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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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한때는 광대한 영토를 자랑하던 나라. 지금은 미국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경제도 어려워 미국으로 넘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나라. 그런 멕시코에서도 학살이 있었다는 것. 소설을 통해서 알게 되었는데...


볼라뇨 소설을 읽기 시작하다. 어느 책에선가 볼라뇨란 작가에 대한 소개를 보고 흥미를 갖게 되었는데, 그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소설로 구현해 냈다고 해서 어떤 작품일까 꼭 읽어봐야지 했다.


첫작품으로 [부적]을 읽기로 하다. 멕시코에서 일어난 학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소개글을 보았다. 멕시코 대학에 군대가 진입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체포해갈 때 화장실에 숨어 13일을 버틴 사람이 있다는 것.


그 사람을 소설에서는 아욱실리오라는 여성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화장실에서 아욱실리오의 생각이 여러 곳으로 뻗쳐 나가는 모습을 소설은 표현하고 있다. 즉 아욱실리오의 독백이 소설의 주를 이룬다. 우루과이 사람인 아욱실리오가 멕시코에 도착해서 겪게 되는 일. 이렇게 라틴아메리카는 특정한 나라에 국한되지 않고 라틴아메리카라는 대륙을 공통 배경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공포물이다. 탐정 소설, 누아르 소설, 호러 소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고, 그래서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잔혹한 범죄 이야기다.' (9쪽) 


이미 소설의 시작에서 선언하고 있다. 잔혹한 범죄 이야기라고. 누구의 범죄. 멕시코 독재 정권의 범죄. 1968년 9월에 멕시코 대학에 난입하고, 10월 2일에 학살이 일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은 멕시코에서 벌어진 학살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다. 


화장실에 갇힌 아욱실리오가 그곳에서 나올 때까지 시집을 읽으면서, 그 시들을 외우면서 또 화장지에 시들을 쓰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과정. 라틴아메리카의 생활이 생각을 통해서 드러나고, 여기에 칠레에서 일어난 1973년 피노체트의 쿠테타(또다른 9.11이다)까지도 언급이 된다. 이것들이 직접 묘사되지 않고 생각 속에서 펼쳐진다.


그렇지만 그 생각들을 통해 라틴아메리카가 겪고 있던 현실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가 있게 되는데, 독재 정권의 탄압이 바로 잔혹한 범죄가 될 것이고, 그럼에도 문학은, 예술은 부적처럼 사람들을 살아남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내가 들은 노래는 비록 전쟁과 희생당한 라틴 아메리카 젊은 세대 전체의 영웅적인 위업에 관한 것이었지만, 나는 다른 무엇보다 용기와 거울들, 욕망 그리고 쾌락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노래는 우리의 부적이다.' (180쪽)


주인공인 아욱실리오가 환상 속에서 듣는 노래. 끌려가는 젊은이들이 부르는 노래. 비록 그들은 죽음을 향해 가지만 노래는 살아남아서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미래를 이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문학(예술)은 독재 정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예비하는, 독재 정권으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해주는 부적에 해당한다는 것을 소설은 말하고 있다. 문학(예술)을 아무리 죽이려 해도 문학(예술)은 죽지 않음을 아욱실리오의 예언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러한 문학(예술)의 부적 역할을 생각하면서 우리나라 시인 김남주를 떠올렸다. 아니, 자연스럽게 아욱실리오에 겹쳐 김남주가 떠올랐다. 이 소설과 연관지을 수 있는 김남주의 시가 있을까 찾아보다 '시인의 일'이란 시를 만났다.


'수천의 시민을 학살하여 / 양키의 이익을 지켜주고 / 그 대가로 세자책봉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 장군인 너의 일이라면' (김남주, '시인의 일' 1연. 김남주 시집.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년 초판. 304쪽.)으로 시작하는 시.


첫연에서 바로 너의 일은 독재다. 잔혹한 범죄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일이다. 이런 이에게 동조하는 이들도, 찬양하는 이들도 모두 너희들, 그들의 일이다. 결코 시인은 하지 못할 일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어떤 일을 할까? 바로 이런 일들로부터 보호해주는 부적 역할을 해야 한다. 


