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이 할 수 없는 것들 - 재택근무의 한계부터 교실의 재발견까지 디지털이 만들지 못하는 미래를 이야기하다
데이비드 색스 지음, 문희경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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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로 디지털에 관해서 많은 논의가 있다. 그 중 가장 대별되는 주장이 이제는 디지털 시대라는 주장과 아날로그가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으니, 무조건적인 디지털 추구는 멈추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비대면 수업을 성공적으로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코로나19시대에 과연 수업이 성공적이었을까? 사회적 거리두기로 방역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자평도 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지 못해 우울감이 높아졌다는 주장도 있다.


배달앱이 발달해서 집에서 음식을 시켜먹는 경우가 늘었고, 혼술, 혼밥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되었으며 온라인 만남도 빈번하게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이제는 비대면 시대, 디지털 시대로 완전히 전환될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원격수업보다는 학교에 등교하는 수업을 더 선호했으며, 혼술, 혼밥보다는 어울려 먹는 것을 더 좋아하고 있는 모습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에 직장들도 마찬가지다. 재택근무가 일상이 될 것이라 했지만 그렇지 않다. 재택근무가 효율적일 수도 있지만 마냥 효율적이지는 않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이루는 효율성이 간과된 것이다.


여기에 출퇴근 시간을 그냥 버려지는 시간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출퇴근 시간이나 잡담하는 시간이 오히려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내고, 창의성을 유발하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직장에 관한 이야기에서 저자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일은 이제야 그 가치를 진실로 이해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두 가지 아날로그적 특징을 갖추었다. 바로 사무실이라는 물리적 공간과 그곳에서 맺어진 인간관계다.'(43쪽)

'재택근무에는 사무실만이 아니라 사람도 빠져 있었다.'(58쪽)


사람이 빠져 있다는 것은 대면하면서 우리는 화면에서 보고 느끼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느끼는데, 그런 것들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코로나19로 대면의 중요성,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는데, 그래서 디지털이 만능이 아님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디지털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거스를 수 없는 대세. 예전처럼 기계를 부수는 일을 할 수 없는 상황. 그렇다면 디지털을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은 바로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삶을 좀더 풍요롭게 하는 방식으로 디지털을 활용해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디지털이 우리 삶을 힘들게 할 수도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생활하는 일주일, 월,화,수,목,금,토,일로 각 장을 나누어, 회사, 학교, 쇼핑, 도시 생활, 문화 생활, 대화, 휴식으로 나누어 디지털이 어떻게 우리들의 생활을 침해하고, 우리들을 힘들게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처음에 디지털에 환호하던 생활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단조로움과 지루함으로 변하고, 결국 집중력을 잃고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변해버렸는지를 자신의 경험과 다른 사람과의 인터뷰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저자가 디지털을 무조건 배격하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로 인해서 우리 삶이 얼마나 편리해졌는지는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그 편리함으로 인해 잃은 것들이 우리 삶을 힘들게 할 수 있음을 깨닫자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과 만나는 일. 만나서 공감하는 일. 공명이라는 말. 그 말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 몸은 진동이다. 우리의 말도 진동이다. 우리의 움직임도 진동이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의 자연은 광활한 우주가 진동하는 춤이다. 하지만 우리의 접촉을 디지털 기술로 여과시킨다면 이런 진동을 차단하게 된다. 사진을 보고 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표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지는 못한다. 코로나19 범유행 중 다들 왠지 모르게 이런 상실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373쪽)


그렇다. 우리들은 서로 공명한다. 그러한 공명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보듬으면서 삶을 유지한다. 그것이 풍요로운 삶이고, 이렇게 관계를 맺게 하는 한 요소로 디지털이 기능해야 한다. 삶 전반을 지배하는 요소가 아니라.


[디지털이 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제목에 영어로 쓰인 '미래는 아날로그다'로 해석될 수 있는 문장이 있다.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듯이 사람은 사람과 대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런 점을 코로나19로 인해 디지털이 확산된 생활의 경험을 토대로 왜 아날로그가 중요한지를 주장하고 있다.


디지털, 디지털 하는 우리 사회. 디지털이 아니면 시대에 뒤떨어진 삶을 살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 책 읽고 토론할 필요가 있다.

