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보이는창 2021년 가을호. 127호다. 이제는 나에게 오는 몇 안 되는 잡지다. 예전에 구독하던 많은 잡지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가거나 내가 떠나가게 했는데...

 

  노동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책. 이 책을 읽으며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생각하게 된다.

 

  이번 호에서는 마지막에 실린 이인휘 소설(시인, 강이산)이 마음에 와 닿았다. 와 닿은 정도가 아니라, 입에 이름을 담기 싫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서도 다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꼴이 싫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 사람이 득세하던 시절, 그리고 그가 뿌린 씨앗들이 득세하던 시절을 오롯이 살아간 사람의 이야기가 소설로 실려 있으니...

 

 물론 강이산으로 등장하는 그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1980-199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는 소설 속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

 

시대의 격랑에 온몸을 맡기고 살아갔던 사람, 그 시대의 격랑에 결국 부서져 버린 사람. 이름을 입에 담기 싫은 사람이 아무런 사과도 용서도 구하지 않고 사라져버린 날, 그로 인해 고통을 받은 분이 차가운 물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용서받지 못할 그 누구는 거대한 병원장례식장에서 그가 뿌린 씨앗들의 조문을 받고 있는데, 그로 인해 고통받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차가운, 딱딱한 곳에서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으니...

 

격동의 시대가 지나고, 인권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우리도 이제는 민주주의를 어느 정도 이루었다고 하는 이 시대에도, 좋지 않은 과거와 연결된 끈을 완전히 끊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이인휘가 쓴, '시인 강이산'은 너무도 아프게 다가온다.

 

이번 호에서 이 소설을 온전히 읽을 수 있어서 좋기도 하지만, 읽으면서 마음에 무거운 짐이 들어차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과연 우리는 이 소설의 주인공 강이산이 살았던 시대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을까?

 

우리는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을 얼마나 실현하고 있을까? 광주민주화운동을 계승해야 한다고, 더 멀리 가면 4·19혁명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87년 민주화 운동을, 촛불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쩌면 자꾸 과거를 잊어가고 있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사람 대접도 못 받고 개 끌려 가듯 경찰에게 끌려가는 장면,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친구를 도와줬다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받고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사람이 결국 죽음에 이르는 장면, 그러면서 자신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자책하면서 세상에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강이산의 모습.

 

과거로 머물렀으면 좋겠는데,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는 생각에 씁쓸하면서도 마음이 아려왔으니...

 

'삶이 보이는 창'. 여전히 우리에게 가야할 길이 있음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 있음을, 이런 소설을 비롯해서 여러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삶이 보이는 창'을 만나고 싶다는 마음... 과거 악의 씨앗들이 자라나지 못하게, 좋은 씨앗들이 살아갈 수 있게, 우리들 마음을 다잡게,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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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언어 - 판타지, SF 그리고 글쓰기에 관하여
어슐러 K. 르 귄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어슐러 르 귄. 


요즘 들어 관심을 가진 작가다. 한두 작품을 읽다가 감동을 받아 여러 권을 사서 읽게 되었다. 빌려 읽은 소설도 있지만, 왠지 소장하고 싶은 작가의 작품이다. 소설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쓴 글도 좋다. 그런 글에서 마음의 울림을 느낀다. 그러니 어찌 이 작가를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권 두권 계속 사 모으기로 하고, 이번에는 '밤의 언어'라는 르 귄이 쓴 소설이 아닌 다른 글들을 편집한 책을 읽게 되었다. 최근에 번역되어 나온 책을 사서 읽었지만,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발간이 되었다고 하는데도, 읽는데 오래되었다는 느낌을 받지 않는다.


당시 르 귄이 느꼈던 문제들이 지금도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 동안 거의 50년이 흐르는 동안 무엇을 했는가 자괴감도 든다.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르 귄은 자신은 페미니스트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게 왜?" 라고.


그런데 지금도 우리는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왼고개를 젓는 사람들이 있다. 또 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과격, 편협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왜 그럴까? 아직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 생각하고 대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남성이고 여성이고 또는 다른 성을 추구하든지 간에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모두가 같을텐데...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먼저 앞세우고, 거기서 성별로 나는 차이를 인정하면 차이가 차별이 되지는 않을텐데, 아직도 그러니, 당시 르 귄이 난 페미니스트다. 그게 왜 문제인가라고 말하는 모습이 강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최근에 읽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을 SF작품이라고 하지만, 그런 용어를 쓰기 이전에 먼저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은 르 귄의 글을 읽고 더 강하게 들었지만...


