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두 번 만난다. 이제는 정기적으로 만난다. 만남이 예측 가능해진 것. 예측 가능해졌기에 기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빅이슈가 나올 때가 됐는데, 이번 호에는 어떤 인물이, 어떤 글들이 실렸을까 하는 기대.


  이번호 표지는 배우 염혜란이다. 요즘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소위 잘나간다고 할 수 있는 배우다. 


  표지 사진으로만 만나지 않고, 빅이슈는 표지인물과의 대담을 글로 실어 그 인물과의 거리를 가깝게 한다. 그 점도 마음에 든다.


이번 호에서 주목할 만한 글들은 바로 중고거래에 관한 글이다. 온라인을 활용해 중고거래를 할 뿐만 아니라, 마을 공동체, 사람 공동체를 꾸려나가기도 하는 활동들에 대한 글이다.


그래, 중고라는 말보다 n차 신상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닿았다. 남이 썼던 안 썼던 내게는 새로운 물건이다. 그러니 그것은 n차로 만나는 새로운 상품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좋은가. 이 한정된 지구에서 무작정 새로운 물건들만 만들어내고, 그 물건들만을 신상이라고 하기보다는, 내게 처음 온 물건은 모두 신상이고,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신상의 가치를 잃었지만, 내게는 신상의 가치를 지닌 물건들을 두루두루 함께 쓰는 활동이라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활동이 아닌가 한다. 빅이슈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꼭 필요한 활동들을 알려주고 있으니, 노숙인들의 자활을 돕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노숙인이 아닌 우리들에게 더 알찬 삶의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다.


우리들이 삶의 방향을 정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그야말로 사람들에게 자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잡지다. 소중한 잡지라고 할 수 있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기 전에는 신설동-동묘에 가곤 했다. 그곳에 가면 온갖 중고 물품들이, 그래 이제는 새로운 사람을 기다리는 n차 신상들이 즐비하다. 너무도 많아서, 그 거리에 나온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n차 신상들이 있었다.


신설동에서 동묘까지 걸어가면서 수많은 n차 신상들을 보고, 또 어떤 것은 구매하던 일상이 지금은 많이 위축이 되어 마음이 허전했었는데, 빅이슈 이번 호에서 n차 신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을 읽고는, 아직은 이러한 n차 신상을 거래하는 활동이 죽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렇듯 언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어떤 존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중고라는 말보다는 n차 신상이라는 말이 더 다가온 이유도 이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n차에서 n이라는 숫자가 커지면 커질수록 동일 물품을 많은 사람이 썼다는 얘기니, 지구 환경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된다. 중고라는 말보다 n차 신상이라는 말이 훨씬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기도 하다.


이 말과 더불어 이번 호에서 한 가지 더 기억하고 싶은 말은 '슬럼프'라는 말을 쓰지 말고 '원더윅스'라는 말을 쓰자는 글... 무언가 새로운 계기가 필요해 잠시 멈춰있거나 기존과 다른 행동, 마음을 지니고 있는 시기를 슬럼프라고 하기보다는 경이로운 주간(WONDER WEEKS)이라고 한다면, 그런 상태를 대하는 우리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까?


이렇게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존재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빅이슈를 통해 알게 됐다. 그야말로 '빅이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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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2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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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용서'라는 말. 참 쉬운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너무도 어려운 말이다. '용서'란 말을 쉽게 써서는 안 된다. 이 말은 피해를 당한 약자들이 자신들의 약함을 극복했을 때, 자신들이 지녔던 두려움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행동이고, 그럴 때에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너무도 쉽게 '용서'란 말을 쓰라고 강요한다. '용서'가 무슨 선행이나 베풂인 것처럼 '용서해라, 그래야 네 맘도 편하지.'라는 말을 한다. 특히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길 때 더 자주, 더 편하게 이 말을 쓴다.


하지만 '용서'는 함부로 할 수 있지도, 또 함부로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용서'에는 진정한 반성이 앞서야만 한다. 반성, 참회, 행동의 수정, 일명 개과천선을 한 이후에 상대에게 온전히 자신을 맡겼을 때야 비로소 쓸 수 있는 말이다.


그것도 '용서는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 베푸는 것'이다. 결국 용서란 말에는 기존까지 지녀왔던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관계의 전복, 강자와 약자의 역전. 이런 새로운 관계 속에서 '용서'란 말이 쓰이고, 그런 행동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용서'다.


따라서 '용서'란 말에는 새로운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새로운 행동, 새로운 질서, 새로운 마음 등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면 '용서'란 말을 쓰는 행위는 미사여구에 불구하다.


