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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나날들이다. 세상이 이토록 어두워졌는데, 빛은 보이지 않는다. 저마다 어둠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한 순간에 역사의 바퀴가 멈추더니 힘겹게 올라왔던 진보라는 언덕에서 뒤로 미끌어져 내려가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약속은 생명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이 어기는 약속은 불가항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하면서 비정상이 무엇인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강한 자들이 행위는 정상이고, 약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행동하면 비정상이다. 여기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불과하다. 과연 이것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이 될까?

 

제왕적 권력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발휘가 된다. 단지 정치 분야만이 아니란 얘기다. 대기업에서 제왕적 권력은 대기업 총수에게 있다. 달랑 몇 %의 지분만을 가지고도 온갖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교장이라는 제왕적 권력이 있다. 모든 것이 교장의 마음에 달려 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 이런 것은 없다.

 

군대에서는 지휘관의 명령이 절대적이다. 불복종이란 없다. 그것은 범죄다. 그러니 지휘관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영혼이란 저 멀리 보내버려야 하는 존재다.

 

이런 사회는 밤이다. 어둡다. 이런 어두움 오래 되면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더 이상 빛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냥 어둠 속에서 보이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견해야 한다. 그 빛이 있는 한 어둠은 어둠으로만 존재하기에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빛의 역할... '삶창'이 하고 있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말라고. 빛을 향해 나아가라고...

 

삶이 보이는 창 97호를 읽다.

 

특집 기사가 "불 좀 꺼주세요!"다.

 

이 특집을 보고 지난 대선 예비경선에서 나온 한 후보의 구호가 생각났다. 그 구호는 서정적인 구호이지만 상당한 힘을 발휘한 구호였다.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끌어올릴 구호이기도 했고.

 

바로 '저녁이 있는 삶'.

 

참 당연한 말인데, 왜 이 구호가 그리도 가슴에 와닿았을까?

 

저녁이 있는 삶.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또는 혼자서 여유 있는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삶. 그런 삶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밤중에서 불야성을 이루는 대도시는, 그들이 저녁을 누리기 때문에 불야성이 아니라 퇴근을 하지 못하기에,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하기에 불을 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근대화, 산업화, 그리고 세계화가 된 지금,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섰다고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삶은 저녁이 없는 삶이었다는 것. 우리가 진정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저녁이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 점 때문에 그 구호는 마음에 맴돌았고,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렇다. 불을 꺼야 한다. 저녁을 확보해야 한다. 일중독이라는 병에 걸린 우리는 치유하고 싶어도 살기 위해서 이 병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 일중독이라는 병은 쉽게 벗어던질 수가 없고, 이 일중독이라는 병을 없애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인식을 바꾸는 일이 바로 '불을 끄는' 일이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도록 서로 노력하는 것이다.

 

지금 정부에서 '돌봄 교실'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초등 1,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앞으로는 초등학생 모두에게 이 '돌봄 교실'을 적용하도록 하겠다고 한다.

 

언뜻 생각하면 참 좋은 발상같다. 좋은 정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가 맞벌이로 일을 하기 때문에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학교에서 돌보아 준다... 참 좋은 발상...

 

그러나... 아니다. 이는 앞뒤가 바뀐, 본말이 바뀐 정책일 수밖에 없다. 아이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또 늦은 시간에도 학교에서 보내야 한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가 너희를 돌보아 줄 시간이 없으니 학교에서 돌보아 주마. 이게 뭔가? 그럼 부모는 아이를 돌볼 책임이 조금 가벼워지니 더 열심히 일해라라는 말인가.

 

이렇게 초등학교 돌봄 교실이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면 맞벌이를 하는 대다수의 가정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은 없다.

 

일에 지쳐 늦게 들어온 부모는 피곤에 절어 있고, 학교에서 너무도 많은 시간을 보낸 아이 역시 지쳐 있을테니, 부모나 아이들이나 서로 지쳐 밤에 얼굴 한 번 보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일이 반복이 될텐데...

 

어떻게 저녁이 있는 삶. 함께 어울리며 정을 쌓아가는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제대로 된 정책이라면 돌봄 교실을 확대할 것이 아니라 부모들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정책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선진국 수준으로 노동시간을 줄이고, 그것을 법으로 명문화해야 할 것 아닌가.

