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왕홍으로 통한다 - 14억 중국시장의 크리에이터, 2020년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
임예성.이혜진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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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홍'이란 말을 얼핏 들으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중국의 왕홍하면, 왕홍이라는 사람이 중국에서 매우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 하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왕홍'은 사람 이름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유튜버'가 사람 이름이 아니듯이. '왕홍'은 중국어로 인터넷을 뜻하는 왕뤄와 유명인을 뜻하는 홍런의 합성어(13쪽)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유명한 유튜버쯤 된다고 보면 된다.


개인방송자라고 해도 좋겠고, 이런 왕홍이 중국에서 많이 나왔고, 또 이들은 17조 원의 경제 시장을 형성하고 있고, 외국 플랫폼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은 중국에서 자신들이 구축한 플랫폼으로 자신들의 인터넷 활동을 하는데, 여기에 왕홍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나라 유튜버는 간접광고나 또는 자신의 방송 전이나 중간에 하는 광고 수입을 얻지만, 중국의 왕홍은 방송을 통해서 직접 제품을 광고하고 판매까지도 한다고 하니, 유튜브와 홈쇼핑을 합친 활동을 하는 사람이 왕홍이다.


이러한 왕홍에 대해서 쉽게 알려주고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중국에 유학가서 직접 왕홍 활동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썼기에 이해하기가 쉽다.


왕홍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해야 왕홍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중국과 관련된 활동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적절한 입문서가 될 수 있는 책이다.


여기에 왕홍 활동으로 돈을 번다는 목적보다는 무엇인가 사회에 도움이 되는 활동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니라 국제 교류를 할 수 있다는 점. 나라와 나라를 이어주는 역할을 왕홍이 할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으며, 앞으로 중국으로 진출하려는 사람들에게 왕홍으로서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조언을 해주고 있는 책이다.


중국을 짝퉁의 나라, 모방과 표절의 나라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 책은 중국은 이미 스마트 사회로 나아갔다고, 모방을 넘어서 이제는 자신들의 플랫폼을 구축하고, 거기서 14억 인구가 참여하는 거대한 세상을 만들어냈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왕홍, 중국의 유튜버... 우리나라 기업들도 중국의 왕홍들을 초빙해 기업과 제품 홍보를 하고 있다고 하니, 반대로 우리나라 왕홍들을 중국이 필요로 한다는 점도 보여주고 있다.


개인방송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 이제는 우리나라를 넘어서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책.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문 분야를 만들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으니... 세상 어떤 일도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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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는 어떻게 진실을 말하는가 - 넘겨짚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는 71가지 통찰
바츨라프 스밀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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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을 펼칠 때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어림짐작으로 정책을 수립해서는 안 된다. 확실한 사실을 기반으로 할 때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수 있고,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다.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는 근거 중 하나가 바로 숫자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 숫자는 사실을 수치로 표시한 기호이니 사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숫자만 믿을 수 있나?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숫자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진실을 가릴 수도 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 말을 숫자는 진실을 말한다고 할 수 있을까?


책 제목이 된 '숫자는 어떻게 진실을 말하는가'를 보면서 영어로 'NUMBERS DON'T LIE'라고 되어 있는 말과 등치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가령 임금인상이 노동자는 10%가 되고, 자본가는 1%가 되었다. 인상률에서 10배나 차이가 나니, 노동자들의 삶이 많이 좋아졌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아니다.


300만 원(많이 쓰자) 받는 사람이 10% 인상이 되면 330만 원을 받게 된다. 30만 원 오르게 된다. 자본가가 1000만 원(적게 쓰자) 받았는데 1% 인상이 되면 1010만 원을 받게 된다. 오른 액수에서 10배가 차이 나는가? 아니다. 겨우 3배 차이다. 만약 3000만 원(아마 이 편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을 번다면? 1% 인상이 되어도 30만 원이 오르게 된다. 인상률에서는 10배가 차이나지만, 액수는 같다. 2%만 올라도 60만 원이다. 노동자보다 2배 많은 돈이 오르게 된다.


숫자는 거짓말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상률만 이야기하면 거짓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거짓이 아니라고 할 수 있으려면 오른 액수를 숫자로 나타내야 한다. 그리고 총액을 이야기해야 하고, 총액과 더불어 사회에서 쓸 수 있는 자원들에 대한 이야기도 나와야 한다.


