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門)은 여러 역할을 한다. 문이 지닌 아름다움을 논외로 하고, 문이 지닌 실용성을 따지면, 문은 열림과 닫힘이다. 연결이자 끊김이다.


  열어서 외부와 연결할 수 있게 하는 역할도 하지만, 닫아서 외부와의 연결을 끊는 역할도 한다.


  문은 그냥 문이지만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사람에게 다가오는 의미는 다르다. 그렇게 문은 관계를 맺게도 관계를 끊게도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문이 있어야 한다. 문이 없는 사람 관계는 없다. 다만 이 문이 잘 열리는 관계가 있고, 전혀 열리지 않는 관계가 있다.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문을 어떨 때 열고, 어떨 때 닫아야 하는지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들은 자신만의 문을 닫고 있을 뿐이다. 스스로 여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두드릴 때 열어주는 경우도 많다.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데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절이다.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은 관계를 맺고 싶어한다. 이러한 마음의 비대칭. 이 비대칭이 관계를 더욱 어렵게 한다.


온몸을 던져도 안 열리고, 다른 것들을 보내도 안 열리고,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기도 힘들고... 참 사람들끼리 맺는 관계는 힘들다.


어쩌면 시를 읽는 것도 이렇게 문을 여는 행위인지도 모르겠다. 시라는 문을 두드리는 일. 시가 문을 열어줄 때도 있고, 아예 안 열어줄 때도 있는데...


박소란 시집을 읽으며 많은 시들에서 문이 나오는데, 그 문이 이상하게도 닫혀 있단 생각이 들었따. 시집 제목이 된 시 '감상'에 나오는 구절인 '한 사람의 닫힌 문'이라는 구절이 강하게 다가와서 그런지 몰라도.


        감상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돌진하였네 내 너머의 빛을 향해

나는 조용히 나동그라지고


한 사람이 내 쪽으로 비질을 하였네 아무렇게나 구겨진 과자봉지처럼

내 모두가 쏠려갈 것 같았네

그러나 어디로도 나는 가지 못했네


골목에는 금세 굳고 짙은 어스름이 내려앉아


리코더를 부는 한 사람이 있었네

가파른 계단에 앉아 그 소리를 오래 들었네

뜻 없는 선율이 푸수수 귓가에 공연한 파문을 일으킬 때


슬픔이 왔네

실수라는 듯 얼굴을 붉히며

가만히 곁을 파고들었네 새하얀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잠시 울기도 하였네


슬픔은 되돌아가지 않았네


얼마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나는, 그 시무룩한 얼굴을 데리고서

한 사람의 닫힌 문을 쾅쾅 두드렸네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2019년. 64-65쪽.


과연 그 문이 열렸을까? 이상하게 시에서 한 사람과 나는 자꾸 빗나간다. 한 사람이 내게 몸을 던졌을 때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하다. 우리는 나를 온전히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과연 진정 '나'를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나라고 착각되는 그 무엇을 사랑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또 그 사람에게 나를 온전히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나는 그대로 나인채로 있다. 마치 한 사람의 비질에 쓸려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듯이.


나를 움직이는 것은 이러한 움직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한 사람을 향해 다가갔을 때 그는 문을 닫고 있다. 나 역시 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의 문을 열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


도대체 무언가를? 어떻게 해야 문이 열릴까? 답은 없다. 다만, 그 사람과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무엇을 찾아야 한다. 그 무엇을 함께 할 수 있을 때 문이 열린다.


하지만 그 함께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어떻게 찾을까? 여기서 질문은 제자리로 온다. 우리는 그렇게 미로 속에 들어간 것처럼 문을 열기 위해 헤매게 된다.  


그렇지만 문이 있으면 열림의 가능성은 늘 있다. 그 가능성을 향해 가는 것, 그것은 우리가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다시 문을 두드린다. 열리지 않더라도 두드리는 행위 자체에서 이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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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SF 걸작선
브루스 스털링 외 지음, 데이비드 G. 하트웰 외 엮음, 정혜정 외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4월
평점 :
절판


SF. 공상과학소설이라고 하는데, 단지 공상이 아니다. 상상이다. 과학적으로 상상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 SF소설이라고 해서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오히려 상상을 통해 현실을 이야기한다.