부적은 악으로부터 사람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문학(예술)은 잔혹한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사회를 지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지켜주지는 못할지라도 완전히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는, 아욱실리오처럼 화장실에서 꿋꿋하게 버티는 역할을 해야 한다. 


아욱실리오가 화장실에서 시를 읽고, 외우고, 쓰는 일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도 감옥에서 시를 쓰면서 저항 정신을 잃지 않았던 김남주 시인을 생각하게 된다. 김남주 시인에게도 시는 부적이었다.김남주 시인은 이렇게 시인의 일을 말한다. 바로 '부적'과 같은 일이다. 이 소설에서 아욱실리오가 하는 일이다. 기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일. 부적은 멈춤이 아니라 전진이다.


'시인인 나의 일은? / 이 자가 저질러놓은 죄악 / 그 하나하나를 파헤쳐 / 만인에게 만인에게 만인에게 고하고 / 일깨워 민중들 일어나 단결하게 하고 / 자유의 신성한 피의 전투에 / 나아가자 나아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노래하는 일.' (김남주, '시인의 일' 마지막 연. 김남주 시집. 조국은 하나다. 남풍. 1988년 초판. 305-306쪽.)


하아, 어디 김남주 시인뿐이랴. 이런 '부적'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의 작품 중에서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 역시 그러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들만이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이 이렇게 아욱실리오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한 '부적' 역할을 하고 있으니, 여전히 우리나라는 독재자들의 잔혹한 범죄를 막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전체가 아욱실리오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 그리고 언뜻언뜻 언급되는 멕시코와 칠레의 학살,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저항하는 정신이 소설 속에 잘 나타나 있다. 


볼라뇨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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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편의 서사시다. 시인이 십여 년을 환경파괴에 맞서 싸운 기록이다. 한편 한편이 독립되어 있지만 전체적으로 연결이 된다.


  자연을 파괴하려는 자들에 맞서는 시인의 마음이 이 시집에 온전히 들어가 있다.


  말이 필요없다. 그냥 읽으면 된다. 그러면 자연을 보호하자는, 환경을 파괴하지 말자는 구호보다 더 마음에 와닿게 된다.


  자연스레 자연에 마음이 쏠리고 환경을 보호해야 함을, 그것이 바로 우리를 또한 우리 미래 세대를 살리는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시집을 읽으면 시인의 말에서 한 '문학의 원사(原絲)는 '비애'입니다'(16-17쪽)라고 한 말이 가슴에 들어박힌다.


비애... 그렇다. 슬픔이다. 무엇에 대한 슬픔인가. 나를 둘러싼 또다른 '나'가 파괴되는 것에 대한 슬픔, 아픔이다. 이런 아픔을 무시하지 못하고 나서게 되는 것이 바로 시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시인은 시로써 나서기도 하지만 행동으로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행동이 행동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행동은 다시 시로 나타난다.


자연과 함께 했던 일들이, 보금자리를 골프장에 빼앗기고 쫓겨나게 될 운명에 처한 뱀을 보고도 징그럽다고 하지 않는다. 시인은 그러한 뱀을 보고도 슬픔을 느낀다.


       허물


골프장 쪽 둔덕을 내려온 초록색 뱀은

내 오른손 검지를 스쳐

오엽딸기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산길에 떨어진 골프공을 줍던 나도 놀라고 비탈을 흐르던 저도 놀라고

야생이 스쳐간 손에 뱀 비린내가 돋아

슬픔이 독처럼 몸에 퍼졌다


조정, 마법사의 제자들아 껍질을 깨고 나오라. 이소노미아. 2023년. 42쪽.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쫓아내야 하는지... 그 생명 중에 사람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까? 골프장이 들어서면 동네 사람들이 골프장을 이용할까? 골프장으로 더 편리한 생활을 할까?


아니다. 골프장을 관리하기 위해서 밀어버린 산, 새로 만든 웅덩이, 잔디, 이를 보호하기 위해 뿌리는 온갖 제초제들... 그리고 수시로 날아오는 골프공.


동네 사람이 아닌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의 편리를 위해 마을 사람은 물론이고 그곳에 자리를 잡고 살던 동물들이 집을 잃고 떠나야 한다. 한 순간에...그러니 시인이 마음에 '슬픔이 독처럼 퍼질' 수밖에 없다.


