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해의 어부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4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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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귄의 소설을 읽으면 질문을 하게 된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우리 과학기술로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소설에서는 형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발생한 일들이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 소설을 통해서 과학이 응답을 하기 시작한다.


과학이 응답을 하고, 소설은 그것에서 더 나아가 또 다른 질문을 하고. 이런 일들이 반복되면서 인류는 더 발전된 과학기술을 지니게 된다. 그렇다면 공상이라고, 상상이라고 치부하는 소설이 오히려 과학 발전을 이끌어가는 역할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데도 우리는 수업 시간에, 또는 자습시간에 소설을 읽는다고 공부 안한다고 구박을 했었다. 아니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구박한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해! 하면서.


르귄 소설집 [내해의 어부]를 읽으면서 많은 질문을 던진다. 윤리와 관련된 질문도 있고, 과학과 관련된 질문, 또 사회와 관련된 질문을 하게 된다. 르귄 소설 장점이 바로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들고, 그 질문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시간을 갖게 하는 데 있다.


많은 소설들에서 질문을 찾을 수 있지만, 이 소설집에는 비슷한 대상을 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소설이 있다. 바로 처튼 기술이라는 현재 우리가 사용할 수 없는, 영화에서는 가끔 나온 순간이동기술을 다룬 소설.


‘쇼비 이야기, 가남에 맞춰 춤추기, 또 다른 이야기 혹은 내해의 어부’라는 소설이 바로 이 ‘처튼 기술’을 중심으로 삼고 있다.


순간이동, 얼마나 멋진 말인가. 사람이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공간으로 이동한다. 이동하는 시간은 단 몇 초.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안드로메다까지 가는데 빛의 속도로 약 200만 광년이 걸린다고 하는데, 이 처튼 기술을 이용하면 몇 초 만에 안드로메다에 있는 별에 도착할 수 있게 된다. 그것도 온전한 상태로.


이게 가능할까? 지금 기술로 화성까지 가는데도 10개월 이상이 걸린다고 하는데, 이 기술이 있으면 우주 어느 공간에도 갈 수가 있다. 그런데 부작용이 없을까? 소설은 이 점에 주목한다. ‘쇼비 이야기’에서는 처튼 기술로 순간 이동에는 성공하지만 10명의 승무원들이 각자 환상을 겪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순간적으로 공간은 바뀌었지만, 그 공간에 대한 인식은 전무한 상황.


우리가 모르는 공간으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갔을 때 그 장소에서 느끼는 감정은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이 다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이 진실일까? 누가 진실한 경험을 했을까? 답은 모두가 진실한 경험을 했을 수도 또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다.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생각의 틀이 자기 경험을 유도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떤 준비도 없이 순식간에 낯선 공간에 떨어졌을 때 우리는 전체를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다. 전체를 보려면, 아니 그 낯선 공간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조각들을 맞춰야 한다. 각자가 보고 있는 사실들을 투명하게 공개함으로써 진실의 조각을 맞추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쇼비 이야기’에서 승무원들이 살아남아 다시 그들이 떠난 공간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된 데에는 바로 이런 노력이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의 연장선상에 있는, ‘쇼비 이야기’에서 승무원으로 등장했던 인물을 통해 ‘가남에 맞춰 춤추기’라는 소설에 등장해서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지 못하고 독선적으로 해석하고 행동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한번 처튼 기술을 경험했던 사람, 불확실성을 누구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는 사람과 자신만만하게 자기 생각이 옳다고 믿고 그대로만 행동하는 사람을 등장시켜 어떤 사람이 살아남게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댈줄이라는 인물, 자신만만하게 행동하지만 그는 가남에서 희생된다. 그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자신만의 틀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즉,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들 처지에서 해석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지닌 틀로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 결과는 비극이다.


낯선 곳, 낯선 시간,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우리는 흔히 바로 자신의 틀을 지니고 그 틀에 다른 존재들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그 실수가 자신에게 치명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데도.


이렇게 소설은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떠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을 한다. 충분한 준비가 필요할 텐데, 우리가 오랜 시간에 걸쳐 여행을 할 때는 어느 정도 준비를 하게 된다. 그래서 치명적인 실수를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있게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실수를 안 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오랜 시간을 준비해도 자신이 지닌 틀을 바꾸지 않고 고수하는 사람들은 있다. 이들이 다른 문명, 다른 존재들에게 어떤 해악을 끼쳤는지는 인류 역사에 잘 기록이 되어 있다. 남들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엄청난 해악을 끼쳤는지도)


순간이동이 과연 바람직할까? 낯선 장소에서 낯선 이들을 만날 때 과연 시간-공간을 없애는 이동이 바람직한 만남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하게 한다. 낯선 존재와의 만남에는 무엇이 필요할까 라는 질문으로 연결이 된다.