르귄이 쓴 소설을 읽는 중인데, 늘 감탄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다른 방향에서, 또는 기존에 놓치고 있던 부분을 더 깊게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이라는 제목에서 어떤 용서가 나올까 궁금했는데, 용서라기 보다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편이 더 좋겠다. 바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질서를 용서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혁명과 해방 이후에 이루어진 배신... 혁명은 하기보다는 혁명 이후에 혁명이 추구했던 것들을 이뤄나가는 것이 더 힘들다. 예이오웨이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그들은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예이오웨이에서도 해방 이후 다시 권력을 쥔 자와 그렇지 못한 존재들로 나뉘게 되는 현실.


여기에 권력을 쥐기 위해서 상대를 이용하거나 지위를 남용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여성들은 다시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는 모습들... 첫번째로 실린 '배신'은 이런 혁명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다. 세속의 삶에서 벗어나 죽음을 맞이하려는 요스와 권력자에서 배신자로 떨어진 압바캄.


이 둘이 서로 어울리게 되는 과정, 이것이 바로 용서의 한 길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찾아가면 '용서'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용서의 달'이라는 소설에서는 에큐멘 특사인 솔리와 그를 경호하는 테예이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웨렐에 자유와 평등을 관철시키려는 솔리라는 특사. 그를 경호하는 일을 맡은 테예이오. 여전히 여성을 하등존재로 취급하는 웨렐에서 솔리는 그런 행동이 부당함을 이야기하지만... 암살 사건에 연루되고.. 


소설은 솔리와 테예이오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식민지 전쟁에 참여했던 테예이오가 변해가는 모습. 그가 정신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 그래서 솔리와 결합하는 과정은 지배계층에서도 자유와 평등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용서'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기존 지배층의 반성과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선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늘 있음을, 외부의 지원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그래서 솔리와 테예이오는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고.


'사람들의 남자'로 가면 이런 외부인이 예이오웨이에 정착하면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내부에서 개혁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하는 사람. 합찌바... 그가 그동안 겪는 과정들을 통해 르귄이 어떤 세상을 상상하고 있는지를 알아가게 된다.


이 합찌바는 네 번째 소설 '한 여자의 해방'에 다시 나온다. 라캄... 노예로 태어나 지내다가 자유민이 된 사람. 그럼에도 웨렐에서는 여전히 남성들의 지배가 공고하니, 노래로 듣던 예이오웨이로 가기로 하고 그곳에 가는 라캄.


그러나 말로만 듣던, 책으로만 알던 해방된 예이오웨이에서도 권력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곳에서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합찌바와 만나게 되고. 결국 그들은 비밀투표를 통해 자유와 평등이 명문화된 헌법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렇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용서'가 시작될 수 있음을... 이 소설들을 통해 관계의 역전 없이는 '용서'가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된다. 혁명 이후 다시 존재하게 되는 과거의 권력관계... 사람들이 바뀔 뿐 제도는 바뀌지 않는다면 그 속에서 '용서'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혁명은 제도를 그대로 두고 사람들을 바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바뀌는 만큼 제도 역시 바뀌어야 한다. 식민지에서 벗어났다고 다시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관계 자체를 없애려는 활동들을 해야 하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약했던 존재들의 바람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읽으면서 끝에 가면 갈수록 책을 덮고 싶지 않아 일부러 천천히 읽은 그런 책. 혁명보다는 혁명 이후가 더 중요함을, 혁명 이후에 진정으로 '용서'란 말을 쓸 수 있으려면 철저한 전복, 그리고 과거의 것을 반복하지 않는 자유와 평등이 중요함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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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4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1-06-05 05: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6-05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kinye91 2021-06-05 11:0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세상에 나와서 살아가면서, 세상이 점점 좋아진다고 느낀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면서 자신에게 덧씌워진 온갖 습속들로 인해, 고집만 더욱 세지고, 자신만 알게 되어 오히려 세상이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진다고 느끼지 않을까?

 

  세상은 진보한다고 하는데, 진보라는 말과 다르게 삶에 대한 통제가 더욱 많아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알면 알수록 오히려 지식이 힘이 되고, 지식이 삶을 더욱 행복하게 해야 하는데, 그와 반대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그런데 이것이 개인의 앎에만 해당할까?

 

그렇지 않다. 진보라는 말에 과학기술을 포함한 앎의 발전이라는 말도 들어있다면, 세상 지식 총량은 늘고 있는데, 우리들 삶은 더욱 옭죔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지식의 총체들이 우리들의 시각을 굴절시키고 있지는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자신의 관점으로 보고, 그렇게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았을까? '인권'이 존중되어야 하는 세상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인권'도 자신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또 많은 것을 알아가면서 오히려 '있는 그대로'에서 점점 멀어져, 내 삶이 행복에서 더 멀어지고, 사회 역시 그 많은 지식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라는 말이 정말로 내 삶에서 많이도 멀어졌다는 생각을 하는데... 손택수 시집을 읽다가 '있는 그대로, 라는 말'을 읽고 아, 그렇지! 하고 감탄하게 됐다.