그런 슬픔을 마냥 안고 살아갈 수 없기에 시인은 슬픔을 털기로 한다. 슬픔을 이겨내기로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자연을 지키는 일이다. 산황산을 지키는 일. 골프장이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곳에서 그렇다면 이는 전국으로 확대될 수가 있다. 개발 광풍으로 사라지는 자연ㅡ생명에 시인은 마음을 줄 수밖에 없다. 그들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시인의 마음, 행동이 시집 전체에 펼쳐져 있다. 그러니 이 시집은 하나하나의 서정시이면서도 서사시다.


자연을 파괴하려는 사람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장대한 서사시.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다. 자연을, 새싹들을 '마법사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시인. 이런 마법사의 제자들을 우리가 막으면 되겠는가. 마법사의 제자들은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다. 그들이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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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 시간 틂 창작문고 14
김숨 지음 / 문학실험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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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위안부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 '정의기억연대'에 따르면 이제 생존자는 8명이라고 한다. 거의 십만 명에 가깝게 끌려갔던 위안부 중에 생존자가 이제 한 자리 숫자가 되었다. 그런데, 한자리 숫자로 생존자가 남을 때까지 과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었던가?


어떤 사람이 그랬다. '위안부'라는 명칭을 쓰지 말자고. 도대체 누가 누구에게 위로와 편안함을 주었단 말인가?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 대가로? 아니다. 이들은 위안을 준 사람들이 아니라 성 착취를 당한 '성노예'였다.


근대에 들어서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으니, 현대판 성노예라는 말에는 자발성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위안부라는 말에는 자발성이 어느 정도 들어설 여지가 있어서 오해를 살 여지가 있고. 가끔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갔기에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이유가 어쩌면 '위안부'라는 용어를 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예는 자신의 의지를 빼앗긴, 다른 존재에 의해서 강제로 부림을 당하는 존재다. 


노예제도가 없는데 노예로 살아간다면 그 치욕과 억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입으로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을 정도... 말을 할 때마다 그 고통이 떠오를 테니. 하지만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니... 


영화 '아이 캔 스피크'를 보아도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 특히 가족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말을 하지 않고 침묵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용기를 내어 자신들의 상황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있어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역사적 비극을 드러낼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했고, 세계 곳곳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워 잊지 말자고,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그들의 말을 제대로 들었을까? 아니 제대로 들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정작 힘있는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미 끝난 일이라고 했다. 또 자발적으로 그 일을 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일본인이 아니고 한국 사람 중에서도. 


세상에, 노예라는 말에 자발성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그들의 말하기는 정말 '듣기' 능력이 영에 가깝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밖에는 안 된다.


이들은 아예 들으려고 하지 않았으니,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들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들으려고 해도 말을 하지 못하는 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은 말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할 수 없는 상황, 김숨의 소설에 드러나 있다. 증언을 녹취하기 위해 황 할머니를 만나러 간 화자는 할머니 앞에 녹음기를 놓고 할머니 말을 들으려 하지만 할머니의 긴 침묵, 그리고 여동생의 반대에 부딪치고 만다. 


할머니가 말을 하게 하려 하지만 할머니는 말을 하지 않는다. 침묵, 침묵... 이 침묵이 고스란히 녹음기에 담긴다. 그렇다. 침묵 속에 있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녹취를 하려는 화자는 그 침묵 속에서 말을 찾아내고 들을 수 있도록 노력하지만, 그 결과는 녹취록으로 나올 수가 없다. 할머니가 한 말은 단 몇 마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머니가 말을 하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온몸으로 말을 한 것이 아닐까? 할머니의 침묵 속에 얼마나 많은 말이 담겨 있는가? 화자는 그 점을 안다. 그래서 기다린다. 기다리고 기다리지만 하루 동안 할머니는 몇 마디 말만 할 뿐,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듣기는 어떠해야 하는가? 침묵 속에서 발화되지 않은 말들을 들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 말을 들어야 비로소 제대로 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나. 꼭 입을 통해 음성으로 발화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을 통해 나오는 그 말들을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녀야 하지 않나.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화자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인지, 아니면 환청인지'(163쪽) 모르는 소리를 듣는다. 온몸으로 듣기 위해서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몸을 다 가져갔어……

그래서 ……  몸이 없지 ……

다 가져가서……

죽지도 못해 …… 몸이 없어서……

피는 나……

피는 눈에서 나는 거니까……

거기…… 굴 속에……

눈을 감아도 피가 흘러……  (163-164쪽)


이제 생존자는 8명이라고, 평균 연령은 94세를 넘어서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그들의 말을 들을 시간이 별로 없다. 그 점을 알고 제대로 들어야 한다. 


