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콤 엑스 -상 - 제3세계총서 1
알렉스 헤일리 지음 / 창비 / 197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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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검은 것이 아름답다."

 

이 말은 흑인들이 백인들에 대한 대항 이데올로기로서 만들어진 말이다. 흑인들을 비하하는 세상에서 흑인들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이 말처럼 좋은 말이 있을까.

 

과학이 발전하면서 우생학을 잘못 도용하여 인종간에 우열을 나누는 경우도 꽤 있었고, 그러한 우생학을 바탕으로 유색인종은(세상에, 그렇다면 백인은 유색인이 아닌지...) 열등하다는 주장을 했고, 또 그렇게 대우를 했다.

 

그런 차별 대우가 언어에도 녹아 있어, 흑인들은 니그로라는 말로, 또는 혼혈임을 나타내는 말로 쉽게 지칭이 되었으며,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도, 살고 있는 지역도 모두 차별을 받았다.

 

아주 오래 전, 중세 시대의 이야기? 아니다. 이것은 현대의 이야기이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는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러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일어선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에게 알려진 사람으로는 미국인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엑스가 있다.

 

킹 목사는 평화주의자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으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는 연설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져 있고, 세계적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지만, 말콤 엑스는 우리의 기억에서 잊혀진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전기를 구해서 읽기도 쉽지는 않다. 킹 목사가 계속 간디와 더불어 조명을 받는 것에 비하면 말콤 엑스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한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그에 대한 오해와 그의 종교.

 

그는 이슬람교도다. 젊은 시절 온갖 방황을 거쳐(이런 방황이 사실은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인 문제라는 사실. 이것을 인식해야만 사회는 변할 수가 있다. 그는 학창시절 뛰어난 성적을 거둔 학생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장래 희망에 대한 무시를 견딜 수 없어 자신의 피부색에 맞는 동포들을 찾아 할렘으로 간다. 이 할렘에 거주하는 동안, 그는 밑바닥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했다고 해야 한다.) 감옥에서 맞이하게 되는 이슬람.

 

그것은 그에게 구원의 빛이었다. 그 빛을 향해 그는 앞으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아갔으며, 그러한 그를 언론들은 과격하다, 증오를 빚는 사람이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언론을 누가 장악하고 있었는가? 그것은 바로 백인이다. 하여 말콤 엑스는 증오는 바로 백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며, 자신은 그러한 증오를 없애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 증오를 없애는 방법, 그것은 흑인의 권리를 되찾는, 흑인의 본래 모습을 되찾는 것이라는 주장, 이 주장이 백인게에는 또다른 증오의 모습이었으리라.

 

게다가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미국이지만, 미국인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인 나라에서 이슬람을 믿는 말콤 엑스는 이미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의 목사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킹 목사와 그가 다른 점이다. 요즘 이슬람에 대한 인식을 보라. 아마 그 때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도 그를 이슬람으로 이끌었던 종교지도자와의 갈등으로 그 단체에서 정권(권리를 중지당함)을 당한다. 그 후 그는 다른 단체를 이끌게 되는데, 이것이 흑인과 흑인의 갈등으로 보이게 되는 소지를 남기게 된다.

 

백인에 대한 증오가 있었던 말콤은 성지 순례를 통해 인종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극복한다. 그는 이제 흑인만을 위한 운동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즉 사람에게는 피부색이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한 단계 나아간 말콤의 의식이 사회운동으로 정립되기에는 활동 시기가 너무 짧았다. 곧 그는 암살을 당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인종을 넘어선 더욱 폭넓은, 인종을 초월한 평화주의자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오래 된 책.

 

다시 읽으니 참으로 흥미롭다.

 

사회의 바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헤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말콤 엑스의 이야기는 희망을, 가능성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회가 사람을 나락으로 내쳤더라도, 깨어있는 사람은, 그 사회의 모순을 파악하고, 사회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 그러한 깨어있는 사람이 결국 사회를 바꾸어 간다는 사실. 이를 말콤의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 된다.

 

그의 삶은 정말로 바닥에서 시작했으니 말이다.

 

진흙에서 핀 연꽃. 그 연꽃은 사회 변화의 상징이다.

 

많은 책 중에 창비 판으로 읽었는데, 다시 활자를 현재에 맞게 고쳐서 재출간하면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어려운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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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철학 - 지배와 저항의 논리
사카이 다카시 지음, 김은주 옮김 / 산눈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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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은 두려움과 함께 한다. 두려움은 공포와 비슷한 감정이라고 한다면 폭력은 이 공포에 기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폭력은 일방향적이 아니다. 폭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폭력이 있으며,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폭력도 있다. 아래로 내려오는 폭력이 지배의 폭력이라면, 위로 올라가는 폭력은 저항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둘 다 폭력이라고 한다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인가? 어떤 폭력은 정당하고, 어떤 폭력은 정당하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든다.

 

여기에 폭력은 무조건 옳지 않다고 하면 이 둘의 차이는 없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그 차이는 무엇인가 고찰해보아야 한다.

 

지배하는 폭력이 단순한 물리력 뿐만이 아니라, 공포를 수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복종하게 한다. 이러한 지배하는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또다른 폭력일 수가 없다. 그것은 폭력의 재생산일 뿐이다.

 

그렇다면 저항의 폭력은 비폭력이어야 하는데, 이 비폭력은 무력함이 아니다. 오히려 비폭력은 힘을 바탕으로 한다. 힘을 바탕으로 하지 않은 비폭력은 지배층에게 이용당하기만 할 뿐이다.