 

부모들의 노동시간이 준다면 자연스레 돌봄 교실은 필요가 없고, 각 가정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될텐데 말이다.

 

"불 좀 꺼주세요!"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노동 식간을 줄여주세요." 근로기준법에 있는 그대로 하루 8시간 노동만 하게 해주세요. 아니, 발전하는 세계적 추세에 맞게 하루 노동시간을 6시간 정도로 줄여주세요. 그러면 우리는 그런 돌봄 교실은 필요 없어요. 우리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어요. 바로 이 말 아니겠는가.

 

삶창 97호.

 

 

저녁이 있는 삶. 그것이 어떤 삶인지 깨우쳐준 특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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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계절이다.

 

정치의 계절이란 말보다는 사실 선거의 계절이라는 말이 더 맞는 듯하다. 조금 이른 감이 있지만, 이미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되었으니, 선거의 계절이 시작되었음에는 틀림없다.

 

지방자치 선거에 교육감 선거까지... 우리의 실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선거가 6월에 치러진다. 이 선거를 통해서 4년이 결정이 되는데...

 

정치의 계절이라는 말이 어폐가 있는 것이 정치는 우리의 삶 내내 붙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정치에서 절대로 자유로와 질 수 없기 때문에 정치는 따로 계절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정치를 우리가 실감하게 되는 때가 바로 선거가 치러지는 때이니 만큼, 지금을 강조하기 위해서 정치의 계절이라는 말을 써도 무방하리라는 생각은 든다.

 

그래도 언어가 삶을 좌우할 수 있으니, 정치의 계절이라는 말보다는 선거의 계절이라는 말을 쓰는 편이 좋을 듯하고, 직접민주주의 대신 간접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선거는 유일하게 시민들이 정치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이런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리다는 이유로... 나이나 성별, 신체장애의 유무 등에 의해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고 헌법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년의 나이를 한 살 낮추는 것에 대해서는 심한 반발이 있는데...

 

아직도 한창 배우고 있는 고등학생에게 무슨 선거권이냐부터, 학생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하겠느냐는 말까지...

 

그래서 18세로 투표권을 낮추자는 말은 어림없는 소리로 치부되고, 아직도 실행이 되고 있지 않다. 대학입시에 매진해도 시원찮을 고3이 무슨 투표냐고? 그런 시간이 있으면 공부나 하라고?

 

그런데... 그런데... 왜 공부를 하지? 대부분의 학교 교육목표가 민주시민 양성 아니던가. 민주시민은 어떤 사람들이지? 자신들에게 관계된 일에 자신들의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은 노예에 불과하지 않는가. 아니면 판단불능의 사유가 있는 어떤 특정한 집단이거나.

 

교육감 선거를 예로 들어보면 문제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교육감은 4년동안 그 교육청의 교육행정을 책임지는 사람이다. 교육부 장관보다도 교육감에 의해서 일선 교육현장은 극심한 변화를 겪는다.

 

그 단적인 예가 서울시교육감 아니던가. 전임 교육감은 혁신학교에 중점을 두고 교육정책을 펼쳤다면, 후임 교육감은 혁신학교를 지우려는 교육정책을 펼치고 있으니, 교육감에 따라 학교 현장은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학교 현장의 중심축 중의 하나가 바로 학생들이다. 학생으로만 국한시키지 않으면 바로 그 나이 또래의 청소년들이다. 청소년들의 대다수를 학생들이 차지하고 있지만, 제도권 밖에 있어도 교육정책의 영향은 제도권 안이나 제도권 밖이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자신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교육감 선거에 학생들은 참여할 수가 없다. 교육감이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학교교육의 범위는 청소년이라고 할 수 있는 유,초,중,고등학교 교육에 해당이 된다.

 

하지만 그들은 어리다는 이유로, 판단능력이 떨어진다는 이유(도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지, 청소년들이 판단능력이 떨어진다고? 과연 그런가? 그럼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어른들은? 왜 그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을 문제삼지 않는가. 투표권을 주느냐 마느냐는 판단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로 투표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다.