‘쿠번은 교육이란 학생과 교사, 학생과 학생 등 학교 공동체의 모든 당사자 사이의 관계라고 말했다. 이런 관계 안에서 정보(사실과 숫자)가 지식이 된다고 했다. 기술적 해결책은 이런 관계를 고려하지 않기에 항상 실패로 돌아가는 거라고 했다.‘(102쪽) - P102

‘디지털 교육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설계된 시스템이지 학습을 위한 시스템이 아니다. 디지털 미래 교육의 테크노-유토피아주의는 여러 요소에서 동력을 얻는다. 이를테면 광학기술과 뒤처진다는 두려움, 탐욕, 비용 절감과 효율성을 추구하려는 동기, 교직원노동조합의 협상력에 댛나 정치화된 혐오가 작용한다. ‘(104쪽) - P104

‘오히려 교육의 미래는 정서와 관계가 학습에 더 깊이 스며들게 하고 이런 능력을 전면에 내세우는 데 달려 있다.‘(117쪽) - P117

‘과학적으로는 정서와 학습이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 충분히 입증되었다. 학교의 주요 임무는 학생들이 정서 능력을 기르고 학습에 관심을 갖도록 보살펴주는 것이다. 학교가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않으면, 다시 말해서 교육이 표준화된 시험이나 디지털 전달을 위해 정보를 암기하는 수준으로 더 축소된다면 모든 정보가 학생들의 귀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고 또 학생들이 나중에 현실 세계로 나갈 때 전혀 도윰이 되지 않는 정보가 될 것이다.‘ (119쪽)

- P119

‘‘에드테크 전도사, 실리콘밸리의 리더들, 공교육제도를 해체하고 싶다고 밝힌 정치인들의 발언을 들어보면 교육의 미래는 여전히 디지털과 가상 세계로 향하는 듯하다.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이미 이런 미래로 가는 방법이 입증되었고, 앞으로 기술과 교수법의 발전으로 분명 더 좋아질 거라고 했다. ... 정치인과 행정가들에게는 비용 절감과 규모의 경제와 허울 좋은 혁신이 매력적으로 보여서 하루아침에 디지털 학교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123쪽) - P123

‘교사가 권한을 갖고 최선의 방법으로 가르칠 수 있게 해준다면 학생의 학업 성취도가 향상될 뿐만 아니라 교사직 자체도 지적으로 도전할 만하고 장래성이 있는 매력적인 직업으로서 더 많은 인재를 끌어들일 것이다.‘(125쪽) - P125

‘무엇보다도 학교의 미래는 더 정서적이고 사회적이어야 하고, 우리가 서로를 인간으로 이해하기 위한 능력을 길러주는 데 집중해야 한다. ... 학생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능력이자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능력은 용기와 리더십과 공감 같은 정서 능력이다. 이런 능력이 있어야 변화무쌍한 세계에서 어떤 새로운 기술이 나와서 새로운 난관을 제시하든 잘 적응할 수 있다.‘(126쪽) - P126

‘...문화에서 빠진 요소는 관계였다. 나와 청중의 관계. 청중 사이의 관계. 모두가 같은 공간에 앉아 그 안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함께 경험하면서 형성된 관계. 이것이 모든 위대한 공연 문화가 공유하는 예측 불가능성의 핵심이자 디지털 버전이 범접할 수 없는 특성이다.‘(253쪽) - P253

‘디지털 대화는 확신 편향을 강화하고 사람들을 극단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소통의 오류가 생기고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 심해진다. 디지털 대화는 우리를 지루하게 만들고 맥락을 제거한다. 그리고 인간적인 행동을 비인간적으로 만든다.‘ (282쪽) - P282

‘...사회적 처방은 환자 중심 의학에서 가장 강력한 변화의 힘을 가진 방법이고, 모든 사회적 처방은 대화를 중심으로 일어난다.‘ (292쪽)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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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3호 : 집 인문 잡지 한편 13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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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사람이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요소를 '의식주'라고 한다. 옷과 밥과 집. 이 중에 '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집이란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집은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를 의미하겠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아파트'로 대변되는 거주 공간이겠지만, 이 책은 그러한 집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는다.


