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있는 줄 알았다. 너무도 유명한 시집이었고, 제목이 된 시는 자주 읽었던 시였으니까.


  그런데 시집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시만 읽고 있었던 거다. 워낙 유명한 시라서 쉽게 만날 수 있던 시였으니까.


  그 한 시로도 충분하지만 시집을 구해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집은 처음 간행된 시집과 지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시집이 다르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시인이 시집의 시들을 바꾸기도 하고, 제외하기도 했다고. 새로운 개정판 소개가 이렇게 되어 있다.



 19권. 맑고 부드러운 언어로 전통 서정시의 순정한 세계를 펼쳐온 '우리 시대 최고의 감성 시인'으로서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정호승 시인의 첫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개정판이 출간되었다. 1993년 첫 개정판에 이은 두번째 개정판이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부 가름을 다시 하고 연작시를 해체하여 작품마다 제목을 새롭게 달았으며, 초기 시 4편을 추가로 수록하였다. 1979년 초판이 출간된 지 35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냉철한 현실 인식과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과 '슬픔을 수반한 아름다움'이 보석처럼 빛나는 정결한 시편들이 여전히 가슴을 적시는 뭉클한 감동을 일으키며 고요한 울림을 선사한다.


내가 읽은 시집은 2004년 개정판 16쇄니, 첫 개정판일 것이다. 표지 그림이 다르다. 그렇다면 수록된 시도 조금 다를테고. 


뭐, 그런 사정이야 그렇다치고, 시집에 나오는 주된 낱말은 '슬픔''이다. 다른 낱말들 중에 빈도수가 높은 말도 있지만 '슬픔'만 취급하자.


아직도 우리는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니까. 시인이 그렇게 슬픔을 주겠다고 하고,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슬픔이 기쁨에게' 중에서 - 13쪽)고 했지만, 아직도 우리는 슬픔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자신의 기쁨에 취해서, 슬픔을 외면하는 생활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지금 시대에는 더더욱 슬픔의 힘이 필요하겠지만, 슬픔을 멀리하면서 기쁨만을 바라보려고 한다. 그렇게 기쁨만을 바라보려고 한다고 슬픔이 사라질까.


아니, 오히려 슬픔을 바라보고, 슬픔을 만나고, 슬픔과 함께해야 슬픔이 사라지지 않을까. 시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 하나 만나기 위해 / 나는 다시 슬픔으로 가는 저녁 들길에 섰다.'('슬픔으로 가는 길'에서 - 8쪽)고 했다. 


'우리가 슬픔을 사랑하기까지는 / 슬픔이 우리들을 완성하기까지는 / 슬픔으로 가는 새벽길을 걸으며 기도하라. / 슬픔의 어머니를 만나 기도하라.'('슬픔을 위하여'에서 - 9쪽)


이렇게 살다 보면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살아보아라. / 슬픔 많은 사람끼리 살아가면은 /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아름다워라.'('슬픔 많은 이 세상도'에서 - 14쪽)라는 시구처럼, 아름다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슬픔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정호승 시는 그렇다고 슬픔 속에 함몰되어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정호승 시는 움직임이 있다. 가고 있다. 끝에서 멈추지 않고, 그 끝에서 움직인다. 이는 그의 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정호승의 '봄길' 중에서)라는 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결국 그가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은 기쁨의 세계로 함께 가기 위해서다. 나만의 기쁨이 아니라 우리의 기쁨을 만들기 위해서다.


각자도생의 사회라고 한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말이 통용되는 사회라고도 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또는 자신들의 주장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슬픔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사람들이 많은 사회라는 생각도 든다. 아니다. 그런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러니 슬픔을 생각하자. 나의 슬픔, 남의 슬픔, 우리의 슬픔을 생각하면 그런 슬픔 속에서 우리는 기쁨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정호승 시집을 읽으면 그런 슬픔의 힘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AI 사피엔스 - 전혀 다른 세상의 인류
최재붕 지음 / 쌤앤파커스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가 없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막을 방도는 없다. 막는다고 해서 개발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내가 쓰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오히려 쓰지 않는 나는 급류에 휘말려 떠내려가듯 이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하고 휩쓸려갈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시대의 흐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거부하고, 부정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적어도 꼰대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또 시대에 뛰떨어져 허덕허덕거리며 살아가지 않으려면.