 

문제는 단지 투표만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정치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민주시민교육"이 목표인 사회과가 교과목으로 버젓이 자리잡고 있지만, 그것은 말 뿐이다. 그리고 시험용일 뿐이다. 오로지 시험을 위한 교과로 존재하는 사회과. 이런 상태에서 청소년들의 정치의식은 발달할 수가 없다.

 

제대로 된 정치교육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른이 되었다고 정치의식이 성숙한 시민이 되는가? 그런 경우가 있는가?

 

정치의 후진성, 그것은 정치교육의 부재를 이르는 말이다. 젊은이들에게 왜 너희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느냐고 질책을 많이들 한다. 그것도 다른 때에는 잠잠하다가 선거때가 되면 각 당의 당리당략에 따라 이런 말이 나온다.

 

왜 정치에 관심이 없냐고? 당연하지 않은가. 언제 제대로 정치에 대해서 민주시민의 역할에 대해서 가르친 적이 있는가?

 

학생들이 "안녕하십니까"란 대자보를 붙이자 그것은 학생이 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교육당국이 앞장서서 떼어버리는 현실에서, 무슨. 

 

그래서 이번 "민들레 91호"에서는 특집으로 '정치가 꽃피는 교육'을 들었다. 시의적절하게 잘 다룬 기획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정으로 민주시민을 양성하고 싶다면 학생들(청소년들) 너희들은 어리니까, 공부해야 할 나이니까 정치에 관심두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너희들은 학생들(청소년들)이니까 제대로 정치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라고 해야 한다.

 

정치에 직접 참여하게도 해야 한다. 물론 집행권을 주지 않더라도, 그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결정을 하게도 해봐야 한다. 그리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옛날에는(지금보다도 더 후진적이라는) 15세가 넘으면 이미 어른 대접을 받았다. 춘향이의 나이를 생각해 보라. 그리도 당당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던 춘향이의 나이는 그 때 16세였다. 또한 옛날에 소년 진사들... 뭐... 이런 과거에 나이 제한이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

 

민들레 이번 호를 중심으로 학생(청소년)의 정치교육에 대해서, 정치 참여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 한다. 마냥 어리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또 하나의 주체로 인정해주어야 한다. 그래야만 민주시민이 양성될 수 있다.

 

학생(청소년)들에게 제대로 된 정치 교육을 할 때에만, 선거 때만 반짝하는 정치계절이 아니라, 늘 우리의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정치라는 사실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다. 그 사실을 민들레 이번 호가 상기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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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상봉이 몇 년만에 이루어졌다.

남과 북.

물리적 거리로는 얼마되지 않는데... 만나는데 몇 십년이 걸린다. 마치 서정춘의 시 '죽편1'에서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고 노래하듯이 너무도 긴 세월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해마다 몇 천 명씩 만나도 시원찮을 판에, 한 번의 만남에 남과 북이 각 100명씩이니... 그것도 해마다 정기적으로 정해져 있으면 몰라도, 남북관계가 얼어붙으면 이산가족 상봉은 물건너 가버리고 마니, 언제 자기 차례가 올지 알 수가 없다.


이산가족을 만나기를 기다리다 기다리다 끝내 가족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조금 늦었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지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쟁으로 서로의 생사를 알지 못하고 지내온 세월이 너무도 길어서, 이제는 만나야 하는데... 이러한 인륜 앞에, 천륜 앞에 이념은 무엇이던가.


무엇보다도 서로 만날 수 있게, 서로 교류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정치가들의 임무 아니던가. 그들의 의무인데, 이런 교류가 활발히 일어나지 않는 책임은 정치가들이 져야 한다.


'통일대박'이라는 말보다는, 작은 것, 즉 헤어진 가족이 다시 만나는 일, 서로가 서로서로 교류할 수 있게 하는 일. 기왕에 해오던 개성공단부터 시작하여 경제협력을 해나가는 일. 예전처럼 남북단일팀을 만들어 세계대회에 참여하는 일.


문인들은 작품으로 교류하고, 언어학자들은 남북공동사전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고, 학자들은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서로의 긴장을 풀고 협력하는 상태가 된다면 통일은 멀리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산가족의 아픔도 어느 정도 줄어들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통일대박'을 이야기해야 한다.


