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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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이다. 그러나 책에 실린 세월은 30년을 넘나든다. 긴 세월이 이 작은 책에 담겼다고 보면 되는데, 시인 최승자가 쓴 첫 산문집에다가 최근에 발표한 글을 합쳐 출판하였다.


몇 권의 시집을 읽었다. 시를 통해서 시인을 알 수도 있지만, 시인이 쓴 글을 통해서 시인을 알 수도 있다. 시인이 어떤 한 면만으로 규정되지 않기에 시인의 여러 모습을 산문을 통해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시인이 되는 과정을 담은 글도 있고, 왜 시를 쓰는가에 대한 질문을 한 글도 있고, 최근에 어째서 시집을 내지 못했는지, 본인이 정신질환을 앓아서 그랬단 이야기도 이 산문집에 있다.


이성보다는 감성으로 시를 쓴다는 시인. 어쩌면 시는 이성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쪽이 더 울림이 클 수 있다. 


무슨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아도, 의미 이전에 마음 속으로 들어오는 시. 마음 속에 자리잡고서 나가지 않는 시. 그런 시들이 있다.


어느 순간 팍 마음에 꽂히는 시. 그런 시를 어떻게 쓰게 되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시인 자신도 잘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최승자 시인이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에서 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시인이 쓴 글을 통해 시인을 만나면서, 그가 쓴 시들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아직 외우고 있는 최승자 시는 없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들어하는 시는 제법 있었는데...


이 산문집에서 친구, 맹희(이름은 명희라고 한다)라고 하는 친구 이야기가 마음에 와 닿았다. 다른 눈을 가진 아이. 어쩌면 바로 시인들이 그 맹희와 같이 다른 눈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었으니...


반에서 분실사고가 생긴다. 범인에게 벌 주고 싶다. 아이들은 미꾸라지를 잡아 눈을 찌르면 범인도 미꾸라지처럼 눈이 멀 거라고 그렇게 하자고 한다. 많은 아이들이 그러자고 할 때 맹희는 반대했단다. 왜? 그럼 눈이 멀고, 눈이 멀면 보지 못하게 된다고. 그럼 슬픈 사람이 된다고. 좋지 못한 일이라고 했단다.(43쪽)


남들은 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 당하는 사람의 감정을 헤아릴 수 있는 눈을 지녔던 맹희만큼이나 시인들 역시 그러지 않을까.


그래서 사회와 동떨어져 있는 듯 보이지만, 시인들은 시를 통해서 사회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이 산문집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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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휴먼 - 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 자서전
주디스 휴먼.크리스틴 조이너 지음, 김채원.문영민 옮김 / 사계절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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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 일이 떠올랐다.


하나는 미국이 7월에 한국은 인신매매 방지 2등급(2류)국가라고 분류했다는 기사.


또 하나는 장애인차별쳘폐연대에서 벌인 지하철 타기 운동과 당시 국민의힘 대표였던 이준석과의 토론.


왜? 이 책의 주인공 주디스 휴먼이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고 주로 미국에서 활동한 장애인이었기 때문.


그가 살아온 환경이 우리나라와 겹치는 장면도 많았고, 그가 하는 말 중에 지금도 새겨들어야 할 말이 많지만, 우리가 민주주의의 선도국가라고 여기고 있는 미국이 장애인에 대해서 차별을 하는 모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랬다. 특히 미국이 지니고 있는 오만함이 이 책에 잘 나와 있어서 다른 나라들을 인권 후진국이니 인신매매 방지 2등급 또는 3등급 국가니 규정짓는 그들 정부의 행태를 인식할 수 있어서.


유엔에서 장애인권리협약을 제정해서 각 나라에서 비준을 해서 실행을 하는데 미국은 오만하게도 비준을 하지 않는다. 이 책 저자인 주디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비준을 실행하도록 움직였지만 결국 비준까지는 가지 않는다. 그만큼 그들은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자신들 나라에는 장애인이 없는 것처럼. 


미국은 일반적으로 유엔의 협약을 비준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 없이도 우리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84쪽)


현재까지 177개국이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을 비준했다.(2022년 2월 현재 184개국이 비준했다-옮긴이) 우리도 머지 않아 비준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때 저자가 말하는 현재는 2017년이다. )(291쪽)


이런 나라가, 수많은 총기사고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있는 나라가, 경찰이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총을 쏘아 죽이는 나라가, 성폭력 피해자들이 여전히 많은 나라가 다른 나라를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둥, 인신매매 방지가 제대로 안 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재단하고 그에 상응하는 대우를 하겠다고 하니,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나라다.


