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고 있는 곳.


  지금이 전부가 아니다. 그 장소에는 수많은 삶들이 거쳐간 역사가 있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많은 삶들이 겹쳐져 있는 곳이 바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이런 삶의 축적으로서의 장소를 서효인이 시로 썼다.


  장소가 시가 된다. 장소에는 사람의 삶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지명이 아니다.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 또 삶을 이루고 있는 곳이 바로 장소다.


그런 장소에 대한 시들... 많은 지명이 나온다. 우리가 잘 아는 지명들만 꼽아도 여수, 이태원, 강화, 남해, 부평, 강릉, 목포, 인천, 진도, 평택, 서울, 구로, 안양, 나주, 안성,, 파주, 마산 영광, 철원 등등 많은 장소들이 나온다.


우리가 살아온 장소들. 또 조상들이 살아온, 미래 세대가 살아갈 장소들. 이 장소들에 얽힌 삶들. 그것을 시로 풀어내고 있다.


그 중 '진주'란 도시를 생각해 보자. 진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지... 논개? 남강? 기생? 냉면?


이 모든 것이 진주란 도시에 녹아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시인은 진주에서 백정을 떠올린다. 형평사 운동을 되살려낸다. 형평사를 불러오기 위해 돼지고기를 소환한다. 그렇게 시인은 '진주'란 장소에서 많은 것들을 불러낸다.


진주


  지난 주말에는 동네 정육점에서 돼지고기 두 근을 떼서 먹었다. 수육용이요, 비계는 싫어요, 했을 뿐인데 돌인지 고기인지 알 수 없는 돼지가 몸을 털었다. 이번 주말에는 기차를 타고 진주에 갔다. 옆자리에는 지난번 그 정육점 주인이 탄 것 같은데 그때 감히 따지지 못했던 고객으로서의 품위와 권리 같은 것이 떠올라 백정처럼 분해지는 것이다. 진주에 도착할 때까지 분한 마음으로 졸다가, 창밖을 보다가 했다. 왜 질긴 돼지고기를 성토하지 못한단 말인가. 졸리지도 않으면서 눈꺼풀을 닫은 채 진주에 닿았다. 작년 여름에 누구는 회사에서 노조를 만들다 보기 좋게 실패했다. 돼지고기에 술추렴하며 몸을 털었다. 진주에 도착하니 남강이 보이고 강에서 부드러운 비계 같은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정육점 주인이 날아가고 없다. 어디 갔지? 어디 갔노? 흩어지고 없다. 질긴 고기처럼 입을 다물고 동덩이처럼 자리에 앉아서 전화고 받고 서류도 쓰고 했다. 문득 관광객의  품위와 권리가 떠올라 남강에 몸을 비추어보았다. 때는 1923년이었다. 진주 남강에는 백정들이 모여 운동 단체를 만들었고 그것을 형평사라 했다. 비닐봉지에 든 고기 두 근이 바스락 소리를 내었고, 나는 엉거주춤 뒤로 물러나 몸을 털었다.


서효인, 여수. 문학과지성사. 2017년 초판 2쇄. 100-101쪽.


형평사 운동은 성공했을까? 백정 자식과는 같은 학교에 다니게 할 수 없다는 그 완고한 사람들이 있던 시대에... 그들은 평등을 외쳤는데, 21세기에 와서 노동자도 사람이라고 단결할 권리가 헌법에 보장되어 있음에도 노조 결성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데, 또는 노조를 만들어도 무력화 되는 경우가 많은데...


돼지고기에서 시작하여, 진주, 노동조합, 백정들의 단체인 형평사까지... '진주'에 얽힌 이런 삶들을 시인은 우리에게 풀어내 주고 있다.


그렇담 내가 살고 있는 장소는 어떤 삶들이 얽혀있을까? 문득 살펴보고 싶어진다. 지금 내 삶이 그 장소에 얽힌 삶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이런 생각을 들게 한 것만으로도 이 시집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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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우리 이웃(?)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 평범하다는 것, 두드러지지 않다는 얘기인데, 두드러지지 않다는 말은 곧 사회에서 어떤 힘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통한다.


남 위에 군림하지 않고 제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이렇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데, 과연 그런가 질문을 하면 답이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는다.


물 흐르듯 살아가기 힘든 세상이기 때문이다. 도처에 물이 흐르는 것을 막는 댐, 보를 설치하고 있는데, 어떻게 물 흐르듯 산다는 말이 행복한 삶과 연결이 되겠는가.


