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시각과 미디어 동문선 문예신서 12
존 버거 지음 / 동문선 / 1990년 5월
평점 :
절판


제목만 보고 책을 사면 가끔 실패할 때가 있는데, 존 버거는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라는 생각. 몇 편 읽지 않았지만, 그에 대한 믿음이 있어서 중고서점에 이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곧장 구입.


읽기를 좀 미뤄두다 최근에 읽기 시작했는데, 어라, 많이 본 내용인데, 하다가 영어 제목을 보니, 이런 열화당에서 최민 번역으로 [다른 방식으로 보기]란 책으로 나왔고, 내가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기억의 짧음이여. 이제는 책을 읽어도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시기에 도달했는가. 어린 적 읽었던 책들은 그래도 장기기억에 남아 있는데, 요즘 읽은 책들은 장기기억까지 가기가 힘들었는지, 아니면 이 책 저 책이 혼재되어 읽었는지 아닌지 헷갈리고 있는지...


책 안쪽에 영어 제목을 봤다면 그래도 읽었다는 기억은 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는데, 그럼에도 책 두께가 다르다. 무언가 다른 내용이 있다는 뜻. 살펴보니 열화당 책은 7장인데, 이 책은 8장이다. 한 장이 더 있다. 그럼 됐다. 그 한 장의 내용으로 만족하자. 어차피 헌책으로 사지 않았던가라는 여우의 신포도같은 자기 합리화도 하고.


앞 내용에서는 이름에서 예전 번역이 느껴진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이름과는 다른 이름을 쓰고 있으니... 그야 뭐. 당시 번역 용어라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나도 한때는 손흥민이 뛰고 있는 영국 축구팀 토트넘을 토튼햄이라고 생각하고 쓴 적도 있으니...


앞 내용은 열화당 책과 중복이 되니, 생략하고, 이 책에 실려 있는 8장을 보면 '본다는 것의 위상기하학'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그러면서 '시각 메카니즘, 사진의 발생과 그 배경, 부즈즈와의 시각, 수집가 역할을 담당하는 미술관, 자연으로부터의 이탈, 복제환경의 확산, 전람회에서 광고로, 새로운 관점의 위상'이라는 8개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 8장이 '보기'에 대해서 역사적인 고찰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존 버거가 썼다고 하기보다는 존 버거의 '보기'에 대해서 정리해주고 있다고 보면 좋은 글이다. 이 글을 먼저 읽고 앞의 내용을 읽으면 훨씬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결국 보기는 개인적인 보기일수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규정된 보기임을 생각하게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요즘 '악마의 편집'이라는 말로 사고를 확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사실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기를 원하는 방향으로 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드라마야 그렇다쳐도 예능 다큐멘터리라고 하는 영상에서도 보여지길 원하는 장면으로 편집됨을, 또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사실이라고만 믿을 수 있는 영상에서도 보여지길 원하는 장면으로 편집됨을 생각해야 한다.


이 점을 정치판으로 옮겨보면, 정치판이야말로 교묘한 보여지기 아닐까 한다. 보여지기 원하지 않는 부분은 삭제하고 보여줄 부분만 보여주는... 그런 편집기술, 보여주기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한 지금이니...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믿는 시대는 지나갔다.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보여지는 것 이면에 숨어 있는 보여지길 원하지 않는 것을 찾을 수 있는 눈도 지녀야 하고.


존 버거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그가 그림(미술-예술)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이것일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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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1-19 1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ways of seeing의 옛날 버전인가요?
저는 계속 구입 중입니다^^

kinye91 2022-01-19 21:02   좋아요 1 | URL
네. 예전 번역인데.. 최근 열화당에서 나온 책보다 한 챕터가 더 있더라고요.
 

  올레길 또는 둘레길을 걸으면 가끔 길을 잃는다. 갈림길인데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우리나라 길에서 이정표는 이상하게도 중요한 지점에 없는 경우가 있다. 다 와서 또는 갈림길에서 이정표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라 헤매게 된다.


