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 따라 하다 보면 돈이 쌓이는 친환경 소비 라이프
최다혜.이준수 지음, 구희 그림 / 미래의창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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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참 더웠다. 기후가 확실히 안 좋은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 해였다. 더위뿐만이 아니다. 어느 나라는 추위로, 어느 나라는 홍수로, 어느 나라는 산불로 몸살을 앓았다. 이런 어려움이 일상이 된다면, 우리들의 삶은 갈수록 고단해지리라.


지금 고단해지는 것을 넘어 다음 세대에게는 고단함 정도가 아니라 고난과 재앙을 넘겨준다면, 그런 일은 우리가 해서는 안 된다. 미래의 자산을 지금 앞당겨 써버리면 그들은 어떤 자산을 지니고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겠는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기후 변화 앞에서, 재앙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지금부터라도 무엇인가를 해야하는데, 이를 정부와 기업에게 맡기기만 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의지가 별로 없고, 이윤을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하는 기업 역시 앞장서서 환경을 생각하는 생산을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도 나오는 '파타고니아' 같은 기업도 있지만, 아직까지 그런 기업은 예외다)


이 책은 이런 위기 의식 속에서 출발했다. 중국이 각국의 쓰레기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는 뉴스에서부터 시작한다. 중국과 쓰레기. 얼핏 연결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아니다. 지금까지 많은 쓰레기들을 중국이나 경제 발전이 안 된 나라에서 수입을 했었다. 그 덕에 부유한 나라들은 쓰레기 대란을 겪지 않을 수 있었는데...


이는 한 나라의 쓰레기를 다른 나라로 옮기는 것밖에는 되지 않았으니, 쓰레기의 총량이 줄지는 않고 오히려 더 느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런 현실을 실감하도록 한 것이 중국의 쓰레기 수입 거부였고, (쓰레기라고 하기보다는 재활용품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지만, 어떤 나라는 정말로 쓰레기를 수입하기도 한다. 이때 수입은 쓰레기를 받고 그에 해당하는 수입을 얻는 것이다. 한마디로 돈을 받고 쓰레기장을 제공한다고 보면 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도 재활용품 수거 거부로 이어지게 되었다.


남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야기였던 것이다. 쓰레기 대란... 평소에 별 생각없이 분리배출을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분리배출을 할 수 없게 되니, 다 쓰레기가 되어 버리는 현실. 이때부터 저자들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쓰레기를 줄여야 한다. 재활용을 한다는 명목으로 많은 물건을 구입했지만, 그것은 쓰레기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쓰레기를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동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이때부터 그들은 실천을 하기 시작한다. 안 쓰는 물건 정리하기부터. 안 쓰는 물건을 정리하는 일은 소비를 줄이는 일과 연결이 된다. 소비를 줄이면서 가능하면 오래쓰기, 바꿔쓰기...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유행했던 (지금은 잘 쓰고 있지 않지만) '아나바다' 운동을 하게 된다.


꼭 필요한 물건만 사는 일, 중요하다. 이것이 쓰레기를 줄이는 가장 기본적인 행위다. 집 안에 있는 물건 중에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쓰지 않는 물건이 얼마나 많은지... 이들은 물건을 정리하면서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니 불필요한 소비를 자연스레 지양하게 된다.


이런 실천부터 일회용품 안 쓰기, 가능하면 채식에 가까운 식단 짜기, 산책을 할 때는 쓰레기 줍기(플로깅이라고 한다), 차는 가급적 잘 이용하지 않고 한 집에 꼭 필요한 한 대만 운용하기 등등.


자신들이 직접 실행했던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들이 고난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임을, 여기에 절약이 자연스레 되니 저축도 되고 있음을...


