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렇게 열심히 사냐 하면 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말을 한다. 한 단어를 덧붙이면 잘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한다.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면서도 정작 먹고 살게 해주는 농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먹을거리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코로나19로 사람들이 감염병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현실은 연일 언론에서 방송으로 내보내면서도, 정작 그렇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지나친 난개발, 소위 발전과 성장이라고 하는 인류가 추구해온 삶의 방식이 감염병의 시대를 열었음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고, 백신과 치료제도 중요하지만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 시급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논의는 다뤄지지 않는다.


언론에서 어떤 쪽으로 방송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은 달라진다. 우리는 전대미문의 코로나19사태를 겪으면서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방향의, 어쩌면 우리들 삶이 더 윤택해지는 그런 방향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가령 이번 호에서 이기영이 쓴 '식생활과 문명의 전환'을 보면 우리가 이런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이유는 먹을거리에서도 기인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온갖 가공식품들로 열량은 높지만 영양은 없는 음식을 섭취하면서 면역력이 떨어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


가볍게 앓고 넘어갈 수도 있는 질병을 온갖 기저질환으로 인하여 목숨마저 위태로울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현대인들의 삶. 그런 삶을 바꿔야 한다고 녹색평론에서는 꾸준히 주장해왔는데,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가. 아니 계란으로 바위치기를 해도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고 우리들 삶에 변환이 이루어진다고 믿어야 하는 건지.


그래서 녹색평론을 읽는다. 내 삶을 생각해 보게 하기 때문에. 나 역시 도시문명, 과학기술의 편리함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삶을 조금이나마 고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이번 호에서는 농업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다. 농업, 농사, 농민에 대한 관심을 지녀야 한다. 대규모 기업농이 아니라 소농이 지구를, 우리를 살릴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특히 소농은 공동체와 민주주의와도 관계가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소농의 위기는 공동체의 위기로 연결되었고, 공동체의 위기는 소농의 위기로 연결되었다. 그런데도, 소농과 공동체가 아니고서는 기후위기라는 엄중한 상황을 극복해낼 수 없다는 절박함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 (윤병선, '기후위기 시대의 농(農)의 복원'에서. 8쪽)


소농, 이것은 대규모 농사가 아니라 그 지역에 맞는 농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공동체를 살리는 길이다. 그러니 이제는 대규모가 아니라 소규모로 생활하는 방식을 생각해야 한다. 그 점에서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민주주의는, 선거라는 대의민주주의에 갇히지 않아야 하고, 민중의 자기통치라는 민주주의의 이상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 그래서 마을 자치가 중요하고, 읍-면 자치가 중요하고, 자급과 자치가 중요하다. 그것을 가로막는 기득권세력을 비판하고 감시·견제하며,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지역에서부터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선이다. 내려다보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당하는 자'의 시선, 폭격하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폭격당하는 자의 시선, '버리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버린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 자'의 시선, 전기를 소비하는 자의 시선이 아니라 발전소와 송전선으로 고통받는 자의 시선 …. 그런 시선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하승수, '농촌에서 본 민주주의와 농본주의'에서. 59쪽) 


지금 보궐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후보들이 내세우고 있는 공약들을 살펴보면, 과연 그들이 어떤 시선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시선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문가의 시선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다음 글을 보자.


"나는 답을 찾는 과정에서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근대의 전형적인 오류를 저질렀는지도 모른다. 전형적인 근대의 실패를 드러내주는 바로 그 오류 말이다. 전문가들이라고 해도 모르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때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고등교육의 수혜자들은 '자격증'에 지나치게 가치를 둔다.

  우리는 산업적 농업과 맞서는 과정에서 공민권, 주민권, 땅 보살피기를 과학으로 대체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과학은 그중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다." (웬델 베리, '농부가 없는 농토'에서. 93쪽) 


많은 권리를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넘겨버리고 있지 않은지... 내 삶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버리고 만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하는 글이다. 


이번 호를 읽으며 다시 농사에 대해, 공동체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한다. 정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우리가 어떤 시선으로 살아야 하는지, 무엇에 더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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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5 11: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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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5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번 최승자 시집을 읽으면 온통 없음과 빔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꽉 차 있다고 생각하지만, 곧 텅 비게 된다. 우리 삶은 충만함과 텅빔이 공존하고 있다.


  비우지 못하면 채우지 못하고, 채우지 못하면 비우지 못한다. 둘이 함께 존재하는 것, 그것이 우리 삶이다,.


  그렇게 이 시집에서는 어느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다. 사라짐이 있으면 나타남이 있다.


  그게 인생이다.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느 하나에 치중하는 경우가 많다.


  어느 한쪽에 자신을 두다가, 어느 순간 하나만이 아니라 둘이 또는 그 이상이 함께 있음을 알게 된다. 최승자의 이 시처럼.