  이때 사람들 발자국이 많이 나 있는 길로 가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다. 발자국이 많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갔다는 이야기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길은 올레, 또는 둘레길이기 때문이다.


  발자국이 보이는 길을 찾기가 힘들어진 요즘, 앞서 간 사람들은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자국을 남기는데 그 자국이 바로 리본들이다. 나뭇가지나 전봇대 또는 담장 틈에 리본들을 묶여 놓는다.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인지 잘 모를 때 길바닥을 보지 않고 -사실 우리나라는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도 웬만하면 포장이 되어 있다. 아스팔트 아니면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으니, 발자국을 남기기는 이제 힘들다. 그래서 선인들의 발자국을 좇아가다란 말보다는 선인들의 리본을 따라가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 눈 높이에 있는 앞을 보게 된다.


색색의 리본들이 이리로 오면 된다고 길을 알려준다. 그렇게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게 사람들은 서로를 도와준다. 고창환 시집을 산 이유는 제목이다. 제목이 '발자국들이 남긴 길'이다. 사람들이 자꾸 다녀서 발자국들이 포개지고 포개지고 또 연결이 되면 길이 된다. 그런 길을 따라가면 나 혼자 가는 길도 함께 가는 길이 된다.


요즘처럼 사회적 거리두기 운운하는 때, 이런 발자국이란 낱말을 만난 자체도 반갑다. 그래서 망설임없이 구입. 읽기 시작. 이 시집 도처에서 발자국들이 나오지만, 발자국은 발자국으로 남겨두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발자국으로 이해하기로 하다.


시인은 우리들에게 언어를 통해서 발자국을 남겨놓는 사람이니, 시를 읽는 일은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일.


고창환 시인의 언어 발자국, 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만난 시가 '내 동료 K 선생'이다.


 내 동료 K 선생


바르게 사는 일이 찬밥인 세상에서

그는 기꺼이 찬밥을 택했다

나는 아무래도 찬밥이고 싶지 않아서

목구멍에 걸린 밥알을 애써 삼키며 살지만

그는 찬밥도 거침없이 삼킨다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지키면서 사는 일이 어디 쉬운가

상한 밥알까지

우적우적 먹어치우는 세상 앞에서

기꺼이 찬밥이 되는 일이 어디 쉬운가


사는 길은 셋뿐이다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우며 살거나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기꺼이 찬밥이 되는 것이다

바르게 살려면 찬밥이 되어야 하고

찬밥이 되지 않으려면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워야 한다 나는

목구멍의 밥알 선생이고 그는 찬밥 선생이다


고창환, 발자국들이 남긴 길. 문학과지성사. 2000년. 67쪽.


'찬밥과 상한 밥과 목구멍에 걸린 밥', 이렇게 세 종류의 밥이 나오는데, 세 유형의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쉽게 '찬밥 신세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배제된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이 시에서 '찬밥'이라고 하면 밥 종류라고 하기보다는 남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목구멍에 걸린 밥'은 살기 위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상한 밥'은 앞뒤 가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찬밥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니, 옳은 일을 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찬밥 대우를 받는 사람이다.


너만 잘났냐? 부터 시작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고이지 않는다 등등... 적당히 어우러져 살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목구멍에 걸린 밥'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중간만 가라는 말, 나서지만 말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하다못해 우리가 남이가, 좋은 게 좋은 거야란 말도...


그래서 '찬밥'이 되는 사람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실제로 경외하여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은 틈이 없어라고 하거나 저 사람에게선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찬밥'같은 사람이 많은 사회가 꼭 인간미가 없는 사회는 아니다. 그들은 바르게 살 뿐이지 인간미를 잃고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목구멍에 걸린 밥이나 상한 밥을 먹는 자들이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찬밥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그에 동조하는 부류들이 열심히 그 말들을 실어나르기 때문일 수 있다.


상한 밥을 먹는 일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합리화하는 족속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족속들. 이들에게 찬밥은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내로남불'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을테다.