무엇보다 이 책은 비장하지 않다. 환경 운동이라고 해서, 지구를 지킨다고 해서 비장할 필요는 없다. 또 완벽할 필요도 없다. 완벽하게 실천하지 못하니 차라리 하지 않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이들 역시 가끔은 반(半-절반 반이라는 한자어를 쓰고 싶다. 反, 반대로하는 반이 아니라... 이들의 행동은 환경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는 환경을 생각하는 일탈이니까) 환경적인 행동도 하지만, 그것으로 포기하지 않는다. 천천히, 즐겁게, 그리고 꾸준히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려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비장함보다는 가벼움, 간혹 웃음을 머금게 된다. 그래, 환경을 생각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거야.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되는 거지.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조금씩 조금씩 더 나은 행동을 할 수 있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하게 되겠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다.


즐겁고, 유쾌하게,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소개하고 있어서 환경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일이 특정한 소수의 인물에게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준다.


이러한 개인들의 실천과 더불어 정부, 기업 차원에서 환경을 생각하는 활동을 해야 한다. 파타고니아와 같은 기업이 필요하고, 각국의 정부는 환경을 살리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쳐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지구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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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건너기 소설의 첫 만남 30
천선란 지음, 리툰 그림 / 창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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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첫 만남' 시리즈의 한 권이다. SF작가라 할 수 있는 천선란이 썼다. 천선란 하면 따뜻한 소설이 떠오르니, 이 소설 역시 따스함을 전해줄 거라 생각하고 읽었다. 


읽기 전에 책 표지에 접힌 면을 보니, '동화에서 소설로 가는 징검다리'라고 한다. 이는 동화라고 하면 주로 어린이를 독자로 한 작품이라고 생각하고(최근에는 어른을 위한 동화가 있지만, 동화라는 말 자체에 아이 동(童)자가 들어 있으니)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가는 과정에서, 소설을 만나는 징검다리가 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 깊은 독서를 위한 마중물'이라고 했으니, 징검다리, 마중물. 모두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 이 작품은 이 작품을 통해 또다른 작품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할 수 있다.


또다른 작품을 만나게도 하지만, 그 말을 조금 더 확장하면 또다른 자신을 만나게 해준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즉 다른 나를 만나러 가게 하는 징검다리이자 (징검다리는 그냥 막 건너지 않는다. 사이 사이가 띄어져 있기에 조심해서 건너야 한다. 이 다리에서 저 다리로 건너갈 때 앞을 정확히 보고 정확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그러니 징검다리는 현재 자신이 딛고 있는 다리를 알아야 하고, 다음에 디딜 자리를 알아야만 한다. 이런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좋다) 다른 존재를 이끌어내는 마중물이 되는 것이 이 작품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어디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이고 무엇을 맞이하는 마중물인가? 당연히 지금보다 나은 나로 가는 징검다리이고, 지금보다 나은 나를 맞이하는 마중물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그 '어떻게'의 역할을 각 작품이 하고 있겠지만, 이 작품은 '상처'를 이야기 한다. 살면서 상처를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는 평생 동안 마음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이 상처는 불쑥불쑥 튀어나와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마주보고 싶지 않은 상처, 마음 깊숙한 곳에 묻어두고 결코 꺼내보고 싶지 않은 상처. 하지만 그렇다고 이 상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예측하지 못한 때에 나와 나를 괴롭히게 된다.


상처가 징검다리나 마중물이 아니라 물귀신처럼 나를 잡아 나락으로 끌어내린다. 그것을 잊으면 잊으려 할수록.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주보아야 한다. 끌어안아야 한다. 상처는 상처니까, 없앨 수 없으니까. 없던 일로도 할 수 없으니까. 자신에게 상처가 있음을 인정하고, 그 상처를 보듬어야 한다.


소설은 그래서 아이 때로 간다. 거기서 아이를 만난다. 자신이 아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만나러 간다. 어른이 된 내가 아이가 된 나를 만난다. 그리고 아이인 나는 어른인 나가 자신임을 알아본다.


자,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어린 시절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존재를 만난다. 이 존재는 그때나 지금이나 나 자신보다 훨씬 크고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미 나는 어른이 되어 있다. 이것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그냥 묻어두고 있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직면한 두려움. 아이가 만났던 두려움과 더욱 커진 두려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돌아가서는 안 된다. 그냥 묻어두어서도 안 된다. 이제는 그것을 이겨내야 한다. 누가? 어른인 내가? 아니다. 아이와 어른인 내가 함께해야 한다.


