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나 도쿄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정현 지음 / 스위밍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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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읽으면서 이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


그들은 성소수자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하고, 남성이지만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의 선택보다는 다른 사람의 선택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따라서 질문을 하지 못하고 그냥 따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삶이 계속 유지될 수는 없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이 되니 말이다. (굳이 리베카 솔닛을 빌려올 필요도 없다.) 소설 속 인물인 한주와 유키노가 그러한 인물들이다.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영원히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들에게도 자신의 말을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 무대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소설 속 김추의 논문에서 클럽 줄리아나 도쿄와 대학생 운동조직이었던 전공투의 무대를 비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중에 전공투의 무대는 다른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이는 그동안 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더 큰소리를 내기 위해 만든 무대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부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이 함께 찾거나 또는 그러한 무대들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의 제목이 되는 줄리아나 도쿄가 바로 그런 곳이다. 힘들게 일하는 여자 노동자들이 돈을 조금만 더 내면 자신들을 무대 위로 올릴 수 있는 곳. 무대 위에서 그들은 남의 시선에 따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즉, 줄리아나 도쿄는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무대다. 그런데 이런 무대 역시 힘 있는 자들, 기존에 목소리를 쉽고도 크게 내던 존재들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약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의 무대는 쉽게 침해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대에 올랐던 사람들의 삶까지 지울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대에 섰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러한 것을 삶의 힘으로 이어나간다.


이 소설 속 유키노의 엄마가 그렇고, 김추의 어머니 역시 그렇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순간을 그들은 영원히 잊지 않는다. 그것이 삶 속에 남는다. (유키노의 어머니에게는 사진으로, 김추의 어머니에게는 기억으로 또는 칼로)


김추의 어머니가 자신은 선택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장면.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경험은 이렇게 표현된다.


"처음으로 제 마음대로 한 거라서 그런 걸까요? 행복하네요. 자금."

그러므로 내가 본 미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붉어진 얼굴의 너는 쑥스러운 건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저도 그럼 행복하네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잊지도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이 짧은 시간이 우리가 함께한 전부라고 해도. (286-287쪽)


이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주에게도 유키노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무대를 경험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주가 "나, 이제 할말이 있어."(257쪽)라고 하는 장면. "한주, 너는 나의 의지야."(253쪽)라고 유키노가 말하는 장면에서 이제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싸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게 됨을 알 수 있다.


한주는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친 사람이지만 사귀는 남자에게서 데이트 폭력을 당한다. 남자는 한주를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말대로만 해야 하는 사람으로 대한다. 가스라이팅과 폭력이 합쳐진 상태.


그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를 나오지 않는다. 아니 소설에서 그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인 한주가 한국어를 잃고 일본으로 올 수밖에 없게 된다. 가해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고, 피해자는 목소리를 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한주가 한국어를 잃게 만든 설정은 이래서 섬뜩하도록 현실적이고 슬프다. 그럼에도 연구자로서의 한주가 일본어를 잊지 않은 것. 하나의 소리(언어)를 잃고 다른 소리(언어)를 기억하는 일. 이것은 한주가 자신의 소리(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유키노 역시 마찬가지다. 성소수자인 유키노는 연인에게 폭행을 당한다. 연인은 툭하면 유키노가 자신을 오해했다고 하면서 폭력을 행사한다. 오해했다는 말, 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바로잡을 때 쓰면 별 문제가 없지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쓸 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즉, 너는 네 언어로 말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공통점이 한주와 유키노를 엮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서로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그렇게 서로 의지하게 된 이들이, 우여곡절을 거쳐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매개하는 인물이 '정추'라는 음악가다. 유키노의 엄마, 그리고 학자인 김추의 엄마가 듣는 음악을 만든 사람. 정추. 그는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살아간 사람. 그런 정추가 소설에서 끊이지 않고 나오는데, 이는 한주나 유키노 역시 정추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소설에서 김추의 어머니를 등장시켜 정리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그 장면.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살아가야 함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함을.


읽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나는 목소리를 내는 축에 들었을텐데, 그 목소리로 남의 목소리를 누르지 않았는가, 또 누구든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도록 노력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유키노가 한주가 김밥 끄트러미를 놓고 이야기했듯이. 


한주는 김밥을 썰었고, 맨 끄트머리를 하나 집어서 유키노의 앞접시 위애 올려주었다.

