까? 


자가용을 타고, 그것도 기사가 운전하는 자가용을 타고 다니지 않을까. 이들이 흙을 밟을 때가 있을까? 골프를 칠 때 말고는.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이들이 [빅이슈]를 구입해서 읽을 기회가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빅이슈]란 잡지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지하철 역을 중심으로 빅판들이 판매하는 이 잡지를 귀하디 귀하신 분들은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연말이 되면 선심을 쓰듯이 거액을 기부하겠지.


결국[ 빅이슈]는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사람들, 일명 보통사람들이 구입을 할 테고, 어려운 사람과 함께 하는 이 일을 결국은 보통사람들이 하고 있다는 생각.


보통사람들. 좋은 말이다. 사람들이 특별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두 보통사람들이다. 힘들 때 서로 도우면서 사는 사람들.


[빅이슈]는 이렇게 보통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잡지다. 그리고 [빅이슈] 이번 호에 나온 내용도 그렇다. 사람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반려동물들 이야기.


동물 유튜브에 대한 소개가 되어 있는데, 이는 동물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관계임을 보여주고 있다.


[빅이슈]도 마찬가지지. 신간이 나올 때마다 편지를 써서 신간에 끼워넣는 빅판의 이야기. 그런 빅판에게 편지를 써서 전해주는 사람들 이야기. 함께 사는 동물 이야기.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쫓겨가는 사람들과 동물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한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뜬금없는 소리로 마무리를 한다. 귀하신 분들도 경험삼아(?)서라도 지하철을 가끔은 이용했으면 좋겠다. 이들이 지하철 역에서 나와 [빅이슈]를 판매하는 빅판을 만나고, 빅판에게서 직접 -비서를 시켜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구입했으면 좋겠다.


이들도 이렇게 보통사람들처럼 행동했으면 좋겠다. 그러면 그들도 다른 세계에서 살지 않게 될 텐데.


[빅이슈] 294호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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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붉은 사랑 -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그대가 있었다
림태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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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택배가 있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시킨 물품이 없는데 무슨 택배? 자세히 읽어보니 보낸 사람이 벗이더군요.


벗이 웬일로 택배를, 무엇을 보냈을지 궁금해 하던 차에,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가 오고, 받아보니 천혜향 한 상자입니다.


웬 천혜향? 벗은 농사를 짓지 않는데, 천혜향을 보냈다는 것은 부러 마음을 먹었다는 얘기입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할겸 전화를 했더니, 벗이 그러더군요.


"봄이 왔어. 봄향기를 선물하고 싶었어."


그렇습니다. 벗은 봄을, 이 포근하고 따스한 봄을 혼자만 보내기가 아쉬웠던 겁니다.


봄을, 봄향기를 벗이 아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답니다. 그렇게 봄을 내 마음에 심어놓았습니다. 벗이 보내준 봄향기가 온집안을 감싸고 있습니다.


봄은 옅은 색깔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읽고 있던 림태주의 책과 비교해보니, 봄도 붉은 사랑이었습니다.


내 마음을 가득 채우는 붉은, 밝고도 따스한 그런 사랑이었습니다. 이렇게 봄이 다가왔습니다. 마음이 포근해졌습니다. 정말 봄이구나, 벗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책도 그렇습니다. 책은 4계절을 각 장으로 나누고 그에 관한 글들이 있지만, 각 장들이 모두 사랑입니다.


따스한 사랑입니다. 계절에 따라 연상되는 색들과 상관없이 모두 붉은 사랑입니다. 그렇게 이 책은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삶의 요체는 축적과 차지가 아니라 비움과 나눔이다. 조문을 가면 먼저 죽은 자들은 늘 이 두 가지를 명명백백하게 알려 준다. 이것은 사유가 아니라 삶의 감각이다. 이 구체적인 감각이 무뎌지고 만져지지 않으면 그때를 죽음이라고 한다. 죽은 자의 것 중 기릴 것이 있다면, 그가 살아서 얼마나 나누고 베풀었는가이다. 그것을 산 자들은 덕망이라 부른다. 삶을 감각하고 있는가. 나여.' (233쪽)


그렇습니다. 이 글에서 말한 비움과 나눔, 벗은 그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 벗으로 인해서 삶을 감각하게 됐습니다. 잠시 무뎌졌던 내 삶의 감각을 깨우는 봄향기를 벗이 보내주었습니다.


벗이 보내준 봄향기, 이 봄향기가 림태주의 책을 내내 감싸고 있습니다. 봄-여름-가을-겨울 할 것 없이 사랑으로 충만한 글들입니다. 그 글들에서 붉은 사랑을 느끼고, 붉은 사랑에서 봄향기를 느낍니다.