이런 태도때문에 이 책을 읽으면서 첫번째 말한 기사가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그 다음은 주디스 휴먼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교육, 이동, 생활을 위해서 투쟁했던 과정때문에 떠올랐다. 


지하철 타기 운동이 과격하다고, 왜 출근시간에 하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그런 방식은 비문명적(비문명이라는 말은 불법이라는 말을 에둘러 한 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불법보다는 비문명이 더 안 좋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 그렇다면 문명은 장애인들의 목소리를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고, 또 그들을 보지 않으려 해도 소리내지 않고, 보이지도 말아야 하는 걸까. 법적인 행동, 그들 말대로 문명적인, 문화적인 행동을 아무리 해도 거들떠도 보지 않으니, 소리를 들으라고, 좀 보라고 하는 행동 아닌가)이라고 몰아세운 전 국민의힘 당대표도 있었다. 그가 토론에 참여하기 전에 그들이 우상으로 삼는 미국에서 벌어진, 그리고 그런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이 쓴 이 책을 읽어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만약 읽었다면 비문명 운운하는 말을 할 수 없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장애인들이 자신들만을 위해서 무엇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도 다른 사람과 같이 이동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인데... 그 목소리가 전달이 안 되니 눈에 보이는 운동을 하는 것 아닌가.


이 책에서 주디와 그를 비롯한 사람들이 권리를 얻기 위해서 하는 일도 그것이다. 이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사회에서 그들은 있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 눈 앞에 나타나야 한다.


한데 나타날 수 있는 방법이? 당시로서는 불법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눈 앞에 나타날 수가 없으니... 도로를 점거하는 일, 차를 세우고 휠체어에서 내려 버스에 기어올라가는 일, 연방정부 건물을 점거하여 자신들과 대화하게 하는 일, 의사당 건물까지 80여 개 되는 계단을 온몸으로, 남들은 오래 걸려야 몇 분 걸리는 그 계단을 몇 시간씩 온몸을 써가며, 다쳐가며 올라가는 일. 그렇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 이런 보여줌, 나타남에 불법(비문명) 운운하면, 그건 아예 눈에 띠지 말라는 말이다.


당신들은 장애인이니까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장애인이기 이전에 그들도 사람이다. 주디가 어렸을 때 휠체어를 타고 친구 집에 가서 벨을 누르지 못하고(계단이 있기 때문에) 문 앞에서 친구를 불러 함께 놀 때, 그때 어린아이들은 편견이 없었다. 주디는 본래 그런 애다. 그냥 함께 놀아준다. 못 하는 놀이가 없다. 그런 주디에게 낯선 남자애가 '너 어디 아프니?'라고 묻는다. 


자신 앞에 나타난 낯선 존재, 다름을 아픔으로 치환해서 묻는다. 다르다와 아프다. 아픈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 나하고 함께 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때 받은 충격. 주디는 그러나 이 충격을 이겨나간다. 학교 입학을 거부 당했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교사 자격증 수여를 거부당했을 때도 포기하지 않는다. 


자꾸 그들 눈 앞에 나타난다. 혼자 힘들면 함께 나타난다. 그리고 함께 그런 상황을 바꿔 나간다. 그렇다. 자꾸 보이게 해야 한다. 보게 해야 한다. 목소리를 내야 한다. 혼자만 끙끙 앓지 말고, 외쳐야 한다. 보여야 한다. 그러면 함께 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렇게 지내는 사람이 나만이 아니었기에.


장애인들만 그렇게 모이지 않는다. 비장애인들도 함께 한다. 장애인이 잘살 수 있는 사회는 비장애인도 잘살 수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이 힘들게 사는 사회는 장애인들에게도 힘든 사회이기 때문에 함께 해야 한다. 이게 바로 문명이다.


또 장애인이라고 한 범주로만 국한시켜서는 안 된다. 장애인에도 청각, 시각, 지체, 인종, 성적지향성 등등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그래서 장애인 운동은 그런 스펙트럼을 존중하고 함께 해야 한다. 그들이 지닌 차이가 차별이 되지 않게.