"이게 한국에서는 제일 맛있는 부분이라고. 그러니 유키노 네 거." (142쪽)


"한주 너는 나의," .... "내 끄트머리야." (142-143쪽)


슬프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울리는 소설이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찾아 읽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명단에 한정현이라는 이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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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삶과 죽음의 이야기 - 모든 존재의 유의미함, 무해함 그리고 삶에 관하여
데이비드 스즈키.웨인 그레이디 지음, 이한중 옮김 / 더와이즈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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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무로부터 시작한다. 아니 모두 불에 타버린 공간에서 시작한다. 대화재가 난다. 숲이 모두 타버린다. 이제 잿더미가 된 그곳은 폐허다. 그렇게 말해야 하지만 폐허가 아니라 생명이 시작하는 곳이라고 해야 한다.


무에서 유가 나온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불타버린 폐허는 무가 아니다. 모든 것을 지니고 있는 존재다. 마치 빅뱅 이전처럼 불타버린 숲은 존재한다. 이제 빅뱅이 시작된다. 빅뱅처럼 순식간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강력하게 일어나지 않고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일어난다.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게.


이런 폐허에서 '더글러스퍼' 나무의 씨앗이 자라난다. 불에 탄 자리. 아무런 생명도 없을 것 같은 그 자리에 더글러스퍼 씨앗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자신 주변의 모든 것들과 함께하기 시작한다. 땅에서 공기에서 또다른 생명체와 함께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이제 탄생이 된 더글러스퍼는 뿌리내리기 시작하고, 뿌리가 내린 다음에는 위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성장하여 성숙한 단계에 이르면 온갖 생명체들과 함께 하기 시작한다. 한 개체가 아니라 군락의 일부가 된다. 전체의 일부로 살아간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나무는 나무 하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들끼리도 함꼐하지만, 숲 속에는 온갖 생명체들이 깃들어 있다. 그들이 모두 숲을 이루는 요소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결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홀로 존재할 수가 없다.


이렇게 더글러스퍼의 성장, 성숙으로 이룬 숲에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있는지를 이 책에서 저자는 잘 보여주고 있다. 생명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도.


그러나 생명은 한계가 있다. 모든 생명이 죽지 않는다면 지구는 존재할 수가 없다. 탄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어야 한다. 별들도 그러하지 않은가.


거대하게 자란 더글러스퍼는 이제 수백 년이 지나서 더이상 자랄 수가 없다. 더이상 다른 생명체를 받아들일 힘이 없다. 면역체계가 붕괴된다. 내부에서부터 비어간다. 고사목이 된다.


고사목이 되어서도 몇 년 혹은 몇 십년은 꼿꼿하게 서 있다. 우리가 주목이라는 나무를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고 하듯이, 더글러스퍼 역시 죽어서도 다른 생명체가 깃들어 살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


자신은 죽었지만 다른 생명들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바로 생태계다. 그러다 고사목이 모진 바람에 쓰러진다. 쓰러짐, 이것이 결코 끝이 아니다. 쓰러져서도 다시 새로운 생명들을 받는다. 그들에게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다. 또한 더글러스퍼가 있던 숲은 다른 숲으로 대체가 된다.


다시 대화재가 나고 더글러스퍼가 생장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이 되면, 그곳에서 더글러스퍼는 뿌리내기고, 성장, 성숙, 죽음의 과정을 거치리라. 


이렇게 한 나무의 삶을 통해서 자연의 순환을 보여주는 책이 이 책이다. 한 나무에 국한되지 않고, 나무와 관련하여 다양한 생명체들과 무생물들이 어떻게 얽혀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코 홀로는 존재하지 않음을, 서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그래서 어느 하나를 제거하면 생태계 자체가 무너짐을 한 나무의 삶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길고 긴 역사였지만, 이것이 바로 자연 아니던가. 100년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에게 좀더 긴 시간을 두고 생명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나무라는 생각. 그런 나무를 통해서 인간이 자연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인간은 자신들이 벌목해서 없앤 많은 삼림들을 인공조림을 통해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또한 그렇게 하면 안 됨을 말하고 있다.


'자연적인 극상림은 나무 묘목에서 고사목에 이르기까지 모든 연령의 나무들을 다 포용하며 숲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무와 낙엽을 포함에 연어의 개체군과 그들의 모든 포식자를 다 먹여살린다. 인공적인 재조림(reforestation)은 단일경작을 하는 농경과도 같다. 생명다양성과는 정반대의 방법인 것이다.'(277쪽)


이 주장을 하기 위해 더글러스퍼 나무의 생애를 책 한 권을 통해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금 개발이냐 보존이냐 하는 문제로 갈등 중인 많은 열대우림, 또 삼림지역에서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도 고려해야 할 점이다.


인간 역시 자연과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인간 역시 자연의 순환고리 중 하나이기 때문에. 고리 중 어느 하나가 끊어진다면, 그 영향은 인간에도 크게 미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더글러스퍼 나무의 일생으로 자연 순환의 이치를 보여주고 있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생각하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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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야 베들레헴의 길고양이 모퉁이책방 (곰곰어린이) 38
데보라 엘리스 지음, 김배경 옮김 / 책속물고기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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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아직도 끝나지 않는 전쟁. 여전히 전쟁 중이다. 전쟁이라는 말보다는 일방적인 공격이라고 해야 하는 편이 맞겠지만.