 

특히 2004년에 나온 이 소설집을 읽다보면 우리가 '알파고'에 대한 당혹감을 느꼈던 것이 무안하기까지 하다. 이미 소설에서는 알파고 이후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작품들이 실렸는데, 오래 전 소설이라는 생각보다는 지금 우리가 맞닥뜨릴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한편 흥미진진한 작품들이었는데, 우주를 개척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개척한 우주가 황폐하게 된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거나, 우주인들과 지구인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거나, 또 다른 동물 종족들과도 대화하면서 살아가는 모습도 표현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상상을 통해서 지금 우리 현실, 또는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 보게 하는데, 그 중에서 어슐러 르귄의 '안사락 족의 계절'이란 작품은 성장, 개발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읽힐 필요가 있단 생각이 든다.

 

"그들은 다른 행성의 다른 종족들이 어떻게 사는지 말해 주고 보여 주었습니다. ... 우리가 선박이나 도로, 자동차 또는 비행기를 만들 줄 알고, 그래서 원하기만 하면 일년에 수백 번이라도 남북을 오갈 방법이 있는데, 걸어 다니느라고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일임을 알았습니다. 북쪽에 도시를 건설하고 남쪽에 농장을 만들면 된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222쪽) 

 

이렇게 다른 문명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가려고 하던 종족이 어느 순간, 자신들이 이렇게 다른 문명을 무작정 따라가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 그리고 그런 삶의 방식이 자신들에게 맞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은 다른 문명의 방식을 거부한다.

 

"고속도로를 건설하던 남자들은 도구를 내던지고 베이데락족이 제공한 거대한 기계들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길이 1,000개나 나 있는데 고속도로가 왜 필요하지?' 그러고 나서 그들은 오래된 산길과 오솔길을 따라 남쪽으로 출발했습니다." (224쪽)

 

문명을 대표한다는 족속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온 방식을 유지하는 것. 성장과 개발을 우선시 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소설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아주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으니, 한편 한편 읽으면서 지금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현실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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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수경의 이 시집 제목을 보다 요즘 언론에서 들리는 막말이 떠올랐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 아니라, 빌어먹을 쓸모없는 말들, 아니 해로운 말들, 해서는 안될 말들.


  빌어먹을, 빌어먹을, 제길, 제길. 그렇게 문장이 아니라 단어들이 나를 습격한다. 쓰레기, 중증 치매환자. 세상 안 좋은 말들이 방송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다.


  그것도 시민들을 대표한다는, 또는 대표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하는 말이 겨우 이 정도다.


  말들이 고생이 많다. 그 사람들 입에서 나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고, 그들 마음에 상처를 주는지. 


허수경 시인은 '문장의 방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직 아무도 방문해보지 않은 문장의 방문을 문득 / 받는 시인은 얼마나 외로운가' (허수경, '문장의 방문' 중 1-2행)


새로운 문장의 방문을 받은 시인은 그 문장을 써야 한다. 문장, 단어들의 방문은 시인을 통해 우리들에게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장이나 단어는 낯설다. 쉽게 인정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시인은 그 문장을, 그 단어를 써야만 한다. 얼마나 외로울 것인가?


반대로 정치인들은 남들이 쓰지 않아야 할 말들을 쓴다. 그들이 쓰는 문장은 남들에게 인정받지 못한 그런 말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천연덕스럽게 쓴다. 외로움이란 걸 천성적으로 모르는 족속들이다.


말들이 지닌 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들이 지닌 힘을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쓴다. 그러니 그들은 외로움을 느낄 틈이 없다. 문장이나 단어는 오로지 수단일 뿐이지.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수단. 무기. 그렇다. 그들의 말에는 외로움이 아니라 피가 묻어 있다. 오로지 살벌함과 역겨움만을 담고 있다.


시인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 그들은 문장의 방문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단어, 문장들을 일부러 방문해 데려 온다. 그리고 그들을 맘껏 사용한다. 그러니, 다시 허수경 시인의 시이자 시집 제목이 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이름 없는 섬들에 살던 많은 짐승들이 죽어가는 세월이에요


이름 없는 것들이지요?


