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하면 얼굴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을 머금게 될까? 아니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찡그린 얼굴이 될까? 과연 아이들은 학교에 오고 싶어할까?


  학교란 공간은 학생들에게는 자유를 상실한 공간, 자신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교사들의 목소리만 들리는 그런 공간일 수도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하는 말들이 '해라'와 '하지 마라'는 명령형으로 끝나는 말들이 대부분일텐데, 그런 공간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학생들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 교사들이 있고, 학생들이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무엇보다도 격의 없이 교사와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런 학교라면 그 학교에 가고 싶을 수도 있겠다.


이 시집을 낸 최은숙 시인은 교사다.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시로 표현했다. 이 시집은 청소년시집이고, 청소년들이 읽으면 '와, 우리 이야기네.' 할 수 있는 그런 시들이 많이 실렸다.


학생을 이해해주는 교사의 모습은 완벽한 교사가 아니다. 허점이 있는 교사다. 학생들에게 배울 수 있는 교사다. 그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딱이다. 이 시들은 그런 교사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배시시 웃음이 배어나온다. (선생님은 우리한테 딱이다, 비밀, 깜빡하기, 무서운 상민이, 선생님께 하는 부탁, 핵인싸각 등등)


또한 마을 사람들과 정겹게 지내는 모습도 표현되어 있고,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과 지내는 모습도 표현되어 있다. 그러니 이 시집을 읽으면 웃음이 있는 학교를 떠올리게 된다. 학교가 이렇게 웃음으로 충만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학생이 졸업을 한 뒤에도 자기 자식들을 데리고 와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그런 학교. (우린 운이 좋다 언제나)


그 중에서도 아이들을 위해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행동하는, 마을과 학교가 동떨어져 있지 않고 함께 하는 모습, 그야말로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떠오르는 그런 시가 있다.


정말 이런 학교, 이런 마을, 이런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이 세상에서, 학교가 담장을 굳게 치고, 교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인 통제를 하며, 심지어 학생들도 한번 등교하면 하교할 때까지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단절된 공간이 아닌, 열린 학교, 함께 하는 학교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 정경이 눈에 그려져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랬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학교를, 학생을 대하는 모습이.


      알고 보니


올봄에도 아이들이 쑥 뜯으러 나올 거라고

동네 어른들은 둑길에 제초제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쑥 뜯는 동안 자동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은 것은

다들 뒷길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공부 안 하고 놀러 나온 게 좋아서

장난치고 도망가고 야단법석

그래도 쑥이 모자라지 않았던 것은

방앗간 사장님이 뜯어 놓았던 쑥을

한 소쿠리 보태 주셨기 때문이에요


학교 앞 솔로몬문방구랑 스마일분식, 독립상회까지

떡을 돌리고도 전교생이 실컷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엄마들이 쌀을 듬뿍듬뿍 퍼 주셨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선생도 자라고

마을은 깊어 갑니다


최은숙, 지금이 딱이야. 창비. 2021년.  87쪽. 


참 아름다운 정경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 그렇다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느냐 하면 아니다. 아이들은 공부 안 하고 나와서 논다고 생각한다. 그 모습들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애늙은이처럼 어른들이 우리를 배려하고 있으니, 우리 최선을 다해서 쑥을 뜯자가 아니다. 


그냥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즐겁게 논다. 즐겁게 놀아도 된다. 이 놀이가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에서 서서히 자라리라. 그들도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리라. 굳이 지금 그렇게 하라고 도덕적인 말로 훈계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이 채우지 못한 쑥은 마을 사람들이 채우면 된다. 아이들과 함께 쑥떡을 먹는 그런 즐거움을 누리면 된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우리가 공동체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이런 어른들의 마음을 자라면서 알게 되리라. 시 제목이 '알고 보니'다. 


왜 아이들이 이렇듯 편안하게 쑥을 뜯을 수 있었는가, 마음 놓고 놀 수 있었는가 하니,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을 배려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공동체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학교와 마을의 관계다.