이 책은 그런 점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지금 AI 기술이 어디까지 왔는지 보여준다.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세상이 변해버렸다. 이제는 사람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AI 기술이 속속 나오고 있다. 다양한 산업분야에서.


예술이라고 해서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미 사진과 그림 분야에서 또 영상 분야에서 AI는 사람의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할 수 있다. 빠르고 효과적으로 제작을 해내는 솜씨. 이제는 그런 시대가 되었으니, 그것에 맞춰 준비해야 한다고...


물론 젊은 세대는, 요즘은 Z세대와 알파세대를 합쳐 '잘파세대'라고 하는데, 이들은 디지털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러한 AI 기술에 친숙하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스마트폰과 더불어 지내왔다. 손에서 스마트폰을 놓은 적이 거의 없는 세대다. 당연히 스마트폰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들이 더 편하다.


그리고 AI 시대는 스마트폰으로 많은 것들을, 앞으로는 모든 것들을 처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그런 세상이 온다.


아무리 그런 세상을 거부하고, 예전으로 돌아가자고 해도 돌아갈 수 없다. 물론 여유 있는 사람은, 그런 AI 기술을 거부하고, AI 세상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삶을 누릴 수 있다. 이미 가진 것이 있는 사람은 그냥 남이 자신을 위해 해줄 수 있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또 그렇게 여유 있는 사람일수록 반대로 첨단 기술에 앞서간다. 그들은 어쩌면 먼저 AI 기술에 접근하고 사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자신들은 몰라도 아는 사람을 고용해서 더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런 여유집단들을(사업을 해서 더 많은 이윤을 내겠다가 하는 사람은 제외하고) 빼면 다른 사람들은, 생존-생활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AI 기술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무시했다가는 취업하기도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AI 기술을 활용할 수 있어야 앞으로 올 시대를 살아갈 수 있다면, 배워야 한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앞서가기 위해서는 두말할 것도 없고.


이 책에서 저자는 다양한 분야에 이미 AI 기술이 도입되었음을 보여주고, 이런 추세는 거스를 수 없을 강변한다. 또한 우리나라는 AI 기술을 활용할 기반이 마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고민하고, 잘 활용하고 있는 사례들을 보여준다. 이미 우리는 AI 시대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AI 시대가 되었다고 인문학이 쓸모없다는 소리는 아니다. 저자 역시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사람의 감성을 움직이지 않으면 실패하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했다는 말, 심장이 노래하게 했다는 그 말을 저자는 많이 인용한다. 딱딱하고 차가운 기술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스한 기술이어야 한다는 것.


AI 시대에도 AI 기술은 그런 점을 목표로 지향해야 한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왜 AI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가를 사람들이 납득하기 쉽게 경제 지표를 이용해서, 즉 자산의 규모를 인용해서 보여주고 있다.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AI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그러한 기업들이 계속 잘나가고 있음을 수치를 통해서 보여주고, 그런 시대가 되었으니, 우리가 준비를 안 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다양한 AI 기술을 소개하고 있으며, 그것들의 활용 사례도 알려주고 있어서 막연히 AI 기술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다. 그리고 AI 기술이라고 해서 모두 인간을 배제한 기술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고...


하지만 그럼에도 자산으로 AI 기술이 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에 반감을 지닐 수도 있고, 또 차페크의 [R. U. R. - 로줌 유니버설 로봇]이나, 아시모프가 쓴 [파운데이션]에 나오는 '솔라리아'를 연상하면서 로봇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또는 인간과 인간이 교류하지 않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모든 기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 AI 시대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면 그 흐름에 우리 인간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고려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즉 어떤 기술도 중요하지만, 왜 그 기술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도 꼭 해야 한다.