  이 세상 속에


이 세상 속에

이 세상과 저 세상

두 세상이 있다

겹쳐 있으면서 서로 다르다

그 홀연한 다름이 신비이다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사. 2016년. 30쪽.


더 말이 필요없다. 수다스러워지면 안 된다. 그냥 이렇게 시를 감상하자. 다른 시를 보자. 


빈 배처럼 텅 비어


내 손가락들 사이로

내 의식의 층층들 사이로

세계는 빠져나갔다

그러고도 어언 수천 년


빈 배처럼 텅 비어

나 돌아갑니다


최승자, 빈 배처럼 텅 비어, 문학과지성사. 2016년.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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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 30년 전쟁의 한 연대기 범우희곡선 25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연희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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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히트의 작품은 등장인물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읽거나 보면 안 된다. 브레히트가 의도했던 것은 등장인물과 거리를 두고 작품을 감상하는 것. 그것을 한자어로는 소격효과라고 했는데, 이 책에서 옮긴이는 생소화효과라고 한다.


즉 낯설게 하는 것이다. 감정이입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게 하는 것. 그러니 브레히트의 이 희곡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도 주인공인 억척어멈에게 감정이입을 하면서 읽으면 안 된다. 억척어멈에게 감정이입을 하면 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자식을 잃고도 살아가고자 하는 한 여인의 삶에의 의지 정도로 이해할 수 있는데, 브레히트가 의도했던 것이 그것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브레히트는 개인의 운명조차도 개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속해 있다고 여기지 않았을까, 개인의 삶을 바꾸려는 것보다는 사회제도를 바꾸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가 마르크시즘에 빠져 있었으니, 개인보다는 사회, 제도를 우선시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유럽의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에서도 사회구조를 찾아야 한다. 즉, 전쟁 속에서 전쟁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목숨을 부지하려는 개인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 결국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전쟁을 이용해서 살아남으려는 모습이 아니라, 전쟁을 거부하고 평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


억척어멈은 전쟁터를 따라다니는 종군상인이다. 변변치 않은 물건을 얻고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자식들 또한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억척어멈의 기원일 뿐이다. 자식들은 전쟁의 와중에 하나둘 죽어간다.


병사로 죽어가고, 도시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경고를 하다가 죽어가기도 한다. 그렇게 자식 셋을 모두 잃고도 억척어멈은 전쟁 부대를 따라간다. 왜? 살아가기 위해서.


여기서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를 고민해야 한다. 억척어멈처럼, 그렇게 억척스럽게 전쟁 통에서 살아남으려고 한다고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자식을 모두 잃고 살아남은 억척어멈이 과연 행복할까?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살아남기 자체가 아니라 전쟁이 아닐까? 이념이나 종교로 분열되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거부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전쟁을 이용한 삶이 아니라 전쟁을 거부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이 희곡은 억척어멈을 통해서 전쟁을 거부해야만 우리의 삶도 평안해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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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는 우리가 평소에 무심하게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보게 한다. 우리 눈에 들어오게 한다. 그래서 시는 별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들을 별것이게 한다. 


  그래서 시를 읽으면 참 별것들이 많다. 별것이라는 말이 그렇다면 특별한 것들 투성이다. 아니 존재한다는 자체가 바로 특별이다. 모두가 특별하다. 그런 특별함을 때로는 외면하면서 지내오다가 시를 읽으며 특별함을 다시 발견한다. 


  양정자 시인의 시집을 읽으며 일상에서 주로 만나는 사람들, 일들을 다시 보게 됐다. 그리고 제주도 여행을 갈 때 무심히 지나쳤던 제주 역사를 시를 읽으면서 다시 생각했고.


  산에 가서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슥 지나갔던 꽃들, 나무들, 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게 바로 시의 힘이다.


시인은 '우리들 하루하루 살아가는 무의미한 일상이 바로 시가 될 수는 없을까에 오랫도안 천착하다 보니, 시들 자체도 매일의 일상처럼 지리멸렬해지는 게 아닌가 걱정스럽기도 하다'(시인의 말에서)고 했지만 아니다. 시는 그렇게 우리가 의미를 찾지 않고 보냈던 수많은 일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많은 시들 가운데, 특별히 '숲 속 세 개의 길'을 인용한다.


  숲 속 세 개의 길


녹음이 우거진 우리 동네 아름다운 숲에 원래

자연스런 하나의 흙길이 있었네

키 작은 잡풀과 풀꽃들이 어우러진 푸른 숲 바닥에

오래도록 사람들이 지나다녀 또렷이 다져진

숲과 어우러진 수수하고 자연스런 흙길, 어느 날 구청 사람들이

그 흙길 위에 네모 반듯반듯한 시멘트 블록을 깔았네


깔끔하지만 어쩐지 어색하고 생경해 보이는 그 시멘트 블록 길

그 단정한 시멘트 길로만 얌전히 다녀

더 이상 숲속을 망치지 말라는 듯이 그러나

그 단정한 시멘트 길로는 아무도 다니지 않았네


사람들은 그 시멘트 길을 비웃듯 피해 다녀

그 시멘트 길 바로 옆

위로 아래로 두 개의 흙길이 새로 더 생겼네


숲을 보호한답시고 깐 시멘트 블록 길 때문에

두 개의 새로운 흙길이 더 생겼다네


이런 것이 바로 현실 인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공무원들의 탁상공론이라는 것이겠지


양정자, 꽃들의 전략. 천년의 시작. 2018년.  64-65쪽.