함께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일이 바로 어린 나를 보듬어주는 일이 된다. 상처를 보듬어주는 일이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 과거의 나와 결별한 내가 아니라, 과거의 나를 징검다리 삼고, 과거의 두려움을 마중물 삼아 다른 존재로 나아간 내가 된다.


짧은 소설에서 이렇게 '나'는 '어린 나'를 만나고 어린 나를 내 안에 받아들인 '어른'인 나가 된다. 그래서 따스하다. 상처가 있음을 알고도 따스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소설은 내용면에서도 그렇지만 이 작품을 통해서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 이 소설은 다른 작품으로 가는 징검다리이자 마중물이 된다. 그런 마중물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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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수피즘. 예전에 신비주의라고 들었던 적이 있다. 그들의 교리를 알지는 못하니 무어라 말을 할 수는 없고.


하지만 '루미'란 이름은 기억한다. 수피즘의 큰 스승이라고 기억하고 있으니...


헌책방 나들이를 한다. 기대하지 않았던 책들을 발견할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 시집도 마찬가지다. 내가 구한 시집은 이런 표지가 아닌데, 알라딘에서 상품 검색을 하니 이 표지의 시집이 나온다. 이현주 목사가 번역한, 2014년에 초판이 나온, 늘봄 출판사에서 발행한 시집인데... 어떻게 표지 그림이 다른지...


하지만 다르다고 해도 상관없다.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겠지 한다. 수피즘. 신비주의. 그냥 무언가 마음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는 시집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읽어가니 마음을 편하게 하는 시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 '중국 예술과 희랍 예술'(110-113쪽)이란 시를 보면 수피즘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꾸미지 않고 비우는 것. 있는 그대로를 유지하는 것. 그야말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비우는 것. 이것이 수피즘이다. 이 시에 나온 몇 구절을 보자.


'희랍인의 예술이 수피의 길이다 / 그는 철학에 관한 서적을 연구하지 않는다 / 자기 삶을 깨끗하게 더욱 깨끗하게 닦을 뿐 / 바라는 것도 없고 성도 내지 않는다 / 그 순수로 순간마다 / 여기서, 별들에서, 허공에서 오는 / 온갖 형상을 받아 되비친다 /그가 그들을 보고 있는 같은 빛으로 / 그들이 자기를 보고 있듯이 / 그렇게 그들을 받아들인다'


이 시를 보니 '묵자'에 나오는 '군자불경어수 이경어인(君子不鏡於水 而鏡於人)'이란 말이 떠올랐다. 사람을 통해서 자신을 보라는 말.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바로 그대가 나이다. 이 시의 표지에 있는 말처럼 '내가 당신이라고 말하라'(11-13쪽)인 것이다.


이런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이 바로 나이고, 그들은 바로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그들의 거울일 수밖에 없지만.


그러니 이런 자세가 '여인숙'(17-18쪽)이란 시로 이어진다.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 이 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인숙


인생은 여인숙

날마다 새 손님을 맞는다


기쁨, 낙심, 무료함

찰나에 있다가 사라지는 깨달음들이

예약도 없이 찾아온다


그들 모두를 환영하고 잘 대접하라

그들이 비록 네 집을 거칠게 휩쓸어

방안에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는

슬픔의 무리라 해도, 조용히

정중하게, 그들 각자를 손님으로 모셔라

그가 너를 말끔히 닦아

새 빛을 받아들이게 할 것이다


어두운 생각, 수치와 악의가

찾아오거든 문간에서 웃으며

맞아들여라


누가 오든지 고맙게 여겨라

그들 모두 저 너머에서 보내어진

안내원들이니


마울라나 젤랄렛딘 루미, 루미시초, 늘봄. 2014년. 17-18쪽


  그래, 이런 마음이라면 세상에 평화가 넘치겠지. 평화로 가는 길. 그것이 루미가 쓴 시들이겠지. 비록 이 시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지라도 적어도 남들에게서 나를 발견하고, 나를 고쳐나가려는 노력을 해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시집이다. 