지리산 주변에 골프장, 케이블카가 들어온다고 하는데, 이것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새겨들어야 하는데... '빌어먹을 멍청이들'(75쪽)


이번 호에서는 전쟁의 비극을 다룬 예술가 케테 콜비츠 이야기가 있다. 아들과 손자를 전쟁에 잃은 케테 콜비츠. 약자들과 연대하고, 약자들이 결코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어가야 함을 예술로 보여줬던 작가, 케테 콜비츠.


그에 관한 글(나의 아가야, 봄이 왔다)을 읽으면서 힘에 의한 평화를 부르짖는 모 정치인이 생각났다. 힘에 의한 평화, 그래서 나치가 평화를 유지했던가? 힘에 의한 평화가 아니라 힘으로 인해 전쟁을 벌이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는 힘을 추구하는 정치인들로 인해서 평화가 오는가? 오히려 긴장과 불안... 케테 콜비츠는 이런 상황을 이미 자신의 예술로 보여줬는데, 과거에서, 예술에서 도무지 배우려고 하지 않으니...


그러다 나도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정부 예산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맞다. 정부 예산이 우리 세금이지. 그렇다면 정부 예산은 우리 돈인데... 왜 우리가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참여할 수가 없지 하는 문제의식.


<2024년 정부 예산, 656.9조 원 속 노동자>라는 글에서 이런 문제의식을 발견했다. 그리고 정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세금은 내가 낸 돈이다. 내게도 이 돈을 어떻게 쓸지, 어디에 쓸지 이야기할 권리가 있다. 정부나 국회가 전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많은 돈에 내가 돈은 일부라고? 허어, 돈의 액수로 따지면 안 된다. 돈의 출처, 돈의 주인이 누구인지 살펴야 한다. 그러면 국민 개개인은 세금의 주인이다. 주인이니 주인답게 세금을 쓰는 용처, 즉 정부 예산에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이게 지나친 발상일까 했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직접민주주의가 힘든 현대에, 많은 사람들을 대변하는 단체를 통해 참여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이 어디인가. 세금을 쓰는 일에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단 얘기잖은가. 


'남아공 헌법은 정부예산안을 이중적으로 한다. 하나는 행정부가 마련하는 예산안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예산위원회가 만드는 예산안이다. 민중예산위원회는 남아공의 NGO, NPO,노동조합총연맹, 시민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다. 공공재정이 담아야만 할 국민의 권리를 실현하는 과정인 것이다. 남아공에서는 이 두 가지 예산안이 마련되면, 서로 조정과정을 거치고 난 이후에 국회의 승인을 받는다.' (20쪽)


이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 최근에 정부는 노조들에게 회계공시를 고용노동부의 노동조합회계공시시스템을 통해서 하라고 했다. 민간(그들이 말하는) 단체를 정부 시스템을 통해서 돈의 사용처를 공개하라고 한 것. 하지 않을 때에는 불이익을 주겠다고, 특히 하지 않는 단체는 기부금 공제를 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민간 단체의 회계를 정부가 관리한다는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정부의 회계를 국민들이 관리해도 된다는 말이잖은가. 그러니 이 정책을 뒤집으면 바로 남아공에서 하는 예산안 조정을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아니, 해야만 한다는 얘기다.


정부 스스로 국민들을 대변하는 민간단체들이 정부예산안을 짜는데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고 해야 하는데, 그런데 이것과 그것은 다르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듯하니...


노동자들이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우리는 회계를 정부시스템을 통해서 공개한다. 그렇다면 정부예산, 즉 우리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리들의 권리인 정부예산안을 조정하는데, 우리가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라고.


그래야만 정부가 노동조합에 회계공시를 하라고 한 일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그런 정부가 되길 바란다고...


[삶이보이는창]13호(2023년 가을호)를 읽으면서, 내년 예산안을 그냥 넘길 게 아니라, 국회심의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예산안을 계획하는 데서부터 국민들이 참여해야 함을 생각하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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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이슈>는 되도록이면 다수가 아닌 소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의문을 가지고 계속 잡지를 만들고 작은 목소리라도 세상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편집장의 말. 8쪽.)


  그렇다. 소수가 행복한 사회는 다수도 행복할 수 있다. 가장 약한 사람이 불편함이 없이 살아가는 사회,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그런 사회 아닌가.


  이제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존재, 청년들에 대해서 우리 사회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대학입시제도를 개편하겠다는 얘기가 최근에 나왔다. 청년들의 미래가 온통 대학에 달려 있는 듯이 대학입시, 대학입시에 목매달고 있다. 누가? 기성세대들이.


기성세대들이 대학이 청년의 모든 것인양 이야기를 하니, 대학에 가지 못한 청년들은 언론에서도 잘 다루지 않는다.