물론 아파트와 비슷한 주거 공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주거 공간을 마련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전세 사기를 당한 사람들, 난개발로 쫓겨난 사람들, 최소한의 주거 공간을 마련하지 못해 길거리를 전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주거 공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한다. 쪽방촌과 전세, 또 집을 마련하지 못하는 청년 세대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에 실려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 집의 범위를 넓힌다. 집은 우리 몸일 수도 있다. 종교 생활을 하는 공간일 수도 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자신의 몸을 의탁하는 장소일 수도 있다. 또한 지구일 수도 있다. 


이렇듯 이 책에는 집에 관한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다. 후쿠시마에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는 주민들 이야기도 있다. 과연 그들이 살고 있는 집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삶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이 머무는 공간인 호스피스 병원은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집은 우리 몸을 머무르게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우리 마음까지도 받아들이는 장소다. 그런 장소는 누구나 지닐 권리가 있다. 그래서 국가는 누구나 자신이 머물 공간을 지닐 수 있게 해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존재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집은 투자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돈으로 환산되는 사회에서 돈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거 권리조차 누리기 힘들다.


점점 낮은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데, 수입은 그에 따르지 않고, 기껏 살고 있던 낡고 허름하지만 싼 집들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철거되어 버린다.


여기에 빚을 내서 전세로 얻은 집은 사기를 당해 전세금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전세금을 받지 못하면 어디로 갈 곳이 없다.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이렇게 내몰리는 삶. 그런 내몰리는 삶이 아닌 집을 기반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읽으면서 마음이 아픈 글들이 많았다. 집에 관한 현실은 여전히 어두웠으므로. 


읽으면서 존 버거의 글이 생각났다. 바로 집에 관한 이 글. 이렇게 세상의 중심인 집. 누구나 그 세상의 중심에서 아래로 위로, 앞으로 뒤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원래 집이란 말은 세상의 중심을 의미했다. 지리적인 아닌 존재론적 의미에서 그랬다. ... 전통 사회에서는 세상의 의미있는 모든 것들은 다 실재였고, 그 세상의 밖에는 위협적인 혼돈이 존재했다. ... 집이 없으면 모든 것은 파편일 뿐이었다.'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열화당. 2004년. 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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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견자들
김초엽 지음 / 퍼블리온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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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디스토피아다. 지구의 지상에서 살아갈 수 없게 된 인간. 외계에서 온 범람체들에 의해 지상을 빼앗기고 지하로 스며들어 살아가는 인간 세계가 나온다. 범람체들은 거의 무한증식이다. 자신들과 접촉한 대상에 들어가 그 대상을 지배한다.


그렇게 여겨지는 범람체들과 공생할 수 없는 인간들은 그들을 피해 지하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상을 찾으려는 노력을 한다. 지상을 찾기 위해서 지상을 탐색할 파견자들을 내보낸다. 파견자들은 지상을 탐색하고 범람체들을 없애는 방법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지하에서도 계속해서 범람체들에 의해 감염되는 사람들이 나온다. 이들은 인간들과 함께 살 수 없다. 광증이라고 표현한다. 미친 사람. 그런 사람은 격리되어야 한다. 그들은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격리시설로 옮겨진다. 그 격리시설을 가족들조차도 방문하지 못하지만.


지상은 범람체들에 의해 잠식당했고, 지하에서도 범람체들에 감염되는 사람이 속속 나오는 상황에서 인간들은 범람체를 없앨 연구를 한다. 지상을 되찾으려 한다.


파견자들은 그러한 막중한 임무를 띤 사람들이다. 그런 파견자가 되고 싶은 태린이 있다. 이제프를 사랑하는, 그래서 이제프와 함께 지상을 거닐고 싶은.


파견자 시험을 보는 와중에 태린은 자신의 머리 속에서 다른 존재를 감지하게 된다. 그 존재와 대화를 하게 되기도 한다. 의존하기도 하지만 시험 마지막에 자신이 이름 붙인 '쏠'이라는 존재에 휘둘려 폭주하고 만다. 대형사고를 친 것이다.


태린에 대한 징계는 이제프의 도움으로 추방이 아니라 파견이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아주 위험한 임무를 띠고 두 명의 파견자들과 함께 파견되는 태린. 여기서 태린은 다른 세계를 인식한다. 자신의 머리 속에 있는 존재의 정체도 깨닫게 된다.


지상과 지하, 범람체들과 인간, 그 사이에 있는 범람화된 인간들. 그렇다. 이제 지구에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탄생하기 시작했다. 그들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 이는 공생이냐 파괴냐의 갈림길에 서게 한다.