멀게만 느껴졌던 AI 시대가 성큼 다가왔음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됐고, 그에 맞는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다만, 아직은 인간적인 온기, 또는 불편하고 조금 엉성하더라도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지는 그런 생활을 포기할 수 없다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으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장으로 간 성폭력
김보화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엉뚱하게도 이 책을 읽으면서 '문해력'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내용을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해야 하나? 어쩌면 이 책은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문해력 부족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문해력이 꼭 필요한 상황에서.


문해력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듣기'를 떠올렸다. 듣기가 문해력과 연결이 된다는 사실. 잘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요즘 처절하게 깨닫고 있는 중인데, 듣기를 못하면 제 말만 한다. 제 말만 한다는 것은 제 이익만 챙긴다는 말이다.


왜 성폭력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문해력과 듣기를 떠올렸을까? 우리는 과연 성폭력 피해자들의 말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또 그들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나 생각해 보면, 내 관점에서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의 말을 판단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러는 것도 문제가 되는데,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잘못 들으면, 문해력과 듣기 능력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나? 그러면 엉뚱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성폭력 사건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라고 한다. 성폭력으로 고소를 당하면 가해자는 명예훼손죄나 무고죄로 역고소를 한다고 한다. 그러면 재판과정에서 성폭력은 묻히고 다른 쟁점들이 떠오르고, 피해자의 태도 등을 문제삼기도 하고, 권력과 자본이 부족한 피해자에게 이중 부담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한 이중부담으로 소송을 하기 힘든 피해자들이 발생하면 그들은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도 위축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가해자들이 (억울하게 죄를 덮어쓰는 사람은 없어야 하겠지만) 자신의 죄를 벗어나거나 경감하기 위해서 돈을 들여 변호사를 사고, 각종 고소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이것이 시장으로 간 성폭력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시장으로 간 성폭력에 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최근 성폭력 역고소는 과거에 비해 더 많은 법을 활용하면서 더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피해자뿐 아니라 피해자를 지원하거나 지지하는 가족, 주변인에게까지 확장되고 있다. 37


명예훼손은 이제 약간 산업이 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피해자의 말) 43


성폭력 역고소가 강화되는 이유 중 하나는 성폭력 피해를 더는 참지 않고 법의 안팎에서 고소나 공론화 등으로 실천하는 피해자들의 문제제기가 많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피해자를 지원하기 위한 공적제도들은 실효성이 부족한 반면, 역고소와 관련된 법의 구성은 이미 가해자를 보호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45


성폭력상담소를 찾는 피해자들은 가해자보다 자원이 적거나 법적으로 유리하지 않은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다. 67

가해자의 방어와 피해자의 권리는 불안감을 강조하는 성범죄 전담법인의 홍보와 고객유치의 수단으로 활용되면서 성폭력의 법적 해결 과정은 자원의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다. 74


성폭력은 법적 해결 과정에서 현실과 괴리된 최협의설과 관행화된 감형, 수사과정에서 피해자를 신뢰하지 않는 통념, 무고에 대한 의심, 재판부에 따라 결과에 큰 차이가 나타나는 특징 등을 보인다. 75


민주적 정치의 공공 영역이 약화되는 맥락에서 사법적 수위는 점점 더 높아진다. 78


가해자들을 조력함으로써 금전적 이윤을 얻는 법인, 그러한 법인들을 조력하는 (전직) 경찰-검찰-판사 및 학자들, 심지어 심리상담소, 범죄심리학 전문가들이 운영하는 진술분석센터와의 연계, 이들의 전략을 승인하는 법원은 전문가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성촉력 가해자 지원산업을 확장하고 있다 137


성폭력은 경제적인 것으로 재구성되고 있다(138) ... 탈범죄화된 가해자 남성성을 만들어내고 있다(139) ... 재판부는 법시장화를 촉진하고 있다(139)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의심, 가해자를 중심으로 한 억울함의 서사, 미투운동에 대한 거부감 등이 확산된 것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140)


이런 내용들을 보면 성폭력 사건에 이윤을 추구하는 법인들이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인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사회적 지위나 권력을 쥐고 있는 가해자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피해자는 이중으로 힘든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다.