팔레스타인이 차지하고 있는 땅이 장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들에게는 변변한 무기가 없고, 비록 무장투쟁을 한다고 하지만, 국가 대 국가로 전쟁을 할 여건은 안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격하고,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지역까지도 공격한다고 하니, 팔레스타인에서 평화는 요원하다.


이 소설은 그런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다루고 있다. 동화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에서 살고 있던 아이가 죽어서 고양이가 되어 이름이 같은 베들레헴에서 지내게 된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미국에서 클레어라는 이름으로 지내던 초등학생이 겪는 일들과 고양이가 되어 베들레헴에서 겪는 일들이 교차하고 있다. 고양이로서 겪는 일들을 통해서 자신이 초등학교 때 했던 행동들을 돌아보게 하고 있다.


클레어는 초등학교에서 집안 좋고, 공부도 잘하는, 그러나 교사들의 눈에 띠지 않게 말썽을 부리는, 요즘 말로 하면 상당히 영악한, 문제적인 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행동을 눈감아 주는 선생이 떠나고, 깐깐한 선생을 맞이하여 그 선생과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다 뜻하지 않는 교통사고로 죽음에 이른다.


죽음, 끝이 아니라 고양이로 태어난다. 그것도 베들레헴에서. 갈등 상황에 처해 있는 그곳에서 클레어 고양이는 이스라엘 군인과 팔레스타인 아이를 만난다. 이스라엘 군인이 정찰 목적으로 들어간 집에 부모를 잃고 홀로 있던 아이 오마르. 이들과 지내면서 클레어는 한 면만 볼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스라엘 군인이라고 해서 모두 팔레스타인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그들도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으며, 저항하는 팔레스타인인들도 모두가 같지는 않다는 사실. 


적대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도 딱 두 편으로 나눌 수가 없으며, 그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편차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클레어라는 고양이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이를 끝까지 보호하려는 이스라엘 군인들과 어떻게든 이스라엘 군인들을 죽이고 싶어하는 팔레스타인 사람, 그리고 이스라엘 군인에 무조건 적대적으로 대하면 안 된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있고.


클레어는 인간이었을 때 선생님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행동이 결코 잘한 짓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고양이 몸으로 겪으면서. 


이렇게 소설은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쪽도 옳고 저쪽도 옳다는 양비론 또는 양시론을 주장하고 있지 않다. 사람 사는 세상에서 갈등이 있지만, 그것을 단순하게 정리할 수 없음을.


전쟁에서도 인간이 있음을, 그 인간성을 지키는 사람들도 인해 세상이 조금씩 평화로운 쪽으로 가고 있음을.


개인이 어쩔 수 없다가 아니라 개인이라도 할 일을 해야 한다는 모습을 이스라엘 군인과 팔레스타인인들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에서 고양이 클레어가 춤을 추어 양쪽이 더 심한 갈등으로 번지지 않게 한다. 이렇게 개인이 할 수 있는 일도 있음을, 아니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함을 작가는 말하고 있다.


여전히 대치 중인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이 소설이 나온 지 꽤 됐는데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음에 암담한 마음이지만, 그럼에도 손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고양이 눈으로 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결코 단순화할 수 없는 그 갈등 상황을 통해 작가는 우리에게 평화로 가는 길이 쉽지는 않지만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됨을, 평화를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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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 특집은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내로남불'할 때 말하는 로맨스 하고는 다른 쪽으로.


  사람이 살아가면서 사랑이 필요없는 때는 없다.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에 따라 로맨스도 되고, 불륜도 되겠지만, 그것은 판단하는 기준이 있을 때 이야기고. 어떻든 사랑은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리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세상 많은 문학작품이나 영화, 연극 등이 사랑을 주제로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랑을 로맨스라고 하면 달달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로맨스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또한 전개가 뻔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로맨스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다.


이번 호에서는 로맨스에 관한 글들이 실렸는데, 그런 로맨스를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글들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로맨스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유튜브 소개를 하는데, 다른 사람의 삶을 보게 되는 유튜브에서,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유튜브도 있고, 또 연인을 주제로 하는 유튜브도 있다. 이들 역시 사랑이 기반이 된 일종의 로맨스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의 삶에서 연인의 삶으로, 연인의 삶에서 가족의 삶으로 가는 과정에서 로맨스는 함께 한다.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든지 말이다. 그러니 그러한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로맨스를 만들어가기도 한다.