즉, 숫자는 단순히 하나의 숫자로 끝나서는 안 된다. 다양한 숫자들을 이야기하고, 그 중에서 가장 타당한 숫자를 근거로 삼아야 한다. 아니면 다양한 숫자들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숫자만 이야기하지 말고. 그래야 영어를 우리말로 번역할 때 바꾼 말이 진실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다. 숫자를 살펴보는 습관을 지녀야 하고, 또 숫자를 하나로만 환산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환산할 필요성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사람, 국가, 기계-설비-장치, 연료와 전기, 운송과 교통, 식량, 환경'에 걸쳐서 많은 숫자들을 통해서 사실을 판단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막연하게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점들을 숫자를 통해서 사실임을, 또는 허구임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접근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나라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원자력발전(이 책에서는 핵발전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용어가 정리되어야 논의를 할 때 논점이 명확해진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몇 구절을 인용하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논쟁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선 저자는 원자력발전은 감소하는 추세라고한다. 


'원자력발전이 차지한 비중은 1996년 정점에 달해 거의 18퍼센트였지만, 2018년에는 10퍼센트까지 떨어졌다. 국제에너지기구에 따르면, 2040년경 12퍼센트까지는 반등할 것으로 추정된다.'(200쪽)


반등이 이루어질 수는 있지만, 숫자로 보면 감소해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유는 '서구인들은 원자력발전소의 안전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원자력발전소에서 전기를 생산하는 기업은 조심하고 또 조심한다'(199쪽)고 하니, 발전가능성보다는 줄어들 가능성이 많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원자력발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나? 


'핵분열로 상당한 양의 전기를 생산하고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그렇게 하려면 무엇보다 한층 개량된 원자로 설계를 사용해야 하고, 핵폐기물 저장에 대해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실에 대한 선입견 없는 객관적 조사가 필요하고 진정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세계 에너지 정책에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이 둘을 진심으로 추진해보려는 실질적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200쪽)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저자가 핵발전에 대해서 하는 말이다. 무엇보다도 '객관적 조사와 장기적 관점'이라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숫자를 동원하지 말고, '객관적 조사'를 하되, '장기적 관점'에서 에너지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숫자다. 다양한 방면으로 숫자들을 활용하고 살펴보는 일이 필요함을 이 책이 말고 있으니...


에너지 정책만이 아니라 정책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 그것이 이 책이 목적하는 바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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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자, 전시회로'라는 제목이 있다. 코로나가 우리 생활을 완전히 제약하던 때를 지나 이제는 코로나와 함께 살아가는 때가 되었다.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벗어도 된다고 했고, 학교는 모두 등교 수업을 하게 됐다.


  학생들도 체육시간에 마스크를 벗어도 되고, 교실에서는 드디어 짝도 생겼다고 한다. 짝!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눌 사람. 코로나로 학생들은 짝도 잃었고, 대화도 잃었고, 몸을 움직일 시간도 잃었었다. 게다가 함께 잠을 자는, 학창시절 가장 큰 즐거움인 수학여행도 잃고 지냈으니...


  어떤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두 해가 지나고, 이제는 많은 활동들을 할 수 있는 때가 되었다. 이때를 맞이하여 빅이슈에서 다룬 주제가 바로 '전시회'다.


나하고는 다른 존재를 만날 수 있는 장소. 전시회. 다양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고,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보고 싶었던 전시회를 찾아갈 수 있게 됐다. 그런 때를 맞아 빅이슈가 소개하고 있는 전시회에 가보아도 좋을 듯 싶다.


전시회와 더불어 저번 호에 이어서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출근 투쟁을 다루고 있다. 이번에는 그들이 주장하는 바보다는, 그들의 투쟁에 응원을 보내는 글들을 실었다. 그래. 언론에서는 중립을 표방한답시고, 비판하는 사람들과 응원하는 사람들을 함께 내보냈지만, 과연 그것이 중립일까?


중립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약자들에게는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언론은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같은 말이라도 어느 상황에 놓이느냐에 따라 엄청난 차이를 보임을 생각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불편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일 수 있음을...


그것을 같은 비중으로 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이 중립이라고 하면 그 중립은 강자 편을 드는 일일 수밖에 없음을 생각해야 한다.


'전시회'가 '장미'라면 '지하철 타기'는 '빵'이다. 장애인들이 전시회에 가려고 해도 지하철(버스)을 제대로 타고 갈 수 없다면, 전시회는 그야말로 '그림의 떡'에 불과하다. 


'빵과 장미'로 대표되는 인간의 권리인데, 이들은 '장미'를 향유하기 위해서 '빵'이 확보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빵'조차도 확보되지 않은 현실에서 장애인들이 거리로 나와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수밖에 없다.


이번 호에서 전시회와 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글이 실렸는데, 묘한 등치를 이룬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회를 즐기기 위해서 우리가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고나 할까. 그런 의미에서 두 주제가 함께 실린 이번 호는 꽤 의미 있게 다가온다.


