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스럽다'는 말이 생각났다. 정일근 시집을 읽으며. 자연스럽다. 순리를 거스리지 않고 살아간다. 꾸미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렇게 자연스럽다라는 말에는 인간이 꾸며낸 것이 없다는 뜻으로 들린다.


  '자연스럽다' 요즘 쓰기 힘든 말이다. 방송을 보면 사람들 모습이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소리를 듣는다. 있는 그대로 방송에 나와라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방송에 나오면 예의에 어긋난다고 할 정도로 고친, 꾸민, 그런 모습이 자연스럽다는 말을 들을 지경이다. 그러니 자연스럽다는 말도 뜻이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하더니, 온갖 좋은 말들이 왜곡되어 사용되는 지금.


환경을 생각한다면서 녹색성장이라는 형용모순인 말을 자연스러운 말인 양 쓰는 이런 때에... 도대체 무엇이 자연스러울까 하는 생각을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이제는 가상화폐를 가지고 투기(투자라고 하기엔 좀 뭐하다)를 하는 지경에 이른 상황. 화폐는 목숨을 건 비약을 통해 자기 자리를 잡았다고 하는데, 이제 화폐는 물질이 아니라 온라인에 존재하는 가상의 존재를 넘어서, 그것들이 기존 물성을 지닌 화폐를 끌어모으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으니...


이런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기후 위기, 기후 재앙이라고 하면서도, 내놓는 정책들이란 것이 도대체 어떻게 기후 위기를 막겠다는 것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는 이때... 청소년들이 기후 위기를 해결하라고 시위를 해도, 너희는 아직 어려서 몰라 하고 무시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그레타 툰베리는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정책입안자들은 있는 공항도 부족하다고 다른 공항을 더 짓겠다고 난리를 치니, 사람들을 많이 실어나르는 비행기는 기정사실이고, 그것들이 더 편리하게 이착륙할 수 있는 공항을 건설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것인지...


발전에 대해서, 성장에 대해서 무어라 말하면 시대를 역행하는 사람이니, 시대를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니, 또는 과거에 사로잡힌 근본주의자니, 꼰대니 하는 소리를 하는 시대에, 그래, 자연은 그냥 인간이 무시해도 되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코로나19가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초래한 재앙임이 분명한데도, 그것을 또 기술로 이겨내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인지... 도대체 무엇이 자연스러운 것인가? 헷갈린다.


그래서 다시 정일근 시를 생각한다. 자고로 시인이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아니 이 세상이 아니더라도 어떤 존재, 비존재에게도 민감한 마음을 투사하는 존재가 시인인데... 그런 시인이 종이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자연스럽다는 말이 어떠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다.


백지의 피


그 시인 출판 기념식장에서 구겨진 백지 묶음 주웠다

처녀시집 묶어온 자리에 덧댄 고급 종이였다

시가 난무하는 세상, 시 한 줄 몸에 받지 못한

백지, 나무에서 종이가 될 때까지의 빛났던

운문 정신이 꾸깃꾸깃 어둡게 구겨져 있었다

깊은 밤 그 백지 한 장 한 장 다려 펴며 물었다

백지가 휴지 되어 버려지는 시대에 나는 시인인가?

종이의 날 선 귀퉁이에 시들이 우수수 베이고

태어나지 않은 시의 깊은 곳에서 피가 스며 나온다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3쇄. 63쪽.


요즘 이런 말이 있다. 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절대로 책을 훔쳐가지 않는다고... 교과서! 수능이 끝난 고등학교에 가보라. 교과서들을 어떻게 하는지... 아니 고등학교만이 아니다. 초·중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년말이 되면 교과서들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아예 업체를 불러 폐휴지로 분리수거를 하는 학교가 태반이니.. 종이를 우리는 이렇게 다룬다. 공부를 하는 학생조차도. 그래 학생들은, 특히 우리나라 학생들은 배움이 아니라 입시를 위한 공부밖에는 하지 못했기에, 그 지긋지긋한 교과서를, 원수같은 교과서를 버린다치지만... 시인은? 왜 시인은 출판 기념식을 하고, 자신의 시집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종이들을 그렇게 버리고 마는가? 그것이 자연스러운가? 아니다. 이것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다. 이런 모습이 자연스러워서는 안된다.


자연스럽다는 것은 바로, 보이든 보이지 않든 모든 존재들을 소중하게 아끼는 마음이다. 그런 존재들로 인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조심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정일근 시인의 시, '자연론'을 본다.


자연론


풀 한 포기 밟기 두려울 때가 온다


살아 있는 것의 목숨 하나하나 소중해지고


어제 무심히 꺾었던 꽃의 아픔


오늘 몸이 먼저 안다


스스로 그것이 죄인 것을 아는 시간 온다


그 죄에 마음 저미며 불안해지는 시간 온다


불안해하는 순간부터 사람도 자연이다


정일근,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3쇄. 57쪽.


이래야 자연스럽다는 말을 할 수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 허랑방탕한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잃고 있는 이 '자연스럽다'는 말. '꺾었던 꽃의 아픔을 몸이 먼저 아는' 그런 사람이라면 어찌 자연스럽지 않겠는가. 우리, 이렇게 자연스러운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자연스러운 체하는 삶이 아니라.


정일근 시집을 읽으며 '자연스럽다'는 말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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