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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어버리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다.

 

세상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마음은 답답하고, 무언가가 가슴에 콱 들어박힌 것 같은데...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거야?

 

이제는 좋아져야 하는 것 아냐?

 

그게 발전이고 진보 아냐?

 

민주화 되었다고, 절차적 민주주의는 나름대로 정착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엇이 민주주의지.

 

힘없는 사람이 힘든 세상이 민주주의 사회인가? 그것은 아닌데... 많은 일들이 터지고 있는데,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 그런 것들, 정말 쓸어버리고 싶다.

 

모두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오래 된 시집을 뒤적이다가 "쓰르라미"라는 시를 발견했다. 이 쓰르라미에 발음이 비슷한 말들을 엮어서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는 시.

 

강창민의 "물음표를 위하여"라는 시집에 실려 있는 시다.

 

 

쓰르라미

 

 

비가 내려도 울어쌌고

작년 늦봄부터

뭐가 그리도 싫은지, 싫어라미

왼종일 싫다고 울어댔제.

매운 6월

성난 광장마다 사람들이 모여

외침 낭자히 피 흘릴 제

무얼 쓸어라는지, 쓸어라미

아침부터 쓸라고만 소리쳤제.

올 여름 쓰르라미는

나무 꼭대기에 올라 앉아

무얼 새로 하라는지

칠 년 동안의 쌓인 울음을

뉘 들어라 울어쌌는지, 새로라미

누가 그 소리 귀에 담고 있노?

 

 

 

강창민, 물음표를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1991년 2쇄. 53쪽.

 

 

절말 이렇게 외쳐댔던 그 많은 외침들이, 그 많은 소리들이 마음 속에 하나도 담기지 않고 다 날려가 버렸는지.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이 마음에 와닿아 사라지지 않는다.

 

민주화 시대라는데, 왜 살기는 더 팍팍해지고 있는지...  이런 때 시인은 이렇게 자괴감을 표출한다. 물론 이 시는 80년대의 시라는 점을 명심할 것. 다만 시는 한 시대에서 머물지 않고, 시대를 넘어 계속 살아남는다는 것.

 

이 땅의 수많은 박사들, 이 시 한 번 읽어보면 어떨지... 하나라도 제대로 잘 박았으면, 그랬으면, 이렇게 많은 말들이 쌓이지 않고 사라지지는 않을텐데... 

 

 

                       박사 이후

 

                                  1

                        학위 축하해요, 강선생.

건배합시다, 쭈욱.

                        어이, 아가씨 박사가 뭔지 아나?

                        박는 데 도사라는 게야.

 

                                  2

                       그게 아니다.

                       한 가지만 빼고는 잘 박지도 못한다.

                       그 한 가지도 결국 빼고

                       언제나 뺀다.

                       자유를 위해, 민주화를 위해

                       몸 박지 못하고

                       늘 뺀 채로

                       얼도 뺀 채로

                       이 가을을 맞는다.

 

 강창민, 물음표를 위하여, 문학과지성사, 1991년 2쇄.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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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가리고, 세상을 가리고, 진실을 가리고 있는 장막. 요즘은 자꾸 이 장막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장막...

 

어느 사회에서든 없지는 않았을테지만, 요즘은 이런 장막이 많아도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드는데...

 

예전에 역사를 배울 때 철의 장막, 죽(竹)의 장막은 배웠는데... 인(人)의 장막은 배웠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데 혹 배웠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중에 어떤 장막이 가장 강하고 질길까?

 

철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녹이 슬고,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르다지만 그래도 식물성이니 한계가 있는데, 사람은 정말로 시류를 따르기도 하고, 거스리기도 하는 그야말로 능동적인 존재이니, 가릴 사람의 의중에 따라서 잘도 변하니, 이 중에 가장 강한 장막은 인의 장막이지 싶다.

 

오죽하면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그런데 요즘 중국에서 나라를 멸망에 이르게 했다는 '십상시'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이런 말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는 말은, 무언가 비슷한 일이 있다는 얘기다. 일명 유추다.

 

사실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지만, 유추는 그냥 생기지 않는다. 비슷하니까말해진다.