연방정부 건물을 점거했을 때 장면이 인상적이다. 다양한 장애인들이 그 힘든 상황에서도 서로의 의견을 끝까지 들어주는 장면. 누구나 소외되지 않고 자기 말을 하는 장면. 다양한 방법으로 의사 소통의 길을 열어가는 장면들. 여기에 비장애인들까지 함께 해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그런 모습.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사회다.


그런 그들에게 당신들은 불법을 저질렀어. 그런 방식은 비문명적이야. 그러면 안 돼. 아무리 의견이 정당해도 방법이 불법(비문명)이면 안 되는 거야. 하면 될까? 그렇게 하기까지 들어주기나 했나? 그들의 존재를 보아주기나 했나?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책이다.


저자는 클린턴 행정부에서도, 오마바 행정부에서도 일했다. 정책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실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정권이 바뀌면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한 번에 되지 않는다고, 먼 길, 오랜 시간이 걸리 거라고. 그러나 꼭 이루어질 거라고 믿기에.


모든 사람의 목소리를 포함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보호하고, 미국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이 모든 것은 사안을 깊이 들여다보고, 다양한 토론과 회의를 거치며, 시간이 걸리는 견제와 균형의 방식을 따르기를 민주주의에 요구한다. 의사 결정에는 시간이 걸린다. 무엇보다 우리는 사실을 검증하고, 납득할 만한 객관성을 보이며, 내 말을 듣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정부를 원한다. (298쪽)


이 말, 지금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해주고 싶다. 특히 집권을 한 사람,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에게... 불통 또는 자신의 주장을 밀고나가는 것이 소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에게.


이글에서 미국을 우리나라로 바꾸면 지금 우리나라 정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민주주의를 시민의 힘으로 이룬 나라라고 자부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떤 정부를 원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꾸 편가르기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디의 다음 말을 들려주고 싶다.


사회 안에서 전체 집단이 다른 사람들부터 분리될 때 민주주의의 구조는 약화된다. 서로 거리를 두고 분리되다 보면 이해와 공감에 실패하고, 궁극적으로 불의를 초래하거나 타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상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나라로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차별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어떻게 느껴지는지 그 복잡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면 불평등과 가난의 책임을 사회 구조가 아니라 개인에게로 쉽게 돌리게 된다. 서로를 비난하는 데만 급급하다면 행동을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겠는가.  (300쪽)


많은 사람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다. 장애인의 성공담이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떻게 사람이 살 만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나를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디가 한 말, 혹 앞이 안 보인다고 희망을 놓으려는 사람에게, 솔닛의 말처럼 희망은 어둠일 수도 있으니.. 그러니


앞으로 나아가는 데에는 종종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300쪽)는 주디의 말도 마음 속에 새겨두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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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머리는 지끈거리고, 날씨는 더욱 몸을 옥죄고 있는 상황에서 박성준 시집을 읽었다.


  '잘 모르는 사이' 


  현대인을 이렇게 표현하면 딱 맞겠단 생각을 하던 찰나에 수해로 인해 목숨을 잃은 반지하 사람들 이야기가 뉴스에 나왔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그래도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올라왔는데... 그 주인공들의 삶이 얼마나 신산한지, 고지대 넓은 잔디를 지니고 집에 윗층, 아래층, 지하까지 갖추고 사는 사람들과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 삶의 거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비가 쏟어지는 날, 하염없이 반지하 방으로 가던 내리막길... 인생이 그렇게 내리막길로 향하는구나 하면서 안타까워하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래도 그들은 살았는데... 이번 비로 인해 반지하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대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인데... 책임이 그들에게 있지 않고 우리 사회에 있는데... 누구는 비로 인해 침수가 되어도 '아, 이거 심각하구나'하는 말뿐일 때,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달린 침수가 되고 있는데, 그 거리를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


멀다. 정말 멀다. 단순히 높고 낮은 곳에 산다는 차이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가난하다는 문제를 넘어선다. 부유와 가난이 함께 공존하는 사회가 공동체 아닌가. 그렇다면 가난으로 인해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하지 않나.


옛날 최부잣집 가훈에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말이 있었다는데, 한 개인도 그렇게 행동하는데, 나라를 책임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 재난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피해를, 가장 심한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어야 하지 않나.


절대적 평등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되나? 하긴 법에는 그런 말들이 없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법 적용은 문구대로 된다. 그것이 평등일까? 요즘 평등과 공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자는 말이 나온다.


