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날, 머리는 지끈거리고, 날씨는 더욱 몸을 옥죄고 있는 상황에서 박성준 시집을 읽었다.


  '잘 모르는 사이' 


  현대인을 이렇게 표현하면 딱 맞겠단 생각을 하던 찰나에 수해로 인해 목숨을 잃은 반지하 사람들 이야기가 뉴스에 나왔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그래도 그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올라왔는데... 그 주인공들의 삶이 얼마나 신산한지, 고지대 넓은 잔디를 지니고 집에 윗층, 아래층, 지하까지 갖추고 사는 사람들과 반지하에 사는 사람들 삶의 거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비가 쏟어지는 날, 하염없이 반지하 방으로 가던 내리막길... 인생이 그렇게 내리막길로 향하는구나 하면서 안타까워하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래도 그들은 살았는데... 이번 비로 인해 반지하에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대피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인데... 책임이 그들에게 있지 않고 우리 사회에 있는데... 누구는 비로 인해 침수가 되어도 '아, 이거 심각하구나'하는 말뿐일 때, 누군가에게는 목숨이 달린 침수가 되고 있는데, 그 거리를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


멀다. 정말 멀다. 단순히 높고 낮은 곳에 산다는 차이가 아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가난하다는 문제를 넘어선다. 부유와 가난이 함께 공존하는 사회가 공동체 아닌가. 그렇다면 가난으로 인해 죽는 사람이 없어야 하지 않나.


옛날 최부잣집 가훈에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말이 있었다는데, 한 개인도 그렇게 행동하는데, 나라를 책임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이 재난이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피해를, 가장 심한 피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어야 하지 않나.


절대적 평등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되나? 하긴 법에는 그런 말들이 없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 법 적용은 문구대로 된다. 그것이 평등일까? 요즘 평등과 공정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자는 말이 나온다.


무엇이 공정한 제도일지, 무엇이 진정한 공정이고 평등일지, 과연 공정과 평등은 자유와 배척이 되는지...


비로 인해 박성준 시집에서 눈에 들어온 시가 있다. 제목이 살벌하다. '대학살'이다.   


대학살


  공정한 제도 속에서 공정한 사람이 태어날 수 있다 공정하지 않던 날씨는 어김없이 비를 뿌렸다 장마였다 뻔뻔스럽게도 불변하는 것들은 요점 정리가 쉬웠고 그럴 만하겠다고 생각한 건강은 조합원들을 몸을 몹시 공격했다


  병은 본래 숨기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근대적인 교육이 처음 이런 작업장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니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잊어버린 것들이 순해 보였다


  불이 꺼진다


  최후의 목적은 농성이 되었다


박성준, 잘 모르는 사이. 문학과지성사. 2016년. 79쪽


'대학살'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여기에서도 이 시집 제목이 된 '잘 모르는 사이'라는 말을 적용하고 싶어졌다.


잘 모르면 이것이 왜 대학살인지 모른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산업현장에서 죽어갔는지... 폭우가 쏟아지는 현장에서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그들을 잘 모른다. 인식의 거리는 마음의 거리를 낳고, 마음의 거리는 행동의 거리를 낳는다. 거리는 결국 알려고 하지 않는 무심함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렇다. 그렇게 모르는 사이로, 무심함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사회는 공동체에서 멀어진다.


그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기계가 되어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관심을... 타인에 대한 공감을... 그래서 잘 모르는 사이라고 그들이 처한 상황에 공감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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