 

굳이 옛말을 들먹이면 경어인(鏡於人)이라고 사람에 자신을 비추어 보라고 했으니,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좋지 않은 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분명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해야 한다.

 

그런 판단을 잘하는 사람이 인사(人事)를 잘하는 사람이고, 이런 사람에게는 만사(萬事)가 편안해질 수 있다.

 

그런데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꾸 안 좋은 일에 거론이 되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한다면 그 때 인사는 만사가 아니라 망사(亡事)가 된다.

 

답답한 나날들인데... 시집이 몰려 있는 도서관 서가에서 시집들 제목을 하나하나 살펴보다 이 시집을 골랐다.

 

시인은 처음 듣는 이름이다. 나름 시들을 읽었다고 자부하는데도, 처음 듣는 시인도 많은데, 이 도서관이 시집의 겉표지를 다 떼어버려서 시인에 대한 설명을 볼 수가 없다. 그래 시를 읽는데 시인을 알면 좋겠지만, 몰라도 시를 느낄 수 있으니 뭐...

 

이 시집을 고른 이유가 바로 인의 장막과 관련이 있다.

 

박용재 시집,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민음사

 

이 말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대상만큼, 또는 대상처럼 산다는 얘기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 만큼, 내가 사랑하는 사람 처럼, 산다는 얘기다. 사람으로 치면...

 

자, 나는 어떤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존재들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것이 바로 내가 사는 모습인데... 인의 장막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그 순간에 이미 자기 주변의 사람을 바로 바라보게 되는데... 인의 장막 속에 갇혀 있으면서도 인의 장막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그런 사람은... 딱... 그 만큼만... 살고 있는 것이다.

 

딱...그 만큼...만... 사는 사람을 믿고 사는 사람은...

또 딱 그...만큼...만... 살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 주변 사람들을 다시 보자. 그들을 감시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말들을 듣고 사는지 안다면, 바로 나를 알 수 있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내 삶이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은데...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이글거리는 붉은 태양을 사랑한 만큼 산다

외로움에 젖은 낮달을 사랑한 만큼 산다

밤하늘의 별들을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사람을 사랑한 만큼 산다

홀로 저문 길을 아스라이 걸어가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나그네를 사랑한 만큼 산다

예기치 않은 운명에 몸부림치는 생애를 사랑한 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박용재, 사람은 사랑한 만큼 산다. 민음사. 2003년 1판 1쇄. 13쪽    

 

시인에게는 죄송하지만 1연으로 되어 있는 시를 4연으로 나누어 적었다.

 

내가 발 딛고 사는 세계의 존재들, 즉 자연의 식물들을, 그 다음에는 내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내가 추구하는 이상인 우주의 천체들을, 그리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그래서 마음을 서로 나눌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사랑한 만큼 우리의 삶의 부피와 넓이와 깊이가 정해질테니...

 

그렇게 이해하기 쉽게 그냥 편의상 나누어보았지만, 원래 시는 연 구분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것.

 

바로 이 만큼이 산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 만큼.

 

나,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사랑을 넓혀야 겠다. 아래로도 위로도, 그리고 옆으로도. 그것이 바로 내가 잘 사는 일이 될테니.

 

적어도 남을 위한다는 사람은 인의 장막에 갇혀 있지 말고, 수평으로, 수직으로 그리고 사람의 마음까지 사랑을 했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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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나날들이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

 

이미 실시되고 있던 복지는 없던 일로 되돌리고, 없던 복지는 아예 없던 일로 하고, 안 해도 될 일은 굳이 하려고 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현진건의 소설 제목처럼 '술 권하는 사회'가 되었으니, 술이나 마실 수밖에 없는 건지.

 

"삶창 101호"가 왔다.

 

반갑게 읽기 시작.

 

마음이 따스해지고 싶어서 빨리 손에 들었는데... 이거 더 우울하다. 즐거운 소식은 역시 없다.

 

삶이 보여야 하는데, 우리나라 곳곳에 펼쳐져 있는 가림막처럼, 아님 도저히 알 수 없는 어둠의 장벽인 지배 계층의 일들처럼, 삶은 어둠 저편에 있다.

