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들 - 존 버거의 예술가론
존 버거 지음, 톰 오버턴 엮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읽으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는 글들이 많다. 마음에 새겨둘 만한 구절도 많고. 존 버거. 뒤늦게 안 사람이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낀다. 틈나는 대로 버거가 쓴 책이 번역된 번역본을 구하거나 빌려서 읽고 있는 중인데...


이 책 [초상들]은 방대한 책이다. 버거의 글들을 관련있는 내용들로 모아 엮어놓은 책이다. 그러니 다른 책에 나온 글들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예술가들을 태어난 순서대로 실었기 때문에, 예술가로 본 미술사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다만, 버거의 예술관이 짙게 들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고.


가령 이런 구절, '파이윰 초상화 화가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글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었고, 이름이 주어졌다는 건 그 연속성에 대한 보장이었다.' (39쪽)


이런 말... 김춘수의 꽃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렇게 고대의 화가들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 아니 자신들의 초상을 그림으로 남기는 행위는 바로 연속성에 대한 보장을 받기 위한 행위였다는 사실. 이런 저런 사실을 떠나서 예술은 우리 인간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란 글에서


'예술가에게 진실이란 가변적인 것으로, 그것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바라보기의 어떤 특정한 방식이다. 예술가에게는 자신의 결정 이외에는 등을 기댈 곳이 없다.' (42쪽)


예술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그것을 작품으로 남겼다. 그에게는 등을 기댈 곳이 자신의 작품활동 말고는 없다고 해야 한다.고독한 존재, 그러나 늘 진실을 갈구하는 존재. 그것이 예술가이고, 그런 예술가들에게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가의 예술 행위 자체가 이미 자신이 진실을 바라보는 방식을 표현한 것이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술가들 뒤에 있는 그 무엇을 찾으려는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버거의 글쓰기는 다방면을 아우른다. 철학도, 시도, 소설도 모두 그림과 관련이 된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미술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쓴다. 


따라서 어떤 화가에 대한 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책의 뒤로 갈수록 최근 작가들이 나오는데, 그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 실렸던 글들을 찾아 수록했기 때문에 그 화가의 작품 사진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엮은이가 그 미술가들의 작품을 찾아서 한 편 이상 실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또한 이 책에는 작품들이 모두 흑백으로 실려 있다. 흑백이 지닌 고유한 특성이 있기도 하겠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흑백으로 작품을 실었기 때문에 오히려 버거의 글에 더 집중하게 되지 않아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에서는 이 한 편으로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이 한 편이 읽는 내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바로 '대 피터르 브뤼헐'에 대한 글이다. 그의 그림에서 무관심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서 글을 쓴다. 마치 니묄러 목사의 시를 연상하게 하는 글. 또 이 글에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나오니... 이 놈의 무관심.


  '그림을 한 점 한 점 그릴 때마다 그는, 제대로 제기될 거라고 본인도 확신할 수 없었던 어떤 고발을 위한 증거를 수집했다.

  그가 고발하고 싶었던 것은 무관심이다. 추락하는 이카로스를 보면서 쟁기질만 하고 있었던 농민들의 무관심, 입을 벌리고 십자가형 앞에서 구경만 하는 농민들의 무관심, 간청하는 플랑드르 사람들 앞에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는 스페인 병사 (그들은 명령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들의 무관심, 역시 눈먼 자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말을 들은 다른 눈먼 자들의 무관심, 아까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데 그저 놀이에만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 죽음에 대한 신의 무관심.' (81쪽)


브뤼헐의 그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버거가 이야기하는 것을 읽고는 아, 그럴 수도 있구나!, 이것이 바로 니묄러가 쓴 시에서 나온 구절대로 아무런 관심도 표명하지 않았던 모습과 같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무관심이 눈감아 준다는 말과 같음을, 그냥 몰랐다고 해서는 안 됨을 이 글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무관심이 많아질수록 불의는 더욱더 판치게 된다는 사실을...