이처럼 이 책에 실린 어느 글을 읽어도 좋다. 작가에 대한 이야기, 작품에 대한 이야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글쓰기에 관한 글들이 실려 있어서 굳이 처음부터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된다. 그냥 아무 글이나 펼쳐서 읽어도 르 귄이라는 사람을 알아갈 수 있다.


몇몇 구절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환상 작가들은, 신화와 전설이라는 고대의 원형을 인용하는 사람이든, 아니면 보다 젊은 과학과 기술의 원형을 끌어들이는 사람이든, 사회학자들만큼이나 진지하고 어쩌면 훨씬 직설적으로,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인간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18쪽)


이것이 바로 이런 소설을 읽은 이유가 되고, 르 귄이 이렇게 평가받는 작품을 쓰는 이유다.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해서 르 귄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에 어떤 이름을 붙여 한쪽으로 규정하는 일은 잘못이다. 소설은 소설일뿐이다. 소설이라는 큰틀을 인정하고, 소설에서 작가만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찾아야 한다. 


작품을 하위 분야로 분류하고, 그 틀에 가두는 일이 문제가 있음을, 그렇게 틀로 나누고 가둬 그 작가를, 또는 그 작품을 이해하는데 한 가지 틀만 제시하면 안 된다고...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서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르 귄은 이 책 도처에서 하고 있다.


  상상력을 위협이라 여기는 사람들은 보통 판타지 작품을 '유치하다'고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이런 배제야말로 자신이 무력하며 노쇠한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판타지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할 때는 어린아이의 역할이 중심이 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정치가, 이득에 눈이 먼 상인, 관능주의자들은 상상 세계의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다.(294-295쪽)


자ㅡ 우리는 얼마나 상상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또 즐기고 있는가. 예전 생각을 해보자. 학창시절에 소설책을(어떤 소설책이든 상관없었다. 세계 명작이든, 추리소설이든, 로맨스 소설이든) 읽다가 교사에게 걸리면 교사들은 대뜸 공부 안하고 이런 것이나 읽고 있느냐고 야단을 쳤다.


상상력이 가장 잘 발휘된 문학 작품을 꿈으로 가득 찬 시기에 들어선 청소년들이 읽다가 야단을 맞는 경우, 이런 경우 우리는 더이상 상상력을 지닌 존재로, 세상을 새로움이 가득찬 경이로운 세계로 보는 눈을 지닌 존재로 지낼 수가 없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자라왔다.


하지만 이렇게 자라왔다고, 후대 세대들에게까지 이런 모습을 강요해야 하는가. 입시라는 굴레로 여전히 상상력이 억압당하게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보다 시험 점수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게 해야 하겠는가.


이런 모습들은 우리가 상상의 세계를 완전히 막아버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니 판타지라고 하든 환상이라고 하든, 아니면 고전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든 읽을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있는 이 현실에서 르 귄이 말하고 있는 앞 구절은 우리에겐 아프게 다가온다. 그것을 '유치하다'고 표현하는 사람들, 자신이 늙어버린, 무력한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는 이 말이...


제목이 된 '밤의 언어'. 자, 밤은 명징함을 넘어서 상상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는 때다. 밤의 언어는 바로 그런 상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인도하는 언어...


르 귄의 글은 바로 그런 밤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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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장의 말이 가슴을 때린다.


  "빅이슈가 지구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잡지를 만들지 않으면 됩니다. 무엇이든 인간이 만들어 내놓는 것은, 아무리 좋은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해도 결국 쓰레기로 변합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도, 인간 한 명이 지구에서 사라지는 게 가장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다고 우리가 잡지를 비롯한 여러 물건을 생산하지 않고 존재하기를 멈춰버릴 순 없으니 그 외의 것들을 해보려고 시도하는 거죠.' (8쪽)


  섬뜩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이 말에 의하면 인간이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지구에는 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최소한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필요한 만큼 쓰는 일. 더 많은 욕심을 내지 않는 일. 먹고, 자고, 입는 일부터 생각해보면, 참 쉽지 않은 일이다. 필요한 만큼 먹고, 필요한 만큼만 집을 얻고, 필요한 만큼만 옷을 입는다는 일... 그 필요라는 말이 사람에 따라서는 달라질 수 있기에...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쓰지 않고 버리는 일은 삼가야 한다. 버려지는 물건을 가장 작게 하는 일. 그러면 필요한 만큼에 가까워진다.