 

   있는 그대로, 라는 말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뭐냐면 있는 그대로더라

나이테를 보면서 연못의 파문을, 지문을,

턴테이블을, 높은음자리표와 자전거 바퀴를

연상하는 것도 좋으나

그도 결국은

나이테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만은 못하더라

누구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만

평화 없이는 비둘기를 보지 못한다면

그보다 슬픈 일도 없지

나무와 풀과 새의 있는 그대로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나

세상에서 제일 아픈 게 뭐냐면,

너의 눈망울을 있는 그대로 더는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더라

나의 공부는 모두 외면을 위한 것이었는지

있는 그대로, 참으로

아득하기만 한 말

 

손택수,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2020년.15쪽.

 

그래, 나에게 씌워졌던 많은 것들을 걷어내려는 노력을 해야겠다. 내 주변에 있는 존재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는 생각. 그래서 많은 고민과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있는 그대로'라는 말에는 자신을 먼저 내려놓는 법을 익혀야 한다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지식부터 시작해서 온갖 습속들을 걷어내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나 아닌 존재들을 내 관점이 아니라 그들 존재 자체로 먼저 볼 수 있는 눈, 마음. 그런 마음들이 대다수를 이룬 사회라면 수많은 갈등들이 해결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손택수, 이번 시집 [붉은 빛이 여전합니까]에는 이 시 말고도 여러 가지 생각할 것들이 많은 시들이 실려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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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들 - 존 버거의 예술론
존 버거 지음, 톰 오버턴 엮음, 신해경 옮김 / 열화당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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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거의 예술론이라는 작은 제목이 붙어 있지만, 예술론이라기보다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글들이라고 하는 편이 좋다.


존 버거 자신이 지닌 사상을 글로 잘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에 관한 글도 있지만, 예술에 관한 글에서도 존 버거의 사상이 드러나고 있다.


특히 '장소에 관한 열 가지 속보'라는 글을 보면 존 버거의 사상을 더 잘 알 수 있는데...


그는 그 글을 이렇게 시작한다. '누군가가 묻는다. 당신은 아직도 마르크스주의자요?' (291쪽)


'그렇다. 나는 무엇보다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이다.' (298쪽)


참 오랜 만에 보는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라는 말. 한 때 우리나라에서 금기시 되었던 말.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는 순간, 국가보안법에 걸려 감옥에 가야 했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 말을 이렇게 당당하게 하는 사람이라니...


소련이 해체되고, 공산주의는 이제 한물 간 사상이라고 생각하는데,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같은 사상으로 보지 않고, 다른 의미로 파악하면, 공산주의를 현실에 적용하려던 마르크스주의인데, 현실 적용에 실패했다고 해서, 이념의 기초가 되는 마르크스주의까지도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그가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존 버거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약자에 기반한, 약자와 함께 하는 사상이기에, 그는 그 주의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는 세상을 약자의 눈으로 본다. 


약자들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다가갈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한다. 그러니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임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마르크스주의' 마르크스조차도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는 말이 있으니, 존 버거의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가 말한 교조적인 마르크즈주의가 아니라, 현실에서 약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상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많은 글들이 실려 있는데, 읽다보면 약자들에 대한 존 버거의 관심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세계화를 통한 금융자본주의의 지배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하는 글들도 많고.


예술이 사회와 독립해서 홀로 존재할 수 없듯이, 예술가들도 사회와 관계없이 지낼 수 없듯이, 우리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사회를 바로보는 관점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돌이켜봐야 한다.


아마도, 존 버거의 이 책은 그러한 눈을 지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중에서 '로자 룩셈부르크를 위한 선물'이란 글은 마음 속에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혁명이 무엇인지, 어떤 혁명이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하고... 우리나라도 '촛불 혁명'이라는 말을 쓰는데... 결과는?


한 편의 글을 더하면 '돌멩이'란 글을 통해 엄청난 비극을 겪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보는 존 버거의 따스한 눈길을 만날 수 있다. 세상에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절로 들게 하는 글이다.


한편 한편 읽어보면 참으로 생각할 것이 많은 글들이다. 존 버거의 사상이 잘 드러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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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들 - 존 버거의 예술가론
존 버거 지음, 톰 오버턴 엮음, 김현우 옮김 / 열화당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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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감탄할 수밖에 없는 글들이 많다. 마음에 새겨둘 만한 구절도 많고. 존 버거. 뒤늦게 안 사람이지만, 그의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느낀다. 틈나는 대로 버거가 쓴 책이 번역된 번역본을 구하거나 빌려서 읽고 있는 중인데...


