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길 또는 둘레길을 걸으면 가끔 길을 잃는다. 갈림길인데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를 때가 있다. 우리나라 길에서 이정표는 이상하게도 중요한 지점에 없는 경우가 있다. 다 와서 또는 갈림길에서 이정표가 없어서 어디로 가야하는지 몰라 헤매게 된다.


  이때 사람들 발자국이 많이 나 있는 길로 가면 실패할 확률이 줄어든다. 발자국이 많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많이 지나갔다는 이야기고,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는 길은 올레, 또는 둘레길이기 때문이다.


  발자국이 보이는 길을 찾기가 힘들어진 요즘, 앞서 간 사람들은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해 자국을 남기는데 그 자국이 바로 리본들이다. 나뭇가지나 전봇대 또는 담장 틈에 리본들을 묶여 놓는다.


  갈림길에서 어느 방향인지 잘 모를 때 길바닥을 보지 않고 -사실 우리나라는 도시뿐만 아니라 시골도 웬만하면 포장이 되어 있다. 아스팔트 아니면 콘크리트로 포장되어 있으니, 발자국을 남기기는 이제 힘들다. 그래서 선인들의 발자국을 좇아가다란 말보다는 선인들의 리본을 따라가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 눈 높이에 있는 앞을 보게 된다.


색색의 리본들이 이리로 오면 된다고 길을 알려준다. 그렇게 길을 잃지 않고 갈 수 있게 사람들은 서로를 도와준다. 고창환 시집을 산 이유는 제목이다. 제목이 '발자국들이 남긴 길'이다. 사람들이 자꾸 다녀서 발자국들이 포개지고 포개지고 또 연결이 되면 길이 된다. 그런 길을 따라가면 나 혼자 가는 길도 함께 가는 길이 된다.


요즘처럼 사회적 거리두기 운운하는 때, 이런 발자국이란 낱말을 만난 자체도 반갑다. 그래서 망설임없이 구입. 읽기 시작. 이 시집 도처에서 발자국들이 나오지만, 발자국은 발자국으로 남겨두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발자국으로 이해하기로 하다.


시인은 우리들에게 언어를 통해서 발자국을 남겨놓는 사람이니, 시를 읽는 일은 시인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일.


고창환 시인의 언어 발자국, 시 발자국을 따라가다가 만난 시가 '내 동료 K 선생'이다.


 내 동료 K 선생


바르게 사는 일이 찬밥인 세상에서

그는 기꺼이 찬밥을 택했다

나는 아무래도 찬밥이고 싶지 않아서

목구멍에 걸린 밥알을 애써 삼키며 살지만

그는 찬밥도 거침없이 삼킨다

무엇인가 한 가지라도

지키면서 사는 일이 어디 쉬운가

상한 밥알까지

우적우적 먹어치우는 세상 앞에서

기꺼이 찬밥이 되는 일이 어디 쉬운가


사는 길은 셋뿐이다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우며 살거나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기꺼이 찬밥이 되는 것이다

바르게 살려면 찬밥이 되어야 하고

찬밥이 되지 않으려면

목구멍에 밥알을 걸고 살거나

상한 밥알까지 먹어치워야 한다 나는

목구멍의 밥알 선생이고 그는 찬밥 선생이다


고창환, 발자국들이 남긴 길. 문학과지성사. 2000년. 67쪽.


'찬밥과 상한 밥과 목구멍에 걸린 밥', 이렇게 세 종류의 밥이 나오는데, 세 유형의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쉽게 '찬밥 신세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배제된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 이 시에서 '찬밥'이라고 하면 밥 종류라고 하기보다는 남들에게 배척당하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면 된다.


'목구멍에 걸린 밥'은 살기 위해서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고, '상한 밥'은 앞뒤 가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찬밥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람은 바르게 사는 사람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옳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아니, 옳은 일을 하기 때문에, 바르게 살기 때문에 남들로부터 찬밥 대우를 받는 사람이다.


너만 잘났냐? 부터 시작해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고이지 않는다 등등... 적당히 어우러져 살라고 하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렇게 우리는 '목구멍에 걸린 밥'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중간만 가라는 말, 나서지만 말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하다못해 우리가 남이가, 좋은 게 좋은 거야란 말도...


그래서 '찬밥'이 되는 사람을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실제로 경외하여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은 틈이 없어라고 하거나 저 사람에게선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찬밥'같은 사람이 많은 사회가 꼭 인간미가 없는 사회는 아니다. 그들은 바르게 살 뿐이지 인간미를 잃고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목구멍에 걸린 밥이나 상한 밥을 먹는 자들이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찬밥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고, 그에 동조하는 부류들이 열심히 그 말들을 실어나르기 때문일 수 있다.


상한 밥을 먹는 일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합리화하는 족속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족속들. 이들에게 찬밥은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내로남불'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기도 했을테다.


상한 밥을 먹는 자들에겐 찬밥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이 아니므로... 하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겠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어떤 밥인지 생각하면 되니까.


정치인들이 서로를 상한 밥까지 먹는 인간들이라고 비난하곤 하는데, 모두가 상한 밥을 먹으면서, 하다못해 목구멍에 걸린 밥조차도 안 되는 족속들이면서 '찬밥'이 되고자 하는 이는 너무도 드문 이 현실에서... 누가 누가 상한 밥을 잘 먹나 경기하는 것도 아닌데...


이 시 읽어보자.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선거들에서 우리는 어떤 밥을 선택해야할지, 시인이 시를 통해 남겨준 발자국을 보자. 우선 보기라도 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