공생의 조건. 서로 다른 존재임을 인정하면서 자신을 지키면서 자신을 내어줄 수 있어야 한다. 즉 범람체들도 인간을 완전히 잠식해서는 안 되고, 인간 역시 범람체들을 인정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지구에서 영원히 몰아내려 해서도 안 된다.


이 사이에 범람화된 인간이 있다. 범람화된 인간 중에서도 태린과 같이 범람체와 공생하는, 두 자아가 동시에 한 몸에 존재하는 존재들도 있다. 바로 태린과 선오가 그런 인물들이다.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소설은 범람체로 인해 지하로 쫓겨난 인간들의 세계인 디스토피아에서 시작한다. 그렇다. 인간은 자신들이 살던 터전에서 쫓겨났다고 여긴다. 그들은 지상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고 한다.


그 과정은 범람체와 인간의 전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전쟁을 막으려는 존재들이 나온다. 변화를 인정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가자고 하는 존재들. 범람체들 역시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치고, 인간들 역시 범람체들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접촉이 있어야 한다. 접촉 없는 이해는 없다. 이런 접촉을 이끄는 존재가 바로 태인이다. 선호다. 이들은 지상에서 오는 신호를 감지하고 이를 이해하려 한다. 그런 과정에서 범람체들과 또 범람화된 인간들을 만나게 된다.


만남에서 오는 이해, 특히 쏠과 공생하면서 다른 존재를 받아들인 태린. 이들은 전쟁이 아닌 공생을 택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제프를 희생시키면서도...


집단과 개인의 공생. 집단 속에 개인이 완전히 녹아들지도 않고 또 개인을 위해 집단을 없애지도 않은 함께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과정이 소설에서 펼쳐진다.


범람회된 인간들은 인간이 아닌 것이 아니라 변한 인간, 즉 다른 형태의 인간일 뿐이라는 인식으로 가는 지난한 과정. 세 존재들이 경계를 정하고, 또 서로 경계를 허물면서 살아가게 되는 과정을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는 단일성에서 오지 않음을, 유토피아는 다양함에서, 다양함을 인정하는 관계 속에서 만들어짐을 생각하게 한다.


중간지대의 확장이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는 태린이 경계지역에서 범람체들과 인간들을 연결짓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인간들의 인식이 범람화된 인간들도 인간이라고 바뀌어 간다. 


'그들은 우리를 움직이는 징그러운 시체라고 생각해. 그래서 그냥 땅속에 파묻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왕 파묻을 거면 무기로 써먹고 묻겠다는 거지. 하지만 우리는 죽은 게 아니야.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게 됐다. 그걸 원하지 않았다고 해도.' (363쪽)


범람회된 인간, 즉 전이자들은 이런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 경계지역이 생기고 점차 서로 접촉하면서 사람들의 생각은 변한다. 바로 이렇게.


'경계 지역에서 새롭게 살아가는 전이자들의 삶을 목격하자, 도시 사람들의 생각도 바뀌었다. 그것도 삶이라는 것.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일 뿐이라는 것을 직접 보았으니까.' (418쪽)

 

그렇다고 한번에 확 변하지 않는다. 유토피아는 결과가 아니다. 과정이다. 디스토피아가 결과라면 변해가는 과정, 서로가 서로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 바로 유토피아다. 


'앞으로도 그 균형이 지금처럼 유지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 태린은 경계 지역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이 그 답을 찾아내주기를 바랐지만, 어쩌면 아이들도 명확한 답에는 다다르지 못할지도 모른다. 단지 불균형과 불완전함이 삶의 원리임을 받아들이는 것, 그럼에도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하는 것,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만이 가능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419쪽)


이렇게 소설은 태린이 점차 각성해가면서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잇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이는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코 쉽지 않은, 어쩌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잃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나아가야 하는 길일 수도 있다.


그렇게 김초엽은 다른 생명체에 잠식당하는 지구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것이 정복이 아니라 공생으로 갈 수 있음을,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소설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결코 쉽지 않겠지만.