 

어둠 저편에서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 삶창에 실린 내용들도 아직은 어둡다.

 

이 사회를 보여주는 거울같은 역할을 하는 삶창이니, 당연히 어두울 수밖에 없겠거니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럼에도 조금 따뜻할 수는 없을까?

 

비록 희망이 사람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희망이 사람을 살아가게 만들고 있듯이 삶창이 무언가 희망을 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 호에서 <오늘>이라는 주제로 쓰여진 글들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잘 짚어내고 있는데, 그게 참 우울한 단면이고, <공간과 환경>에서도 역시 우리 삶을 침해하고 있지만 적절히 대응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이 글에서는 삶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조금 희망을 가진다면 <다른 세상>에 나온 '공룡'이란 공동체 실험 이야기처럼 아직 희망을 지니고 다양한 삶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세월호에 관해 재판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를 두고 말들이 많다. 그 많은 말들 중에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없다. 이런 상황이 이번 삶창 101호에서 고병권의 글.

 

그가 <노동의 인문학>에서 이야기한 '왕에게는 아무 것도 희망하지 말라. 그에게는 단지 책임만을 물어라. 힘은 바로 당신에게 있다.'(83쪽)는 고병권의 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에게 시혜를 구걸하지 말라는 말, 그들이 우리에게 해야 할 일은 시혜가 아니라 책임이라고,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힘없는 서발턴(하위 주체)들에게 책임을 묻는 왕에게 읍소하는 것이 아니라, 왕, 네가 책임져야 한다고, 책임자는 바로 너라고 당당하게, 힘있게 말해야 한다고 읽힌다.

 

이게 희망이다.

 

그럼에도 마음은 따스해지지 않는다.

 

이상하게 100호를 기점으로 삶창이 가슴에서 머리로 옮겨간 느낌이다. 삶을 살아가는 주체들의 이야기보다는 그런 주체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글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마음을 울리는 글보다는 머리에 호소하는 글이 더 많다.

 

이게 삶창을 읽고 나서도 우울함이 가시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삶이 보이는 창, 마음을 울리는 글들이 나에게 삶을 보여주곤 했었는데, 그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논리적 사유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변화가 더 좋을 수도 있겠지.

 

덧글

 

이번 호에서 사실 마음이 가장 따스해진 글은 책 뒷표지에 실린 손별걸 시인의 글이다. 학생들이 쓴 시를 제비뽑기를 통해서 시상했다는. 시인들 답게 왜 아이들 시를 순위를 매겨야지 하는 생각, 그리고 제비뽑기를 통해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고, 뽑히지 않더라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 그런 모습. 정말 따스하다.

 

예전 그리스에서는 추첨으로 지도자를 뽑기도 했다는데, 제비뽑기로 뽑은 지도자가 선거를 통해 뽑은 지도자보다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왜일까?

 

이런 따스한 글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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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듣기도, 신문을 펼치기도 싫다.

 

들리는 소리는 다 귀를 씻어도 시원찮을 소리고(허유와 소부의 고사처럼, 귀를 씻은 물이 강물을 오염시킬까봐 두렵기만 한 나날들이다), 신문을 보면 열통이 터지는 기사들만 난무하고 있다.

 

그러다 오늘 본 <한겨레 신문>, 첫 면. 커다랗게 나온 사진. 전봉준.

 

그 눈빛, 끌려가면서도 세상을 꿰뚫을 것 같은 그 눈빛을 지닌 사람, 녹두장군. 그의 사진을 보며 마음이 뭉클했다.

녹색평론 11-12월호에서도 전봉준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한겨레 신문>에도 그의 사진이 나오다니... 이게 우연일까?

 

아니라는 생각. 그만큼 이런 인물이 필요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전봉준은 허균의 말대로 한다면 '호민'에 해당할 터.

 

항민들이 그냥 그대로 순응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탐학이 겹치니 이러한 항민이 원민이 되어 버린 시대. 원민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사람, 그가 바로 호민이다.