여기에 ‘또 다른 이야기 혹은 내해의 어부’는 순간이동과 더불어서 과연 타임머신이 가능한가? 라는 질문까지 하게 한다. 나는 두 곳 이상의 공간에 두 곳 이상의 시간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만약 존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소설에는 처튼 기술을 발전시키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신이 개발한 기술이 잘못 작동하여 18년(다른 곳은 10년 전- 르귄 소설은 여러 인물들이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모습이 많이 나온다) 전으로 돌아간 ‘히데오’를 통해 과연 타임머신은 가능할까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있다.


자신이 만든 처튼 기술로 과거로 돌아간 히데오. 처튼 기술이 개발되기 전으로 돌아갔기에 그는 미래로 돌아갈 수가 없다. 이상하다. 처튼 기술은 동시간에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기술인데, 여기에 주름이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시간의 이동까지도 가능해지게 했다.


그렇다면 나는 여러 장소에 여러 시간에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 18년 전으로 돌아간 히데오는 자신이 고향을 방문했던 때를 불안감에 휩싸여 맞이하는데, 그 시간에 그 장소에 과연 히데오가 나타날까?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몇 년을 과거에서 살아온 히데오와 현재까지 주욱 살아온 히데오, 이 둘은 만날 수 있을까? 소설에서 만남은 보여주지 않는다.


보여줄 수 없다. 영화에서 타임머신을 많이 다루고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르귄 소설도 마찬가지다. 다만 질문을 던질 뿐이다. 어찌할 것인가? 시공간에 주름을 잡고, 그 주름이 겹친다면? 소설은 이를 여울이 비유하고 있는데, 물은 물이되, 여러 갈래로 바위에 부딪히는 물결들, 여울들. 나는 누구인가? 이 소설을 읽으면 과연 지금의 나는 지금 내가 맞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좋은 소설이다. 질문을 하게 하는 소설이니. 네루다가 쓴 시집 제목이 ‘질문의 책’이었는데, 르귄 소설 역시 질문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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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의 눈으로 미래를 설계하라 - 연세대 공대 교수 22명이 들려주는 세상을 바꾸는 미래 기술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지음 / 해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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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학하면 기계가 떠오른다. 기계 중심의 발전을 공학 발전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공학은 사람과 관련된 학문이다. 사람과 관계없는 공학은 없다. 즉 공학은 우리가 잘살기 위해서 만들어낸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공학 발전이 인간을 뒤로 제쳐두고 있다는 생각을 갖기 쉽다. 그만큼 공학 기술은 인간보다는 기계나 기술의 발달을 우선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학은 사람들이 한다. 왜 사람들이 좀더 편리하고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공학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먼저다. 사람을 우선하지 않는 공학은 존재하기 힘들어진다.

 

예측불가능할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했고, 공학기술도 발전했지만 이들 모두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행복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다양한 공학을 전공하는 교수들이 모여 앞으로 다가올 세상에서 공학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세상의 바뀜에 공학이 큰 역할을 할 수밖에 없고, 또 큰 역할을 해야 한다고 한다. 다만, 공학이 사람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공학은 곧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위한 공학은 어떠해야 할까?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는데, 우리들 삶과 관계없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무작정 공학의 발전을 예찬하지 않아서 좋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전제하고 있다. 미래 세계에서도 공학은 사람에게 복무해야 한다. 아니 사람이 없는 공학은 필요 없다. 사람이 없는 지구를 상상할 수 없듯이 사람을 전제로 하지 않는 공학은 상상할 수가 없다.

