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나날들이다. 세상이 이토록 어두워졌는데, 빛은 보이지 않는다. 저마다 어둠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한 순간에 역사의 바퀴가 멈추더니 힘겹게 올라왔던 진보라는 언덕에서 뒤로 미끌어져 내려가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약속은 생명이라고 하는 사람이 자신이 어기는 약속은 불가항력이라고 한다. 그리고 비정상의 정상화라고 하면서 비정상이 무엇인지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강한 자들이 행위는 정상이고, 약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행동하면 비정상이다. 여기서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힘이 있느냐 없느냐에 불과하다. 과연 이것이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이 될까?

 

제왕적 권력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발휘가 된다. 단지 정치 분야만이 아니란 얘기다. 대기업에서 제왕적 권력은 대기업 총수에게 있다. 달랑 몇 %의 지분만을 가지고도 온갖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학교라는 공간에서는 교장이라는 제왕적 권력이 있다. 모든 것이 교장의 마음에 달려 있다. 합리적인 의사결정 이런 것은 없다.

 

군대에서는 지휘관의 명령이 절대적이다. 불복종이란 없다. 그것은 범죄다. 그러니 지휘관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영혼이란 저 멀리 보내버려야 하는 존재다.

 

이런 사회는 밤이다. 어둡다. 이런 어두움 오래 되면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더 이상 빛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냥 어둠 속에서 보이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견해야 한다. 그 빛이 있는 한 어둠은 어둠으로만 존재하기에 빛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그런 빛의 역할... '삶창'이 하고 있다. 어둠에 익숙해지지 말라고. 빛을 향해 나아가라고...

 

삶이 보이는 창 97호를 읽다.

 

특집 기사가 "불 좀 꺼주세요!"다.

 

이 특집을 보고 지난 대선 예비경선에서 나온 한 후보의 구호가 생각났다. 그 구호는 서정적인 구호이지만 상당한 힘을 발휘한 구호였다. 우리의 삶을 한 단계 끌어올릴 구호이기도 했고.

 

바로 '저녁이 있는 삶'.

 

참 당연한 말인데, 왜 이 구호가 그리도 가슴에 와닿았을까?

 

저녁이 있는 삶.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가족과 함께 또는 혼자서 여유 있는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삶. 그런 삶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녁이 없는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밤중에서 불야성을 이루는 대도시는, 그들이 저녁을 누리기 때문에 불야성이 아니라 퇴근을 하지 못하기에,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해야 하기에 불을 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근대화, 산업화, 그리고 세계화가 된 지금, 선진국의 대열에 올라섰다고도 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삶은 저녁이 없는 삶이었다는 것. 우리가 진정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는,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저녁이 있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 점 때문에 그 구호는 마음에 맴돌았고,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렇다. 불을 꺼야 한다. 저녁을 확보해야 한다. 일중독이라는 병에 걸린 우리는 치유하고 싶어도 살기 위해서 이 병을 껴안고 살아가고 있다. 일중독이라는 병은 쉽게 벗어던질 수가 없고, 이 일중독이라는 병을 없애기 위해서는 사회적 인식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인식을 바꾸는 일이 바로 '불을 끄는' 일이고,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도록 서로 노력하는 것이다.

 

지금 정부에서 '돌봄 교실'을 추진하고 있다. 올해는 초등 1,2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앞으로는 초등학생 모두에게 이 '돌봄 교실'을 적용하도록 하겠다고 한다.

 

언뜻 생각하면 참 좋은 발상같다. 좋은 정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부모가 맞벌이로 일을 하기 때문에 갈 곳이 없는 아이들을 학교에서 돌보아 준다... 참 좋은 발상...

 

그러나... 아니다. 이는 앞뒤가 바뀐, 본말이 바뀐 정책일 수밖에 없다. 아이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또 늦은 시간에도 학교에서 보내야 한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가 너희를 돌보아 줄 시간이 없으니 학교에서 돌보아 주마. 이게 뭔가? 그럼 부모는 아이를 돌볼 책임이 조금 가벼워지니 더 열심히 일해라라는 말인가.

 

이렇게 초등학교 돌봄 교실이 전국적으로 확산이 되면 맞벌이를 하는 대다수의 가정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은 없다.

 

일에 지쳐 늦게 들어온 부모는 피곤에 절어 있고, 학교에서 너무도 많은 시간을 보낸 아이 역시 지쳐 있을테니, 부모나 아이들이나 서로 지쳐 밤에 얼굴 한 번 보고 잠에 곯아떨어지는 일이 반복이 될텐데...

 

어떻게 저녁이 있는 삶. 함께 어울리며 정을 쌓아가는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제대로 된 정책이라면 돌봄 교실을 확대할 것이 아니라 부모들의 노동시간을 줄이는 정책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세계 최장 노동시간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선진국 수준으로 노동시간을 줄이고, 그것을 법으로 명문화해야 할 것 아닌가.

 

부모들의 노동시간이 준다면 자연스레 돌봄 교실은 필요가 없고, 각 가정에서는 '저녁이 있는 삶'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될텐데 말이다.

 

"불 좀 꺼주세요!"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노동 식간을 줄여주세요." 근로기준법에 있는 그대로 하루 8시간 노동만 하게 해주세요. 아니, 발전하는 세계적 추세에 맞게 하루 노동시간을 6시간 정도로 줄여주세요. 그러면 우리는 그런 돌봄 교실은 필요 없어요. 우리는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어요. 바로 이 말 아니겠는가.

 

삶창 97호.

 

 

저녁이 있는 삶. 그것이 어떤 삶인지 깨우쳐준 특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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