상한 밥을 먹는 자들에겐 찬밥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므로... 하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어떤 밥인지 생각하면 되니까.


정치인들이 서로를 상한 밥까지 먹는 인간들이라고 비난하곤 하는데, 모두가 상한 밥을 먹으면서, 하다못해 목구멍에 걸린 밥조차도 안 되는 족속들이면서 '찬밥'이 되고자 하는 이는 너무도 드문 이 현실에서... 누가 누가 상한 밥을 잘 먹나 경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 시 읽어보자.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선거들에서 우리는 어떤 밥을 선택해야할지, 시인이 시를 통해 남겨준 발자국을 보자. 우선 보기라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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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 - 강렬했지만 스러진 존재의 희미하지만 영원한 온기
손홍규 지음 / 문학사상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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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세 인물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다가 소설 목차를 보는데 네 인물이 나와야 한다. 날짜가 네 개기 때문이다.


1895년 4월 24일. 1956년 7월 19일. 2009년 5월 23일. 2014년 4월 16일.


년도를 보면 대강 인물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지금과 가까운 2000년대는 인물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2009년 고 노무현 대통령, 2014년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들 가슴에 상처를 남긴 세월호. 그렇다면 1895년은  1894년 동학혁명 다음 해니, 전봉준을 떠올릴 수 있다. 동학혁명하면 많은 사람을 생각할 수 있지만, 전봉준을 대표라고 할 수 있으니... 1956년은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1950년대 비극적인 죽음에서 박헌영이나 조봉암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를 추측하기는 힘들다. 이는 소설을 읽어봐야 한다. 소설을 읽는 순간, 아, 1956년은 박헌영이 사망한 해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이렇게 이 소설은 전봉준, 박헌영, 노무현, 세월호(학생)를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지나온 과거와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과 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소설을 통해서 과거 속 인물을 만나고, 그들의 꿈을 알게 되고, 그들의 꿈이 어떻게 좌절되었는지, 또 역사에서 그들이 한 역할이 어땠는지를 체험함으로써 현실을 잘 살아내는 힘을 키울 수 있게 된다.


작가의 말이 이런 소설의 특징을 대변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기록하는 게 역사라면 우리가 어떤 꿈을 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건 소설이라고. 소설은 기억이다. 아름답고 비참했던 사람들이 어떤 세계를 꿈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가장 쓸쓸한 형식이다. 잠이 들면 그들은 내게 예언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잠에서 깨어나면 나는 무슨 꿈을 꾸었는지 기억하려 애썼다. 이 소설은 가까스로 기억해 낸 이야기다." (395쪽. 작가의 말)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을 소설가는 소설을 통해서 기억하고, 우리는 그 기억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된다. 소설 제목이 된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는 바로 그들의 죽음 직전에서 시작해 그들의 삶을 살펴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제목에 나온 예언자는 미래를 현실에 불러온다. 불러오기는 하지만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예언이다. 예언은 실현을 전제로 이야기되는 미래의 현실이지만, 예언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냥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예언이 실현되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율성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예언을 실현하는 힘은 바로 사람이다. 사람들 사이의 사랑이다. 사랑이 있으므로 좀더 나은 세상을 예언하고, 그런 세상을 실현하려 노력한다. 그 노력에 함께 하려고도 한다. 그러나... 예언은 실현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


예언을 실현시키려 하지 않는 집단이 더 큰힘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권력, 경제력과 추종하는 사람들이 더 많이 있다. 따라서 예언자는 그 자체로 핍박을 받고 현실에서 추방당한다. 그는 미래의 꿈을 꾸지만, 그 미래가 오기 전에 현실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것이 바로 예언자의 운명이다.


이런 예언자의 운명을 가혹하다.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보지만 그 세상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니... 사랑이 넘치지만 그 사랑이 자신을 더 힘들게 하고 있으니...