이 책 [초상들]은 방대한 책이다. 버거의 글들을 관련있는 내용들로 모아 엮어놓은 책이다. 그러니 다른 책에 나온 글들도 간혹 있기는 하지만, 예술가들을 태어난 순서대로 실었기 때문에, 예술가로 본 미술사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다만, 버거의 예술관이 짙게 들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고.


가령 이런 구절, '파이윰 초상화 화가들'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글에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었고, 이름이 주어졌다는 건 그 연속성에 대한 보장이었다.' (39쪽)


이런 말... 김춘수의 꽃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렇게 고대의 화가들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 아니 자신들의 초상을 그림으로 남기는 행위는 바로 연속성에 대한 보장을 받기 위한 행위였다는 사실. 이런 저런 사실을 떠나서 예술은 우리 인간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또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란 글에서


'예술가에게 진실이란 가변적인 것으로, 그것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바라보기의 어떤 특정한 방식이다. 예술가에게는 자신의 결정 이외에는 등을 기댈 곳이 없다.' (42쪽)


예술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보고, 그것을 작품으로 남겼다. 그에게는 등을 기댈 곳이 자신의 작품활동 말고는 없다고 해야 한다.고독한 존재, 그러나 늘 진실을 갈구하는 존재. 그것이 예술가이고, 그런 예술가들에게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가의 예술 행위 자체가 이미 자신이 진실을 바라보는 방식을 표현한 것이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술가들 뒤에 있는 그 무엇을 찾으려는 일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버거의 글쓰기는 다방면을 아우른다. 철학도, 시도, 소설도 모두 그림과 관련이 된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미술을 본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쓴다. 


따라서 어떤 화가에 대한 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책의 뒤로 갈수록 최근 작가들이 나오는데, 그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다른 곳에 실렸던 글들을 찾아 수록했기 때문에 그 화가의 작품 사진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많다.


엮은이가 그 미술가들의 작품을 찾아서 한 편 이상 실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다. 또한 이 책에는 작품들이 모두 흑백으로 실려 있다. 흑백이 지닌 고유한 특성이 있기도 하겠지만, 다른 것은 몰라도 흑백으로 작품을 실었기 때문에 오히려 버거의 글에 더 집중하게 되지 않아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 책에서는 이 한 편으로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이 한 편이 읽는 내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해야 한다. 바로 '대 피터르 브뤼헐'에 대한 글이다. 그의 그림에서 무관심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서 글을 쓴다. 마치 니묄러 목사의 시를 연상하게 하는 글. 또 이 글에서는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나오니... 이 놈의 무관심.


  '그림을 한 점 한 점 그릴 때마다 그는, 제대로 제기될 거라고 본인도 확신할 수 없었던 어떤 고발을 위한 증거를 수집했다.

  그가 고발하고 싶었던 것은 무관심이다. 추락하는 이카로스를 보면서 쟁기질만 하고 있었던 농민들의 무관심, 입을 벌리고 십자가형 앞에서 구경만 하는 농민들의 무관심, 간청하는 플랑드르 사람들 앞에서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는 스페인 병사 (그들은 명령을 따르고 있을 뿐이다)들의 무관심, 역시 눈먼 자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말을 들은 다른 눈먼 자들의 무관심, 아까운 시간이 흘러가고 있는데 그저 놀이에만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의 무관심, 죽음에 대한 신의 무관심.' (81쪽)


브뤼헐의 그림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이렇게 버거가 이야기하는 것을 읽고는 아, 그럴 수도 있구나!, 이것이 바로 니묄러가 쓴 시에서 나온 구절대로 아무런 관심도 표명하지 않았던 모습과 같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런 무관심이 눈감아 준다는 말과 같음을, 그냥 몰랐다고 해서는 안 됨을 이 글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무관심이 많아질수록 불의는 더욱더 판치게 된다는 사실을...


'저항하지 않는 것이 곧 무관심이라는 점을, 잊어버리거나 모르고 있는 것 역시 무관심이라는 점을 이해시키려 했다. 무관심하다는 것은 눈감아 준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83쪽)


왜 예술을 감상하는가? 세상의 고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아니다.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작가가 세상을 보고 표현한 작품을 보면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내 관점을 확립하기 위해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품을 한 방향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 작품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모습, 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모습.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표현되어 있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을 찾는 노력을 예술 감상을 통해서 하는 것이다.


좀더 진실되게 살아가기 위해서... 어쩌면 버거의 [초상들]이란 이 책은 예술가들의 초상을 통해서 바로 읽는 사람의 초상을 스스로 그려보라는 권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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