 

그 호민을 따라 원민도 항민도 함께 일떠섰던 일, 동학 혁명.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보여주었던 그런 혁명.

 

전봉준에 겹쳐 허균이 떠오르고, 허균의 호민이 생각나니, 자연스레 홍길동이 나타나게 되고. 홍길동, 그는 호민이었음에 분명하지만, 전봉준이 농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 아니 모든 사람이 평등한 인내천(人乃天) 세상을 꿈꾸었다면 홍길동은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꾸었으되, 그것이 자신에 대한 차별 철폐에 그치고 만 한계가 있는데, 이는 시대적 한계이겠지만, 적어도 허균은 사람들이 신분으로 차별받는 세상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그의 유재론을 보라)

 

무상급식을 없애고 누리교육과정에 돈을 써라. 정부에서 3-6개월은 양보할 수 있다. 절충안 제시.

 

이상하다. 절충안은 교육청에서 제시해야 하는 것 아닌가?

 

누리교육과정은 대통령 공약이고, 조례든 법령이든 이는 정부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데, 이를 교육청에 넘기면서 무상급식을 폐지하란다.

 

말을 한 번 잘못 썼더니 이런 일을 당한다. 무상급식이 아니라 의무급식이다. 의무교육에는 학생들의 심신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학교에 학생을 보내지 않으면 부모에게 과태료를 물게 할 정도로 학교에 꼭 보내라고, 그것이 의무교육이라고 하면서 왜 학교에서 밥을 책임지지 말라고 하는지, 그것은 부모가 알아서 할 문제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

 

교육기관도 아니고 보육시설로 되어 있는 어린이집을 교육기관인 교육청에서 책임지라니, 우리나라 보건복지부는 뭐하는 부서인지.

 

세월호법 역시 유가족들의 뜻과는 멀게 정리가 되어 가고 있고, 무상급식이 아닌 의무급식은 자꾸 하지 말라고 해서 아이들을 굶주리게 하거나, 아니면 남 눈치 보면서 밥 먹게 하면서, 비정규직은 차별을 견디지 못해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나라 학생들의 만족도, 행복지수는 선진국 가운데 꼴찌라는데...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부모들도 살기 힘들다고 아우성치는데... 공무원연금법은 개정한다고 하는데, 당사들과 또 제3자들과의 합의도 없이 먹고살기 편안한, 아니 지들은 너무모 편하게 세비를 받아 쓰고 있는 족속들이 나서고 있는데...

 

우리나라 국민들이 항민에서 원민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태 아닌가? 힘들다고 힘들다고, 이건 아니라고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 상태 아니던가. 

 

여기에 호민이 나서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호민, 그리워지는 시대다.

 

갑자기 정여립이 생각났다.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이렇게 정여립처럼 팽당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가 꿈꾸던 대동세상은 어쩌면 허균이 말하던 호민이 나서서 건설하려던 세상과 같은 세상이 아니었을까? 녹두장군이 꿈꾸던 세상 역시 대동세상 아니던가.

 

그 때보다 모든 면에서 풍족해진 시대. 그럼에도 왜 이렇게 살기 힘들다는 말이 나오는 걸까? 아직도 국민은 졸인가? 호민이 필요한가? 국민은 졸이 아니라 주인이라고 외치는. 그렇게 함께 외치는.

 

그런 호민.

 

제발 국민들을 원민으로 만들지 말라. 원민이 많아지면 홍길동, 녹두장군같은 호민이 나타난다. 호민을 사람들이 부른다. 호민은 그 자체로 호민이 아니다. 세상이 만들고 세상이 부를 때 나타난다.

 

오늘 본 전봉준의 사진. 그 눈빛.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슬프다. 그의 눈빛이 아직도 내 가슴에 파고드는 이 현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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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꾸준히 정기 구독을 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책 가운데 하나.

 

두 달에 한 번 나오지만, 그 동안에 내가 살아온 방식을 반성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하게 하기도 하는 책이기도 하고.

 

근본주의자라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근본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없다면 세상은 더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근본을 추구하되, 다름을 인정하고, 근본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고,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는 일.