'저항하지 않는 것이 곧 무관심이라는 점을, 잊어버리거나 모르고 있는 것 역시 무관심이라는 점을 이해시키려 했다. 무관심하다는 것은 눈감아 준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83쪽)


왜 예술을 감상하는가? 세상의 고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니다.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작가가 세상을 보고 표현한 작품을 보면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내 관점을 확립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품을 한 방향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모습, 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모습.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되어 있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찾는 노력을 예술 감상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좀더 진실되게 살아가기 위해서... 어쩌면 버거의 [초상들]이란 이 책은 예술가들의 초상을 통해서 바로 읽는 사람의 초상을 스스로 그려보라는 권유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연스럽다'는 말이 생각났다. 정일근 시집을 읽으며. 자연스럽다. 순리를 거스리지 않고 살아간다. 꾸미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렇게 자연스럽다라는 말에는 인간이 꾸며낸 것이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자연스럽다' 요즘 쓰기 힘든 말이다. 방송을 보면 사람들 모습이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소리를 듣는다. 있는 그대로 방송에 나와라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방송에 나오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할 정도로 고친, 꾸민,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다는 말을 들을 지경이다. 그러니 자연스럽다는 말도 뜻이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더니, 온갖 좋은 말들이 왜곡되어 사용되는 지금.


환경을 생각한다면서 녹색성장이라는 형용모순인 말을 자연스러운 말인 양 쓰는 이런 때에... 도대체 무엇이 자연스러울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가상화폐를 가지고 투기(투자라고 하기엔 좀 뭐하다)를 하는 지경에 이른 상황. 화폐는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 자기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이제 화폐는 물질이 아니라 온라인에 존재하는 가상의 존재를 넘어서, 그것들이 기존 물성을 지닌 화폐를 끌어모으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런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기후 위기, 기후 재앙이라고 하면서도, 내놓는 정책들이란 것이 도대체 어떻게 기후 위기를 막겠다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는 이때... 청소년들이 기후 위기를 해결하라고 시위를 해도, 너희는 아직 어려서 몰라 하고 무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그레타 툰베리는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정책입안자들은 있는 공항도 부족하다고 다른 공항을 더 짓겠다고 난리를 치니, 사람들을 많이 실어나르는 비행기는 기정사실이고, 그것들이 더 편리하게 이착륙할 수 있는 공항을 건설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인지...


발전에 대해서, 성장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면 시대를 역행하는 사람이니, 시대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니, 또는 과거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자니, 꼰대니 하는 소리를 하는 시대에, 그래, 자연은 그냥 인간이 무시해도 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코로나19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초래한 재앙임이 분명한데도, 그것을 또 기술로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도대체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가? 헷갈린다.


그래서 다시 정일근 시를 생각한다. 자고로 시인이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니 이 세상이 아니더라도 어떤 존재, 비존재에게도 민감한 마음을 투사하는 존재가 시인인데... 그런 시인이 종이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자연스럽다는 말이 어떠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다.


백지의 피


그 시인 출판 기념식장에서 구겨진 백지 묶음 주웠다

처녀시집 묶어온 자리에 덧댄 고급 종이였다

시가 난무하는 세상, 시 한 줄 몸에 받지 못한

백지, 나무에서 종이가 될 때까지의 빛났던

운문 정신이 꾸깃꾸깃 어둡게 구겨져 있었다

깊은 밤 그 백지 한 장 한 장 다려 펴며 물었다

백지가 휴지 되어 버려지는 시대에 나는 시인인가?

종이의 날 선 귀퉁이에 시들이 우수수 베이고

태어나지 않은 시의 깊은 곳에서 피가 스며 나온다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3쇄. 63쪽.


요즘 이런 말이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절대로 책을 훔쳐가지 않는다고... 교과서!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에 가보라. 교과서들을 어떻게 하는지... 아니 고등학교만이 아니다. 초·중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년말이 되면 교과서들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아예 업체를 불러 폐휴지로 분리수거를 하는 학교가 태반이니.. 종이를 우리는 이렇게 다룬다. 공부를 하는 학생조차도. 그래 학생들은, 특히 우리나라 학생들은 배움이 아니라 입시를 위한 공부밖에는 하지 못했기에, 그 지긋지긋한 교과서를, 원수같은 교과서를 버린다치지만... 시인은? 왜 시인은 출판 기념식을 하고, 자신의 시집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종이들을 그렇게 버리고 마는가? 그것이 자연스러운가? 아니다. 이것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워서는 안된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바로,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존재들을 소중하게 아끼는 마음이다. 그런 존재들로 인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조심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일근 시인의 시, '자연론'을 본다.