  참고로 루미는 지금 터키에서 신성시되고 있으며, 그와 관련된 춤이 '세마' 춤이라고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며 빙글빙글 도는 춤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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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4-10-15 23: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 궁금해진 시인이라 루미 평전을 샀더랬습니다. 어떤 인물일지 궁금해지네요^^ 아마 이들이 추는 츰이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흰 옷을 입고 쫙 펴지는 춤을 추는 장면이 수피즘괴 관련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kinye91 2024-10-16 09:44   좋아요 1 | URL
루미 시를 읽으면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는지 생각하게 돼요. 아마 춤도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것이 사람이라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지 않을까 합니다.
 
1948년 헌법을 만들다 - 제헌국회 20일의 현장, 2024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
안도경 외 지음 / 포럼(도서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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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국군의 날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이 되었다. 한때 공휴일이었으나 제헌절과 함께 공휴일에서 제외된 날이었는데. (한글날은 제외되었다가 다시 공휴일이 되었으니 논외로 하고) 


왜 국군이 날을 언급하냐고? 그것은 올해 제헌절은 임시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국군의 날과 제헌절 중에 어느 날이 더 비중이 크냐고 하면 난 당연히 제헌절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국군에 대한 규정이 헌법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헌법을 공포한 날이 바로 제헌절이기 때문이다. 


헌법의 하위에 속해 있는 국군을 기리는 날이 임시 공휴일에 되었는데, 정작 우리나라의 법 근간인 헌법을 제정한 날은 공휴일이 아니다. 공휴일이 아니니 사람들이 그 날이 어떤 날인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숫자를 달달 외우는 학생들에게도 광복절, 삼일절은 언제인지 알아도 제헌절은 언제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들과 관계없는 날이라고 여기니까. 


그렇지만 헌법은 우리 모두와 관계가 있다. 우리들의 삶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헌법이다. '헌법재판소'가 있어 수많은 위헌 신청을 하지 않는가. 법이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헌법에 호소를 한다. 그만큼 헌법은 우리 국민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믿고 기댈 언덕이 된다.


이 헌법을 만들 때 어떠했을까? 단지 1948년 7월 17일에 공포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이 책을 통해서 헌법을 기초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며칠 동안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문구, 자구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며, 또 헌법에 기록되지 않았더라도 회의록에라도 헌법 정신을 남기려는 정신을 알게 됐다. 또한 제헌의회 의원들의 높은 수준과 열의도 알게 되었고. 그들은 결코 헌법을 속성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신념과 당시 처한 우리나라 상황과 우리나라 인민들(헌법 조항에 대한 논의 중에 국민이냐 인민이냐 하는 논쟁도 벌어지니)이 처한 현실, 그리고 우리나라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종합해서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한다. 


남의 의견을 완전히 묵살하지도 않고 또 그간 우리가 숱하게 보아왔던 식으로 몸싸움도 하지 않고 절차에 따라서 의견을 제시하고 가부(可否)를 논해 헌법 조항들을 수정하고 결정해 나간다.


그동안 헌법 제정 기간 동안 벌어졌던 회의록을 바탕으로 정리해서 낸 것이 이 책인데... 말을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다. 의장이 진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의장인 이승만이 연로한 관계로 부의장인 김동원, 신익희가 주로 진행을 한다. 그런데 이승만이 진행을 할 때는 이 편집본에 의하면 부의장들이 진행할 때와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무엇인가, 글만으로는 그렇다고 확신할 수 없지만, 내 편견이 작동한 결과일지도 모르지만, 김동원, 신익희는 자신들과 동등한 급의 국회의원이라 여기지만, 이승만은 자신들과 다른 권위를 지닌 사람으로 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 또 이승만의 진행은 상당히 권위적이다. 헌법 독해 후반으로 가면 이승만의 이런 모습이 잘 드러나는데...