김숨의 이 소설 [듣기 시간], 바로 우리가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올해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우리 역사에서 우리가 들어야 할 것들을 드러내주는, 잘 듣기를 통한 표현이 이루어진 작품들이 있다. 김숨의 작품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 그래서 더욱 잘 들어야 하는 일들을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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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한국을 말하다
장강명 외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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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을 소설로 표현하기 위해서. 아주 짧은 소설로. 4000자 안팎의 소설이라고 한다. 21명이 참여했는데도 두꺼운 소설집이 아닌 얇은 소설집이 되었으니, 각 작가가 쓴 분량이 어느 정도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량이 짧다고 내용도 짧은 것은 아니다. 짧은 형식 속에 긴 내용이 들어 있다. 우리 사회가 보이고 있는 모습들 중에 하나하나씩을 잡아 소설로 표현하고 있으니까.


지금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들이 어떨까? 아니 작가들은 어떤 모습을 포착했을까? 21개의 주제라고 할 수 있지만 첫작품은 소설집의 방향이나 내용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주제는 20개라고 보면 된다.


요즘 화두가 되고 있는 AI에 대해서는, 이미 인공지능이 소설도 시도 쓰고 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작가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가 화두가 되고 있는 요즘, 곽재식은 '제42회 문장 생성사 자격면허 시험'이라는 소설로 이를 해결하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실행'하는 자격증을 인간에게만 주면 되는 일. 이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을 작가라고 하면 될 일. 즉 일은 인공지능이 하지만 열매는 인간이 먹어야 한다고 지금 현실을 조금 비틀고 있다.


구병모의 '상자를 열지 마세요' 역시 요즘 넘쳐나는 콘텐츠를 다루고 있다. 너무도 많은 콘텐츠들로 인해 우리는 사유를 하지 않는다. 사유 기능을 상실하는 인간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를 풍자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보면 된다.


점점 가난해지는 삶을 비판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이서수의 '우리들의 방'은 절약이라는 이름은 사실 가난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음을 해학적인 표현을 통해 보여주고 있으며, 이기호의 '너희는 자라서'는 사교육이 판치는 우리나라 현실을, 김화진의 '빨강의 자서전'은 일에 치여 번아웃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경란이 쓴 '금요일'은 가족을, 김영민의 '변기가 질주하오'는 현대적 삶과 예술을, 김멜라의 '마감 사냥꾼'은 고물가를, 정보라의 '낙인'은 타투를, 구효서의 '산도깨비'는 은퇴 후 자연에 돌아가 살고 싶어하는 자연인을 꿈꾸지만 그것이 꿈에 불과할 수도 있음을, 손원평의 '그 아이'는 현대판 소비를, 이경란의 '덕질 삼대'는 팬심을, 천선란의 '새벽 속'은 새벽 배송으로 힘들어하는 배달노동자들을, 백가흠의 '빈의 두 번째 설날'은 이주 노동자의 문제를, 정이현의 '남겨진 것'은 반려동물을, 정진영의 '가족끼리 왜 이래'는 섹스리스를 주제로 한다고 하지만 육아와 일에 치인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서도 멀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을, 김혜진의 '사람의 일'은 노동을, 강화길의 '화원의 주인'은 마약이나 이런 중독만이 중독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자기 만족적인 중독이 있음을, 김동식의 '그분의 목숨을 구하다'는 돈을, 최진영의 '삶은 계란'은 식단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렇게 20개의 주제가 가볍게 펼쳐지는데, 읽으면서 마음은 절대로 가볍지 않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일이고, 우리 다음 세대들도 역시 겪을 일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을 통해서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으며, 그것들을 표현한 작품들을 통해 그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지도 생각할 수 있다.