또한 재판과정에서 피해자의 피해자성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고, 또 가해자에게 여러 가지로 감형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그 점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한다.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법적 주체로 인식하고 그에 걸맞은 언행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재판부는 피해 상황에서 피해자가 처할 수밖에 없었던 무력함과 법적 공간의 주체로서 피해자의 모습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181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해자는 그에 합당한 처벌을, 피해자는 그것을 이겨내고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사회에 그런 문화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듣기와 문해력 아닐까 한다.


이런 듣기와 문해력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 이 책에서는 그것을 성인지감수성이라고 하는데, 재판부가 아닐까 한다. 판사를 비롯한 경찰, 검찰들. 이들에게는 피해자의 말을 잘 들을 듣기 능력과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문해력이 필요하다. 이것들의 바탕이 바로 성인지감수성이고.


마찬가지로 억울한 가해자가 나오지 않게 해야겠지만 법인도 이윤만을 위해서 활동을 하면 안 된다. 그들이 이윤을 위해서 일을 하는 순간, 성폭력은 시장으로 가게 된다. 그러니 억울한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기본 원칙을 지키면서 활동을 했으면 한다.


더 많은 조치들이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문화를 확립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는 사회,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서 '이 책은 공감과 지지의 기록이고 앞으로의 연대와 투쟁의 결의문이다.'(355쪽)라고 하고 있다. 공감과 지지, 연대와 투쟁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바로 '듣기와 문해력' 아닐까 한다. 

성폭력의 법적 해결 과정은 피해자의 치유를 산업화하고 가해자의 보복성 역고소를 용인하면서 법인들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탈정치화되고 있음을 주의깊게 살펴봐야 한다. - P221

성폭력 사건의 ‘해결‘이란 가해자가 합당한 징계/처벌을 받고 반성/성찰하고, 피해자는 피해의 경험을 재구성하는 가운데 일상으로 회복하고, 그로 인해 공동체/사회의 인식과 문화, 때로는 구조적 틀과 내용이 피해자에게 공감할 수 있도록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 P223

성폭력은 페미니즘 이론과 실천에서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분야 중 하나로서, ‘성적인 폭력을 둘러싸고 사람의 몸과 인격, 기억과 정체성, 감정과 합리성, 자율성과 관계성, 제도와 문화에 대한 총체적 접근 속에서구조화되는 개인적 경험이자 한 시대의 담론적 형성물이며, 집단적으로 이해되고 구성되는 정치적 구성물로 재정의하고자 한다. - P332

성폭력 정치란 성폭력을 탈정치화하는 담론적 질서에 저항하는 정치적인 페미니즘 투쟁으로서 성폭력 사건 해결의 공공성을 확장하기 위한 사회적 조건과 역동적 실천의 양식들로 개념화하고자 한다. - P333

실천적 제안

첫째, 변호사 시장의 무분별한 홍보와 고소 남용에 대한 변호사 업계 차원의 규제와 노력이 필요하다. 337
둘째, 성폭력 사건 해결의 법시장화에 저항하기 위한 제도의 도입을 고려해볼 수 있다. 339
셋째, 법조인들의 성인지감수성 훈련이 필요하다. 339
넷째, 성폭력 역고소 수사와 판단의 과정에서 ‘적극적 조치‘가 필요하다. 340
다섯째, 성폭력 피해자가 수사-재판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341
여섯째, 조직 및 공동체 내 성폭력 사건 해결을 공유된 책임으로 인식하면서 사건 해결 과정을 조직문화의 변화를 위한 과정으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342
마지막으로, 여성운동에 대한 국가의 통치 질서에 강력한 저항이 필요하다. 343-344 - P3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의 운명에 대한 아주 개인적인 생각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용어로 시작해야 한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주장했던 철인 정치... 거의 완벽한 사람인 철인이 정치를 해야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다고. 이런 철인 정치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민주주의는 철인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해서 그 중 가장 낫다는, 또는 가장 현실적이라는 의견을 받아들여 실행하는 정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전세계에서 민주주의가 대세인 지금은 철인 정치는 해서는 안 될 정치다. 전체주의는 당연히 철인 정치가 불가능한데, 민주주의에서도 철인 정치를 이야기하면 안 된다. 특정한 개인에게 우리들의 운명을 맡겨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철인이 있다고 해도. 