그것은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관한 조항을 부칙에 넣자고 할 때 나타난다. 이 부칙에 '~할 수 있다'로 있단 조항을 '~한다'로 고치자는 김동명 의원의 주장에 (당연히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고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정신차려라 하는 것은 그것은 도저히 말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표결해 주십시오.) 하니 이승만은 '제2 독회에서 부결된 것 문제삼지 말고 다음으로 넘어갑시다.'라면서 논의를 종결한다.


물론 이 과정에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제2독회에서 부결되었으니 다시 논의하는 것이 문제 있다는 말도 일리가 있고, '법률상으로 법리적으로 불소급의 원칙으로 규정된 특별법'(서상일 의원)이기 때문에 '할 수 있다'라고 한다는 말도 일리가 있지만, 이런 법리를 떠나서 민족정기를 세운다는 입장에서, 그것도 제헌 헌법에서 부칙으로 정하는 마당에 '~할 수 있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같기에, 이승만이 이렇게 넘어간 것이 나중에 반민특위를 해산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참고로 이승만은 제2독회를 끝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의미는 다르겠지만, '여기서 문구라든지 글자를 정정할 것이 있으면 3독회에 가서 작정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흘 동안 휴회하는 동안에 헌법 기초안의 문구과 글자를 교정하고 동시에 정부수립법안을 월요일 아침까지 제정해서 내놓기로 하십시다.'라고 하고 있다.


결국 채택된 구절은 부칙에

제101조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

로 되어 있다.


이만큼 치열하게 논쟁이 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문구, 글자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쓰면서 헌법을 만들려고 했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했다는 의의도 있다.


그리고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를 계승했다는 말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으니... 소위 뉴라이트라고 하는 사람들, 처음 공포된 -그들이 그리도 우상으로 삼는 이승만이 회의를 주도하여 통과시킨 제정 헌법의 전문을 읽어보는 것이 어떨지... 이 전문의 앞부분도 상당한 논의를 거쳐 확정이 되었으니...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라고 되어 있으니... 


헌법은 몇 번 개정이 되었는데, 지금 헌법의 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ㆍ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ㆍ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분명 건립이라는 말이 나온다. 건립이 건국과 다르다고 할 것인가? 제헌 헌법에 분명히 재건이라고 쓰여 있음을 그들은 부정하는 것인지... 건립, 재건이 건국과 다르다면 왜 반민특위를 설치할 법을 헌법 부칙에 만들자고 했을까? 이것을 당시 우익들도 반대하지 않았는데... 


보수란 기존의 가치를 수호하는 집단이라고 한다면, 이들이 건국절 운운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헌법에 이미 삼일운동으로 건립했다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이 책을 통해서 우리 헌법이 제정되는 동안 벌어진 일들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다. 다양한 의견, 그리고 치열한 논쟁. 그것으로 탄생한 우리의 헌법에 대하여. 더 논의하지는 않겠지만 제헌 헌법에는 '경제민주화라고 할 수 있는 이익 균점'에 관한 조항도 있으니...그들이 꿈꾸었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이 헌법에 잘 나와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날인 제헌절이 공휴일이 아니라니... 국군의 날은 비록 임시긴 하지만 공휴일로 한 해 지정이 되었는데... 우리가 헌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읽고 생각하는 시간을 지니려면 제헌절을 공휴일로 지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왜 우리가 제헌절날 쉬는 거지? 의문을 가지고 생각을 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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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와 메리 -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메리 셸리, 열정과 창조의 두 영혼
샬럿 고든 지음, 이미애 옮김 / 교양인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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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울스턴크래스프와 메리 셸리. 어쩌면 두 명 다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있고, 둘 중 한 사람만 들어본 사람, 또는 아예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페미니즘을 공부하거나 SF소설을 읽은 사람들은 둘 다를 기억할 수도 있겠다.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주장한 사람이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라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괴물의 이름으로 착각하고 있는 [프랑켄슈타인]을 쓴 작가가 메리 셸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셸리'란 이름에서 낭만주의 시인이라고 하는 '바이런, 키츠, 셸리'를 떠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들이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놓치기 쉬운데,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메리 셸리의 어머니다. 비록 딸 메리를 낳고 열흘 만에 산욕열로 죽지만, 남겨진 작품들로 인해 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어머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최초의 아나키스트라고 할 수 있는 고드윈과 결혼을 하니, 메리 셸리는 페미니즘과 아나키즘을 주장한 사람들을 부모로 두고 있다.