모든 청년들이 대학에 가야 한다는 듯이 대학입시에 대해서 그렇게 호들갑을 떨면서, 그 제도에 대해서 분석하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대학에 가지 않는 소수(?소수라고 해야 한다. 대학 진학률이 60-70%대에 해당한다고 하니)에 대해서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을까?


그들을 위한 정책이 있기는 할까?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것을 마치 실패한 인생처럼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빅이슈 이번 호에서는 그래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은 청년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그렇게 빅이슈는 소수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연히 유튜브에서 조앤 K. 롤링이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에서 연설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롤링이 그때 말한 내용 중에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실패가 주는 미덕과 상상력의 중요성이다.

(영상 주소 : https://www.youtube.com/watch?v=_9-ajTbM838)


빅이슈 이번 호하고도 통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하는데, 청년 때 실패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실패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늘 성공만 하고 살 수 없기 때문에... 롤링은 이 연설에서 실패로 인해서 자신은 삶의 군더더기를 없앨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자신에 대해서도 잘 알게 되었다고 하고, 그로인해 실패는 누구나 할 수 있으며, 그런 실패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상상력, 그냥 공상이 아니다. 롤링이 말하는 상상력은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아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에 대한 공감. 즉 타인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실패로 인해서 얻게 되는 점과 상상력의 중요성은 청년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빅이슈가 이번 호에서 청년들에 대해서 다룬 것, 롤링의 연설이 떠오른 것도 바로 지금, 우리 사회가 청년들을 가연 잘 대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말이라도 학원가에 줄지어 서 있는 학원 버스들, 여기에 의대 정원을 늘린다고 하니, 상위권 학생들이 의대 지원을 하겠다는 현실, 또 대학입시가 청년들의 전부인 양 떠들어대는 언론들...


대학입시만큼이나 대학에 가지 않는 청년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잘살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대학에 가지 않은 청년들에게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청년들의 처지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빅이슈 이번 호 읽으면서 우리나라 청년들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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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적 지향과 몸의 불일치. 내 몸에 다른 이가 들어와 있다고 할 수 있고, 다른 이의 몸에 내가 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든 몸에 둘이 있다. 둘은 나와 남이라는 분리 의식을 지니고 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는 이분법의 세계에서, 나는 너이고 너는 나일 수도 있다는 너와 나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일은 사회에서 용납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나는 수많은 나로 구성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나라는 존재들 사이에 너는 없다. 그러므로 내 몸에 들어온 너는 잘못 들어온 너가 되고, 너 안에 들어간 나는 잘못 들어간 내가 된다.


  과연 그런가? 성적 지향과 몸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잘못 들어간 나, 또는 잘못 들어온 너라고 할 수 있는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 중에, 너도 있을 수 있고, 그런 나와 너 중에는 서로 다른 지향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문제는 이런 너와 나를 어떻게 한몸에서 융합할 것이냐에 있다. 하나를 내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또 하나가 받아들여 다른 하나로 함께 지내는 일.


이번 시집 제목이 된 '슬픈 게이'란 시에서 통합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부만 인용한다.


1

손바닥에 너의 두 눈 / 내 눈을 빼고 그걸 끼운다. / 코와 입 귀를 지우고 / 너의 코와 입 귀를 덮는다. / 머리카락을 뽑고 / 너의 머리카락을 / 씌운다. // 내 얼굴은 사라지고 / 거울 속에 비친 네 얼굴 / 웃는다 너처럼. / 너무나 생생한 예전의 너의 미소 / 그걸 흉내낸다. / 내 생각이 너의 생각이도록 / 반복하고 반복한다.  // 너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냐. / 네가 되어 너의 삶을 살아가는 거지.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10쇄. '슬픈 게이' 중 부분. 86쪽)

 

쉽지는 않은 일이다. '네가 되어 너의 삶을 살아가는' 일이 쉬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때문에 슬프다. 하지만 슬프다고 해서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계속 노력한다. 살아가려고, '반복하고 반복한다.'


이러한 반복을 통해서 힘든 일이지만 너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게이 1' 시를 보면 이 점이 더 잘 나타난다.


게이 1


내 몸을 다 / 뒤지고 돌아다녀도 / 내 들 곳은 없어라, 내 몸의 / 벼랑에 서서 생각하느니 / 저 꽃의 몸으로 / 저 바위, 저 파도의 몸으로 / 저 새의 몸으로 / 태어났다면 나는 지금껏 /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 허공 중에 흩어나는 너의 향기 따라 / 나를 던지느니, 저 포말의 몸으로 태어날 건가 / 벼랑의 컴컴한 틈에 아슬아슬히 / 피어 있는 꽃 한 송이 나를 잡아채니 / 너는 내 안의 오랜 나였구나 // 한 꽃 속에 모든 여성이 들어 있고 / 한 여성 속에 모든 꽃이 숨어 있으니 / 나는 내 육체의 경계를 빠져나와 / 네 몸으로의 험난한 벼랑을 기어오른다네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10쇄. 94쪽.