하지만 지금 세상에 그런 철인이 있을까? 철인은 없다고 봐야 한다. 급변하는, 엄청나게 분기된 분야가 편재한 현대 사회에서 철인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래야만 하는 세상이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어느 한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어떤가? 아직도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말이 있다. 삼권분립이라고, 권력이 분산되어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는 민주적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런가라고 물으면, 답을 그렇다라고 쉽게 할 수가 없다. 그만큼 대통령의 권한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권한을 십분 활용하는 사람은 제왕적 대통령이 된다. 


그런데 자신을 제왕이라고 하지 않고 민주적 운영자라고 생각하면? 대책이 없다. 이를 유시민은 주관적 철인왕이라고 부른다. 아니면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완성형 권력자라고도 하고.


주관적 철인왕이든, 완성현 권력자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그런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보완해주는 관계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사회가 바로 민주주의 사회다. 민주주의 국가다. 이런 말에 비추어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고, 그것에 대한 비평을 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유시민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을 담아서. 그가 '정치 잡문'이라고 해야 좋을 글이 되었다(6쪽)고 하고, '인상 비평'이 많다(7쪽)고 할 정도이니. 


이렇게 이 책은 유시민의 주관적인 생각을 쓴 책이니 받아들여도 그만, 안 받아들여도 그만이다. 다만 끝까지 읽어볼 필요는 있다. 그런 태도가 백가쟁명을 이루는 민주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유시민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은 어떤가를 살펴보자.


그는 말한다. '윤석열은 '도자기 박물관에 들어온 코끼리'와 같다.'(7쪽)고. 그가 잘못된 장소에 들어왔다는 뜻이다. 그러니 잘못을 윤석열에게만 전가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그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그랬다고 책임이 면제되지는 않는다. 그런 분위기를 바꾸지 못한 책임이 있다. 어느 정도는.


그래서 박물관에 코끼리가 들어가면 내보내야 한다. 빨리. 내보내기 전에 조용하게 더 큰 사고를 치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유시민의 말을 빌리면 '민주주의는 선을 최대화하는 제도가 아니라 악을 최소화하는 제도'(23쪽)라고 하니, 악을 최소화할 수 있는, 코끼리가 박물관에서 사고를 치지 않게 할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최소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현명하고 유능한 권력자가 국민의 이해와 지지를 받고 야당과 대화해 가면서 사회적 선과 미덕을 최대한 실현하는 민주주의를 '최대 민주주의', 선과 미덕을 실현하지는 못해도 사악하고 무능한 권력자가 마음껏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민주주의를 '최소 민주주의'라고 하자.'(26-27쪽)


이런 최소민주주의나마 유지해야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나라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정치가와 정치업자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구분할 수 없으면 적어도 정치가들이 정치를 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내 생각이 아니라 유시민의 생각이다.


유시민은 정치가와 정치업자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정치를 위해 사는' 사람과 '정치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 편의상 전자를 '정치가', 후자를 '정치업자'라고 하자. 정치인은 누구나 '대의(大義)'에 헌신하는 동시에 '소리(小利)'를 추구한다. '대의'는 정치적 이상과 사회적 선을 실현하는 것이고, '소리'는 공직과 당직 등 이익과 지위를 챙기는 일이다. '대의'와 '소리'가 충돌할 때 대의를 앞세우면 '정치가', '소리'를 먼저 챙기면 정치업자가 된다. (197쪽)


그렇지만 정치가는 대의를 위해 일을 한다고 해도, 완벽할 수 없다. 그도 실수를 한다.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위선이라고 한다. 악인이 이득을 취하는 행동을 하면 위선이라고 안 한다. 그냥 그러려니 한다. 하지만 대의를 위해 일한다고 하는 사람이 이익을 취하는 행위를 하면 위선이라고 비난한다. 그에게 수모를 준다. 이때 유시민은 정치가는 그런 수모를 견뎌내야 한다고 한다.