18세기에서 19세기, 시민혁명이 일어나던 때, 프랑스대혁명으로 인해 시민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함을 인식하던 때, 이때도 여성은 시민이 되지 못했다.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 여성들이 단두대에서 사라지던 때가 이때다.


그리고 남성과 동등함을 주장하던 여성들은 사회에서 배척당하던 때가 이때인데, 그럼에도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고 주장했다. 공식적으로 출판을 통해서 주장을 했으니, 메리 울스턴크래프트가 겪어야 할 고통을 지금에서 짐작하기는 힘들다.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생계가 해결되지 않으면 남성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여성의 자립을 주장한다. 자신이 할일을 찾아서 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남성과 동등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도 결국 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할 수밖에 없는 현실. 육아에서도 마찬가지고. 사회를 변혁하고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지만 당시에는 동등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다.


불공평한 사회에서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고군분투한다. 사랑에도 독립적이지만 그럼에도 살기 위해서 자신의 직업을 선택하고 그 일을 끝까지 유지하려 한다. 메리 역시 마찬가지다. 남편인 셸리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입으로 살아가려 한다.


남편이 시를 쓴다면 자신은 소설을 쓰는 메리 셸리. 그 과정에서 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당시에는 추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일들도 벌어지지만 자신이 추구하는 것, 여성의 삶도 남성의 삶과 동등하다는 것, 그리고 남성성이 얼마나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그것이 메리 셸리의 과업이 된다.


이 책은 엄마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삶과 딸인 메리 셸리의 삶을 교차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죽음까지. 당대 사회에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 사회적 비난 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독립적인 개체로 살아가고자 했지만 아이를 임신했을 때 또 사랑에 실패했을 때, 아이를 잃었을 때, 남편을 잃었을 때 등등 그들이 느꼈던 절망감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절망감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 절망감에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그것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는 점.


어쩌면 딸인 메리 셸리는 엄마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삶에서 자신의 운명을 보고, 자신이 그 길을 갈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시대를 앞서간 사람임은 분명한데,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야 했는지, 어떤 오해를 받아야 했는지를 두 모녀의 삶을 통해서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일제시대 우리나라 여성 작가들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 했던 수많은 여성들이 어떤 편견 속에 시달리고 사라져 갔는지... '나혜석'의 경우도 떠오르고... 나혜석이 독립적인 자신을 주장하지만 당대 사회에서 어떻게 가려졌는지, 어떻게 핍박을 받는지를 보면 19세기(엄마는 18세기) 유럽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을...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제는 남성과 여성으로 명확하게 구분하는 것이 아닌, 함께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온전히 평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방대한 내용이지만 연대 순으로, 작품 활동 순으로 서술되어 있고, 또 엄마와 딸이 한 장씩 교대로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그러면서 당대 시대적 제약에서 그들이 지녔던 한계도 간과하지 않고 (그들의 내밀한 사적인 생활이 사료를 통해 재구성되고 있어, 당시에 그들이 느꼈던 감정들을 우리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그럼에도 그들이 이룩한 성과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지금 우리 시대를 돌아보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특히 그동안 잘 인식하고 있지 않았던 유명한 사람들을 한 자리에 불러모으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메리 셸리와 관련해서는 '바이런, 셸리'를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관련해서는 '토마스 페인, 윌리엄 고드윈'을 소환할 수 있다는 것. 따로따로 알고 있었던 이 인물들이 서로 관계됨을 알 수 있게 되었고, 여성들이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떠한 고난을 헤쳐왔는지를 알 수 있어서 더 좋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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