시작입니다. 사랑의 시작. 지금까지 왔던 길을 되짚어보는 일이 아니라, 지금-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그렇게 봄향기를 나만이 아니라 주변으로 퍼뜨리는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이 봄, 이 봄향기와 같이 마음이 따스해지는 그런 글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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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3-03-14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봄향기 품은 페이퍼네요. 친구분과 함께 세상에 봄향기를 마구 퍼뜨리고 계시구요. ㅎㅎㅎ 책 소개도 감동입니다. ^^

kinye91 2023-03-14 13: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봄향기가 세상에 널리 퍼졌으면 좋겠어요.
 
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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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트우드가 쓴 책을 읽다가 발견한 소설가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했는데, 기억에 없다. 어느 순간부터 노벨문학상은 문학상이고, 내가 읽는 작품은 작품이다라는 태도를 지니게 되었다.


한때는 노벨문학상을 탔다고 하면 꼭 읽어봐야겠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는데, 이제는 노벨문학상이 무엇이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상을 받았다는 사실보다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소개한 소설이라는 점에서 꼭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읽으면서 애트우드의 추천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첫소설부터 버지니아 울프가 쓴 '자기만의 방'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다. '작업실'이란 소설인데, 작품을 쓰기 위해서 집이 아닌 작업실이 필요하다는 여성의 말. 이 작품이 꽤 오래 전에 쓰였는데, 지금도 집은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씁쓸한 마음이 일기도 하고.


조금은 나아졌으려나? 이 소설에서 이런 표현이 나온다. 생각해 보자.


'집은 남자가 일하기에는 아주 좋다. 남자가 일감을 가져오는 집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고 일하기에 딱 좋도록 남자 중심으로 새로 배치할 수도 있다. 남자에게는 일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준다. 따라서 으레 전화를 받는 일도, 어디 두었는지 모를 물건을 찾는 일도,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보는 일도, 고양이 먹이를 주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아걸어도 무방하다. 방문이 닫혀 있고 그 방 안에 엄마가 있다는 걸 아이들이 안다고 생각해 보라.(생각해 보라고 남편에게 말했다.) 왜냐, 아이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자체도 용납하기 어려울 테니까. 여자가 허공을 응시한 채, 남편도 자식도 없는 엉뚱한 곳을 바라보는 건 자연의 섭리를 저버린 짓과 마찬가지라고 여길 테니까. 그러니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다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작업실'에서. 13쪽) 


하지만 작업실을 얻었다고 해도 집에서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지 못한다. 임대해 나간 작업실에서도 주인은 남자다. 여자는 보조 역할을 할 뿐이다. 게다가 남자 주인은 여성 임대인을 함부로 대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허락을 받는 일, 형식적인 허락이야 받지만, 언제든 마음대로 여성 임대인의 작업실을 드나들 권리가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마치 호의를 베푸는 듯한 태도로.


여성 임대인이 이런 태도를 용납하지 않으면 그때부터 태도가 돌변한다. 어떤 꼬투리를 잡아서라도 여성 임대인을 비난한다.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된다.


결국 집이든 작업실이든, 여성은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받기가 힘들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고 하겠지만 먼로의 소설 당시는 그렇다.


이렇게 여성은 남성의 간섭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는 없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생활을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


이 소설집에는 주인공이 대부분 여자다. 그만큼 여성의 삶에 관심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소설이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란 소설이다.


어린 시절에는 남성과 여성의 구분을 그리 하지 않는다. 집안일에도 물론 어느 정도의 분리는 있지만, 계집아이가 아버지를 돕는 일을 막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되면 성에 따른 일의 구분이 생기고, 행동에도 차이가 난다.


말을 도살하는 장면에서, 말이 도망치려고 했을 때 그동안 아버지의 일을 도와주던 딸은 말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문을 닫으라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한다. 문을 열어둔다. 생명의 소중함을 깨달아가는 순간이다.


자연과 인간의 삶이 닫히지 않고 열리는 순간을 표현했다면, 그동안 소심했던 남동생은 반대로 행동한다. 말을 도살하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듯이, 문을 닫지 않은 누나를 비난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버지의 말이 성차를 확인하게 한다.


"계집애일 뿐이니까."('사내아이와 계집아이'에서. 227쪽)


이 성차는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많은 걸림돌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비관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소설집의 마지막 소설 '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이 점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마살레스 선생님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자신만의 세계를 꾸준히 살아간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 딱하다는 표현이 어울리지만, 서술자는 딱하다는 표현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선생님은 이 각박한 세상에 행복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남는다.