오직 정치를 해야만 이룰 수 있는 이상을 품었거니, 정치 말고는 달리 충족할 수단이 없는 욕망에 사로잡혔거나, 둘 중 하나라야 정치의 남루한 일상을 감내할 수 있다. (36-37쪽)

대중에게 정치가로 인정받으려면 대의를 위해 헌신하면서도 정치판에서 오래 생존해야 하기 때문에 수모를 견디지 못하면 리더가 될 수 없다 (199쪽)


정치가들에게 수모를 견뎌내라고만 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정치가들이 어느 정도 수모를 이겨내고 계속 대의를 위해서 정치를 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제도다. 대의와 소리(小利 ). 정치가가 취한 소리만을 보고, 그를 재단하고, 그를 몰아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철인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정치가는 더한 도덕적 잣대를 스스로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민주주의 정치는 '전쟁의 문명적 버전'이다. 권력투쟁을 할 때도 정책경쟁을 내세운다. 상대방을 죽이지 않고 선거에서 이기는 데서 멈'추어야 한다. (264쪽)


이런 그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 대통령에 대한 유시민의 개인적인 생각을 알 수 있다. 철인이 아닌데 철인인양 정치하는 사람. 국민보다는, 대의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정치를 이용하는 사람이라고 그는 판단한다. 그러니 지금대로 나가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암울하다. 그래봤자 3년 뒤면 바뀌겠지만...


3년이 짧은가? 길다면 엄청 긴 시간이다. 우리나라가 거꾸로, 과거로 돌아가기에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아무리 퇴행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최소민주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니 가능성이 있다. 우리 사회는 절대로 독재 사회가 아니다. 전제 왕정도 아니다. 제도가 살아 있고, 시민의식이 살아 있다. 유시민은 거기에 기대를 건다. 


그의 생각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한번 읽어볼 필요는 있다. 적어도 우리 사회를 보는 다른 눈을 가질 수는 있을테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원더풀 사이언스 - 아름다운 기초과학 산책
나탈리 앤지어 지음, 김소정 옮김 / 지호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과학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쉽게, 정말 어려운 방정식이나 수식이 나오지 않고, 과학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하는 책이다.


왜 우리는 천문관측소로 여행을 가면 안 되는가? 과학박물관은? 기껏 공룡화석박물관은 아이들 데라고 가본 적은 있을지라도, 그것은 아이들이 한껏 공룡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지, 어른인 우리가 관심을 가져서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 생활이 과학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데, 또 과학(수학)을 그렇게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과학을 멀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렵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 생활과 별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러나 과학은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가 발 딛고 사는 땅부터 별을 보는 하늘까지, 우리가 먹는 음식부터 우리 몸까지, 또 눈에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모두 과학과 관련이 있다. 그러니 과학은 곧 우리 삶이다.


이렇게 과학이 우리 삶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데 어찌 과학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랴. 관심을 가져라. 말만 한다고 관심을 갖게 되지는 않는다. 무언가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것을 충족시켜 주어야 관심을 갖는다.


이 책은 그런 역할을 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착각부터 시작한다. 과학적 지식이 있음에도 착각하는 경우, 잘못 알고 있는 경우를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사례들을 통해 과학이 그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착각에 이어서 확률과 척도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로또에 당첨될 확률이라고 해서, 확률이라는 말은 많이 들어봤고, 무언가를 하기 전에 고민하고 계산하는 것도 확률과 관련이 있다. 마지막 장에 나오는 생명체가 있는 다른 행성이 있을까란 질문에 대한 답도 확률로 말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니, 그것을 파악하는 척도도 필요하다. 큰 것부터 아주 작은 것까지. 이렇게 과학에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한 다음에 물리, 화학, 진화생물학, 분자생물학, 지질학, 천문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설명을 한다.


나같이 과학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하고 있어서 그리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읽으면서 과학이 다만 어렵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차분히 한 분야씩 공부하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 과학을 멀리하기만 해서는 안 되겠단 생각을 하게 한다. 


아직도 과학의 아름다움을 잘 느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과학이 필요함을, 과학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정도로 이 책은 과학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과학이 어렵다고만 생각하는 사람, 이 책을 읽으면 과학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은 그릴 수 없을지 몰라도 전반적인 윤곽이 잡힌 그림은 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