말을 못 알아들으니 죽여도 좋다고 말하던

어느 백인 장교의 명령 같지 않나요

이름 없는 세월을 나는 이렇게 정의해요


아님, 말 못하는 것들이라 영혼이 없다고 말하던

근대 입구의 세월 속에

당신, 아직도 울고 있나요?


오늘도 콜레라가 창궐하는 도읍을 지나

신시(新市)를 짓는 장군들을 보았어요

나는 그 장군들이 이 지상에 올 때 신시의 해안에 살던

도룡뇽 새끼가 저문 눈을 껌벅거리며

달의 운석처럼 낯선 시간처럼

날 바라보는 것을 보았어요


그때면 나는 당신이 바라보던 달걀 프라이였어요

내가 태어나 당신이 죽고

죽은 당신의 단백질과 기름으로

말하는 짐승인 내가 자라는 거지요


이거 긴 세기의 이야기지요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의 이야기지요 


허수경,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문학과지성사. 2005년. 126-127쪽


막말은 이렇게 다른 존재를 말살한다.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니, 그를 동등한 존재로 받아들이지 않으니, 무조건 배척할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긴 세기를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말뿐이 아니라 이제는 행동으로, 그렇게. 하지만 차가운 심장은 멈출 수밖에 없다. 지속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뜨거운 심장이 필요하다. 시인이 '시인의 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심장은 뛰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가장 뜨거운 성기가 된다. 그곳에서 가장 아픈 아이들이 태어난다. 그런데 그 심장이 차가워질 때 아이들은 어디로 가서 태어날 별을 찾을까'라고.


아이들만이 아니라 차가운 심장은 이미 태어난 사람도 죽게 만든다. 그들을 어루만져줄 문장은, 단어는 오지 않고 오로지 비수가 될 문장, 말들만 온다. 그러니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자, 이제 다시 심장을 뜨겁게 하자.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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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방구석 미술관 2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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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요즘 시대에 딱 맞는다. 코로나19로 대면이 줄고, 비대면이 는 시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하고, 만나도 가급적 대화를 하지 않는. 5인 이상 모임이 계속 금지되고 있는 그런 시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감염병을 차단하는 가장 빠른 길은 만남을 막는 것. 그러나 언제까지 만남을 막을 수는 없다. 만남이 없는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죽하면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을 써가며 홀로 지내는 사람들을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겠는가. 그렇게 인간은 만나면서 관계를 맺어가야 하는데, 질병으로 인해 그것이 힘들어지고 있으니, 사람들이 지니게 되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만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때 방구석에서,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미술을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니, 바로 이런 책을 읽는 것이다. 이 책에는 또 큐알코드도 수록되어 있어, 스마트폰으로 큐알 코드를 찍으면 미술작품들을 감상할 수도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다.


또한 미술하면 서양미술을 떠올리는데, 이 책은 그 점을 넘어서 우리나라 미술을 소개하고 있다. 그간 우리가 소홀히 다루었던 한국미술. 한국미술가들을 소개해 주고 있다. 그 작가가 지닌 특성을 하나 뽑고,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그래서 작품을 통해 그 작가들의 개성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총 10명의 작가를 소개하고 있는데, 이중섭, 나혜석, 이응노, 유영국, 장욱진, 김환기, 박수근, 천경자, 백남준, 이우환이 바로 그들이다.


제목을 보면 그 작가가 지닌 특성을 알게 해주는데, 제목에서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 호기심을 충족신키는 방향으로 책을 서술하고 있다. 


'소'를 그린 화가로 유명한 이중섭의 경우, 이렇게 제목을 달았다. '사실 그에겐 두 개의 사랑이 있었다?'