 

다만, 기술 발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사회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에 대해서 전문가로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들이 제시한 의견이 전부라고 하지도 않고, 이러한 의견을 참조해서 더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많은 교수들, 22명이나 되는, 특정 대학, 연대 공대 교수들이 썼지만, 어느 대학의 학문에 편중되어 있지는 않다. 또한 자신의 전공만을 주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래 사회는 초연결사회이고, 그러한 사회에서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건축만 하더라도 건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학문이 융합되어야만 건축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공학의 눈으로 미래를 설계하라는 말에는 전문가를 참조하되, 다양한 관점들, 기술들이 융합되어 사람을 중심에 놓는 사회를 만들어가자는 권유가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부정해도 과학기술은 계속 발전한다. 이 책은 그 발전을 사람을 위한 발전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해서는 공학이 미래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하겠지만, 그 중심에는 항상 사람이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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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소년 주거권에 대한 글이 실렸다. 청소년 주거권. 생소하다. 그렇지만 현실에서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청소년 주거권이란 그들이 부모에게서 나와 살아갈 때 그들이 삶을 살아가는 공간을 마련해야 하는 권리를 뜻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이 집을 나온다. 부모로부터 벗어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를 아주 단순하게 가출이라고 하고, 이들을 가출청소년이라고 말하면서 비행청소년이라는 말과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다.


  왜 이들이 부모로부터 나와 살아가려고 하는지를 살피지 않고,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가족이라는 개념을 상정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미성년자들을 '비행'이라는, 잘못된 행동이라는 틀에 가두어 두려 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부모로부터 벗어남이란 자신이 부모에게 의존해서 살아가는 삶을 포기하는, 자기 삶을 스스로 살아내야 하는 목숨을 건 도약이라 할 수 있다.


부모와 함께 도무지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집을 나온 청소년들, 그들에게 어떤 집을 마련해 주어야 하는가? 단지 비행청소년이라고 규정하고 떠나온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가? [빅이슈]는 이 점에 대해서 짚어주고 있다.


그들에게도 주거권이 있음을, 그들이 가정으로부터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줘야 함이 사회가 지닌 책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 [빅이슈]에서 주장하는 '청소년에게 주거권을 허하라!'는 주장은 우리가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


가족에 대한 개념에 대해 여러 방면에서 논의가 되고 있는데, 그와 연관지어서 청소년의 주거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도 좋을 듯하다.


[빅이슈]가 노숙인들이나 어려운 사람들이 자립해서 살 수 있도록 하는 잡지라면 탈가족 청소년들에게 주거권을 마련해주는 문제 제기는 [빅이슈]의 취지와도 맞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호부터 연재되는 빅판의 생애 구술사는 더 의미가 있다. 낮은 곳에서 사는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는 생각을 하는데...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글이다. 계속 연재 된다니 기대가 된다.








 

이번 호 표지 인물은 차인표다. 참 반듯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글을 읽어봐도 이처럼 반듯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얼굴 표정에서 차가운 느낌을 받았는데 글을 읽어보니 참 따뜻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사람. 자기만이 아니라 주변 존재들에게도 희망을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빅이슈]에 화보가 실렸다는 것을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빅이슈]에 애정이 간다.


여기에 또다른 배우 유승목이 있다. [빅이슈]를 구매하다가, 이제는 정기구독을 한다는 사람. 그의 가족이 [빅이슈]에 애정을 지니고 이 잡지가 많은 사람에게 읽혔으면 하는 내용도 좋았다.


그렇다. [빅이슈]는 많은 사람에게 읽혀야 한다. 당위로서가 아니라 읽으면 좋은 잡지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주제들로, 다양한 사람들 이야기가 실려 있어서 내 삶을 더욱 넓고 깊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


책을 검색했을 때 나오는 표지 사진(그 표지 모델은 차인표와 그의 친구 김광수 씨다)과 다른 것을 나는 받았다. 차인표의 얼굴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 둘 다 표지 사진으로 좋을 듯해서 함께 올린다. 


2주가 지나면 새로운 [빅이슈]가 온다. 설렘으로 늘 새로운 [빅이슈]를 기다린다. 기다림이 즐거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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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실체가 잡히지 않았다.


  막연한 불안감. 촛불이 타버리고, 촛농만 흘러 촛불을 켰던 사람들 손에 뜨거움만 남겨 놓은 상태.


  어둠을 밝히려고 촛불을 켰는데, 촛농으로 내게 뜨거움만 남기고, 초를 놓아버리게 만든 시간들.


  그것이 바로 불안감이 생긴 원인이었다. 촛불로 밝히려던 많은 일들이 밝혀지지 않고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는 생각.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는데, 쳇바퀴 위에서 열심히 달렸구나 하는 생각.


꼭 외부 요인 때문이었을까? 아니다. 외부 요인이 강하게 다가오더라도 내부에서 고쳐나갈 의지가 있었다면 그렇게 되지 않았을 터다.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생각. 녹색평론179호를 읽으며 불안의 실체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최병성, 탄소중립,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


선진국으로 인정받았다고, 세계에 도움을 요청하는 나라에서 세계에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되었다고, 탄소중립으로 가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자화자찬하는 방송이 많았는데... 과연 그런가?