여기에 탱고에 관한 글이 이 두 주제를 묶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탱고를 둘이 함께 추는데, 혼자만 잘한다고 상대 생각없이 제 멋대로만 춘다면, 그 춤은 볼썽사납게 되어버리고 만다고.


'나는 팀의 목표를 서로 잘 연결되어 기분 좋은 순간을 창조하고, 더 나아가 아름다움을 완성하는 것으로 보는데, 이를 위해 리더는 상대방이 움직일 수 있도록 방향을 제시하고 상대가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뒤 본인도 움직여야 한다. 분명히 리드하지 않거나, 팔로워의 움직임을 확인하거나 기다려주지 않은 채 혼자만 급히 움직인다면 역할을 정성껏 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결과는 불쾌한 순간과 보기 싫은 몸짓이다. 나는 대부분의 팔로워가 자신을 '추하게' 만드는 리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68쪽) 


리드와 팔로워를 정치인과 시민으로 바꾸고, '추하게'를 '힘들게'로 바꾸면 우리나라 정치에도 적용이 될 수 있다.


이때 팔로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장애인도 팔로워에 해당한다. 그들도 한 팀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춤을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출 수 있게 리드해야 한다. 리드하기 위해서는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 


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지하철 출근 투쟁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데,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정치인들은 자기만의 속도로 춤을 추는 리더에 해당한다. 그러면 이 팀은 제대로 춤을 출 수가 없다.


중립이란 바로 이렇게 리더가 제 역할을 해서 팔로워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힘들어하지 않도록 할 수 있도록 하는 비판하는 데 있다. 그것이 바로 중립이다. 양쪽 다 문제가 있다 또는 양쪽 다 이해가 간다고 말하는 데 있지 않고.


그래서 '전시회와 장애인차별철폐연대'를 함께 다룬 이번 호는 '빵과 장미'처럼 함께 이야기될 수 있는 그런 주제였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이렇게 '빵과 장미'를 함께 생각할 수 있도록 한 [빅이슈] 275호가 중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맙다. 이렇게 중립을 지켜주는 잡지가 있어서... 더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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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의 일
박서련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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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왜 예수가 마르타에게 무어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나도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마르타가 하는 일은 그림자 노동에 속한다. 다른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동안에 그들이 먹고 마실 것들을 준비하는 마르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이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일을 한다. 그것이 마르타의 일이다. 


반면에 마리아는 집에 손님으로 온 예수를 대접하는 일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예수 곁에 머물며 예수의 말을 듣고 있다. 마르타가 마리아에게 뭐라고 하자, 예수는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누가복음 10:42)고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박서련이 쓴 [마르타의 일]은 둘의 관계를 소설로 어떻게 변형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분명 자매가 나올테고, 한 사람은 남들에게 인정받고 편하게 지내고 다른 사람은 남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는, 그리고 언니가 마르타에 해당하고, 동생은 마리아에 해당하리라고...


그런데 소설을 읽으면서 누가 마르타고 마리아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왜냐하면 둘 다 현대 사회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자 노동에 해당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동생인 경아 쪽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왜냐하면 경아는 많은 봉사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봉사활동으로 인정받고, 또 현대 사회 사이버 공간에서 유명인이 되지만...


유명인이 되었다고 마리아처럼 대우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마리아는 빼앗기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소설 속 경아는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다. 결국 유명인이 된 경아는 자신의 삶을 빼앗기고 만다. 


반면 마리아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당당하게 했을 뿐이다. 빼앗겨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언니인 수아가 마리아?


수아는 성적이 좋다. 우리나라에서 성적이 좋다는 이야기는 남들에게 인정받는다는 의미다.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무시해도 좋다는 인식이 팽배한 사회가 바로 우리 사회다. 


소설 속 경아는 성적이 좋고, 그로 인해서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 오히려 남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경아가 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본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수아는 자신이 원하는 일을 성취하고, 또 하고자 하는 일도 해낸다. 경아의 죽음에 대한 복수도 완성한다. 그렇다면 누가 마르타인가?


경아? 수아? 읽어가면서 답을 찾으려는 것이 어쩌면 소설 제목에 갇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르타의 일은 수아와 경아라는 자매를 떠나서 여성 모두에게 해당하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남들이 돋보일 수 있도록 묵묵히 일을 해야 한다.


소설 속에서 수아는 성적 때문에라도 당당하다. 당당하지만 삶은 녹록치 않다. 고시원에서 살아가면서 아르바이트로 간신히 돈을 벌고, 임용고사를 준비한다. 반면 경아를 죽인 남성은 어떤가? 그는 약물과 환락에 취해 살아간다. 삶의 방식이 다르다. 그렇다고 모든 남성 인물들이 그렇게 살아갈까? 아니다.