모세가 생각난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출한 사람. 신의 뜻에 따라 그들을 이끌고 나온. 하지만 모세는 자신이 이끌던 사람들과 함께 신이 말한 그 땅으로 가지는 못한다. 모세의 역할은 현실에 미래를 가져오지만 자신은 현실에서 그 미래로 가지 못하는 존재에 머문다.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를 꿈 꾼 사람들. 좀더 나은 세상을 향해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려 한 사람들. 찬반 논쟁이 있을 수 있고, 그들에 대한 좋고 나쁨이 있을 수 있지만 그들이 현실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를 현재에 가져오려고 했다는 데는 동의할 수 있다.


이렇게 그들의 좌절된 꿈을 '해원'이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네 시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해원'이다. 소설에서는 '해원'을 한자어로 표기하지 않았기에 '해원'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독자가 의미를 붙일 수가 있다.


세월호에서 나오는 해원은 아빠와 엄마 이름 한 글자씩을 따서 만들었다고 하지만, 세월호라는 이름에서 바다 해(海)를 연상한다. 원(源)은 근원이라고 상상할 수도 있으니, 유치환이 쓴 "깃발"이란 시에 나오는'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란 구절에서 우리가 바라는 세상, 이상적 세계로 해원을 생각할 수도 있다.


부모는 그렇게 아이가 이상적인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해원'이라는 이름을 지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아다시피 바다는 자비롭지만은 않다. 차가운 바닷속에서 결국 생명을 잃은 아이... 이 아이가 지니고 있을 원망을 풀어야 한다. 그러니 이름에 이제는 원망을 푼다는 '해원'이란 뜻을 보탤 수 있다.


원망... 바라던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생기는 마음. 그것도 개인적인 욕망이 아니라 사회적 변혁에 대한 꿈이었다면 개인의 원망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문제로 계속 남아 있게 된다. 풀어야만 하는 원망이다. 그래서 원망을 푼다가 아니라 원망을 풀어야 한다고 '해원'을 생각해야 한다.


동학혁명을 통해 전봉준이 꿈꾸었던 백성들이 잘사는 나라, 공산주의 운동을 통해 박헌영이 꿈꾸었던 민중들이 잘사는 나라, 민주주의를 통해 시민들이 잘사는 나라를 꿈꾸었던 노무현의 나라. 그들은 그런 나라가 오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그런 나라는 예언 속 나라였다. 그들은 예언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존재였고, 다른 사람들이 결국에는 그런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게 하는 존재였다.


비록 자신들은 그 미래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은 역사 속에 살아남아 예언이 공언이 아니었음을 기억하게 하는 존재가 된다. 역사 속에서 그렇게 기억되는 존재더라도 이렇게 소설 속에 등장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면 사람들 마음에 더 쉽게 다가오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머리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기억하게 된다. 이런 작업을 소설을 통해서 소설가는 하고 있고, 그래서 작가는 '아름답고 비참했던 사람들이 어떤 세계를 꿈꾸었는지를 기억하는 가장 쓸쓸한 형식'이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을 통해 그들이 그런 세상을 꿈꾸었던 것은, 미래를 예언하고 실현시키려 노력했던 것은 바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바탕이었음을. 실패할지라도 지속적인 꿈을 이야기한 것은 바로 사랑이 있었음을, 그런 사랑이 지금의 우리를 있게 했음을... 


이 소설을 통해서 그런 존재들을 마음 속으로부터 기억할 수 있게 된다.


덧글


소설이어서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들을 정확히 표기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존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정확히 써야 한단 생각을 한다. 아예 없던 인물을 창조해내면 몰라도...


