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
조시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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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한 느낌을 주는 소설(동양식 정원, 중국식 테이블. 파수破水-이 작품은 어느 하나로 규정하기는 힘들다)도 있고, SF소설이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소설([월간 코스모스 ]6월호, 특집:외계문학, 어스, 무덤 속으로,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도 있고, 그냥 우리 사회의 현실을 다루고 있는 소설(파수, 에코 체임버)도 있다.


다른 내용의 소설들을 엮어 하나의 소설집으로 내었는데, 무엇보다도 읽는 재미가 있다. 읽기에 몰입할 수가 있는 소설들이다. 한편 한편이 모두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마치 정념이나 무엇을 떨치지 못해 그 속에 빠져들듯이, 소설의 내용을 이해하기보다는 그 모호함 속에 빠져들어 버린다.


'동양식 정원'에는 물고기가 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원념을 버리지 못해, 그곳으로 가버리는 사람들. 이는 중국식 테이블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온다. 마치 옛날 동양 공포 영화를 보는 듯한, 귀신이나 귀신들린 사람들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여기에 '귀'를 먹었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파수'에서도 반복되어 나온다. '귀'가 잘리거나 '귀'를 먹었다는 것은 듣지 못한다는 말 아닌가. 듣지 못함, 이것은 불통인데, 귀를 잘라버리거나 귀를 먹어버리는 것은 남에게 자신의 말을 전달하지 못한다는 의미 아닌가.


소통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 아닌가 싶기도 한데,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에서 인간은 영혼(데이터)으로 변해버렸다. 인공지능이 다스리는 사회에서 인간은 데이터로 존재하고, 그 데이터가 인간을 흉내낸 몸으로 들어가 지내다 다시 데이터로 저장되는 그런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몸은, 유한한 몸, 질병에 걸리는 몸을 혐오해서 무한한 생명, 질병 없는 인간의 몸을 추구하는 우리의 모습이 만나게 될 미래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몸이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몸은 독성을 지니고 있어서 땅에 묻을 수도 없다. 우주로 쏘아올릴 수밖에 없다. '어스'와 '무덤 속으로'를 보면 그러한 사회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인간은 이제 지구에서 살 수 없다. 인간 스스로가 지구를 망가뜨려버렸다. 개조된 몸으로 살아가는 인간들, 그러한 인간들을 우리는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나? 이젠 '인간'에 대한 새로운 정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는 인공지능이나 복제인간에 대한 논의를 떠올리게 하는데, 소설 속에서 그러한 인간들은 예전의 인간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가 인간이라고 할 때의 인간처럼 살고 죽고 싶어하는 존재들이 있는데, 그러한 인간을 포기할 수 없다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데이터로만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이었을 때를 그리워하고 그때 사랑한 사람을 찾아가는 존재를 그리고 있는 '크림의 무게를 재는 방법'에서도 그 점이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귀'가 없는 사회가 맞닥뜨릴 미래의 모습, 어쩌면 현재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결국 이 소설집에서 나를 사로잡은 것은 '귀'를 먹어버렸다는 표현이다. 듣는 역할을 하는 '귀'를 자신이 먹어버렸다는 것, 또는 잘라버렸다는 것은 남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것이고, 이는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밀어붙이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것들을 끝까지 밀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데, 그러한 세상이 행복할 수 없음을 이 소설집의 다양한 배경과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후 재앙부터 시작해서 외계 탐사 및 이주, 인공지능 개발 등등이 과연 소통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어쩌면 이들은 다른 존재들의 '귀'를 먹어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지금처럼 이렇게 일방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이 소설집을 통해서 미리 만나보는 경험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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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혁명과 반혁명 사이 - 철학자 박구용, 철학으로 시대를 해석하다
박구용 지음 / 시월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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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혁명이다.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바로 빛이고, 이렇게 어둠을 몰아내는 것이 바로 혁명이다. 혁명하면 피를 연상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에서 비롯되었지만, 우리나라는 두 번의 대통령 탄핵과정에서 빛의 혁명을 이루었다. 평화 혁명. 그래서 혁명에서 피를 제거하고 빛(여기에 더불어 빛과 함께는 볕-온기)을 생각하게 했다. 한번은 촛불로 빛이 어둠을 몰아냈고, 또 한번은 응원봉으로 대표되는 빛이 어둠을 몰아냈다.