이 시집에 실린 시 한편 한편이 따스하게 다가온다. 청소년들이 읽어도 쉽게 이해가 될 언어들로 시가 쓰였고, 또 자신들의 이야기가 표현되었으니, 시를 가까이하는 청소년들이 이런 시집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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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9-09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채우지 못한 쑥은 마을 사람들이 채우면 된다.
시가 아닌데 왜 시로 읽히죠?
아마도 아이들과 쑥이라는 단어가 함께 오는것이 드물어서 그런가봅니다.
시 읽기 좋은 계절이 왔네요~~♡

kinye91 2021-09-09 13:17   좋아요 0 | URL
네. 시를 읽기도 책을 읽기도 좋은 계절이 왔어요. 코로나 시국이 빨리 안정이 되면 아이들이 이렇게 밖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겠지요.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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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 하면 로봇을 떠올린다. 인간과 다른 로봇이 아니라 인간의 몸에 장착된 기술, 로봇과 인간의 융합. 그래서 보통 인간보다는 능력이 뛰어난, 초능력을 발휘하는 존재. 


그래서 사이보그와 장애인을 결합시키지 못하고 있었는데, 인간의 몸이 다른 존재와 결합되었을 때를 사이보그라고 하면 장애인은 사이보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에 생각해 보지 못했던 점을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장애인을 사이보그라고 불러도 될까? 그렇게 부르자고 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장애인 하면 결핍, 부족, 부끄러움, 가려야 함 등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은 장애인이 뭘 하면서, 그대로 다른 사람과 같이 드러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 책에 치료하는 약이 나와도 안 먹겠다는 장애인 활동가 이야기가 있다. 


이런 모습들은 같은 대상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 아니 자신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일 수도 있겠다. 소위 정상인(정상, 비정상 개념으로 다가가면 장애는 결핍으로,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는데... 통상 쓰는 말이니 여기서도 쓴다면, 알으로는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라는 말로 통일하겠다)들도 자신을 다양하게 바라보는데, 때로는 만족해서, 때로는 불만족스럽게 보고 있으니, 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장애인도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본다. 그때 그때 따라서 장애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판단하고 느끼는 감정이 다 다르다. 비장애인도 마찬가지고.


사이보그가 되다에서는 다양한 관점이 나타난다. 무엇이라고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다. 아니 규정할 수가 없다. 비슷한 장애를 가진 사람도 사회에서 지낼 때 같은 모습으로 지낼 수 없다. 하물며 다양한 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그에 따라서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 기술을 바라보는 시각, 장애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장애를 완전한 비장애인처럼 해주는 기술이나 약, 수술을 원하고, 어떤 사람은 장애인으로 불편하게 살아가지만 첨단기술이나 의약, 수술 등을 거부하고 비장애인처럼 보이는 모습이 아닌 장애인인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려 한다. 


그런 장애에 대한 관점, 기술에 대한 관점을 하나로 통일시켜서는 안 된다.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여 읽다보면 장애에 대해서 그간 생각을 하지 못했던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서 다시 우리 사회를 바라본다. 과연 우리 사회는 장애인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그들이 지내기에 어떤 환경을 지니고 있는가? 우리가 예전보다는 많이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본다고 하지만, 과연 우리는 정말로 길거리에서 장애인을 많이 만나는가?


산책길에서, 또는 자전거도로에서 장애인을 만난 적이 얼마나 있던가? 길거리는 비장애인도 걷기에 위험하지 않나? 자전거도로에서 장애인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경우는 참 드물지 않나? 패럴림픽에 사이클 종목도 있던데...