이런 일이 많지 않은가. 가로수 정비라는 명목으로 싹둑싹둑 잘라버려, 가지치기가 아니라 몸통치기가 되어버려 나무들이 그냥 일자로 무슨 전봇대 마냥 서 있는 도시의 나무들.


길 양 옆으로 울창하게 가지를 뻗어 터널을 만들어주는 나무들을 정비한다고 가지를 뭉텅잘라내어 터널을 없애버리는 나무 가지치기.


아파트 건물을 보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가지를 잘라내 흉물스럽게 변한 나무들. 


그럼에도 나무들은 다시 가지를 내고, 잎을 낸다.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등산로를 정비한답시고, 등산로에 시멘트를 깔아놓으면 그 길보다는 그 길 옆으로, 흙을 밟으며 가곤 한다. 그래서 길이 더 넓어진다.


자연을 찾는 사람들은 자연과 함께 있고 싶어하지, 인공과 함께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렇게 시인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세상에 별것 아닌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이렇듯 양정자 시인의 시집을 읽으면 일상에서 시를 발견하는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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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지영의 섬진 산책
공지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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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공지영. 이름이 꽤 알려진 사람. 소설로도 그렇고, 사회 참여글로도 그렇고, 다른 이유로도 그런 사람. 젊은 시절에 공지영 작품을 몇 권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리고 공지영이 쓴 '수도원 기행'을 읽는 적도 있고. 최근에는 '의자놀이'를 마지막으로 공지영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글을 참 잘 쓴다고 느꼈는데, 그런 공지영이 섬진강변에 자리를 잡고 산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섬진강도 좋고, 지리산도 좋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사람.


참 한적하고 여유로운 유유자적하는, 그야말로 자연친화적인, 물아일체의 경지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 책은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거부하게 만든다. 처음에 이런 말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죽어도 될 이유를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삶의 굴곡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가 있을까 싶다.이 문장 하나로 공지영이라는 사람이 다사다난했던 삶을 살았구나 하고 느낄 수가 있다. 그러다가 '사람이다'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표현에 눈길이 머문다.


과거형이다. 과거형이라는 말은 현재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아니, 죽어야 할 이유는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이 책의 제목처럼) 살아야 할 이유를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은 '그래서'라는 말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어울리게 공지영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들의 고민을 통해서 드러내 보인다. 


공지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제 살아간다. 세상을. 주변이 바뀌지 않아도, 주변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에는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 자신의 현재에 집중한다.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간다가 된다. 자신의 삶에서 겪었던 수많은 고통들은 이제 삶의 무늬로 되살아난다. 그렇게 되기까지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겠지만 그 과정들을 거쳐 지금의 공지영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후배들의 고민에 덧붙여 이야기한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들을 겪었겠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어려움들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이제는 자신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지금-여기-나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려 한다. 우리는 자꾸 오지도 않을 미래를 걱정하고, 바꾸지 못할 과거 때문에 괴로워 하며 산다. 또 자신이 바꿀 수 없는 남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기도 한다. 현재를 살아가기에도 짧은 생인데...


그러니 '지금-여기-나 자신'을 늘 생각해야 한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 어려움이 있다고 그 어려움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그것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그러면 '그 또한 지나가게 되라라'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 바로 지금-여기에서. 무엇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 자신만큼 소중한 존재는 없으니. 그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바로 '지금-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세 명의 고민하는 후배들이 나온다. 우리가 일상에서 부딪치는 고민들이다. 그런 후배들의 고민에 대해 공지영은 자신이 살아온 길들을 보여주면서 그 고민에 대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우리들 삶을 성찰하도록 한다.


거창한 말이 아니라 바로 일상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마음을 열게 하고 있다. 그래서 '공지영의 섬진 산책'이라고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섬진 산책과 더불어 '마음 산책'을 하게 된다.


세상이 그래서가 아니라 세상이 어떻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점점 행복해지기로 했다"는 책 표지의 말마따나 우리 행복해야 한다. 그 행복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가끔 잊는 그것,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곁에 있다는 것.


이 책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된다. 자ㅡ, 내게 죽을 이유가 30가지도 더 가지고 있다고 여긴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살아야 할 이유가 30가지도 더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내 행복은 남이 줄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지금-여기'에서 가장 소중한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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