여기서 다시 동생을 죽인 차해경에게 복수를 하는데, 익명으로 나오는 인물이 한 명 더 등장한다. 그 역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니 이름이 밝혀지는 것은 소설의 뒷부분에 가서이고, 소설 내내 익명이라고 불린다.


드러나지 않음, 그것이 바로 마르타의 일이다. 그렇다면 마르타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사회에서 자신을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또는 고학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카페 매니저를 하는 사람, 성적이 좋아 약대에 진학하고 대기업에 취직을 해도 남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손가락을 잃은 사람(익명으로 나오는 사람은 손가락이 몇 개 없다. 이는 노동으로 잃었다고 유추할 수가 있다)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마르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수아나 경아는 모두 마리아가 될 수 있고, 마르타가 될 수 있다. 


소설은 자살로 위장된 살인사건을 언니의 관점에서 파헤쳐 나간다. 늘 마리아로 여겨졌던 동생이 사실은 마리아가 아니었음을, 동생 역시 마르타였음을... 하여 여전히 마리아가 되기 힘든 사회, 소설 속에서 예수는 마리아가 함께 배우는 모습을 두둔함으로써 여성들도 주체적으로 배울 수 있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고, 익명으로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말과 경아의 죽음을 통해서 마리아가 되고자 하는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마르타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을 하는 존재로 남게 하려는 사회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마르타의 일... 아니, 마르타의 일을 하게 암묵적, 명시적으로 강요하는 사회. 그런 사회의 모습을 이 소설을 통해서 만나게 된다.


한번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는, 흥미진진하게 사건을 이끌어가는 소설인데... 우선 재미있다. 그거면 됐다. 


그래도 여전히 마리아와 마르타에 대한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는다... '마르타의 일'이란 제목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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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 아이 블루? 곰곰문고 101
브루스 코빌 외 지음, 조응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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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패턴을 찾아내려고 하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무질서에서도 특정한 질서를 찾아내고, 모양을 찾아내려고 하는 인간. 그래서 우리는 무작위로 펼쳐져 있는 별들에서도 온갖 모양을 발견한다. 별들을 이어서 궁수자리, 사자자리, 오리온자리, 카시오페이아, 북두칠성 등등 이름을 붙인다. 


특정한 패턴을 발견하지 못하면 불안해 하는 경우도 있다.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 그래서 미지의 존재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패턴을 만들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잘 드러내준다고 할 수 있다.


그때서야 안심하는 존재. 그런데 패턴에서 어긋난 존재가 있으면? 무시하거나, 없애려고 하거나 한다. 자신의 틀로 설명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름을 존중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 다름도 자신의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을 때 적용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성소수자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반대, 학생인권조례에 대한 반대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소수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데 있다. 성소수자는 사회에서 용인되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더럽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비정상적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더럽다고? 무엇이? 깨끗함의 반대로 쓰이는 더러움이라는 말을 사람의 성정체성에 쓸 수 있는 말일까? 또한 성정체성을 정상, 비정상으로 나눌 수 있을까? 


요즘은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성소수자는 여전히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힘들다. 사회적 시선을 의식하기도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가족에게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두려움도 많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를 둔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가족 중에 성소수자가 있으면 그 자체로 바라보지 않고,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을 어떻게 바라볼까를 먼저 생각한다. 그리고 두려워한다. 사회에서 배척받을까 봐. 사회의 패턴에서 떨어져 나오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이 성소수자에게 향한다. 그래서 성소수자는 사회는 물론이고 가족에게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거리두기를 당한다. 커밍아웃을 하든, 아웃팅을 당하든, 성소수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힘든 삶을 살아가게 된다.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로. 이 소설집에서도 이런 문제를 다룬 소설들이 있다. 


다행히도 이 소설집에 나오는 소설들은 대부분 희망을 주는 결말을 맺고 있는데... '다름'을 말로만이 아니라 가슴으로도 받아들이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 인물들을 통해서 소설을 읽으면서 '성소수자'를 받아들이는 또다른 패턴을 발견하게 된다.


이 소설집이 2005년에 초판본이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읽은 기억이 없다. 아마 그때에는 이런 소설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나 보다. 아님 홍보가 덜 되었던지...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더 심했을 땐데, 그럼에도 책이 출간되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우리 사회도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할 때라고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때 왜 읽지 못했을까? 성소수자 이야기는 나에게는 여전히 남 이야기였을까? 내 주변에서 나 성소수자야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그냥 다름을 인정해야지 하면서도, 가까이 여기지 못했던 일이었다. 내 삶의 패턴에 성소수자는 들어와 있지 않았다. 좁은 분야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내 삶의 패턴.