빛의 혁명은 피의 혁명과 달리 축제의 장이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함께 어울리며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희망과 즐거움에 찬 혁명. 그것이 빛의 혁명이었다. 그리고 빛의 혁명은 윤석열의 탄핵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속되어야 한다. 빛이 사그라들면 어둠이 시작된다. 혁명은 반혁명을 부른다. 반대로 반혁명은 혁명을 부른다. 이 책에서 저자인 박구용이 말하는 반혁명이 윤석열의 비상계엄이었다면, 혁명은 응원봉으로 대표되는 빛의 함성이었다. 빛들의 모임이었다. 반짝임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면 안 된다.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다시 반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정치가 나아가야 할 길이다. 이 책에서 제7공화국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제는 87헌법을 넘어서 빛의 혁명을 이어갈 수 있는 새로운 헌법, 새로운 정치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7공화국이다.


철학자로서 우리 시대를 말하고 있는데, 대부분을 윤석열 정권과 그를 탄핵한 이후에 중점을 두어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윤석열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촛불 혁명으로 이룬 일들에 대한 반혁명으로 나왔다고 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촛불 혁명은 어떻게 나왔느냐 하면, 박구용은 이러한 혁명을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우리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혁명의 역사는 동학혁명으로부터 시작해서 3.1운동을 거쳐 5.18민주화 운동을 들고 있다. 이러한 과거가 현재에 작동해서 87년 민주화 투쟁이, 촛불 혁명이, 그리고 다시 윤석열 탄핵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고.


우리나라 혁명의 역사는 이렇게 100년이 넘게 이어져 왔고, 이는 공공의 영역으로, 시민들이 권력을 쟁취하고 행사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혁명에 대한 반혁명으로 최근 윤석열 정권을 들고 있다.


반혁명은 오래가지 못한다. 다시 혁명으로 뒤집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뒤집었을 때, 그냥 뒤집고 말면 안 된다. 새로운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체제, 어디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체제는 없다. 동학혁명으로, 3.1운동, 5.18민주화운동으로 제시되었던 것들을 지금 시대에 맞게 제도로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 정당정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정당원들만의 정치가 아니라, 정당이 시민을 제대로 대변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구조가 확립되어야 한다.


시민들과 동떨어진 정당정치는 성공할 수 없다.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면 시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고 해야 한다. 시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들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그런 정치체제가 마련되게 해야 하는 것이 빛의 혁명이 지속되는 길이고, 그것이 제7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이제 탄핵 이후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실시된다. 한 달이 채 남지 않았는데, 대통령 한 사람을 바꾸는 혁명이 아니어야 한다. 이번 대통령 선거 기간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근본적으로 질문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시기로 만들어야 한다.


헌법 개정이 대통령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87년 체제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거의 40년이 되어가니 이제 이 시대에 맞지 않는 것들이 무엇인지,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를 논의하는 기간, 그리고 그러한 논의들이 반영될 수 있게 힘을 결집하는, 그야말로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기간이어야 한다. 그래야 빛의 혁명이 지속된다고 할 수 있다.


박구용이 이 책에서 주장한 내용은 명쾌하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을 토대로 이번 기회에 많은 공론장을 형성해서 혁명이 한 순간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되도록 해야 한다.


저자인 박구용의 주장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 이러한 주장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사회에서 빛의 혁명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 반혁명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간 우리 역사에 있었던 혁명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니, 이번에 이루어진 빛의 혁명, 잘 기억하고 앞으로도 지속되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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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표현한 문장 중에 슬픈, 너무도 슬픈,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어찌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무력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현실,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만나면서, 이런 현실이라면 이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현실이 아직도 그렇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문장들이 화살이 되어 와 박힌다. 이들의 삶이 이런데 도대체 왜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령 '감정노동자'라는 시를 보면 '빨리 지옥을 빠져나가리라 / 이 지옥을 빠져나가자, 나가자, 나가자……'('감정노동자' 중에서. 16쪽) 하지만, 지옥을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다. 


  그들은 '눈이 없는 길로 내몰리는 샌드백'(앞의 시 중에서)이 되어 '사자, 순식간에 튀어나와 / 육중한 발바닥으로 샌드백을 후려친다 / 갈기갈기 물어뜯는다 / 샌드백, 주저앉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흔들리다' (앞의 시 중에서)는 표현처럼 그렇게 당하고 산다.