 

그것이 지식인의 역할이고, 지금 녹색평론과 같은 책이 해야 할 역할이다.

 

이번 호는 " 대안학고, 희망의 교육을 위하여"이다.

 

녹색평론이 생태주의를 표방하고 있는데, 이 생태주의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간과할 수가 없다. 교육은 생태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어떤 교육이냐가 중요한데, 이런 교육에 대해서 우리는 제도권 교육이나 학원 교육으로 대표되는 사교육에 대해서는 이야기도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하지만, 대안교육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

 

대안교육. 말 그대로 이것이 아닌 저것을 추구하는 교육. 이곳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교육이 대안교육이라고 해야 할텐데, 지금 수많은 대안학교들 중 대안교육을 실질적으로 행하고 있는 학교는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다.

 

이번 호에서 대담에 참여한 분들도 우려하고 있는 것이 대안이라는 이름으로 전혀 대안적이지 않은 기관까지 묶여 있으며, 정부에서는 대안교육을 인가라는 무기로 간섭하고 통제하려 한다는 점이다.

 

대안교육은 그냥 놓아두어야 한다. 마음껏 할 수 있도록, 대신 대안교육이니 너희들 맘대로 할 것이니 우린 모른다 하는 자세가 아니라, 너희들이 꿈꾸는 교육을 해라,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뒷받침해주겠다 하는 자세를 지녔으면 하는데...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지금처럼 대안교육이 들불처럼 일어나지도 않았겠지.

 

그럼에도 대안교육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안교육이 제도권 교육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좌담에서도 나오지만 혁신학교가 만들어지고 나름 성과를 거두게 된 데에는 대안학교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육은 죽었다. 학교는 죽었다는 말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지금 이 시대, 대안 교육은 여전히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서 제도권 교육과 대안 교육이 함께 가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제도권 교육과 대안 교육이 함께 가는 사회, 이런 사회는 생태적 사회가 될 수 있다.

 

생태적 사회라는 이야기는 다양성이 존중받는 사회, 다양성을 이루는 사회일테니 말이다.

 

이런 대안 교육에 대한 글과 더불어 배병삼의 글이 마음에 와 닿았다. 한자어를 풀이하는 과정에서, 아니 유교 경전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우리에게 늘 다가왔던 말, 인(仁). 이 말을 이야기하면서, 배병삼은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도대체 지식인으로서 감정을 숨기기에는 지금 우리 사회가 너무 저열하다. 그들에게 고급스런 단어(이런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걸 사교적인 언어라고 하지)를 쓸 수가 없는 상태라는 사실을 이 글을 읽으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단장의 슬픔을 애써 외면하려는 그런 집단에게 인(仁)이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족속들이니, 어찌 고운 말이 나올 수 있겠는가.

 

이런 애타는 마음이 날것 그대로 글에 드러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공부한 사람들이 지닌 마음의 자세 아닐까.

 

공부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하는 것일텐데, 이기적이기 위해서는 이타적이어야 하듯이, 공부는 남과 나를 잇는 다리가 되어야 할텐데,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공부를 하는 집단. 오로지 제 말만 하는 집단. 그런 집단들에게 이번 호 배병삼의 글을 그대로 들려주고 싶다.

 

"불인하도다, 이 땅이여. 잔인하도다, 이 땅 사람들이여. 아! 슬프다." (71쪽)

 

이 땅, 이 땅 사람들. 누구를 말하는지 꼭 짚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은 다 알 터.

 

두 달에 한 번 여전히 내 생각보다 앞서 간 책을 읽는 재미는 단지 재미로 그치지 않는다. 나를 되돌아 보게 한다. 내 삶을 성찰하게 한다. 내가 어떤 삶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래. 이것이다. 이것이 바로 책의 역할이다. 책은 시간을 때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책은 단지 시간을 때우게 해서는 안된다.

 

한 사람의 영혼에 자리잡아 그 사람의 삶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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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11-09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녹평 독자를 만나면 언제나 반가워요!!
그나마 녹평이 있어 이 사회가 이 정도라도 유지하고 있는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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