그렇다면 16년이 지나서 출판된 이 복간본에 있는 이야기들은 이미 과거에 묻힌 이야기들일까? 아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이야기다. 그래서 이 책이 더 의미 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성소수자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책이 내 눈에 띤 건, 내 삶의 패턴에 성소수자들의 삶도 들어올 수 있게 많은 성소수자들 이야기를 만났고 이들의 이야기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책을 발간하기도 한 작가가 한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차별금지법을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 작가의 말을 곱씹을 필요가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성소수자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글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은 성소수자만이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다.


  이 주제를 품격과 권위를 가지고 다룰 수 있으리라 믿는 작가들, 이들이 참여한 작품이라면 모든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싶어 하는 유명 작가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제발 게이나 레즈비언이 등장하는 이야기 한 편만 써 주세요." 

  딱 그렇게만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동료가 그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 결실로 얼마나 다양하고 정감 있고 멋있는 이야기들이 쏟아졌는지요. 얼마나 진실한 이야기들이! (9쪽)


  오늘날 미국 어느 곳에서든 남성은 남성을 사랑할 자유가 있습니다. 심지어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여성 또한 여성을 사랑하고 배우자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젠더로 정체성에 꼬리표를 붙이는 관념에 대해 많은 이들이 과거에는 없었던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 속에서 자아를 찾아가는 청소년은 다양한 경로로 지원받고 건강한 롤 모델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쪽)


이 말이 남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도 이런 작품집이 나오고(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들이 소설로 많이 나오고 있다), 편견을 지니지 않고 이런 작품들을 읽고, 또 '자아를 찾는 청소년이 다양한 경로로 지원받'을 수 있는 상황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자신의 성정체성 때문에 목숨을 끊는 그런 사람이 더이상 나오지 않는 사회.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 한편 한편이 다 소중하고, 또 읽으면서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을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책 제목이 된 "앰 아이 블루?"라는 소설은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만하다.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또는 우리 옛이야기에서 차용한 소원을 들어주는 이야기를 들어서 자신의 성적 지향을 표시하는 파란색이 보이게 해달라는 소원... 이 소원을 통해서 사람들은 파란색에도 다양한 농도의 색깔이 있으며, 자신의 말과 전혀 다른 지향을 지닌 사람도 있음을...


그렇게 자연스럽게 아웃팅되게 만든 사회... 아웃팅이지만 비장하지 않다. 오히려 웃음이 나온다. 그래서 더 좋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서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정체성을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고 살지만, 그렇다고 고립되고 배제된 상태에서 살아가고만 있지는 않다는 사실. 남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잘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라는 말을 쓰지만,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성정체성을 지니고 살아가고 있음을, 또 자신조차도 자신의 성정체성을 잘 몰라서 혼란스러워하고 있음을, '앰 아이 블루?'라는 소설을 통해서, 그리고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통해서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패턴을 인식하는 동물이라고 했다. 패턴을 만들고 인식하고, 아주 오래 전에는 동성애라는 사랑도 하나의 패턴이었다. 그러다 중세를 거치면서 동성애는 사랑의 패턴에서 배제되었다. 다시 세월이 흘러 근대에 들어서, 현대에 들어서 동성애는 다시 사랑의 한 패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패턴 역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회에 따라서 우리의 인식에 따라서 변해간다. 변함, 이것 또한 사람이 세상을, 인간을 이해하는 패턴 아니겠는가.


'성소수자'를 다룬 소설집이지만 무겁지 않다. 칙칙하지 않다는 말이다. 가볍게,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이 점이 더 좋다. 성소수자를 다룬 소설이 꼭 비장해야 할 필요는 없다. 박상영 소설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왔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만큼 우리나라에서도 이젠 이 소설집을 엮은 작가가 말한 것처럼 변해가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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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2-05-21 1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복간되었군요.
예전 낭기열라라고 출판사 파란색 표지로 읽었던기억이 납니다. 그 출판사 책을 따라 읽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kinye91 2022-05-21 10:29   좋아요 2 | URL
가끔 어떤 책을 읽으려고 하는데 절판이 되어서 구할 수가 없는 때가 있는데요, 이렇게 복간되어 독자들을 만나는 책이 있으면 반가워요. 또 그때는 몰라서 못 읽었던 책을 지금은 읽을 수 있어서 좋기도 하고요. 좋은 책들이 복간되어 독자들을 만나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