이것이 어디 감정노동자뿐이겠는가? 우리 사회에서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에게 강자들이 휘두르는 폭력(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또는 그들은 폭력이라고 여기지도 않고 내뱉는 말들, 행동들)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 아닌가.


약강강약(弱强强弱). 강자에게는 끽소리도 못하는 것들이 약자들에게 큰소리를 치고 있는 것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현실 아닌가.


그러니 이 시는 너무도 슬프게 다가온다. 벗어나야 하는데, 이것이 우리 사회의 풍경이라니... 정말, 이 시에 표현된 내용이 사실일까 의문이 든다면, 한승태가 쓴 [어떤 동사의 멸종]'을 읽어보라. 작가가 직접 경험한 콜센터 직원의 일상이 드러나 있으니까. 그러한 감정노동자들의 생활이 달라지지 않았음을, 아무리 대화를 녹음한다고 해도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이런 어른들의 폭력이 아이들에게까지 번져나간다면 그 사회가 과연 가능성이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모범이 되는 어른이 있는 사회, 그런 어른이 많은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일지 명약관화하지 않은가.


이 시집을 읽다가 섬뜩한 마음에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시가 있는데, 그 시는 바로 '병아리'다. 병아리, 얼마나 귀여운가? 그 자체로 여리고 귀여운 생명체인데, 병아리를 대하는 아이의 모습, 이런 아이가 없다고 믿고 싶지만, 어쩌면 폭력에 무감한 사회는 이런 아이들을 키워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연신 병아리를 조몰락대던 아이 / 느닷없이 테니스공처럼 병아리를 벽에 내던졌다/ ... /하얀 백지처럼 웃으며 / 아이는 연거푸 허공에 공을 던지고 / ... /비틀거리던 몸, 안도의 숨 내쉴 때 / 아이의 손 다시 / 상자 안으로 쑥, 들어갔다'('병아리' 중에서. 59-60쪽)


이런 일이 과연 일어날까? 일어나지 않겠지.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지. 그럼에도 시인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서 약자를 이렇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경고 아닌가.


그런 사람들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사는 샌드백이나 병아리 같은 존재들이 이 사회에 있다고, 그것을 못 본 체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눈 감고 살지 말라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 시인은 그런 사회를 바라고 있기에 이렇게 우리가 보여줘서는 안 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어른이 주목받고 있는 우리 사회다. 그냥 나이 먹었다고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른답게 살아가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어른 노릇을 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대다. 잘못 나이 먹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이 약한 사람들을 '샌드백이나 병아리'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이 시집을 통해 시인은 우리 사회의 좋지 않은 모습을 드러내 그것을 바꾸어나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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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필의 진보를 위한 역사 - 진짜 진보의 지침서 & 가짜 극우의 계몽서
황현필 지음 / 역바연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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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쾌하다. 망설이지 않는다. 자신의 주장을 간단 명료하게 제시한다. 좌고우면(左顧右眄)이라고 하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지 않는다. 이리저리 재지도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자료를 제시하면서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그의 말을 빌리면 진보의 입장에서 주장한다.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사건의 해석이 달라질 수는 있지만 사실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진보나 보수를 막론하고 역사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순 있겠지만, 사실 자체를 왜곡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으로선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데 사실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에게 필요한 자료만, 문구만 선택해서 사실이 그러한 양 꾸며대는 사람들.


이 책에서 황현필은 그런 사람들로 뉴라이트 계열의 사람들을 지목한다. 그리고 그들의 주장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를 자료를 바탕으로 반박한다. 사실,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주장들을 뉴라이트 계열의 사람들이 왜곡한 경우가 많다.


그렇게 왜곡했는데도 뉴라이트들이 비판을 받으면서도 계속 살아남는 이유는, 그들의 주장에 동조함으로써 이득을 얻는 집단이 있기 때문이다. 역사의 해석을 통해서 이득을 얻는 집단이야 어느 사회에도 있겠지만, 왜곡된 해석으로 이득을 얻는 집단이 권력을 쥐고 있을 때에는 문제가 심각하다.