여기에 이 책에서 나온 지적이 가슴에 콕 박혔다. 소설 속에서 과연 장애인이 얼마나 나오는가? 소설을 사회의 축도라고 하면서 그 소설 속 인물들 중에 장애인이 얼마나 되는가? 영화나 드라마는? 인간승리를 홍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어떤 다른 주제를 전달할 목적이 아니면 장애인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비장애인들이 주변에서 장애인을 잘 못 보는 현실이 예술 작품에도 이렇게 나타나 있다. 이런 면도 지적하고 있지만, 과학기술로 장애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자는 말... 과학기술이 장애인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고, 계속 개발해야 하지만, 그와 더불어서 장애인들이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살아가는 사회, 즉 다름으로 다름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많은 면에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책에 나온 몇몇 구절을 인용하면서 마친다. 이 인용문들을 곱씹으며 장애인에 대해, 또 장애정책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자.



김초엽과 김원영은 각자의 몸을 둘러싼 테크놀로지와 세계를 관철하면서 과연 누가, 어떤 방식으로 사이보그가 되는지 묻는다. 이들은 '장애인을 위한 따뜻한 테크놀로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테크놀로지와 사회가 어떻게 재설계되어야 하는지 상상하고 제안한다. (5쪽. 전치형의 추천의 말에서)


나에게는 말소리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정보로 전환해주는 과정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먼 미래에 도래할 완벽한 보청기나 청력 치료제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의사소통과 그런 소통 환경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이 내 삶을 실제로 개선했다. (35-36쪽. 김초엽)


'사이보그가 되어서' 스스로를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언젠가 도래할 첨단의 기계와 결합하거나 기계 없이도 '정상적인 몸'이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계들과 더 안전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63쪽. 김원영)


테크노에이블리즘은 기술 낙관론에 기반한 비장애중심주의다. 이러한 관점은 장애를 손상된 몸을 가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고, 그 개인에게 기술적 지원이나 교정을 통해 장애를 제거할 것을 혹은 정상적인 기능을 회복할 것을 요구한다. (86쪽. 김초엽)


기술은 우리 삶을 더 편리하게 만들지만, 우리 모두를 더 '인간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101쪽. 김원영)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연결들의 거점에서 등장하는 사이보그적 존재는 그 연결들 때문에 힘을 발휘할 뿐 아니라, 그 연결들을 지탱하고 견딘다는 점에서(김혜리 기자의 표현을 약간은 변형된 의미로 인용해본다면) "청테이프처럼 영웅적이다." (113쪽. 김원영)


사이보그 신화는 사이보그의 현실이 기계와의 불완전한 동거, 즉 불화에 가깝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138쪽. 김초엽)


완벽하지도 매끈하지도 않은 기술과의 융합과 불화가 실제 사이보그들의 삶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139쪽. 김초엽)


장애인 사이보그들은 자신의 삶에 기술을 도입해 일상을 개선하면서, 동시에 기술과 불화하고 기술과 관련된 정상성 규범과도 불화한다. (144쪽. 김초엽)


신체 손상에 따른 기능을 보완하되 주목은 덜 받는 디자인은 오랜 기간 장애인을 위한 보철물 제작에서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다. 이는 지금도 인공 보철 판매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중요한 마케팅 포인트다. (154쪽. 김원영)


장애disability는 단지 몸의 특정한 기능이 결여dis-ability된 상태가 아니라 '정상이 아닌 몸'이라는 사회적 평가를 획득한 일종의 신분(지위)에 가깝다. 따라서 고도로 발전한 테크놀로지가 기능의 결여를 보완한다 해도 여전히 장애는 존재할 수 있다. (155쪽. 김원영)


어떤 기술이 반드시 억압적이거나 해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술과 장애인이 이 사회에서 관계 맺는 맥락이 중요한 것이다. (182-183쪽. 김초엽)


기술 지식의 생산자들이 무엇보다 장애인의 필요를 중심에 두고 장애 정의와 접근성 실현으로 목적으로 하며, '따뜻한 기술'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기술'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200쪽. 김초엽)


장애인은 심리스-스타일의 세계 안에 끊임없이 '이음새'를 만드는 존재다. 많은 것이 자동화되고 인간 행위자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시스템이 갖춰질 때, 늘 거기에 빈틈이 있다고 알려주는 존재가 장애인이다. (248쪽. 김원영)


