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아나 도쿄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한정현 지음 / 스위밍꿀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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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읽으면서 이 작가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상처받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회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목소리 속에 묻혀 있는 사람들.


그들은 성소수자이기도 하고, 여성이기도 하고, 남성이지만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들은 자신의 선택보다는 다른 사람의 선택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따라서 질문을 하지 못하고 그냥 따르는 그런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삶이 계속 유지될 수는 없다.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말이 되니 말이다. (굳이 리베카 솔닛을 빌려올 필요도 없다.) 소설 속 인물인 한주와 유키노가 그러한 인물들이다.


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러나 영원히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들에게도 자신의 말을 하는 순간이 온다. 그런 무대도 있다. 그것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 지금까지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찾아주는 것이 아니다. 소설 속 김추의 논문에서 클럽 줄리아나 도쿄와 대학생 운동조직이었던 전공투의 무대를 비교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중에 전공투의 무대는 다른 위상을 지니고 있다고 보면, 이는 그동안 소리를 내던 사람들이 더 큰소리를 내기 위해 만든 무대와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람들이 그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부대는 극명하게 대비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목소리를 잃은 사람들이 함께 찾거나 또는 그러한 무대들을 스스로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의 제목이 되는 줄리아나 도쿄가 바로 그런 곳이다. 힘들게 일하는 여자 노동자들이 돈을 조금만 더 내면 자신들을 무대 위로 올릴 수 있는 곳. 무대 위에서 그들은 남의 시선에 따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하게 된다.


즉, 줄리아나 도쿄는 자기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무대다. 그런데 이런 무대 역시 힘 있는 자들, 기존에 목소리를 쉽고도 크게 내던 존재들에 의해 사라지게 된다. 약한 사람들, 상처받은 사람들의 무대는 쉽게 침해당할 수 있다.


그렇다고 무대에 올랐던 사람들의 삶까지 지울 수는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무대에 섰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러한 것을 삶의 힘으로 이어나간다.


이 소설 속 유키노의 엄마가 그렇고, 김추의 어머니 역시 그렇다.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순간을 그들은 영원히 잊지 않는다. 그것이 삶 속에 남는다. (유키노의 어머니에게는 사진으로, 김추의 어머니에게는 기억으로 또는 칼로)


김추의 어머니가 자신은 선택을 바꾸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장면. 자신의 목소리를 낸 경험은 이렇게 표현된다.


"처음으로 제 마음대로 한 거라서 그런 걸까요? 행복하네요. 자금."

그러므로 내가 본 미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붉어진 얼굴의 너는 쑥스러운 건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본다.

"저도 그럼 행복하네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잊지도 않을 것이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이 짧은 시간이 우리가 함께한 전부라고 해도. (286-287쪽)


이것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주에게도 유키노에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무대를 경험했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 속에서 여전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힘들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한주가 "나, 이제 할말이 있어."(257쪽)라고 하는 장면. "한주, 너는 나의 의지야."(253쪽)라고 유키노가 말하는 장면에서 이제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감싸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게 됨을 알 수 있다.


한주는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마친 사람이지만 사귀는 남자에게서 데이트 폭력을 당한다. 남자는 한주를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의 말대로만 해야 하는 사람으로 대한다. 가스라이팅과 폭력이 합쳐진 상태.


그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를 나오지 않는다. 아니 소설에서 그는 처벌을 받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인 한주가 한국어를 잃고 일본으로 올 수밖에 없게 된다. 가해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고, 피해자는 목소리를 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한주가 한국어를 잃게 만든 설정은 이래서 섬뜩하도록 현실적이고 슬프다. 그럼에도 연구자로서의 한주가 일본어를 잊지 않은 것. 하나의 소리(언어)를 잃고 다른 소리(언어)를 기억하는 일. 이것은 한주가 자신의 소리(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유키노 역시 마찬가지다. 성소수자인 유키노는 연인에게 폭행을 당한다. 연인은 툭하면 유키노가 자신을 오해했다고 하면서 폭력을 행사한다. 오해했다는 말, 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바로잡을 때 쓰면 별 문제가 없지만,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쓸 때는 그 자체로 폭력이 된다. 즉, 너는 네 언어로 말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공통점이 한주와 유키노를 엮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서로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니. 그렇게 서로 의지하게 된 이들이, 우여곡절을 거쳐 자신들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소설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리고 이들을 매개하는 인물이 '정추'라는 음악가다. 유키노의 엄마, 그리고 학자인 김추의 엄마가 듣는 음악을 만든 사람. 정추. 그는 자신의 선택으로 삶을 살아간 사람. 그런 정추가 소설에서 끊이지 않고 나오는데, 이는 한주나 유키노 역시 정추와 같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소설에서 김추의 어머니를 등장시켜 정리하고 있다. 앞에서 인용한 그 장면.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살아가야 함을.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함을.


읽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나는 목소리를 내는 축에 들었을텐데, 그 목소리로 남의 목소리를 누르지 않았는가, 또 누구든 자신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하도록 노력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에게 의지가 되는 삶을 살았는가 하는.


유키노가 한주가 김밥 끄트러미를 놓고 이야기했듯이. 


한주는 김밥을 썰었고, 맨 끄트머리를 하나 집어서 유키노의 앞접시 위애 올려주었다.

"이게 한국에서는 제일 맛있는 부분이라고. 그러니 유키노 네 거." (142쪽)


"한주 너는 나의," .... "내 끄트머리야." (142-143쪽)


슬프지만 아름다운, 마음을 울리는 소설이었다. 이 작가의 다음 작품을 찾아 읽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명단에 한정현이라는 이름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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