'우리는 도대체 왜 딱한 마살레스 선생님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분명코 하고도 남을 이 상황에. 그건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고, 그 음악은 선생님이 사는 저쪽 나라에서 보낸 코뮈니케이기 때문이다.'('행복한 그림자의 춤'에서. 386쪽. 코뮈니케-문서에 의한 국가의 의사 표시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외교상의 공문서, 정부의 공식 성명서 따위를 이른다.고 주로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는 당시 시대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지금과는 다른, 그렇지만 어쩌면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그런 삶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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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3-13 11: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 표지가 좀 많이 화사해졌어요^^
전 구판으로~~좀 칙칙했죠
저도 이 책 보면서 아파트 베란다 너머로 보이는 저 녹색 원룸들 위 옥탑방 한칸 나만의 비밀장소로 갖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매일 거기로 출근도장 찍는 상상이요. 거기서 책보고 화분키우고 점심 해먹고 내방아 잘 있어 이러면서 걸어서 집으로 퇴근하는 그런 상상이요. 상상하게 하는 힘이 삶을버티게 해주는 앨리스 먼로의 책이 었어요.

kinye91 2023-03-13 19:57   좋아요 1 | URL
꽤 오래된 소설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생각할거리를 주고 있어요.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그 중 하나고요.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정호승의 시가 있는 산문집
정호승 지음 / 비채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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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승은 유명한 시인이다. 이렇게 시작한다. 그를 만난 적은 없다. 단지 얼굴을 본 적은 있다. 안치환 시노래 콘서트에서. 그때 정호승이 나와서 시를 낭송했다. 


안치환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는데, 시도 좋지만 노래도 좋았다. 거기에 정호승이 직접 낭송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으니, 그런 호사가 없었다.


2007년이었다. 서강대에서 이루어졌던. 그렇게 정호승을 시로만이 아니라 노래로도 만났다. 그때 받았던 안치환의 사인. 여기에 정호승 시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시와 산문이 하나가 된 책으로도 만나게 되었다.


정호승의 시가 먼저 한 편 나온다. 그리고 그 시에 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시와 산문. 서로 다른 것 같지만 다르지 않음을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시도 좋지만 시와 관련된 산문을 읽으면서 시인 정호승이 아닌, 인간 정호승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정호승이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 시가 어떻게 해서 우리 곁에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사연.


한편 한편의 시와 산문이 다 좋다. 읽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진다. 글을 통해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 정호승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이 책의 묘미가 있다. 시인의 개인 생활에 대해서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냥 시를 통해서 만나든지, 아니면 산문을 통해서 짐작을 할 뿐인데, 이 책은 정호승 자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시를 통해서 산문으로 풀어내주고 있다. 


살아온 이야기, 살아가는 모습, 그리고 삶을 대하는 태도. 그렇게 정호승은 시와 산문을 통해서 시와는 다르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는 정호승이 만난 많은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을 통해서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고, 또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은 모든 존재를 사랑으로 보려는 자세가 나타나 있어서, 자신만을 중심으로 여기는 삶을 반성하게 한다.


또한 첫글에서 말하고 있듯이 온전한 삶만이 삶이 아니라 깨어진 삶도 삶임을,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통해서, 그 시와 관련된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 삶은 바로 이것이다. 삶의 순간순간이 모두 삶이고, 그것이 온전한 삶임을. 꼭 온전한 삶을 찾으려 헤맬 필요가 없음을. 그냥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살면 된다는 마음을 갖게 한다.


정호승의 시하면 마음에 위안을 준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이 책에 실린 산문들도 그렇다. 마음에 위안을 주는데 시와 산문을 가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책이다.


그냥 생각날 때마다 한편씩 읽어도 좋을 책이다. 곁에 가까이 두고 틈틈이 읽으면 좋을 책.


덧글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


윤동주에 관한 글이다.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갔던 일화를 이야기해주는 글에서,, 류기천 씨의 말이라고 하는데...


"... 윤동주의 친어머님은 일찍 죽고, 그 후에 윤동주는 새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그 어머니가 중풍을 일으켜..." (440쪽)


내가 알기론 윤동주는 새어머니 밑에서 자란 적이 없는데... 검색을 해보니, 어머니 김룡(김용) 씨는 1948년에 돌아가신 걸로 나와 있다. 그렇다면 용정에 있는 류기천 씨의 이 말에 대해서 책에서 부연 설명을 해주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우리나라 국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가운데 한 명인 윤동주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 책을 읽고 윤동주의 가족관계에 대해서 잘못 알 수도 있지 않나 하는 우려가 생겼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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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와 크레이크 미친 아담 3부작 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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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판단은 다 다르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또는 만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판단 역시 다르다.