기계-다른 인간-동물과 결합할 때 더 효과적으로 성취될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시각장애인이 안내견과 하나로 움직일 때, 중증 뇌병변장애인이 휠체어와 결합하고 다시 그 휠체어를 밀어주는 활동지원사와 접속할 때, 그 사에서 발생하는 많은 어긋남, 불화, 이음새의 단차를 넘어 결합해본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미래에 '증강해야 할' 역량이다. (250쪽. 김원영)


개인을 교정하는 것으로 장애를 해결하는 대신 환경과 접근성의 문제를 고려해 다른 세계를 설계한다. 장애가 사라지거나 감춰진 미래가 아니라 장애인들이 세계의 일부로 살아가는 미래가 ... (268쪽. 김초엽)


인류가 그보다 현명하다면, 다른 존재로서 서로를 조금씩 불편하게 만들고 또 서로 적응해가며 같이 살아가는 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인간으로의 일방적인 동화를 요구하는 대신 이 사회 속에 다른 존재들의 자리를 만드는 방식으로. (275쪽. 김초엽)


장애는 그 사람의 삶에 새겨지는 경험이며, 치료가 반드시 답이 될 수는 없고, 어떤 이들은 장애인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277쪽. 김초엽)


장애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장애인의 몸으로 물질세계와 직접 상호작용하는 구체적인 경험이고, 그 경험은 개인의 자아와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278쪽. 김초엽)


우리는 어떤 사람과 하나의 시공간을 점유할 때에만 이미지와 소리에 제한되지 않는 풍부한 총체를 경험할 수 있다. (299쪽. 김원영)


기술의 발전 수준이 문제가 아니라, 장애 정의와 접근성이라는 원칙이 기술의 핵심 가치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무시되는 것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해요. ... 비판을 통한 개입, 장애 당사자의 지식 생산, 접근성 원칙의 의무화 등 시스템의 변화가 모두 적극적인 개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350쪽. 김초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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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현대미술가 시리즈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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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크니, 모르던 화가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그림을 많이 보게 되어서 좋았지만, 그는 우리가 화가가 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곳까지 나아간다.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나왔을 때 그것을 받아들여 거기에 그림을 그리고, 아는 사람들에게 보내주는 일을 한 화가. 사진을 찍고, 그 사진들로 작품활동도 하는 화가. 무대 미술에도 참여한 화가.


참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지만, 그의 그러한 활동들은 모두 그림으로 귀결된다. 그는 그림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고, 사진이 그림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림은 바로 우리들의 삶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 그의 그림이 한 유파로 정리될 수가 없다. 그는 시대에 맞게 또 도구에 맞게, 아니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발달된 도구들을 활용하여 그림을 그린다. 그에게는 도구가 중요하지 않다. 그림이 중요하다.


그림에 대한 데이비드 호크니의 생각을 게이퍼드와의 대담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사람들이 실제 현실만이 아니라 그에 대한 시각의 재현과 해석에 강하게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201쪽)


'이미지는 항상 매우 강력했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입니다. 만약 '미술계'가 이미지에서 멀어진다면 미술계는 주류에서 벗어난 활동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힘은 이미지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201-202쪽)


이런 말들... 그렇지만 이 책의 매력은 말보다는 그림에 있다. 역시 힘은 이미지와 함께 있다. 호크니가 작업하는 사진도 실려 있고, 그의 작품도 실려 있으니, 이미지가 이 책에 많이 나와 호크니의 미술 또 그의 미술관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호크니의 그림 '월드게이트 숲 3월 30일 -4월 21일'. 2006년.  30-31쪽>




<월드게이트 , 2010년 11월 7일. 오전 11시 30분과 '월드게이트, 2010년 11월 20일. 오전 11시>

 234-235쪽. 호크니의 사진


같은 장소를 그림으로 그린 작품과 사진으로 찍은 작품이 있다. 시간의 변화에 따른 풍경의 변화와 그림과 사진이라는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는 이런 활동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함께 감상해 보면 좋을 듯하다. 다만 그는 그림도 사진도 하나로 만들지 않았다. 여러 장으로 나누어 그린 다음 붙였다. 이 붙이는 과정에서 시간차가 나며, 그 시간차가 그림을 더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호크니의 이 말, '나는 항상 그림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누가 무엇을 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고 봅니다.' (11쪽) 마음에 새겨둘 필요가 있다.