코로나19로 일회용품 사용이 늘었다고 한다. 안전을 위해서 배달음식을 먹는데, 배달음식의 특성상 일회용 용기에 담겨 오는 경우가 많다. 또 식당에서도 안전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종이컵을 내놓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은 한번 쓰고 버려지게 된다.


내가 먹을 음식을 담을 용기가 한번 쓰고 버려지는 일, 이는 필요한 만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한번 쓰고 버려지는 그릇들이 아니라, 한번 이상 쓸 수 있는 그릇들을 배달음식에 사용할 수는 없을까? 안전에는 문제가 없을까? 


[빅이슈]263호에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실천하는 사람들 이야기가 있다. 우선 일회용품이 아닌, 여러 번 쓸 수 있는 용품을 다회용품이라고 하는데, 다회용품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있다. '나 하나 실천한다고?' 라는 말보다는 '나 하나라도 실천해야지'라는 말을 할 때 지구에 쓰레기는 줄어들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씻기를 잘하면 안전에도 별 문제가 없고, 지구가 감당하지 못할 쓰레기를 만들어내기보다는 내가 조금(혹은 많이)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마음이 있으면, 또 그런 불편함보다는 다회용품을 썼을 때 편안함을 느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글들이 실려 있다.


아직은 시작단계지만 배달음식 그릇을 스테인레스 용기로 제공하고, 음식물을 가정에서 처리하지 않고, 그 용기에 그대로 남겨서 내놓으면 수거해서 세척한 뒤 다시 음식점에서 사용하도록 하는 사업이 시행되고 있다고 하니... 

(이런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관심이 있다면 [빅이슈]263를 참조하면 된다)


다회용품 사용이 불편하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다. 사실 배달음식을 시키더라도 일회용품으로 와도 남은 음식물을 처리해야지, 플라스틱에 묻은 음식물 흔적을 닦고 분리배출을 하는 일보다는 그냥 통째로 내놓는 일이 더 편할 수 있다.


일회용품도 줄이고 우리도 편해지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업들이 소개되고 있으니, 자활, 자립을 이야기하는 [빅이슈]다운 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편집자의 말처럼 멈춰버릴 수는 없으니 무엇이라도 시도해보려는 움직임을 보여줘 지구와 우리가 공존하는 길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빅이슈]가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편집자의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지 않고, 우리가 실천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 말로 다가오게 해야 한다. 적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이번 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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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평론이 발간된 지 30년이 되었다. 30년. 한 세대가 지났다고 해야 한다.


  첫권에서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로 시작했다고 하는데, 한 세대가 지나도록 과연 우리는 희망을 찾았는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넘어간다고 하면 이제는 그 세대의 장단점을 알고 장점은 계승하고 단점은 극복해야 하는데, 30주년이 된 녹색평론을 읽으면서는 오히려 더 가슴이 아파왔으니...


  이번 호를 기점으로 한 해를 쉰다고 한다. 그래, 한 세대 동안 우리 사회가, 우리 인류가, 우리 지구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그토록 열심히 외쳤으니, 이제는 숨을 고르고, 쉬고, 다시 외칠 수 있는 힘을 비축할 때도 되었지.


이렇게 생각하면 녹색평론이 한 해 쉰다고 그리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는 안 되겠는데, 이번 호에 실린 농업에 관한 글, 공동체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마음이 아려왔다. 녹색평론이 그토록 주장해왔던 소농공동체가 살아나기는커녕 오히려 농업에 대한 경시만 더 늘었고, 공동체가 부활하지는 못하고, 자본의 논리에 침식당한 요즈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거기에 대해서 경고음을 울려주던 녹색평론이 한 해 동안 나오지 못한다니, 


우리가 겪고 있는 농업의 쇠퇴, 공동체의 쇠퇴와 더불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책조차도 우리 곁에서 잠시 떠나는구나 싶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녹색평론은 다시 돌아올 거라 믿고,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우리들이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지켜나가야겠단 생각을 한다.