고은의 시집을 펼치게 되었다. "남과북" 우리의 국토를 남과 북 어느 한쪽에 국한시키지 않고 옛날처럼 남과북의 장소들을 노래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장소, 이 공간, 바로 한반도는 남과북을 모두 포함하고 있음을, 북한에 있는 그 땅들도 바로 우리임을 이 시집에 말해주고 있다.


시인은 후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시편 [남과북]은 남과 북의 수준 낮은 정치 현실로부터 비정치적인 조율과 문화로서의 음향을 지향하는 분단 이전의 노래이기도 하고 분단현실의 몇 단면에 다가가는 노래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 분단 이후의 어떤 시기에 들어맞는 노래이기도 하기를 하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255쪽)


이 시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우리 조상들의 삶의 흔적이 녹아 있는 장소들, 그 장소에서 남과북, 우리 모두는 살아가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모습. 그것이 바로 통일의 시발점이 아닌가 한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북쪽에서 남쪽으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사회, 그래서 가족들이 헤어져 서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고 지내지 않도록, 또 살아있음을 알고도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더 이상 함께 있지 못하는 세상이 되지 않게... 그렇게...


이 시집에서 노래한 "남과북"이 모두 우리임을.


두 편의 시를 보자. 이것이 바로 남과북이 지녀야 할 자세가 아닐런지.

이산가족들의 아픔이 하루빨리 씻겨내려가기를 바라면서...  

 

이제 입춘도 우수도 지났다. 봄이다. 꽃소식. 계속 되기를 바란다. 그러면 곧 단풍도 멋지게 들테니...

 

      꽃소식


봄입니다 만물이 자유자재합니다

꽃소식이

세상의 가난을 달랩니다

누구는 불쌍하다고

누구는 불쌍하지 않다고 말하는

미완성의 나라 온통

봄입니다

이 나라 남쪽

제주도에 피는 진달래

며칠 뒤에는

바다 건너

전라남도

경상남도에 피어납니다

며칠 뒤에는

중부 한강 기슭

춘천 소양강 기슭에 피어납니다

한달쯤 지나

북한 압록강 상류

혜산 일대에 피어납니다

5월 하순

표고 2천7백 미터쯤에

수목한계선 밑 추운 봄에

진달래는 울긋불긋 피어납니다

이것이면 됩니다

더이상 바랄 나위 없습니다

어디메 봄날 꽃만한 것 있겠습니까

남과 북 차츰 가지런히

고은, 남과북, 창작과비평사. 2000년. 82-83쪽


     단풍

구원이란

컴컴한 신념보다 종교보다

별이 

꽃이

기어이 가을 단풍이 아주 많이 맡아온 것을 알고 싶다


한반도 북쪽 끝 두만강 상류 무산

첩첩산중

거기 사람은 없고

홍단수

단풍 가득하였다


한달 뒤

강원도 금강산이 온통 단풍이었고

이내 내려와 설악산의 단풍이었다

한달 뒤

호남 내장산 단풍이었다

바다 건너

제주도 한라산 위층은

벌써 빈 나무들이고

아래층은 아직 하루이틀 더 단풍이었다

이렇게 봄 꽃소식 북으로 가고

이렇게 단풍 소식

남으로 남으로 오는데

그동안의 동포들 남과 북에서

수고 많은 날들

그 찬란한 단풍으로

가슴 훤히 구원받아왔으니

이제 더이상 구원받지 않아도 좋아라

그저 단풍이면

어머

어머 소스라쳐 기쁘고

단풍 가면

아이고 어쩌나 안타까워하다가


한밤중 북극성 하나 바라보면

거기 내일이 있어야 한다

 

고은, 남과북, 창작과비평사. 2000년.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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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공판이 있었다. 1심에서 징역 12년에 자격정지 10년이라는 판결을 받았다고 한다.

 

내란음모에 선동, 국가보안법 위반까지 모두 인정했다고 하는데... 물론 이석기 의원 측에서는 항소를 할 예정이고, 이와 함께 헌법재판소에서는 이석기 의원이 속한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청구 심판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 판결이 어떻게 작용을 할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내란음모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한겨레신문에 한홍구 교수가 '내란의 나라?' 비슷한 제목으로 글을 연재하고 있던데... 내란의 나라임에도 성공한 내란(그걸 쿠테타라고 할 수도 있는데)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이상한 논리도 한 때 유행했던 나라이기도 하니...