다름을 인정하고 공존하면 좋겠지만, 이 다름이라는 이유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해서도 안 된다. 그냥 다르다고 넘어갈 수 없는 문제가 있다. 바로 인류의 생존에 관한 문제라면.


과학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후퇴라는 말은 과학기술에는 없다.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면 그 난관을 과학기술의 힘으로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


전염병이 발생하면 백신을 개발하고, 식량위기가 닥치면 화학농법이라든지 또는 대체육과 같은 과학기술을 이용한 식량 개발을 하고, 기후 위기에 봉착하면 또다른 과학기술로 해결하려고 한다. 


계속 발전되는 과학기술. 이런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종'이라는 개념이 희박해지고 있다. 유전자변형, 또는 유전자 조작이라고 하는 기술이 지금도 많이 발전하고 있고, 대체육이라는 개념까지도 나오고, 스마트팜(스마트농장이라고 흙과 관계없이 농사를 짓는 기술)도 운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우리를 유토피아로 이끌까? 역사를 보면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주장하면서 사람들을 디스토피아로 몰아넣은 경우가 한둘이 아니지 않은가?


유토피아란 명목으로 디스토피아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경우를 보면서도 '다름'이라고 인정해야 할까? 그 다름을 용인해야 할까? 아직 오지 않은 세계니, 판단을 유보하고 한번 지켜보자고 해야 할까? 결과나 나타난 다음에는 돌이킬 수 없을텐데도.


이 소설은 그런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현생 인류가 너무 많다고, 현생 인류는 사라지고 새로운 인류가 나타나 (완벽하게 조작된 유전자를 타고난, 그래서 그들에게는 갈등도 없는, 오로지 채식으로도 생활이 가능한, 죽음이라는 말을 모르는 그런 존재들) 지구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를 실행에 옮긴 사람이 등장한다.


뛰어난 과학기술 능력으로 그는 인간을 창조하고 (그의 별칭이 크레이크이고, 그가 만든 새로운 인류를 크레이커라고 부른다) 현생 인류를 멸망시킬 바이러스를 유포한다. 급속도로 퍼지는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지 못한 상태에서 인류는 속절없이 죽어간다.


세상은 폐허가 된다. 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 크레이크의 친구. 그가 크레이커들과 살아가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소설이 진행이 된다.


온갖 유전자 조작들이 성행하고, 다양한 변종 동물들이 만들어졌지만, (소설에서는 이 동물들 이름을 늑개, 너구컹크, 돼지구리 등으로 부른다) 그것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집단과, 그 집단에 끼치 못한 일명 평민층이 존재하는 세상. 


이는 분명 유토피아는 아니다. 그러니 이런 세상을 없애려고 하는 크레이크의 시도.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인류인 크레이커들이 이 세상에서 새로운 인류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물론 그의 의도는 실현되지 못한다. 그 자신이 죽었으므로.


과학기술로 차별이 이루어진 사회는 유토피아가 될 수 없다. 아마도 과학기술은 그것을 점유하고 이용할 수 있는 사람과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을 가르고 차별할 것이다. 또다른 차별사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차별사회를 없애겠다고 현 인류를 모두 죽게 만드는 방식 또한 또다른 차별을 낳을 수밖에 없다. 자신까지 포함해서 다 죽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인류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가르칠 존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 역시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 즉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 찬동하고 따르는 사람들은 계속 살아갈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 또는 이런 과학기술에서 소외되어 있던 소위 평민층들은 이유도 모른채 죽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다. '다름'이 인정받아야 하는 한계가 있다. 소설은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서 최근에 나타난 지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세계를 팬데믹이 빠뜨린 코로나19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새로운 질병이 발생해서 인류를 위험으로 몰아갈지 모른다. 그것도 과학기술의 발전이 만들어낸 부작용일 수 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대체육은 이미 만들어지고 있으니, 이제는 종을 파괴한 인류의 기호에 맞는 동물들이 등장할 수도 있다. 인간은 다양한 종들을 멸종시키고 있지만, 반대로 다른 종들을 창조하고 있기도 하다.


소설 속 크레이크는 자신이 신이 되고자 했다. 현생 인류를 없애고 새로운 인류를 창조한. 물론 자신이 창조한 인류에는 지도자도 신도 없을 거라고 말했지만, 소설은 그렇지 않음을, 그들 역시 우리 인류가 걸어왔던 길과 비슷하게 갈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니 소설은 과하기술의 한계가 어디까지여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다름'이라고 다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또한 과학기술은 과정과 예측 결과까지도 공유되지 않으면 인류를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로 이끌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미친 아담' 3부작이라고 하는데, 이 책은 1부다. 1부부터 애트우드답다는 생각이 든다. 다음 권들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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