자연론


풀 한 포기 밟기 두려울 때가 온다


살아 있는 것의 목숨 하나하나 소중해지고


어제 무심히 꺾었던 꽃의 아픔


오늘 몸이 먼저 안다


스스로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시간 온다


그 죄에 마음 저미며 불안해지는 시간 온다


불안해하는 순간부터 사람도 자연이다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3쇄. 57쪽.


이래야 자연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 허랑방탕한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잃고 있는 이 '자연스럽다'는 말. '꺾었던 꽃의 아픔을 몸이 먼저 아는' 그런 사람이라면 어찌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우리, 이렇게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자연스러운 체하는 삶이 아니라.


정일근 시집을 읽으며 '자연스럽다'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와 함께 고전영화 읽기 - 내 아이 감성 영재로 키우는 영화 이야기
조수진 지음 / 호밀밭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 영화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감독 가운데서 세계적인 감독이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여럿 있고, 배우 중에서도 세계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그만큼 우리나라 영화가 세계에 많이 알려졌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미나리'라는 영화로, 감독이 한국계이고, 우리나라 배우들이 참여했고, 윤여정 씨가 조연으로 세계에서 수많은 상을 받고 있으니, 가히 한국영화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영화는 아직은 학생들에게 그리 권장되지 않는다. 내 학창시절, 학교에서 소설을 읽으면 공부 안 하고 쓸데없는 짓 한다고 야단을 맞았다. 야단 맞는 정도가 아니라 책은 압수 당하고, 지금은 거의(?-완전히라고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사라진 체벌까지도 당해야 했는데, 아마 지금 학생들 중 대다수는 영화를 본다고 하면 공부 안 하고 이상한 짓 한다고 야단맞지 않을까 한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공부 하면 대학입시로 수렴된다. 모든 공부는 대학으로, 대학 입학과 관련 없는 공부는 - 사실 대학 입학과 관련 없는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수시'라는 제도는 각자 능력있는 학생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만든 제도 아니겠는가. 다만, 이것이 또 변질돼서 문제지 - 이상한 짓, 딴 짓, 공부에 방해가 되는 짓으로 치부된다.


아직도... 참... 그러니 세계적인 감독이 나와도, 세계적인 배우가 나와도, 여전히 우리는 '헐리우드 키드'를 벗어나지 못하게 미국 헐리우드 중심의 영화를 주로 접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영화가 전부가 아님에도, 다른 영화를 만날 기회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학창시절에는.


그래서 이 책은 참 반갑다. 엄마가 아이와 함께 고전영화를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내용. 실제로 그렇게 한 결과를 가지고 책을 냈다고 하니, 공부라는 개념이 대학 입시를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서 너무도 반갑다.


또한 이 책은 요즘 영화도 이야기하고, 또 함께 보기도 하지만, 기초부터 시작해서 좋다. 고전영화, 물론 고전영화라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고, 꼭 고전영화부터 봐야 할 이유도 없지만, 그럼에도 요즘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 고전영화를 보면서 영화의 역사, 영화의 기법, 영화 감독, 영화 음악 등등을 이야기하고 있어서 좋다.


영화를 본다고 표현하지 않고 읽는다고 표현한 것 역시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다. 기초가 탄탄하면 어떤 영화를 보더라도 더 깊고 넓게 감상할 수 있다. 본다는 말과 읽는다는 말이 합쳐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기초를 제공해주고 있는 것이 이 책이다. 영화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또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감독과 영화는 무엇인지, 우리나라 예전 영화는 어땠는지 등등을 엄마와 아들이 함께 보본 결과, 또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한 결과를 책으로 엮어냈으니, 우리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고전영화의 세계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고전영화 읽기라는 제목에 걸맞게 헐리우드에 편중되지 않아 좋다. 세계 여러나라의 영화를 골고루 다뤄주고 있다. 그만큼 영화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좋은 책이다.