학문의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지장을 초래하는 차원이 되는데, 그것은 이들은 차분히 증거를 따지고 논리를 따져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언론을 통해서 또는 방송을 통해서 자신들의 주장만을 주입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역사관을 갖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잘못된 행동을 하게끔 유도하기 때문이다.


지금 뉴라이트들의 역사 왜곡이 도를 넘어섰다고 판단하기에 저자는 이런 책을 써서 역사 왜곡을 바로잡으려 한다. 뉴라이트들의 역사 왜곡에 동조하는 권력을 쥔 집단들이 횡행한다면 우리 사회가 더 나은 쪽으로 나가가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뉴라이트들이 주장하는 것들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반박이 아니다. 사실이 이렇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역사라는 이름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총 108개의 항목을 가지고 주장하고 있는데, 하나하나가 다 명쾌해서 이 책을 읽고서도 뉴라이트의 주장에 동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때 유럽에서는 뉴레프트라는 운동이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엉뚱하게 뉴라이트라니...


진보와 보수라는 말과 비슷하게 좌파니 우파니라는 말을 쓰는데, 좌파 중에서도 새로운 이론을 들고 나온 사람들을 뉴레프트라고 했었다. 그런데 우파에서 새로운 이론을 갖고 나올 수가 있나 싶기도 한데, 자고로 우파란 기존의 것을 지키는 쪽으로 가기 때문인데 뉴라이트라니...


기존의 것이 미약하면 바꾸려고 하는 진보 쪽으로 가는 것이 맞는데, 기존의 것을 더 안 좋은 쪽으로 돌리려는 것은 보수도 아니고 수구라고 하기에도 좀 그런데... 뉴라이트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지만 이는 퇴행에 불과하다. 


첫번째 항목이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근대화시켰다고? 철도를 깔아주고, 산업을 부흥시켰으니 우리는 일본에 고마워해야 한다? 정말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다. 그러니 황현필이 '식민지근대화론은 소수의 거짓말쟁이가 의도를 가지고 자행한 수준 낮은 역사 왜곡에 불과하다'(27쪽)고 하지.


이 의도가 무엇일까? 자명하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는 것. 자신들의 권력을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것. 그것을 위해서 역사적 사실을 자기 입맛에 맞게 해석해서 갖다 붙인다. 식민지근대화론부터 시작해서 이 책은 비상계엄을 국민을 계몽시키기 위해서 했다는, 소위 '계몽령' 이야기로 끝낸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말처럼 번져나가는 현실을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견딜 수 없었으리라. 그러니 그것을 바로잡아야지. 어떻게 간단명료하게, 사람들이 지루하지 않게, 전달해야지. 그래서 이 책의 각 항목은 짧다. 짧아야 읽을 테니까. 읽어야 사실을 알게 될 테니까.


그래서 때때로 저자의 감정이 여과없이 나오기도 한다. 비속어도 꽤 나오는데, 그만큼 저자의 마음이 격앙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한 각종 유튜브에서 걸러지지 않고 나오는 표현들, 사실 왜곡들에 맞서기 위해서 일부러 좀더 강한 표현을 선택했다는 느낌도 든다.


역사를 이야기하는 책에서 저자의 직설적인 감정표현이 바람직한가를 따질 수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저자의 심정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만큼 절박하게 역사왜곡에 대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뉴라이트들이 장악하고 있고, 그들의 말도 안 되는 주장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나라에서 행해지고 있으니, 역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는가. 


이런 분통터지는 것이 어디 역사학자들만이겠는가마는 이런 책을 통해서 왜곡된 역사적 사실들을 바로잡고, 제대로 된 주장을 하지 않으면 이런 사태가 지속될 테니... 이런 책이 많이 나와야 한다. 그리고 많이 읽혀야 한다. 그래야 터무니없는 주장이 설 자리가 없어질 테니. 더 이상 우리 속이 터지는 일도 줄어들 테고. 


그래서 저자의 이런 작업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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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
무라타 사야카 지음, 최고은 옮김 / 살림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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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섭다. 그러나 거쳐야 할 일이다. 겪지 않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한에서는.


소설의 배경은 중2다. 우리나라에서 중학교 2학년 때를 사춘기가 가장 심한 때, 또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고, 친구 관계가 가장 중요하게 작동하는 때라고 한다.