이를 현실에 반영하면 사람들의 이주를 생각하면 된다. 이주민들을 자신들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야 함을. 그들과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해 봐야 함을. 이주민이 우리 사회에 많이 유입되고 있는 이때, 그들과 어떻게 지내야 할지를 범람체, 인간, 그리고 전이자들의 관계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결코 상상 속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현실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 펼쳐진다는 생각이 든다. SF소설은 공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현실을 반영하는, 우리에게 이 현실에서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SF소설은 공상이 아니라 상상임을, 이렇게 다른 관계로 치환해서 생각해 볼 수 있음을,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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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4년 봄호 - 통권 185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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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를 읽으면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강원도 양양에 있는 해변에 건물들이 들어선다는 것. 아니, 이미 들어섰다는 것.


해변이라고 해서 모래사장으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바로 모래사장 위에 건물을 짓고, 다른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파라솔이나 다른 것들을 설치할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그 건물을 이용하지 않고는 (주로 음식점이나 카페인데) 모래사장을 거닐 수도 없다고 한다.


바닷가에 있는 모래사장이 개인 소유가 아닌데, 마치 개인 소유처럼 이용하는 것. 그렇다고 소송을 걸어도 이길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하니, 이는 소송의 대상자가 명확하지 않고, 소송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은 특정하기 힘든데, 소송에 진 쪽은 피해가 명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구나 갈 수 있고 쓸 수 있는 모래사장을 이익을 위해서 독점하고 있는 현실. 녹색평론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지나갔으리라.


그냥 누가 이렇게 백사장에 건물을 지었지? 이것이 어떻게 허가가 났지? 하면서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일.


가건물만 지을 수 있다고 하는데, 콘크리트로 전기시절이나 조리시절까지 다 갖춘 건물이 들어서니, 이젠 철거하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공유지의 비극도 아니고, 공유지를 사유지처럼 활용하는 자본의 논리가 무섭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 이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녹색평론 이번 호에서 다룬 지방자치(지역자치)다.


우리는 지방자치를 한다고 하지만 큰 단위의 지방자치기 때문에 실질적인 지역주민들의 자치는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사실. 그래서 지방자치라고 하지만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모래사장에 건물을 짓는 일도 그렇다. 지역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면 그런 건물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지역자치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녹색평론에 실린 글에 동의하는데, 이제 곧 선거가 다가온다. 지역구가 있지만, 국회의원의 지역구는 지방자치, 주민의 참여와는 관계가 없다.


많은 국회의원들이 당선 가능성을 쫓아 지역구를 옮기는 모습을 보라. 그들은 지역과 연계된 정치를 한다고 하지만, 지역구민들의 의사를 대변한다고 하지만, 지역에 머무는 기간이 얼마인지 살펴보면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역을 대변한다고 지역구 국회의원을 늘리고 비례대표를 한 석 줄였는데, 지역구에 출마한 사람들을 보면 전국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지역 정치가 살 수 있는 길이 별로 없단 생각이 든다.


국회의원들이야 나라 전체를 본다고 쳐도, 그렇다면 지역구를 줄이고 비례대표를 늘려야 하지 않나?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의 수가 반대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 그리고 지역을 살리는 일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실질적인 지방자치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


그래야 각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개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들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어야만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지역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미래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역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공생하는 삶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번 호 양양 해변에 들어서고 있다는 건물들에 대한 글을 보면서 이것이 지방자치(또는 지역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벌어지는 부작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점에서라도 녹색평론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그렇다면 자신들의 삶을 몇 년에 한번 돌아오는 선거로 결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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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친화력으로 세상을 바꾸는 인류의 진화에 관하여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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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약육강식의 시대에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말이지만, 지금까지의 역사를 통해서 살아남은 종들을 보면 호전적인 종이 아니라 다정한 종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정함이 기반이 되면 무리를 이뤄 생활할 수 있으며, 무리를 이룬다는 말은 서로 돕는다는 말이고, 이는 다른 집단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 된다. 이런 무리에서 자기만을 생각하는 존재는 버텨낼 수가 없다.


함께함이라는 말에는 이미 나를 어느 정도 양보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렇다고 무조건 나만이 양보한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양보하면 남도 그만큼 양보한다. 호혜라는 말이 성립한다. 


이 책은 이렇게 다정함이 우리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침팬지와 보노보를 비교하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양태가 어느 동물과 더 가까워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물론 인간은 보노보처럼 다정함을 바탕으로 지구에서 가장 강한 종으로 군림해 왔다. 단지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뇌의 발달과 다정함이 함께함으로써 인간은 지구에 더 많은 인구를 퍼뜨려왔다고 한다.