그냥 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자신의 생활로 끌어들여올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한데... [빅이슈]를 읽으면서 험한 세상에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함께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로맨스에 대한 글들은 팍팍한 세상을 조금씩 부드럽게 바꿔주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부드럽게, 홀로에서 함께로 나아가게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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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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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빨리 읽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 책이다. 이런 책은 드문데, 구절구절이 마음에 와 닿고, 그 구절을 좀더 마음 속에서 음미하고 싶기 때문이다. 도처에 인용하고픈 문장들이 있지만, 굳이 인용을 하지 않아도 된다.


솔닛의 말을 인용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더 이 책의 내용에 맞는단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마지막 부분은 꼭 인용하고 싶다. 이것들은 지금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은 그저 발성할 수 있다는 동물적 능력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 자신과 타인들의 관계에, 자기 삶에 영향을 미치는 대화들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그렇게 목소리를 가진다는 것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요소가 세가지 있다. 가청성, 신뢰성, 영향력이다.

가청성이란, 그의 말이 청취된다는 것을 뜻한다. ... 신뢰성이란, 그가 말할 수 있는 영역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그를 기꺼이 믿어준다는 것을 뜻한다.  ...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중요한 존재라면, 그에게는 권리가 있다. 그의 말은 그 권리를 위해서 일한다.' (286~288쪽)


그렇다면 나에게 솔닛의 책은 가청성, 신뢰성, 영향력을 모두 갖춘 말들로 이루어져 있다. 솔닛이란 이름 자체에 신뢰감을 느끼고, 책을 찾아 읽으니 말이다. 읽으면서 내 삶을 돌아보고,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 또는 보지 못하고 있던 부분을 찾게 되니.


솔닛은 이 책의 끝부분에서 손금을 봐줬던 사람이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우여곡절이 있었겠지만, 당신은 결국 운명대로 살고 있네요." (296쪽)


이 책은 바로 솔닛이 겪은 이 우여곡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자신이 목소리를 지니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해주고 있다.


자신 역시 목소리를 지니지 않은 세상에 없는 존재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보이지 않고 말해지지 않는 자신을 직면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과정.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책을 발간하고, 또 행동으로 나서기도 하고.


그동안 읽었던 솔닛의 책이 어떤 과정 속에서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되고, 그 책들의 내용을 다시 반추하면서, 아 이렇게 솔닛이 우여곡절을 겪고서 마침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알게 해주는 책이다.


운명대로 산다는 말은 곧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산다는 말이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문제에 맞닥뜨려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모습, 혼자만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세상에 없던 자신을 찾아내고 세상에 있는 존재로 드러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책. 그것이 바로 이 책이다.


손금을 봐주는 사람의 말을 빌려 한 말은 곧 솔닛의 삶을 정리하는 말이 된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단단해진 솔닛.


또한 보이지 않는 또는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삶들이 결코 쓸모없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솔닛. 그런 솔닛의 문장을 읽으면서 정호승의 시 '산산조각'이 생각나기도 했다. 온전한 불상도 소중하지만 깨어진 불상도 그 자체로 소중함을. 그것이 바로 우리 삶의 우여곡절이고, 그런 우여곡절을 겪지만 우리 역시 운명대로 살아가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또 솔닛의 삶을 보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기까지의 그 과정에서 웹툰 '화산귀환'의 장면이 생각났다. 상처를 통해서 더 강해진다는 119화의 장면. 


(화산귀환 - 119화 : 네이버 웹툰 (naver.com),  하지만 네이버에 연재되고 있는 이 웹툰과 솔닛의 말은 차이가 있다. 물론 웹툰에서 주인공인 청명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지만, 이는 주인공인 청명이 바로 이야기를 하는 주체라는 말이 된다, 아직 다른 인물들은 청명의 이야기를 따라갈 뿐이다. 그들은 솔닛처럼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이제 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때 비로소 그 웹툰은 청명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가 될 테다. 우리 역시 솔닛의 말을 솔닛의 말로만 따라가면 우리의 말,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 우리도 스스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솔닛의 책을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솔닛은 글에서 자신의 운명은 '어떤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것'(302쪽)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깨뜨리기 위해서도 많은 고통을 겪었을 것이고,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에서도 더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러나 솔닛은 그 운명을 거부하지 않았다. 받아들였다. 바로 자신의 운명, 자신이 해야할 일을 직면했다. 


운명에 직면해서 회피하지 않고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솔닛은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찾아내어 밖으로 드러낸다. 이것은 기존 이야기를 깨뜨리고,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그 운명대로 살고 있는 솔닛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다면 우리는? 나는?


그 과정, 이 책에 잘 나와 있으니,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보자. 읽으면 읽을수록 솔닛의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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