친구 관계! 정말 중요하다. 부모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길 때 제일 먼저 찾는 존재가 바로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 처음 겪게 되는 일이다. 그러니 서투를 수밖에 없다. 서툰 행동과 말 때문에 오해가 생기고 친구 관계가 틀어질 때도 있다.


서툰 행동과 말 때문에 틀어지지 않으려면 자신을 감추어야 한다. 친구에게 맞추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친구가 뭘 원하는지 알아서 그에 맞게 행동하고 말을 해야 한다. 특히 친구가 권력을 지니고 있을 때에는.


위계, 그렇다. 서열이 생긴다. 여러 사람들이 한 공간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에 성향별로 또는 누군가의 주도로 몇몇끼리 모이게 되고, 그것이 굳어지면 다른 모임에 끼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이미 속해있는 모임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야 한다.


중학교 교실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이 소설 역시 그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여학생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 그것을 관찰하면서 가까스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하는 다니자와 유카. 초등학교 때 친했던 노부코는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지만 당당하게 맞선다. 자신의 소리를 낸다.


그런 노부코를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다니자와. 그렇다. 숨 막힐 것 같은 교실 생활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노부코를 통해 다니자와 역시 관찰자로서 지내온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이 없음을.


자신이 자신에게도 방관자였고, 자신을 자신이 가장 부끄러워하고 비난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노부코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순간 이미 달라진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는 과거 관찰자, 방관자로만 지내던 자신과는 달라진 모습을 발견하는 순간, '그것이 내가 싫어하는 나의 최후였다'(354쪽)고 말한다.


다니자와가 좋아하던 이부키와의 관계에서 위악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남을 잘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이부키에게서 이런 소리를 들으며, 다니자와는 더욱 과거의 자신과 결별하게 된다.


'제일 싫었던 건, 다니자와가 그걸 꾹 억누르면서 분명 자기가 제일 싫어할 방식으로 나에게 쏟아냈다는 거야. 네가 싫어하는 네가 나보다 상처받은 얼굴로, 자기에게 상처를 줬어' (364-365쪽)


이 구절에서 이 소설의 제목을 연상할 수 있다. '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법'이라는 제목을. 이는 친구들과의 관계를 관찰하면서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그러면서는 속으로는 관찰하는 자신을 높이고 관찰당하는 친구들을 낮추는 다니자와의 모습을 표현한 말이다.


그것이 결국 자신을 낮추는 것밖에는 되지 않음을,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이부키를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니자와가 노부코를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도 바로 여기에 있다. 노부코는 자신을 관찰자의 자리에 놓지 않고 주체의 자리에 놓고 있으니까.


주체의 자리에 선 학생은 친구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아니, 친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누르지 않는다.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런 모습을 이 소설에서 시종일관 보여준 존재는 이부키다. 그런 이부키를 통해서 다니자와 역시 자신을 발견하게 되고.


중반까지는 무섭다. 여학생들 사이의 따돌림, 모임에서 떨어져 나오지 않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그런 모습들이. 여기에 자신을 싫어하면서도 자신을 지키려 애쓰는 다니자와의 모습. 여기에 사춘기 남녀관계가 끼어들면서 더욱 힘들어지는 친구들과의 관계들이.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자신을 바로보게 되는 다니자와의 모습. 남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눈만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살아있는 몸을 알아가는 다니자와의 모습을 통해서 소설은 무서움에서 응원으로 마음을 옮겨가게 한다. 스스로를 찾아가는 사춘기 소녀의 마음을, 행동을. 


중학교 2학년이 주요 배경인 이 소설에, 한 학급에서도 철저하게 위계가 나뉘어진 아이들의 모습, 그런 위계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 그럼에도 그것을 없애지 못하고 있는 현실. 여기에서 자신을 찾아가는 한 소녀의 모습을 통해서, 과연 이런 일을 모두가 겪어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학교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따돌림, 괴롭힘 등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다름'과 어떻게 공존하느냐를 배우는 과정으로 학교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부모에게서 떠나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할 때, 이 때 자신이 주체로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하게 하는 소설. 


다니자와처럼 자의식이 강한 사람도 힘들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그 과정을 힘들게 거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적의를 담아 애정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은 애정을 담아 고백할 수 있는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이부키처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학창시절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학교의 모습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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