220쪽. 앙굴마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천 번째 살인을 저지르려는 순간 붓다를 만나 회심하여 비구니가 되었지요.'라는 서술이 있다. 그런데 비구는 남자 승려, 비구니는 여자 승려라는 차이가 있으니, '앙굴마라는 비구가 되었지요'라고 해야 적절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304쪽. 박헌영을 주인공으로 삼은 장면에서... '박 선생, 정말 나를 모르겠소? 허현이외다.'라는 서술이 있는데, 박헌영과 관련 있는 변호사라면 아무래도 '허헌'이 아닐까 한다. '허헌이외다'라고 하는 편이 더 핍진감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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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SF를 쓰는가 -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 사이에서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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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작가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마거릿 애트우드에 대해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SF작품에 대해선 어느 정도 편견이 있었다. 공상과학소설이라고, 과학소설이라고 하지 않고, 공상이란 수식어를 붙여 생각했다. 어린시절부터 이런 용어에 익숙했고, 언어가 사고를 결정하기 쉬운데, 공상이라는 말 때문에 SF소설은 어린 시절이나 읽는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슐러 K. 르 귄을 만났다. SF소설이 공상이라는 말이 빠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학소설이라는 말도 무언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소설 자체가 상상이 창조해낸 이야기 아닌가. 소설에서 현실의 모습을 그대로 찾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 아닌가.


그런 사람이 권력자가 되면 금서다 뭐다 하면서 소설에도 간섭을 하지 않나, 그렇다면 소설은 상상 이야기니 상상을 국한시키는 수식어를 굳이 붙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애트우드는 사변소설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사변소설, 생각을 밀고 나가는 소설.


이런 생각 덕분에 애트우드가 쓴 [시녀이야기]와 [증언들]을 읽으면서 SF라는 생각보다는 맞이하고 싶지 않은 사회라는 생각을 했다.


있음직하지 않은 세상, 그러나 있음직한 세상. 어쩌면 [시녀이야기]나 [증언들]에서 그려진 사회의 모습이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에도 어느 정도 나타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소설은 사회를 반영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장르이든.


이런 소설을 쓴 애트우드의 글쓰기에 대한 책이 나왔다. 읽어볼 만하다. 애트우드의 어린 시절부터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알 수 있게 되고, 또 애트우드가 어떤 작가들에 관심을 가졌는지, 그리고 르 귄과 애트우드의 비슷한 점도 알게 될 수 있는 책이다.


특히 애트우드 역시 SF라고 해서 공상이 아님을, 현실을 그려내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으니... 나는 왜 SF를 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바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소설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다양하게 표현해내는 예술이니, SF든 아니든 작가는 바로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작품을 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작품을 읽고 인간을, 바로 나 자신을 이해하려고 한다.


특히 애트우드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유스토피아'라는 말에 공감이 갔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합쳐진 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유토피아이기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디스토피아이기만 하지도 않다는 사실.


[시녀이야기]나 [증언들]이 디스토피아라고 해도, 그 소설 속에 이미 유토피아가 들어가 있음을 알 수 있고, 유토피아로 그려진 세상이 마냥 유토피아만은 아니니, 애트우드가 말하는 '유스토피아'란 용어가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느 정도의 유토피아와 어느 정도의 디스토피아가 결합된, 그래서 결정되지 않고 과정을 통해서 변화가 가능한 세상 아니던가. 우리 인간이 살아가야 할 세상이 이렇고, 앞으로도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갈테니...


소설에 대한 애트우드의 글을 보자.


나는 스토리텔링이란 미완의 작업,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많은 이들이 자문하게 되는 질문들을 통해 구현되는 작업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를테면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대체 우리는 이 행성을 얼마나 망가뜨려 버린 걸까? 인간의 내면을 얼마나 깊이 파헤쳐 볼 수 있을까? 종 전체가 자기 구원을 위해 애쓰는 상황이 실제로 벌어진다면 그건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한 가지 더. 유토피아적 사고는 대체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 이 질문을 던지게 되는 이유는 유토피아적 사고란 절대 완전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너무나 희망에 차 있는 종이므로, 그런 건 불가능하다. '좋음'이란 것이 있는 한, 언제나 '나쁨'이라는 쌍둥이가 존재할지 모르나 인간에게는 '더 좋음'이라는 다른 쌍둥이도 있다. (156쪽)


소설가의 거짓말이라 함은, 진실을 우회적으로 전달하고자 소설가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해석한 진실이다. (197쪽)


그래서 소설을 SF라는 틀에 가둘 필요가 없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 또는 원치 않는 세상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고, 간접 체험할 수 있다.