무엇이 공정한 제도일지, 무엇이 진정한 공정이고 평등일지, 과연 공정과 평등은 자유와 배척이 되는지...


비로 인해 박성준 시집에서 눈에 들어온 시가 있다. 제목이 살벌하다. '대학살'이다.   


대학살


  공정한 제도 속에서 공정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다 공정하지 않던 날씨는 어김없이 비를 뿌렸다 장마였다 뻔뻔스럽게도 불변하는 것들은 요점 정리가 쉬웠고 그럴 만하겠다고 생각한 건강은 조합원들을 몸을 몹시 공격했다


  병은 본래 숨기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근대적인 교육이 처음 이런 작업장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잊어버린 것들이 순해 보였다


  불이 꺼진다


  최후의 목적은 농성이 되었다


박성준, 잘 모르는 사이. 문학과지성사. 2016년. 79쪽


'대학살'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여기에서도 이 시집 제목이 된 '잘 모르는 사이'라는 말을 적용하고 싶어졌다.


잘 모르면 이것이 왜 대학살인지 모른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서 죽어갔는지... 폭우가 쏟아지는 현장에서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을 잘 모른다. 인식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를 낳고, 마음의 거리는 행동의 거리를 낳는다. 거리는 결국 알려고 하지 않는 무심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렇다. 그렇게 모르는 사이로, 무심함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사회는 공동체에서 멀어진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기계가 되어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관심을... 타인에 대한 공감을... 그래서 잘 모르는 사이라고 그들이 처한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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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을 받는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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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베카 솔닛의 책을 몇 권 읽었다. 읽을 때마다 실망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일깨워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페미니즘 책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페미니즘이 한 범주로만 정의될 수 없듯이 솔닛의 책도 그렇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책이라고 하지만, 여성의 권리를 주장한다는 말은, 사람이 지녀야 할 권리를 주장한다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솔닛이 무지권(privelobliviousness)이라는 단어를 만들어 보았듯이 (특권을 뜻하는 'privilege'와 무지 혹은 무심함을 뜻하는 'obliviousness'를 합한 말이라고 한다.특권 있는 사람, 재현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곧 의식할 필요가 없는 사람, 실제로 자주 의식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과 같다는 걸 표현하기 위해서다. 241-242쪽) 이미 권리가 있는 쪽은 권리에 대해서 주장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침묵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고, 이 침묵을 깨는 말하기가 주장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 책 처음에 실린 글이 '침묵의 짧은 역사'인데, 얼마나 많은 침묵들이 강요되어 왔는지 이 글을 읽으면 알 수 있게 된다.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눈치보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것은 권리가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반대로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반대하는, 또는 비아냥거리는 말들이 난무하는 모습은 말할 권리를 제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표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고난을 겪고도 말을 할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는 사람들.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말을 하는 사람에게 자꾸 같은(비슷한) 질문을 한다. 이것은 아직 권리를 인정하지 않겠단 태도다. 발언을 인정하지 않고 발언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기 위해 하는 질문들이다. 계속 같은 질문을 던지는 일은...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피해자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같은 질문이 계속될 때 피해자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왜냐,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니까. 자신을 믿어주지 않으니까. 결국 같은 질문은 침묵의 강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 책 처음이 '침묵의 짧은 역사'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짧은' 역사가 아니라 '긴' 역사일텐데, 솔닛이 짧은 역사라고 한 이유는, 이제는 과거로 돌아가야 할 역사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변했고, 침묵에서 발언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아주 오래 전에 나온 영화 '자이언트'로 끝맺는다.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볼 때마다 영화에서 느끼는 점이 달라졌음을 이야기하면서, 솔닛은 영화 '자이언트'를 '거대한 여자'라는 제목으로 바꿔서 이야기하고 있다.


세상이 한 번에 변하지는 않겠지만 그럼에도 변할 수 있음을 이 영화를,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사람은 어느 한 쪽으로만 규정해서도 안 됨을. 어느 범주에 사람을 가둬놓고, 그 범주 안에서만 판단해서는 안 됨을. 영화를 보면서 솔닛은 같은 영화임에도 볼 때마다 관심을 두는 주안점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만큼 영화에는 많은 요소가 담겨 있는 셈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엄청난 다양함이 사람들에게는 있다. 남성이라고 여성이라고 또는 백인이라고 흑인이라고 딱 규정지을 수 없다. 범주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범주 속에서도 개별성을 인정해야 한다.