사회생활이라고 하는데, 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바로 다정함이라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다정함이 사회 관계를 잘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컴퓨터를 이용한 게임이론에서도 가장 승률이 높은 프로그램은 호혜 원칙을 잘 지킨 프로그램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남들과 함께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좋다는 것을 게임이론을 통해서도 증명하고 있다.


(엑셀로드 교수의 게임이론이라고 하는데 '28. 협력의 비밀, 로버트 엑셀로드의 '협력의 진화' #한봉규 (tistory.com)' 이 사이트에 이 이론이 잘 설명되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열린책들, 2001년 초판 3쇄. 34-36쪽)에 '협동 상호성 용서'라는 제목으로 이 이론에 대한 글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 책은 절판이 되었으니, 아마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에서 찾아보면 될 듯)


그렇다면 지금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다정함을 회복하는 일이다. 어떻게 해야 다정함을 회복할 수 있을까? 그것이 교육으로, 홍보로 가능해질까?


저자는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고... 자주 만나야 한다고. 만나면서 서로에 대한 벽을 조금씩 허물어가야 다정함을 통한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관용이 없는 사람들을 '교육'하려 했다가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 ... 가치관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거나 다양성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다문화주의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등의 행동은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이런 노력이 가장 큰 효과를 보이는 대상은 이미 관용을 실천하는 사람들인 듯하다.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문화 감수성 훈련이 본래 자리잡고 있던 불관용 이데올로기를 오히려 더 공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 (250-251쪽)


이렇게 문제를 제기한 다음에 해결책을 제시한다. 해결책은 다름 아닌 접촉이다. 만남이다. 이런 만남이 집단 간 갈등을 해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집단 간 갈등의 경우에는 접촉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행동의 변화가 태도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260쪽)


그러면서 앞에서 이야기한 교육에 대해서 부연 설명을 한다. 교육이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라, 이론으로, 지식으로만 하는 교육이 유용하지 않다는 말이다. 교육을 하는 곳, 학교는 다양한 사람들이 만날 수 있는 장소다. 학교는 바로 접촉을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장소다. 그러니 교육은 다정함을 바탕으로 사회를 이루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교육으로 편협함을 없애는 일의 효과는 다소 제한적이지만, 그럼에도 교육은 사회화라는 중대한 역할을 담당한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는 사람들과의 우호적인 접촉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데 이상적인 공간이다.' (260쪽)


자, 이 말을 지금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 적용해보자. 어떤 학교가 필요한가? 특정한 소수의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가 아니라 다양한 다수의 학생들이 모이는 학교가 필요하다. 오히려 특정한 학생들이 모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고하게 한다면, 이것은 다른 집단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길러주는 일이 될 수 있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는 말을 인정한다면 학교는 다양한 구성원들이 함께 지내는 장소여야 한다. 어떤 특정한 구성원들로 한정된 학교는 다정함을 발현시키기 힘들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학교 제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수월성을 강조하면서, 영재교육을 하겠다고, 또 특정한 재능을 지닌 학생들을 어려서부터 교육하겠다고 다른 학생들과 구분지어 교육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아마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러한 특수학교(특정한 목적으로, 그 목적에 어울리는 학생들만으로 구성된 학교) 설립에 반대할 것이다. 그것은 상대를 받아들이게 하지 않고 저자가 말한 대로 다른 사람들을 비인간화하면서 배척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반대로 다양한 구성원들이 자주 만나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장소, 그런 장소로서의 학교라면 교육이 집단 간 갈등을 해소하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끝부분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많은 적을 정복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친구를 만들었느냐로 평가해야 함을. 그것이 우리 종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숨은 비결이다.' (300쪽)


친구는 나와 같은, 또는 비슷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와 함께하는 존재들, 인간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종들 또 무생물들도 포함이 된다. 그들을 비인격화하는 태도가 아닌 다른 존재들도 인격화하고 존중하는 태도, 그것이 바로 다정함의 원천이고,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렇다. 점점 더 각박해지는 시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다정함이 살아남는다는 저자의 말을 새겨들어야 한다.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 함께 살아가야 하는 존재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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