1부에서는 애트우드의 자전적 이야기가 흥미를 끌고, 2부에서는 다른 작품에 대한 애트우드의 생각을 알 수 있어서 좋으며, 3부에서는 애트우드의 짧은 소설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시녀이야기], [증언들]을 읽은 독자라면, 또 [눈 먼 암살자]를 읽은 독자라면 애트우드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더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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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차 여행을 했다. 케이티엑스를 타고 가는 길. 결코 요금이 싸지 않은데, 그래도 운전하는 내 노동력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니, 그 가격이 상쇄되었다고 생각하고 떠난다.


  기차를 타니, 광고나 또는 책자에 '잇다'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잇다'

  한 지점에서 한 지점을 연결해 준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을 맺어준다. 이렇게 '잇다'는 관계맺다가 된다. 고립되어 있지 않고, 함께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여행을 하면서 보게 된 낱말 '잇다'를 [빅이슈]를 읽으면서 떠올리게 된다.


  [빅이슈]를 받아보면서 늘 느끼는 점이 바로 '잇다'란 말로 정리될 수 있다. 관계맺기, 홀로가 아닌 함께. 그렇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하는 잡지가 바로 [빅이슈]다.


판매원인 '빅판'이 전철(지하철)역에서 내리는 사람들과 연결이 되고, 또 잡지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연결되는 '함께'를 실천하는 잡지.


새해 신년호다. 무엇을 연결하고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번 호에서는 '노년'을 다루고 있다. 사람이 나이 먹어간다는 것, 나이 들어간다는 것, 이것은 바로 시간의 연결이다. 시간은 끊어지지 않는다. 시간의 끊어짐. 이건 죽음이다. 죽음 전까지 우리는 연속되는, 연결되는 시간 속에서 산다.


그런데 가끔 시간을 끊어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세대론이 그렇다. 이 세대, 저 세대가 다르다고, 연결되기보다는 단절되어 있다고, 그래서 소통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과연 그럴까? 시간을 끊을 수 있을까? 다른 말로 하면 한 세대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을까? 지금 젊은 세대라고 해서 영원히 젊은 세대로 남을까? '라떼는'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될까?


아니다. 우리는 연속되는 시간 속에서 서로 다른 세대를 살아간다. 그 살아온 시간 속에 수많은 세대들이 연결되어 있다. '요즘 젊은애들'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그런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그렇게 우리는 연결된 시간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불리는 세대를 통과해 왔다.


죽음으로 시간과 단절될 때까지는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인위적으로 끊고 다르게 이야기를 하려는 모습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말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꼭 아이만이 아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이렇게 우리는 '잇다'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노년'이라고 특정한 시기라고 해서는 안 된다.


노년은 장년, 청년, 소년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연결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빅이슈] 이번 호를 읽으면서 [빅이슈]가 바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번 호에 있는 옥희살롱 김영옥 대표의 인터뷰 글이 있는데, 이 말이 바로 '잇다'를 대표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년에 대한 추상적인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 돌보고 마음을 쓰는 관계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우리는 어떤 것을 연습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매뉴얼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나이 든 사람들이나 아픈 사람들을 자주 만나야 한다. 옆에서 만나본 적이 없으면 자기의 미래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나. 자기의 돌봄 역량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 (46쪽)


아이들에게도, 노인들에게도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 마을은, 공동체는 그렇게 사람들을, 세대들을 잇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고 살아가기 힘든 지금 시대에도 이러한 공동체를 마련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공동체는 뜻이 맞는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장소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여러 세대들이 함께 갈등하고 그 갈등을 풀어가면서 서로가 서로를 조금씩 이어가는 그런 장소여야 한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는 세대를 막론하고 이런 공동체가 필요하다. [빅이슈]를 읽으면서 [빅이슈]가 이런 연결, 즉 '잇다'를 기차보다도 더 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새해 받아본 소중한 잡지, 우리와 우리를 이어주는 그런 잡지 [빅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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