너무 어렵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가볍지도 않아서 청소년들이 읽기에 좋다. 영화에 관심 있는 청소년이라면 자신이 그동안 영화에 대해 생각하고 공부했던 것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을 것이고, 고전영화라면 고리타분하고 따분한 옛날, 그것도 지금은 보지 않아도 될 잊어야 할 영화라고 생각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는 그렇지 않음을, 고전영화를 통해서 재미도 느낄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영화를 더 흥미롭게 볼 수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문학과 마찬가지로 영화 역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폭을 확장해주는 역할을 하니, 이 책을 통해 많은 영화를 만나고, 또 자신의 경험도 넓혀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덧글


읽다보니, 우리나라 영화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년도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있을 수 없는 년도가 나와 버려서... 이 부분은 수정해야 할 듯하다.


71쪽. 우리나라 영화 전래 시기는 대략 1897년에서 1903년으로 본다. 1897년 소설가이며 영화감독인 심훈이 신문에 글을 쓴 것과... 로 되어 있는데... 소설가이자 영화감독인 심훈이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상록수]를 쓴 심훈일테고, 그는 1901년에 태어나서 1936년에 세상을 떴으니, 그런 심훈이 1897년에 신문에 글을 쓸 수가 없다. 이 부분은 알 수가 없으니, 찾아서 수정을 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상이 멀어진 생활이 한 해가 지났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이 기존에 해왔던 일상을 잃어버리고 있다. 자신이 생활 습관이 깨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야 하나.


  단순히 생활습관만 깨진 것이 아니라 생존에도 위협을 받고 있다. 감염병이라는 것이 우리의 권리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제한하고,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온갖 곳에서는 개인정보보호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에 동의합니다를 요구하면서도, 음식점이나 기타 다른 곳에 들어갈 때는 동의합니다 없이 그냥 개인정보를 적거나 큐알코드를 찍어야 한다.


핸드폰이 없는 사람은 아예 들어갈 수도 없는 상태니, 그런 장소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모두 핸드폰을 지니고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펼치는 정책이 과연 올바른 정책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그냥 실행을 한다. 여기에 핸드폰을 잘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이것은 문제가 되는 정책이다.


그런데도 그냥 실행이 된다. 코로나19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강력하게 우리의 생활을 통제하고 있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이런 일과 연결을 하면 안 되겠지만, 삶창 125호에 실린 이번 글 중에 소설 '어둠의 공간'이 머리 속에 남았다.


축산농가에서 일하는 사람. 공장식 축산으로, 오로지 사람들의 먹을거리로 제공되기 위해 키워지는 돼지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운데 외국인노동자들이 있다. 또 우리나라 사람 중에서도 갈 곳이 없어 그곳을 노동의 장소로 삼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들 삶에 가장 중요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농장이, 가장 비인간적인, 그곳에서 노동하는 사람들의 삶의 질을 보장해주지 않는 모습이 너무도 잘 드러나는 소설인데...


그럼에도 벗어나지 못하고 적응할 수밖에 없는 외국인노동자의 모습. 여전히 그러한가? 이런 의문이 들지만, 여전히 그러하다는 답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


길을 가다 보니, 대규모 단지를 건설하고 있는 대기업 건설현장에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체불임금 지급하라는 플래카드. 아직도 공사중인 그곳, 대기업이 주도하는 공사현장임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잘 알려지지 않은 축산농가에서야 어떻겠는가.


그러니 제목이 '어둠의 공간'이다. 캄캄하다. 이 캄캄함 속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는 돈을 벌어 자기 나라로 돌아갈 꿈을 버리지 않는다. 아니, 이 어둠의 공간에 남아야 하는 자신을 그렇게라도 다독이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


이 소설의 외국인노동자만이 아니다. 우리 역시 지금 코로나19라는 감염병 때문에 어둠의 공간에 있다.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데, 우리는 어떤 꿈을 지니고 있을까? 적어도 예전과는 다른,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고, 그것을 정책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우리 인간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지구, 우주 차원의 공동체가 공생할 수 있는 그런 삶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어려운 시대에 더 고통받는 사람들은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의 삶이 개선될 때 우리에게 희망의 빛이 어둠의 공간을 밝혀주게 될 거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적어도 삶창을 읽으면서도 그러한 희망의 빛을 보게 되니, 그것으로라도 위안을 삼아야 하는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라비니아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준영 옮김 / 황금가지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르귄의 소설을 읽기 전에 기대를 한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일로부터 어떻게 소설을 쓸까? 소설 속에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까? 그리고 르귄은 내가 지니고 있는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 몇몇 작품을 읽은 결과, 르귄에 무한한 신뢰를 보낼 수 있게 됐다.