자본이 전세계를 집어삼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를 살리고 있는 곳이 있음을, 이번 호를 통해서 알게 되었으니... 


조그마한 섬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공동작업 공동분배를 이루고 있다고 하니, 아직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공동체들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확대되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더 많은 말이 필요없다. 이제 녹색평론은 한 해 동안 숨고르기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 곁에 올 것이다. 그때까지 녹색평론이 해왔던 일들을 우리가 해야 한다. 그것이 그동안 녹색평론을 만나왔던 우리들이 녹색평론에 대해 보이는 예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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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1-11-26 1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주 시사인에 김정현 편집자님 인터뷰 기사 나왔더라구요. 주말엔 녹색평론 좀 읽어야겠습니다~

kinye91 2021-11-26 13:54   좋아요 0 | URL
한 해 쉰다고 해서 아쉽지만, 곧 다시 만나게 될 거라 생각해요. 읽으면서 생각할거리가 많아서 좋아요.
 
파운데이션 10 - 지구의 끝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최서래.김옥수 옮김 / 현대정보문화사 / 2003년 7월
평점 :
품절


10권. 긴 여정의 끝이다. 그런데 끝이 개운치가 않다. 인류의 미래를 제시하는 트레비스의 모습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인류의 미래가 로봇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10권까지 오는 동안 신을 대신해서 우리 의지를 조종하는 존재들을 만나왔는데, 이를 신으로 대체해도 좋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행동한다고 생각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대한 계획 속의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드디어 지구를 찾는다. 그런데 지구는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인간들이 살 수가 없다. 왜 지구가 그렇게 되었는지를 밝히기보다는 지구에 관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곳, 드디어 달이다. 트레비스는 달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다시 다닐이라는 로봇을 만난다.

 

파운데이션을 시작할 때 셀던이 만났던 로봇이 다시 등장한다. 그가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끌어왔다고 한다. 물론 그는 계획할 수는 있지만 실행할 수는 없다. 실행은 바로 인류가 해야할 일.

 

이렇게 셀던프로젝트와 연결이 된다. 즉, 셀던프로젝트는 미래를 완전히 완결지어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변수로 작동하지만, 결국 그런 쪽으로 가야 한다는 당위와 연결이 된다.

 

이 당위를 실현시키기 위해 다른 인물들이 필요하고, 트레비스는 이런 역할을 하는 인물로, 이 소설 초기 셀던에 이어 후반기에 선택된 인물이다. 그렇다고 셀던프로젝트가 성공하는 것으로 끝나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400년 이상이 남아 있기 때문이고, 그 기간 동안 셀던도 트레비스도 또 중간에 나왔던 다른 인물들도 모두 사망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계획이 완수되는지를 누가 확인해야 하는가? 따라서 로봇은 그때까지 죽을 수가 없다. 자신의 능력을 전수하고 인간들의 미래를 지켜보아야 한다. 인간들의 자유의지는 살아 있지만, 전체적인 방향 역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소설은 트레비스가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그리고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인식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비록 더 많은 세월이 흘러야하겠지만. 여기서 가이아를 선택한 트레비스가 옳았음을 이야기하는데, 여전히 가이아는 닫힌 체계라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잘 납득할 수 없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블리스가 가이아이기도 하지만 개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전체적인 틀 속에서도 개인의 자율성을 확보하고, 그것이 보장되는 사회,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으면서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 다른 존재를 배척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회, 그런 사회를 아시모프는 바라지 않았을까 싶고...


가이아가 '정-반-합'에서 '합'이 되지만, 그 '합'은 완결된 존재로 있지 않고 다시 '정'이 되어 또다른 '반'을 통해 계속 변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렇듯 지구에 관한 비밀을 찾기 위해 떠나는 여정에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서, 그리고 낯선 존재를 만났을 때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 소설이 시사해주는 점이 많다.

 

방대한 우주를 배경으로 낯선 행성들에서 경험하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는 현실의 우리 모습을 살펴보게 된다. 이 소설에서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행성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다른 행성으로 이주해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지구의 위기를 생각하게 한다. 이런 소설을 읽는 이유도 낯선 세계를 통해서 우리 세계를 다시 발견하고, 우리 삶을 잘 살아가게 하는 데 있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긴 여정이었다. 10권까지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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