이 소설집에 실린 20개 주제에 들어가지 않지만 여기에 정치를 풍자하는 소설이 하나 정도 들어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우리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주제가 바로 '정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소설, 한국을 말하다]라고 했으면 정치를 다루는 풍자 소설 한 편은 실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래도 지금 한국 사회를 전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해주는 소설집이다.


무겁지 않게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그러면서도 우리 사회 문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그러한 소설집이니 한편한편 천천히 읽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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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그것도 그 운명을 바꿀 수 없다면. 마치 예정조화설처럼 모든 것이 정해져 있다면 인간의 삶은 행복보다는 불행 쪽으로 가지 않을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어떤 행동을 해도 정해진 대로 될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비극이다. 그러니 자신의 운명을 아는 것이 꼭 행복한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즉 정해진 것처럼 보이는 운명도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점쳐보지 않을까?


알고 고칠 수 있고, 또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으니, 그때 운명은 나에게 행복으로 다가올 수 있다. 즉 바꿀 수 없는 운명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운명. 그것은 운명을 알고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운명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우선 자신의 성격을 알아보는 MBTI(16개의 성격유형이 있으니)가 있고, 9개의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 애니어그램이 있고, 점과 비슷하게 타로 점이 있고, 그리고 우리나라 점, 또 주역이 있다. 


이보다 더 많은 방법이 있겠지만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 많이 알려진 방법들인데, 최근에 사주 보는 사람들이 늘었다고 한다. 설마 저번 대선의 영향은 아니겠지...


사주를 고정된, 불변의 것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것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를 생각한다면 사주, 좋다. 그것을 맹신하지만 않는다면.


왜냐하면 사주를 본다는 것은 그것에 자신을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빠져 있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새로운 거울을 추가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 지금 내가 이래서 이런 상황에 처해 있구나.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그것이 사주의 의미다. 즉 사주는 보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같은 사주라도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이 하는 행위나 마음가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해석이 달라지면 운명도 달라진다. 그것이 요즘 사주보는 사람들, 또는 자신의 사주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지닌 자세다.


그 점을 이번 호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사주를 맹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판단하는 또 하나의 거울로 사주를 보고 해석하는 것. 그것은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사주를 미신의 영역이나 맹신의 영역이 아니라 자신을 돌아보고 행동하는 영역으로 옮겨놓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것이 이번 호, 사주에 대한 글들이다.


또 이번 호에서 많이 생각해야 할 문제를 오후 작가가 제시하고 있다. '값비싼 치료, 국가는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나'라는 글에서.


의료 문제가 붉어진 한국 사회에서 의사 문제도 문제지만, 의약품 문제도 문제다. 건강보험으로 모든 치료를 보전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서 너무도 비싼 약을 어떻게 해야 할지. 국가에서 건강보험으로 모두 보전해주면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도 반가운 일이겠지만, 막대한 예산이 투입되므로, 무한정 국가가 나설 수는 없는 일.


세상에 약값이 28억 원이나 되다니... 이것을 건강보험이 보전해줘서 600만 원에 투약할 수 있다고 하는데, 이런 약들이 계속 개발이 된다면, 돈이 많은 환자들에게는 기쁜 소식이겠지만, 그 비용을 충당할 수 없는 환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더 상실감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런 약들은 국가가 지원해줘야 하는데, 마냥 할 수도 없고...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개발한 제약회사의 이윤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그러니 그러한 인간의 생명에 관련된 연구는 세계적인 협업으로, 세계정부 차원에서(유엔이라고 해야 하나) 해야 하지 않을까. 이윤을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우선한다면, 세계 각국에서 차등적으로 비용을 충당해 그런 연구를 지속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헛된 생각도 품어보는데...


이게 아직 안 되고 있으니, 오후 작가의 말인 '의학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과거에도 건강은 부의 영향을 받았지만 이제 결정적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독자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하나뿐이다. 부디 건강 잘 챙기시길.'(81쪽)이라는 말이 씁쓸하게 다가온다.


이런 현실이 아니길... 부가 건강에 어느 정도 영향은 끼치겠지만 결정적 영향은 끼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그런 사회를 꿈꾸는 것이 [빅이슈] 아니던가. 그래서 이런 잡지가 계속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나. 우린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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