왜 도처에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숲을, 땅을 밀고 그 위에 고층건물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은 여전히 아침에 나가 저녁에 집에 돌아오지 못하는 일이 많은데 '중대재해처벌법'조차 어정쩡하게 처리하고 있는지...


환경을 보호해야 한다고 하면서 숲에 있는 나무를, 그것도 30년이 넘은 나무는 탄소 흡수율이 떨어지니 베어내고 어린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하면서 베어내고 있으니...


재생에너지를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태양광, 풍력 발전을 위해 농토를 없애고, 산을 깎는 행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으니, 녹색평론 이번호를 읽지 않았으면 그냥 막연하게 무언가 잘못되었다고만 생각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태양광을 농토에 만들지 않고 고속도로를 둘러싸고 있는 방음벽, 철도 방음벽 등에, 또 고층 건물 외벽에 설치하면 될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 산촌에 건설해서 송전탑과 송전선을 만들어 전력을 이동시키는 정책은 환경 파괴 정책이지 환경 보호 정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지적.


나무로 문제를 국한시키더라도 이번 정부 정책에는 문제가 많다고 한다. 30년 이상된 나무가 탄소를 흡수하는 능력은 떨어질지 모르지만, 탄소를 저장하는 능력은 훨씬 뛰어나다고 하니 방송에서 다루었던 우리나라 숲에 30년 이상된 나무들이 많아서 탄소 흡수율이 떨어지니 그 나무들을 베어내고 어린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말이 잘못된 주장이라고 한다.


'30살까지는 나이를 세기 어려울 만큼 나이테가 간격이 아주 촘촘했다. 그런데 30살이 넘어가자 나이테 간격이 폭발적으로 넓어졌다. 나무가 성장한다는 것은 탄소를 흡수하는 과정이다. 나이테가 더 넓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은 탄소를 흡수하여 몸에 저장한 것이다.' (최병성 글. 11쪽)


'나무 둥치는 나무가 대기 중의 탄소를 흡수하여 자기 몸에 저장한 것이다. 나무는 탄소덩어리 자체다.' (최병성 글. 13쪽)


이 글을 통해서 오래 된 나무를 함부로 베어내는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탄소는 토양에도 많이 저장되기 때문에 나무를 베면서 토양을 훼손하는 일도 탄소중립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한다.


말로만 환경, 생태, 탄소중립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자연과 공생하면서 우리 인류의 삶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점을 녹색평론 179호에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탈핵으로 간다고 했으면서도 고준위핵폐기물에 대해서는 여전히 이전 정권과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앞에 내세우는 말과 실제로 하는 행동이 다른, 전 정권과 차이가 나는 정책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 촛불이 결국 우리들 손만 데게 하고 있는 상태. (황대권, 고준위핵폐기물 투쟁의 전말)


하지만 이런 일들에 실망만 할 수 없다. 회의가 들고 그냥 포기하기엔 들었던 촛불이 아깝다. 초는 자신을 태워 불을 밝혔는데,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이번 호에서는 고 김종철 선생을 다루고 있다. 녹색평론을 만들고 우리들에게 생각의 전환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우리 시대의 어른. 돌아가신지 1년이 넘었는데... 그분의 주장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결코 포기해서는 안됨을 깨닫게 하고 있다.


오래 걸리더라도 가야할 길이 있다면 가야만 한다. 그 길을 걸어가야 함을 김종철 선생이 잘 보여주었고, 이번 호에서 다루고 있는 '김종철 선생 1주기를 맞으며'는 아직 우리에게 희망이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 녹색평론이 여전히 발간되고 있음은 우리에게 아직도 희망이 있음을, 우리가 가야할 길이 있음을, 그렇게 그 길을 함께 가자고 결코 멈추지 말자는 독려라는 생각이 든다. 이번 호에 실린 이문재의 문장을 마음에 새긴다.