이런 제목을 보면 읽기 전에 추측을 한다. 두 개의 사랑이라? 하나는 분명 소일텐테, 그럼 하나는? 하면서. 읽어가면 답을 찾을 수 있다. 그 답이 나오기까지 화가에 대한, 그림에 대한 설명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혜석의 경우는 '인생의 황금기에 미스터리한 <자화상을 남겼다고?'>다. 나혜석이 그린 자화상이 어딘가 어두워보이는데, 그가 파리를 비롯한 세계여행을 할 때 그렸다는 자화상이 왜 이렇게 어두운 면을 보여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최초하는 수식어를 많이 달고 있는, 시대를 앞서 태어났다고 할 수 있는 나혜석의 삶에 대해서 알아가면 그 그림이 그렇게 표현된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듯 워낙 유명해서 알고 있는 작가도 있지만, 처음 들어보는 작가도 있다. 그 중 유영국 같은 경우는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사람이라고. 그가 이중섭과도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고. 이우환 역시 이름을 들어봤으나, 그의 작품은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만나게 되어 반갑기도 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을 보게 되는 즐거움도 좋고 작가들을 알아가는 재미도 있는 책인데, 방구석 미술관이라는 말답게 어느 한 작가에 그치지 않고 여러 작가들을 소개해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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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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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소설은 재미있다. 우선 잘 읽힌다. 그리고 결말을 쉽게 예상할 수 없다. 그러니 끝까지 읽어야 한다. 끝까지 읽고도 곰곰 생각하게 만든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주요 등장인물은 셋이다.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남자, 여자, 아주머니다. 구체성을 부여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이름과 상관없이 구체성이 살아난다. 읽어가면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또는 우리가 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목이 '그믐'이다. 생소하다. 그믐이라니..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달. 그런 그믐을 제목으로 달고, 작게 다른 제목이 달려 있다.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작가는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믐이라 그래. 그믐달은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거든. 그래서 쉽게 볼 수 없지.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어." (140쪽)


그렇다면 우리가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그믐과 비슷하다는 얘기인데... 내가 세상을 기억하는 방식이 아주 조금 확실할 뿐, 나머지는 다른 것에 가려져 불확실하다는 것. 사실 우리의 기억은 정확하지 않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억은 왜곡된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억도 조작된다고 하는데...


한 사건을 두고도 서로 다르게 기억할 수 있다. 이런 다른 기억들이 만나도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기 어렵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아주머니의 아들을 죽였다. 소위 말하는 학교 폭력이다. 학교 폭력하면 패턴이 나타난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


학교 폭력을 바라보는 사람에 의해 학교 폭력은 일정한 패턴으로 그려진다. 가해자의 폭력에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었다거나, 가해자의 폭력에 참다참다 그에게 폭력을 휘둘렀다거나, 그렇게.


그 패턴이 진실인 양 사람들 사이에 퍼지게 되고, 진실이 무엇인지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자신의 생각을 강화시키는 쪽으로 다른 것들을 만들어 간다. 기억조차도.


가해자, 피해자를 명확하게 나눌 수 있을까? 소설은 가해자인 남자가 피해자였음을 보여주는 쪽으로 가고, 피해자의 엄마인 아주머니가 가해자 역할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까지는 단순한 진행이다. 그야말로 패턴이다. 패턴의 양 축이 있으면 중간이 있어야 한다. 그 중간에 여자가 나온다.


남자를 사랑하는, 아니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인 여자. 하여 이 소설은 각 장마다 세 개의 낱말들이 병치되어 나타난다. 남자-여자-아주머니를 연상할 수 있다.


여기에 신비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우주의 알'이란 것을 도입해, 남자는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남자. 그는 선택해야 한다. 미래를 알고 있기에 어떻게 미래를 맞이할 것인가를.


소설의 끝부분에 가면 반전이 있다. 그냥 중간에서 피해자로만 살아왔던, 다른 이름을 가진 동창들을 질투하고 부러워했던 여자가 다른 면에서는 가해자였음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남자와 아주머니도 이제는 누가 가해자이고 누가 피해자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그렇게 우리 삶이 명확하게 구분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가해자와 피해자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얽히고 설켜 있다. 이렇게 얽히고 설켜 있는 것에서도 명확한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에는 거짓이 섞여 들어가지 않는다.


소설은 학교 폭력에 또 지은 죄에 대한 처벌은 어디까지인가? 그 죄는 과연 씻길 수 있는가? 피해자에게 가해진 피해가 과연 아물 수 있는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학교 폭력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과 관계 맺으며 했던 말과 행동들이 과연 자신의 기억과 맞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부분을 전체로 여기면서 지내왔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자신의 기억 속에 갇혀 다른 면을 보지 못하고, 결국 그믐처럼 해가 묻혀 제대로 보이지 않게 만들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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