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월 시문학상 작품집을 읽는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시인. 적어도 한국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김소월 정도는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데...


  그의 시를 많이는 몰라도 또 '진달래꽃'을 몰라도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이라는 시구를 들으면, 아, 그 시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그만큼 김소월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고, 그런 시인을 기리는 문학상도 의미가 있다.


  아마도 시인들에게 김소월 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큰 즐거움이리라.


이 작품집의 수상 소감에서 수상자인 정일근 시인도 그런 식으로 말을 했으니... 서정성. 이것이 우리 마음을 울리기도 하리라. 김소월의 서정성이 지금까지도 우리 마음을 울리듯이, 김소월 문학상을 받은 작품들도 계속해서 우리들 마음을 울리리라는 생각을 한다.


이번 수상작은 정일근 시인의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이다. 둥글다는 표현과 두레라는 말, 그리고 밥상이라는 말이 모두 모여 따스함을 전해주고 있다.


모나지 않았음은, 다른 존재를 밀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래서 둥근이라는 말에서는 보름달을 연상하기도 하고, 또 보름달 중에서도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한가위(추석)의 달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한가위의 보름달... 풍요롭고 평화로운, 사람들에게 만족을 전해주는 달 아닌가. 여기에 두레라고 하면 홀로가 아닌 함께라는 의미가 있으니, '혼밥'이 대세인 요즘과 달리 '함께하는 밥'이라는 의미로 '두레밥상'이 등장한다고 할 수 있다.


식구(食口)라는 말 자체가 밥을 함께 먹는 존재들이라는 의미니, 두레밥상에는 이미 식구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좁은 의미의 가족이 아니라 넓은 의미의 확장된 가족이 바로 식구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식구들이 모여 함께 먹는 밥상은 평화로울 수밖에 없다. 너 잘났니, 나 잘났니 싸울 필요가 없다. 


그냥 따스한 밥 한 끼 함께 먹으면 된다. 그렇게 모여 함께 먹는 밥, 함께 모이는 밥상은 둥글 수밖에 없다. 두레밥상이 둥근 까닭이 여기에 있겠다.


서로의 모난 점들을 서로 보듬어주어서 둥글게 둥글게 만드는 두레밥상. 시인이 꿈꾸던 두레밥상이 벌써 20년이 지났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두레밥상'은 의미가 있다. 우리 마음을, 몸을 포근하게 감싸준다. 


시를 읽으며 마음을 밥상머리에 앉아 있는 듯이 그냥 내어주면 된다. 그러면 된다. 더 말이 필요없다.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는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랫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2004년도 제18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사. 2003년 초판. 

정일근,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15-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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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자의 말 제목이 '수취인 불명'이다. 누가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히 누군가에게 말을 건넨다. 수취인 불명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누구나 받아서 보라는 얘기가 된다.


  누구나 받을 수 있다는 말은 거꾸로 하면 누구도 받지 않을 수있다는 말과도 통한다. 이러니 수취인 불명은 참 어려운 말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특정해서 말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힘들 때 누군가를 특정하지 않고 그냥 말한다.


  그 누군가가 글을 읽는 당신이기를 바라면서... 읽는 사람들이 건네고 싶은 말을 들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수취인 불명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다.


빅이슈 이번 호를 읽으면서는 이런 수취인 불명이라는 말과 벽이라는 말을 연결짓게 된다. 벽, 담장, 장벽 등... 남과 나를 가르는 존재. 그것이 바로 벽이다. 그리고 내가 벽을 느끼면 수취인을 명시하지 않게 된다.


그냥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달을 한다. 당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지만, 당신이라고 지칭하지는 않겠다. 다만, 당신이 내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수취인 불명이라고 하지만 그건 당신과 나 사이에 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발 그 벽을 허물어달라는 말이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동물권행동 카라 조현정 정책기힉팀장'의 인터뷰 글과 '승리일 수 없는 승리'라는 글, '산양 집 빼앗고 15분 만에 설악산 정상 정복하고 싶어?'라는 글과 '우리, 오프라인에서 더 많이 만나자'라는 글을 읽으면서 이들이 말하는 대상이 바로 수취인불명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딱히 누구라고 꼭 집어 말할 수가 없다. 다들 욕망을 지닌 인간들이고,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나 말고 다른 존재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나만큼 그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존중할 때 벽은 허물어지지 않을까 하는데...


이렇게 벽을 허물기까지 수취인 불명으로 계속 말을 걸어야 한다. 수취인이 정해지면 그 수취인이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하면서 벽을 더 두텁게 쌓을 수 있으니...