'근대문명이 끝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이 끝이 끝나기 전에 (이 끝이 끝나는 순간 인류는 사라집니다), 끝을 시작으로 바꿔내야 합니다. 선생이 누차에 걸쳐 말했듯이 우리 안에 있는 '시의 마음'을 되찾는 것이 전환의 시작입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진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시의 마음으로 우리가 다시 만날 때, 우리 '전환의 전위'는 춤을 추게 될 겁니다. 샤먼의 영혼과 땅의 노래(시)가 어우러지는 춤이 '공생공락의 가난한 사회'를 만들어내는 맨 앞이 될 것입니다.' (153쪽)


"끝이 시작되었다. 춤을 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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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지구, 물러설 곳 없는 인간 - 기후변화부터 자연재해까지 인류의 지속 가능한 공존 플랜 서가명강 시리즈 11
남성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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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위기에 처해 있다. 이대로 가다간 지구가 견뎌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기 의식이 생겨났다. 위기 의식이 아니라 실제로 위기다.


이 책에서는 기후 변화란 말을 썼지만, 많은 사람들은 변화라는 말보다는 위기라는 말을, 또 재앙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한다.


이미 우리 인간이 손 댈 수 없을 정도로 지구 기후는 예전에서 벗어났으며, 그러한 변화로 인해 우리들 삶에도 위기가 도래했다. 그런데 위기라고 다 같은 위기일까? 아니다.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지만 하위 10억 명 정도에게는 기후 변화는 위기 정도가 아니라 삶을 위협하는, 재앙에 해당한다.


이대로 지구를 내버려둔다면 하위 10억 명은 살아남기가 매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그만큼 우리는 지구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도 우리가 초래한.


따라서 지구 위기는 우리의 위기다. 우리 삶이 위험에 처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벌써 두 해째 코로나19로 인해 전세계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있다. 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 하지만 백신이 개발되었어도 돌파 감염이 일어나고, 바이러스들은 수많은 변이를 일으키고 있다.


코로나19로 홀연히 나타난 질병이 아니다. 인류의 삶이 초래한 질병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질병이 우리들 삶을 얼마나 위태롭게 하는지 두 해째 겪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19는 이렇게 눈에 보이게 다가와서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질병에 대한 경각심이지 우리들 삶에 대한 경각심까지는 가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백신을 개발해 감염을 예방할까에 집중하고 있지, 인류의 삶에 대한 성찰까지는 가지 못하고 있다.


정신 차리라고 경고를 하고 있는데, 그 경고를 무시하고 있는 현실이라고나 할까. 기후 위기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다뤄줘서 조금은 낫지만, 그래도 사람들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겪는 자연재해들이 이러한 기후 변화, 위기로부터 초래되었는데도, 근본부터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그때 그때 땜질식 처방만 하고 있는 셈이다.


이 책에서는 기후변화가 자연재해를 일으키고, 그러한 변화로 인해 인류의 삶 자체도 위험한 수준으로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 지구는 우리 인간을 살 수 있게 해주고 있다고.


지구를 사람처럼 비유한 경우가 많다. 엄밀히 말하면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해야겠지만. 가이아라고 한다. 지구는 가이아다. 그렇다면 지구는 사람과 같다고 (신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 인간을을 만들었다고 하는 신화들이 대다수니까) 한다면 역시 물이 중요하다.


사람 몸을 이루는 요소 가운데 물이 70%정도 차지한다고 하니... 그러고 보니 지구도 마찬가지다. 지구도 물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러니 물이 없으면 사람이 죽듯이 지구도 물이 없으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별이 되지 못한다.


물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을 함부로 대하고, 또 그러한 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바다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더 많다고 한다.


하긴, 우리 몸에 대해서도 여전히 모르는 부분이 많으니, 지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바다, 물로 차 있는, 아니 그 물 속에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수많은 자원을 품고 있는 그 바다를 우리가 육지에서 했듯이 막 개발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바다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도 난개발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으니.. 다만 바다에 대한 수많은 자료들을 모아둘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강조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빅데이터 시대일텐데, 바다에 대한 자료들도 그렇게 모아두면 우리 인류에게 도움이 된다고 한다.


기후변화로 시작해서, 자연재해, 쓰레기 문제 등을 통해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이야기하면서, 바다를 통해 인류에게는 아직도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희망은 바다에 있다고 한다. 이 말은 바다를 육지처럼 다루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바다는 그 자체로 기후를 조절하는 역할도 하고, 수많은 생명체들을 품고 있고, 또 자원도 풍부하기에 우리 인류가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다에서 희망을 지녀야 한다. 다만, 지금까지 해왔던 난개발은 절대로 안된다는 점을 명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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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8-06 17: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1-08-06 18: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8-06 18: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kinye91 2021-08-06 18: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08-06 18: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kinye91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1-08-06 19: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