'너는 내 안의 오랜 나였구나'라는 구절을 통해서,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나 중에 너도 있음을, 그래서 너를 추구하는 일이 결코 나를 잃는 일은 아님을 말하고 있다.


요즘은 조금 나아졌다고 하지만 성적 지향과 몸의 불일치를 이루는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가운 경우가 있다. 스스로도 버거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시인은 이를 '게이 4'라는 시에서 보여주고 있다.



게이 4


내 몸이 / 내게 맞지 않다 // 몸에 갇혀 /끙끙거리는 / 나 아닌 / 몸 속에 / 다른 이의  / 애타는 / 목소리. // 덜컹거리는 몸에 실려 / 나의 일생을 떠메고 가는 / 잘못 입은 너의 / 몸의 / 쓸쓸한 뒷모습.


채호기. 슬픈 게이. 문학과지성사. 2010년 초판 10쇄. 98쪽.


여전히 힘들어 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줄 필요가 있을까? 그가 자신 속에 있는 수많은 나와 너들을 받아들이고 '너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 역시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여러모로 생각할거리를 제공해 준 채호기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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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혼'.  혼을 부르다. 지금 이 세상을 떠난 존재를 다시 불러오는 일. 


   혼을 다시 부르는 일은 현실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혼이 현실을 인정하고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정희 장시집을 읽으면서, 우리 가락의 우수성을 한 유산으로 활용하고 싶었다(시인 후기. 175쪽)고 말하고 있는데, 굿의 형식으로 쓴 시들이 이 시집에는 많다.


  이렇게 쓴 시들에는 우리 현대사의 사건들이 등장하고, 그 사건들을 통해서 무언가 한을 풀어야 한다는 의식이 개입하고 있다고 보는데...


  시들이 4.19나 6.25 또는 독재 시대를 다루고 있는데, 이 시들에서 고정희가 우리들의 한을 풀어주려 했는데...


혼을 부르는 일은 단지 혼이 이곳에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혼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혼이 해결하지 못했던 응어리를 풀어주려는 행위가 된다.


그러므로 '초혼'이라 함은 개인의 한이나 사회의 한을 푸는 행위에 해당하는 것이다. 쉬쉬하고 감춰진 일들을 밖으로 드러내는 일 또한 '초혼'에 해당할 수도 있겠다.


이 시집에 실린 시 한 구절... 이 구절을 읽으면서 2017년 3월과 2022년 3월을 떠올렸으니... 이런 역사는 반복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우리가 혼을 제대로 부르지 못했나 하는 생각도 드니... 그게 아니어야 하는데.                                                        


 '천구백칠십*년 시월 그날을 / 우리는 '한얼'의 종지부라 적어두자 ' 천구백칠십*년 시월 그날을 / 우리는 한민족의 꿈이라 불러두자 / 천구백팔십년 모월 모일을 / 우리는 우리들의 죽음이라 전해주자' (고정희, '그 가을 추도회' 중에서 76쪽) 



몇 년 뒤 다시 혼을 부르는 일이 없어야 할텐데... 혼들이 다시 오지 않게 이 사회가 명징해져야 하는데...


오래 된 시집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렇게 혼을, 신을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앞앞이 기원축수 받고 내리소서 / 앞뒤 가리지 말고 내리소서 /가타부타 하지 말고 내리소서 / 한반도 이땅에 절로 깊은 이들에로 내리소서 / 한반도 이땅에 절로 닫힌 문앞으로 내리소서 / 한반도 이땅에 절로 나는 탄식소리 / 한반도 이땅에 절로 오는 생이별 / 단번에 쫓으시려 내리소서 내리소서 / 기왕지사 인연맺은 아땅이기로서니 / 이번에 한번만 내리시기만 하면 /석삼년 병든 전답 옥답으로 일구고 / 석삼년 풍년들게 하겠나이다 / 석삼년 풍어제 바치겠나이다 / 석삼년 태평성대 바치겠나이다 / 막힌 물꼬 터주고 / 닫힌 항로 길을 내어 / 강줄기 바다가슴 어디서나 만나서 /수천대 이을 후손 기르게 하겠나이다 / 민주통일 후손 낳게 하겠나이다' (고정희, '그 가을 추도회' 중에서 90-91쪽) 


이렇게 다시 부르지 않도록... 이미 이루어지도록...그렇게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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