범주 속에서도 개별성을 인정받아왔던 존재들은 기존에 권력을 지고 있었던 권리를 충분히 누리고 있던 존재였다. 그리고 약자들은 범주 속에서 녹아들어버렸지, 개별성을 인정받지는 못했었다.


그러니 이제는 모든 존재들이 범주 속에서도 개별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솔닛은 그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범주 속에서 개별성을 인정한다면 같은 질문을 자꾸 할 필요가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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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08-19 09: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권리가 있는 쪽에서는 권리를 주장할 필요가 없죠. 약자가 불편함과 권리를 주장해서 스스로 쟁취해야할 것이 많은 사회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죠. 솔닛을 페미니스트의 범주에 넣기에는 그가 문제삼는 범주가 그보다 넓고 확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kinye91 2022-08-19 10:35   좋아요 2 | URL
맞아요, 어느 한 분야로 규정짓기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권리 전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단 생각이 들어요.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들이 같은 질문을 많이 받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둠 속의 희망 - 절망의 시대에 변화를 꿈꾸는 법, 개정판
리베카 솔닛 지음, 설준규 옮김 / 창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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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주로 부시(아들)가 당선되었을 때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에서 9.11테러 사건이 일어난 때이기도 하고... 그럴 때 절망에 빠진다. 사람들은 부시의 정책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공개적으로 반대하기 힘들어졌다.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이유로 이라크를 공습하겠다고 했을 때 어둠은 더 짙어졌다. 그렇게 솔닛은 그 어둠의 시대에 희망을 이야기한다.


희망은 어둠이라고 했다. 어둠, 앞이 캄캄하다는 의미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고 있다. 즉, 명확하게 보이지 않기에 조금씩 나아가야 한다. 또 희망은 어둠 속에 있는 문이라고 했다. 어둠이라는 벽을 손으로 짚어가면서 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물론 문을 열었다고 해서 어둠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는다. 또다른 어둠이 있을 수 있고, 또다시 벽을 짚으며 나아가야 한다. 희망이라는 문을 향해서.


그렇기 때문에 희망은 어둠이다. 어둠은 포기가 아니다. 나아가게 한다. 어둠 속에 주저앉는 일. 그것이 바로 절망이다. 때문에 솔닛은 희망은 어둠이라고 한다. 우리가 벗어나야 할 동기를 주는.


그러므로 한번에 모든 일을 해결하려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세상에 '헤라클레스'처럼 강물을 끌어와 마굿간을 한번에 청소할 수는 없다. 희망은 그런 마굿간을 치우는 일과 같다. 지난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조금씩 치워야 한다. 혼자서만이 아니라 함께 치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깨끗해진 부분이 나온다. 그곳을 발판으로 삼아 더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희망이 하는 역할이다.


솔닛은 이런 점에서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해결책은 없다고 한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그들의 연대를 통해서 해야 한다고 한다.


연대가 잘 이루어질 때도 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우리가 어둠 속에서 벽을 짚으며 나아가지만, 문을 찾지 못할 때도 있지 않은가. 또 서로 부딪칠 때도 있고. 


이때 포기하면 안 된다. 자신의 방식을 지키면서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일. 그렇다. 차이보다는 공통점을 찾아내고, 그 차이를 행동을 통해서 메워나가는 일. 그것이 바로 '어둠 속의 희망'이다.


이 책은 2001년 9.11사건의 어둠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음을, 아니 희망을 보았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개정판을 내면서 그 뒤의 이야기들을 몇 편 실어서 아주 오래 전 이야기만은 아니다. 또 미국이 과연 2001년보다 많이 좋아졌는지, 그들이 희망의 문을 찾았는지 의문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우리는 희망을 찾았는가. 어쩌면 우리도 솔닛의 이 책이 쓰여질 때와 비슷하게 어둠 속에 있지 않을까.


어둠 속에 있다면 이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희망으로 함께 행동해야 한다. 저건 아니야에서 멈추지 않고 이렇게 하자고 해야 한다. 자신부터 그렇게 해야 한다. 행동하는 일, 어둠 속의 희망은 바로 이런 행동에서 나온다.


좀 지난 책 같지만, 아니다. 지금 우리 현실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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