우리가 눈을 뜨고 다닌다고 다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그림을 통해 우리는 보는 눈을 지닐 수 있고, 더 잘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필요를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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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고양이들 봄나무 문학선
어슐러 K. 르귄 지음, S.D. 쉰들러 그림, 김정아 옮김 / 봄나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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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 둘 중 하나의 대우를 받게 된다. 칭송이나 박해. 칭송이나 박해 모두 다름을 인식하고 대응하는 방식이다. 칭송이 좋을 듯하지만, 가끔은 다른 존재에게 어떤 특별함을 요구할 수 있다. 다른 만큼 더 잘해야 한다고 기대하고, 기대에 못 미치면 실망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다른 존재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동화에서 막내 제인은 엄마를 찾아가는 길에 우연히 어느 아저씨 집에 들어간다. 이 아저씨는 날개 달린 제인을 보고 배척하지 않지만 그 특이함을 이용한다. 제인에게는 '귀여운 애가야'라고 하면서, 언론에 알려 신문과 방송에 제인이 나오게 한다. 그리고 제인이 쇼를 하게 한다. 제인이 자기를 떠나지 못하도록 창문을 닫아놓고. 이게 과연 칭송일까?

 

칭송도 이럴진대 박해는 어떨까? 그것은 생명을 위협한다. 엄마 고양이인 제인은 날개 달린 고양이들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잡혀서 동물원에 가거나 서커스를 하는 등, 고양이들이 원하지 않게 갇혀 지낼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기 아이들이 안전한 곳으로 떠나가게 한다.

 

우리가 보통 다른 존재를 대할 때 지니는 태도인데, 사실 다른 존재를 대할 때 그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 그런 자세를 어린이들은 지니고 있다. 다름을 인식하지 않고 그대로 지낼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이 동화에서 그 역할을 행크와 수잔이 해주고 있다. 이 어린이들은 날개 달린 고양이 네 마리를 보고서도 놀라지 않는다. 그럼에도 날개 달린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하면 (심지어 자신의 부모들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고양이들이 구경거리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들은 남들의 눈에 띠지 않는 곳에 고양이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해주고 고양이들과 함께 한다. '함께'라는 말이 중요하다. 가두지도, 억지로 어떤 행동을 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냥 함께 어울린다.

 

이렇게 아이들만큼 고양이들을 그 자체로 인정해주는 사람이 한 명 더 나온다. 바로 엄마 제인과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 이 할머니는 창문을 걸어 잠근 아저씨와는 달리 창문을 활짝 열어둔다. 제인이 그것을 더 원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는 듯이.

 

이 활짝 열린 창문으로 농장에 있는 네 마리 날개 달린 고양이와 도시에 살고 있는 제인이 만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다른 공간에 있지만 왔다 갔다 하면서 만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여기에 날개가 없는 고양이, 약간은 허황스러운 알렉산더라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자신이 잘난 줄 아는 고양이. 세상에서 모험을 하고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이루고자 하지만 트럭에 놀라고, 사냥개에게 쫓기고, 나무 위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알렉산더.

 

제인이 구해줘 함께 지내게 되는데, 알렉산더 역시 날개 달린 고양이를 칭송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그냥 함께 지낸다. 그렇게 다름을 대하는 방식. 그 존재를 인정해 주는 일. 그래서 그는 처음에 말을 못 하던 제인이 말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알렉산더에게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날개 달린 고양이를 집에서 함께 지내는 고양이가 아닌 야생에서 지내는 고양이로 바꾸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날개 달린 고양이들이 다름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듯이 들고양이들도 우리에게 그런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야 한다.