 

통합진보당이 왜 해산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헌법을 찾아 보았더니...

 

제 8조 4항  정당의 목적이나 활동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될 때에는 정부는 헌법재판소에 그 해산을 제소할 수 있고, 정당은 헌법재판소의 심판에 의하여 해산된다.

 

그렇다면 통합진보당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된다고 정부가 판단했다는 얘긴데... 정당은 정권을 획득할 목적으로 결성된 조직이고, 이들은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하는 활동이 민주적이 아닐 수가 있는가.

 

그 정당을 지지한 국민들도 많은데... 어쩌면 이것은 국민들에게도 너희들은 민주적 질서에 위배된 활동을 했어라고 하는 것은 아닌지...

 

헌법재판소가 현명한 판단을 하리라 생각을 하고...

 

다만, 지금 내 마음이 어두운 것은 통합진보당의 해산 심판 청구나,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재판이나 결과가 나와봐야 하는 일이니 더 논의할 것은 아니지만, 이 시대에, 2010년이 지난 시대에 구시대적인 내란음모, 민주적 질서에 위배라는 말들이 난무하는 현실 때문이다.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으로는 민주적 질서에 어긋한 정당이나 사람이라면 결코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내게는 있는데...

 

김삼웅이 엮은 "해방후 정치사 100장면"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지금까지 약 70년 동안 정치사에서 주요한 장면을 100장면을 뽑아놓은 책인데...

 

이 책에서 이번 일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는가를 찾아보니, 데자뷰라고 할 수 있는 일이 두 개가 있다.

 

22. 비운의 정치가 조봉암의 죽음 - 진보당 사건

77. 체포, 사형선고,  해외망명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망명

 

앞으로 판결이 어떻게 될지... 그것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일로 정치사에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나는 민주화된 시대에 살고 있다고 믿고 있으므로.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정치사에 추가되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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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없이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어느 순간 세상의 석유가 모두 없어져 사용할 수 없게 된다고 상상을 해보면 끔찍하다.

 

지구상에 있는 대부분의 기계들이 작동을 멈추어야 하고, 난방도 제대로 될 수가 없으며, 우리들의 삶은 빙하기를 만난 공룡들과 비슷한 처지로 전락할 것이다.

 

얼마 전부터는 석유가 고갈될 것이라고, 석유 피크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고, 따라서 대체 에너지를 개발해야 한다는 말들이 계속 나오고 있는데....

 

그런 대체 에너지로 원자력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석유보다도 더 위험하다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많으니...

 

그래서 원자력을 제외하고 천연에너지 개발을 위해 전세계가 움직이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석유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편이니...

 

지금 당장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아예 없앨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조금씩 낮춰갈 수 있는 에너지 정책이 필요하다.

 

석유는 한 때 '검은물'이라고 해서 신의 재앙이라고 했다. 근대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나 산업화가 되면서 재앙이라던 검은물이 신의 축복이 되었고, 사막이었던 아랍국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들이 되었다. 석유때문에.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다는 우리나라에서는 석유를 수입하기 위해서 막대한 돈을 투자하고 있고... 이렇듯 석유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 석유로 인해서 우리네 삶에 막대한 피해를 주는 큰 사고가 얼마간이 간격을 두고 연이어 일어났다. 바다에 기름이 유출되는 사고. 그것도 대량의 기름이 유출되어 바다를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다. 한 사고는 해양수산부 장관까지 사퇴하게 만들 정도로 파급이 컸고.

 

바다에 기름 유출 사고. 내 기억에만 벌써 세 번째다. 태안에서, 여수에서, 그리고 이번에 부산에서.

 

외국에서 힘겹게 실어나르는 원유가 바다에 유출되는 것은 원유가 아깝다는 차원을 넘어 원유로 인해 생계가 막막해지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더욱 우려가 된다.

 

조심. 조심. 더 조심해도 시원찮을 판에... 이런 사고들이 연달아 나고 있으니...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하루바삐 낮추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에너지 정책을 펼쳐야 할텐데... 단순한 사고수습대책에서 벗어나 정말로 우리나라의 미래를 내다보는 그런 정책... 그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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