결국 내 말을 듣는 사람을 특정한다는 것은 그 존재와 나 사이에 신뢰관계가 쌓였다는 뜻, 또는 적어도 내 말을 말로 들을 수 있는 귀를 지니고 있다는 의미일테니.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상대의 말이 들어오지 않는다. 귀는 있으나 들을 귀는 없다. 들을 귀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노여워하는 귀만 있다. 내 귀에 거슬리는 말은 듣지 않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말을 못 하게 막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들, 수취인 불명으로 말들을 할 수밖에 없다. 수취인 불명이 아니라 귀에 거슬리는 말이라도 자연스레 할 수 있는 관계, 이는 자꾸 만나야 한다. 만나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벽이 점점 얇아진다.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예전 같으면 오해로 갈등이 커질 문제들이 대화로 해결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된다. 그래야만 한다. 예전에 철의 장막(구 소련), 죽의 장막(중국)이라는 말이 있었다. 여기에 인의 장막이라고 가장 무서운 장막은 사람들이 가로막는 벽이라는 말도 있었는데, 인의 장막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자신이 마음에 쌓은 마음의 벽(마음의 장막, 심의 장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마음에 장벽이 쌓이면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다. 어느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냥 내 맘에 맞는 말을 하는 사람만 곁에 두게 된다. 그러니 편견은 확증이 되고, 그 확증은 상대를 배척하는 근거로 활용이 된다. 


이런 마음의 장벽이 있는 사람에게는 결국 말은 수취인 불명으로 닿을 수밖에 없다. 그가 그런 말들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이때 마음의 장벽이 있는 사람에게가 아니라 그가 들을 수밖에 없도록 더욱 많은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있다. 말을 걸어야 한다. 이때 하는 말들이 수취인 불명으로 말해지게 된다.


하, 수취인 불명이라니...개인 신상이 몇 분이면 다 털리는 세상에서... 이 말이 슬프게 들리지 않으려면 누구나 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바꿔야 하겠지.


이렇게 [빅이슈]가 누군가에게 건넨 말. 수취인 불명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수취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에게 들을 귀를 만들어주는 잡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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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에는 희망을 노래하자'라고 하려다가, 희망보다는 행복이라는 말을 쓰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희망은 아직 오지 않은 것, 그래서 현재에는 없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인데, 현재에 없는 것을 바라다가 자칫 현재에 있는 것을 놓치는 수도 있지 않을까 하기 때문이다.


  행복은 바로 지금-여기에서 내게 있는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일이 행복일 수도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아직 오지 않았을지라도 나는 그것이 오기를 기대하는 지금 행복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해에는 행복을 노래했으면 좋겠다. 모두들... 빅이슈 새해 첫호를 읽으면서 여성 홈리스들에 관한 이야기. 그들에게 미래의 희망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행복이 중요함을 생각하게 됐다.


자립하기 위해서 자격증을 따는 일. 그 일을 하면서 홈리스들도 행복을 느끼지 않을까? 빅이슈 판매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주거 독립을 위해서(많은 빅판들이) 빅판을 하고 있지만, 빅이슈 판매원 일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고 있다.


무언가를 한다는 것,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사실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다. 먼 미래의 대학을 위해서 초,중,고등학교를 희생하라고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초,중,고등학교 생활에서 행복을 느껴야 한다.


빅이슈가 그런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담아주고 있는 것 또한 ('청소년의 사치생활'이라고 하여, 오디세이 학교'를 다닌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러한 행복을 누리는 모습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고 싶어서 일지도 모른다.


나의 행복이 남들의 행복으로 퍼져나가게 해야 한다. 그래서 새해에는 우리가 행복을 노래했으면 좋겠다. 행복한 마음에 노래가 마음 속에서부터 절로 나오는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희망과 행복, 그것은 이번호에 실린 '슬기로운 문화생활'이란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비움과 채움의 미학'인지도 모른다.


희망은 아직 비어있음을 인식하고 그 비움을 채움으로 바꾸려는 기대라면, 행복은 비움이 채움이 되어 있는 상태, 또는 비움 자체를 채우는 과정이나 기대에서 오는 또다른 채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비움과 채움의 공존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빅이슈]와 관련 있는 사람들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비움과 채움이 적절히 어울리는 삶을 사는 새해였으면 한다.


적어도 내게는 [빅이슈]를 읽는 순간만은 비움이 채움으로 전환되는 행복한 시간이었으니... 누구나 이런 행복을 지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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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보고 시집을 샀다. 세상에, '김종삼을 생각하다'라는 제목이라니. 그렇다면 김종삼에 관한 시가 꽤 있겠군 하고 무조건 샀다.


 - 김종삼을 내가 그렇게 좋아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시집 제목을 보니 사고 싶은 욕망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 


  그렇다고 김종삼 시를 모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김종삼이 쓴 시 중에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시들이 몇 편 있었다. 


  '묵화, 민간인,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장편(掌篇)' 등등


  이런 김종삼 시가 아니라, 김종삼에 대해 쓴 시를 모아놓은 시집이니,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한 것. 그런데 읽다보니, 몇 편이 아니라 전부가 김종삼에 관한 시다. 


여기에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김종삼에 대한 시에 대한 글도 있다. 다른 시인의 시에 붙인 글이 시집의 절반을 차지한다. 