 

환상적인 동화지만 다름을 인식하고 함께 지낼 때 서로가 행복해 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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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겨울 2020 소설 보다
이미상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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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 보다>는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문지문학상 후보작)을 묶은 단행본 시리즈로, 1년에 네 권씩 출간됩니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소설 보다> 봄, 여름, 가을, 겨울호가 있는 셈이고, 이들 소설 중에서 문지문학상이 나온다는 얘기일테다. 그렇다면 한 해 평론가들에게 인정받는 소설이 실린다는 얘기가 된다. 많은 소설이 나오는 중에 독자들에게 읽을 소설을 고를 때 하나의 기준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처음으로 읽어봤는데, 세 편의 소설이 실렸다. 이미상 '여자가 지하철 할 때', 임현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 전하영 '그녀는 조명등 아래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전하영 소설은 2021젊은작가상수상작품집에도 실렸기 때문에 여기서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아마도 이 소설이 평론가들에게 많은 주목을 받은 작품이었나 보다. 


그 작품을 빼고 이야기를 하면 이미상이 쓴 소설은 제목부터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지하철 할 때'라니... 잘못 읽었나 싶어서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 봤다. 분명 '탈 때'가 아니라 '할 때'다. 지하철을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생각해 보는데, 답이 없다. 


상황 설정도 현실적이지 않다. 얼굴리 쪼개지고, 그 얼굴들이 이야기를 한다. 그것도 본래 사람과 함께. 그래서 얼굴 둘과 주인공, 이렇게 셋이서 지하철을 탄다. 아니, 지하철을 한다. 한다는 말은 능동적인 행위를 나타낼 때 쓴다고 하면, 위험한 세상에 그냥 숨어 있지 않고 나와서 행동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얼굴이 둘로 쪼개진다는 의미, 여성이 하나의 얼굴로 살아가지 못하고, 여러 얼굴을 지니고 살아가는 현실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면 되는데... 그만큼 여성에게 기대되는 역할이 많음을, 때와 장소에 따라 여성에게 다른 얼굴을 요구하고 있음을 이 소설에서 쪼개진 얼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여러 얼굴을 지니고 살아야 하는 여성들의 형상화는 여성들이 도처에서 위협받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얼굴로는 살아남기 힘든 세상, 예기치 않은 폭력에 노출될 가능성이 많은 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지하철에 내려서 "살았다!"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고작 지하철을 탄 20분이 하루 종일 한 일이라는 사실. 그만큼 이동하는 시간에 어떤 위험을 겪을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임현의 '거의 하나였던 두 세계'는 결국 하나가 될 수 없는 세계라는 뜻으로 읽힌다. 위계가 나뉘어 있다는 점에서는 학문을 하는 세계도 마찬가지지만, 여기서 학문을 함은 진리를 추구하는 일이고, 진리 추구는 둘이 아닌 하나를 향해 나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길에서 하나로 될 수 없음을, 하나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둘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소설은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결코 하나일 수 없는 관계는 서로 조심을 해야 한다. 아무리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아니듯이, 그 사람에게 나인듯 말을 해서는 서로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별것 아니라고 여기면서 지켜보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상대에게 말할 때 '상처줄 것이 거의 분명한 말들인데도 상처주지 않으려고 나름 애쓰는'(99쪽) 소설 속 연재처럼 해야 한다.


이렇게 소설은 우리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준다. 내가 살아가고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세상, 그 세상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럼으로써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하게 한다.


<소설 보다> 겨울 2020에 실린 소설들, 세 편 모두 지금 우리 사회를 비춰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여성으로서 살아가기 힘든 세상, 타인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타인에게 상처주는 말이나 행위들을 하고 있는, 또는 그런 모습을 모른 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 이렇게 소설은 우리 사회의 거울이다. 거울을 들여다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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