 

베르길리우스, 단테의 신곡에서 단체를 지옥과 연옥으로 이끈 길잡이 역할을 하는 시인. 그가 쓴 [아이네이스]는 로마 건국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다. 트로이 멸망 후 이탈리아로 건너와 그 후손이 로마의 왕이 된다는 이야기.

 

아마도 로마의 정통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끌어온 신화겠지만, 비너스의 아들인 아이네아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해 라비니아와 결혼하고, 그 자손들이 로마를 다스리게 된다.

 

그런데 [아이네이스]에서 라비니아는 결정권이 없는, 그저 남자들의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에 불과하다. 라비니아를 차지하기 위한 남자들의 전쟁. 그리고 승자가 라비니아와 결혼을 한다. 이게 끝? 그러면 도대체 여성은 무엇인가?

 

호전적인 남성들이 차지하는 전리품인가? 하긴 [일리아드]에서 아킬레스가 그리스군에서 이탈한 것도 전리품(?)인 여자 문제였으니, 그들 세계에서 여자란 값비싼 거래 물품에 불과했을 뿐. 특히 트로이 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헬레네를 보라. 살아 있는 인물이라기보다는 그냥 전쟁의 구실을 위해 필요한 존재에 불과하다.

 

이렇게 영웅 서사시의 여성들은 자신의 의사를 지니고, 남자들과 동등하게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존재가 아니라, 남자들에 딸린 부속품이었을 터.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영웅서사시에서 여성들은 부속품으로, 무언가 자신의 일을 하더라도, 카르타고의 디도처럼 조연에 불과하다.

 

디도라는 카르타고의 여왕도 조연에 불과했는데, 로마에 정착해서 왕이 되는 아이네아스에게 라비니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정착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공하고, 아이네아스가 성공했을 때 그에게 주어지는 전리품에 불과하다.

 

그런 라비니아가 르귄에게서는 주도적인 인물로 되살아난다. 주연으로 등장한다. 그렇다. 르귄은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에서 발언권도 없던 라비니아를 살아 있는 인물로 창조한다. 베르길리우스가 남겨놓은 틈을 르귄은 라비니아로 하여금 채워넣게 한다.

 

그냥 빈 틈을 채워넣는 것이 아니라, 라비니아로 하여금 새로운 신화를 쓰게 한다. 여성도 당당하게 역사의 한 축이 됨을, 자신의 인생을 남에게만 맡기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제 인생을 개척해나감을 라비니아를 통해 보여준다.

 

그래서 [라비니아]는 베르길리우스가 쓴 [아이네이스]에 헌정한 소설이자, 그것을 더욱 확장하고 발전시킨 소설이다. 베르길리우스가 미처 말하지 못한 부분을, 라비니아를 통해서 말하게 하고 있으니...

 

조연으로 묻혀 있던 인물이 당당하게 주연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서 볼 수 있다. 그레서 전쟁을 통해서 파괴되는 면을,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모습만을 보게 되지 않고, 그 과정에서도 탄생하고, 창조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게 된다. 바로 라비니아가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운명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이라도 자신이 당당하게 받아들이고, 행하려고 하는 모습. 그렇다. 결과는 바꾸지 못할지라도 그 과정은 충분히 중요하다. 과정에서 주인공이 되느냐,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하는 수동적인 조연이 되느냐는 큰 차이이기 때문이다.

 

하여 이 소설은 [아이네이스]에서는 아주 조금밖에 언급되지 않는 인물인 라티움의 왕녀인 라비니아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녀의 시각에서 아이네아스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왜 로마제국이 세계 제국으로, 다양성을 포용하는 제국으로 나아가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먼저 살았던 위대한 작가가 펴낸 훌륭한 작품을 이어서 쓴다는 것. 그 작품을 계승해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훌륭한 작품이 될 수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르귄이 잘 보여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