시집 한 권이 오롯이 김종삼에 관해서다. 이쯤되면 이는 김종삼에게 바친 시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읽으면서 작년에 포천 산정호수에 갔던 일이 생각났다. 호수를 한 바퀴 도는데 김종삼 시가 둘레길 주변으로 죽 걸려 있다. 왜지? 하다가 김종삼 시비가 포천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김종삼 시비까지는 몰랐는데... 최근에 다시 김종삼에 대해서 찾아보니 시비가 포천국립수목원에서 이곳으로 이전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포천은 김종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우연히 들렀던 산정호수에서 김종삼을 만났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면서 이 시집을 읽었다. 


참고로 김종삼 시비와 김종삼 시에 대한 것들은 포천 산정호수가 아니라, 포천 고모호수공원이라고 한다. 같은 포천이지만 거리는 꽤 떨어져 있다


시집을 읽으면서 다시 김종삼 시집을 찾아보니 다행히 내게 한 권의 시집이 있다. 미래사에서 출간한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9권이다. 제목은 '스와니江이랑 요단江이랑'이다.


다시 주욱 훑어본다. 이 시집을 읽고 김종삼 선집을 읽으니 그간 눈에 띄지 않았던 시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랬구나! 김종삼이 이런 삶을 살았구나! 이 시인이 시에 불러들인 시인들이, 예술가들이 이렇게나 많았구나!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럼에도 김종삼 시를 생각하면 화려한 색채가 아니라 - 하긴 시인들이 시를 화려하게 쓰겠는가? 그들은 자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서 언어를 끄집어내어 쓰기 때문에 화려하다기보다는 하나의 색조를 밀고 나간다는 느낌을 준다 - 흑백이 떠오른다.


'묵화'라는 시를 보라. 제목 자체가 먹으로 그린 그림이다. 흑백으로 연상되는 그런 시. 


여기에 '민간인'이란 시를 보면 배경이 밤이다. 소리 죽이고, 움직임을 들키면 안 되는 상황. 역시 흑백이다. 


한 시를 더 예를 들면 '장편(掌篇)2'라는 시도 그렇다. 조선총독부, 거지 소녀... 화려한 색채가 나올 수 없다. 흑백이다.


이렇게 김종삼의 시들은 내게 흑백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이런 김종삼에 대한 시집이니, 이 시집 역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김종삼이란 시인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갖게 한다. 그의 시는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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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도발적이다. 전쟁과 강간이 한꺼번에 나오는 시집 제목이라니...


  실제 전쟁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로 언론을 통해 소식을 듣게 된다. 사실 강간도 전쟁이다. 한 성이 다른 성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전쟁.


  그러니 전쟁 중이나 강간은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 둘 다 전쟁이고 범죄이기 때문이다.


  제목이 된 말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러시아 군인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국가가 흔들리는데 성폭력 문제가 그렇게중요한가라는 시선에 대한 인나 소우선 우크라이나 의원의 말이라고 한다. (이 시집 29쪽 주 참조)


시인은 그 말을 행을 바꿔 시에 가져왔다. 전쟁 중이라고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전쟁 범죄다. 공소시효를 두어서는 안 되는.


시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앞부분 생략) ... 전시 강간을 운 없는 개인이 겪은 / 안타까운 작은 일 정도로 치부해선 안 된다. / 분명히 직시해야 할 건 / 러시아가 훼손하고 있는 것이 / 인간이라는 점이다. / 전쟁은 추상적인 그 무언가가 아니다 . / 인간과 세계를 바꾸는 구체적인 사건이다. ... (뒷부분 생략)


- 하종오,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이야기하자?. b판시선. 2023년. 28쪽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만이 아니다. 시집에는 세 나라(시를 읽다 보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공격하고 있으니... 이를 전쟁이라 하기에는 좀 그렇다.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명백한 전쟁 범죄다)가 나온다.


우크라이나, 미얀마, 아프가니스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는지 시집을 통해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시인은 먼나라 사람들이 겪는 일을 남의 일처럼 이야기하지 않는다. 바로 우리가 함께 겪는 고통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우리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던가. 또한 전쟁이라고 할 수 없지만 학살을 겪지 않았던가. 민주화를 위해 많은 사람이 희생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시인에게는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민주화 운동이라든지, 전쟁, 학살이 남 이야기 같지 않다.


따라서 시인은 4월에 우리의 4월과 외국의 4월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 바로 우리의 고통임을.


하여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 시인이 꿈꾸는 나라가 나온다. 그런 나라, 우리가 원하는 나라여야 한다.


  난민 국가

 

각국 난민이 모여 국가를 세운다면

국호를 난민국이라 지을 것이다


난민국에는 어디에 가도

푸성귀가 포기포기 자라고

과일이 주렁주렁 열리고

곡식이 알알이 익어서

식량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독재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하는 난민만 살 수 있다


난민국에선 누구를 만나도

좀체 눈치를 보지 않고

일절 말다툼하지 않고

절대 등 돌리지 않아

사람 때문에 기분이 좋아지니

모두모두 이웃이 된다고

모두모두 친구가 된다고

장담하는 난민만 살 수 있다


어느 정도 이상 부유해지지 말고

어느 정도 이하 가난해지지 말자는 약속을

건국이념으로 삼는 국가가 될 것이다


하종오, 전쟁 중이니 강간은 나중에 이야기하자?. b판시선. 2023년. 129-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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