 

힘을 바탕으로 하는 비폭력, 이것이 역사 속에서 나타난 순간이 있었으니, 그것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인종차별 운동, 말콤 엑스의 운동, 간디의 운동 등등이다.

 

이들은 지배의 폭력에 맞서 비폭력의 저항으로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러한 비폭력은 다른 세상이 가능함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세상이 가능함을 인식하는 것은 비폭력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러한 비폭력은 현실적으로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게 된다.

 

1부에서 이러한 비폭력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2부나 3부에서는 폭력의 문제를 고찰하고 있다. 가장 큰 폭력인 전쟁, 이를 전면전과 게릴라전으로 나누고 있으며, 또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도 고찰하고 있다.

 

이러한 폭력에서 벗어나는 길은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상호신뢰로 뭉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결국 공포란 나만이 고립되어 있다는 생각, 또 나 이외의 사람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깊숙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테다. 하여 저자는 미디어도 비판하고 있다. 미디어들이 사건들을 계속 내보냄으로써 불안감을 조성하고, 이러한 불안감이 폭력에 대해서 관용적인 모습을 보이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배의 폭력은 두려움과 공포를 끊임없이 자극하여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다면, 저항의 폭력은 믿음과 사랑을 회복하여 함께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그래서 비폭력 직접행동을 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해야 할까. 그것은 명백하다. 비폭력 직접행동. 나만이 아닌 우리가 함께 하는, 서로가 서로를 믿는 그런 관계의 회복. 그것이 바로 폭력의 철학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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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힘 - 매혹적인 스토리텔링의 조건
이창용 외 지음 / 황금물고기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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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정의하는 말들은 많다. 사회적 인간이라든지, 정치적 인간이라든지, 놀이하는 인간이라든지, 또는 생각하는 인간이라든지...

 

이 중에서 언어적 인간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언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언어가 어쩌면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추측을 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언어 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보면 언어는 곧 인간이고, 인간은 곧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원시시대부터 언어를 사용하려고 했으며, 지금과 같은 고도의 문자가 없던 시대에는 그림을 통해서 또는 단순한 기호를 통해서 무언가를 표현하고 있지 않았던다.

 

이런 표현 욕구, 그것을 채워주는 것이 언어이고, 언어로 표현된 것이 바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우리 인간의 필수조건이라고 할만한다.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많은지, 아무 말 안하고 몇 시간, 며칠을 있어보면 안다. 입이 근질근질하다고 하지 않던가. 오죽했으면 스님들의 수행 중에 묵언수행이라는 것이 있겠는가.

 

그만큼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 널려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 삶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면 더욱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이야기에 관한 책은 대부분 재미있다. 왜냐하면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재미있는 이야기에 대해 글을 썼는데, 재미가 없다면 그것은 잘못된 책이기 십상이다.

 

어떤 이야기가 재미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야기가 지니고 있는 효과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추구한 내용을 책으로 정리해내었다고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래서 이야기의 힘에 대한 예들이 적절하게 나타나 있어서 아,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단지 우리가 이야기라고 알고 있는 소설이나 영화, 만화만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이야기, 즉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지를 광고를 통해서, 또는 상품을 통해서 실험한 결과를 이야기해주고 있으며, 이런 이야기가 정치에서도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오바마의 예를 들어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이야기를 자신의 삶에 체현한 사람이 좀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는 남들에게도 매력적인 사람으로 자신을 내보일 수 있으며, 그러므로 자신의 삶에서도 더욱 자신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이와 반대로 아주 어린아이도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도 보여주고 있으므로 이야기는 결국 우리 인간의 삶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렇듯 중요한 이야기를 우리는 너무 간과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이제는 자신을 내보일 때 겉모습에만 신경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삶의 필수 조건인 이야기, 그 힘에 대한 책.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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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 누구나 경험하지만 누구도 잘 모르는 - 이혁규의 교실수업 이야기
이혁규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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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관한 책이 많이 나와 있다. 아마 교육에 관한 책을 다 읽겠다고 나선다면 평생에 걸쳐서도 다 읽지 못할 만한 양이다.

 

철학적인 내용부터 구체적인 실천지침까지 온갖 교육책들이 있는데, 정작 수업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책은 많지 않다.

 

대학 교재로 교수법에 관한 책은 있지만, 이 책들은 학교 현장에서 벗어난 이론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수업과 관계가 없는 책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수업에 대해서 고찰을 한다. 정작 교육의 기본은 수업이기 때문이다. 수업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아니 학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라는 문제제기에서 시작하고 있다.

 

학교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부터 시작하여 수업에 대해서 지니고 있는 생각들을 살피고, 어떻게 하면 더 나은 수업을, 더 나은 교육을 할 수 있는지를 살피고 있다.

 

교대에서 예비교사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또 현장에서 중고등학생들을 직접 가르쳤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고민을 중심으로 바람직한 수업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하여 글들의 대부분이 현장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교사들이 수업을 해온 모습을 돌아보고, 더 나은 수업을 찾아나갈 수 있게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전문가라고 하는, 또는 연구자,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역할이다.

 

그런 역할에 충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예비교사들에게도 도움이 많이 되겠지만, 예비교사들보다는 현장에서 수업에 임하고 있는 현직교사들에게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다.

 

교사들이 가끔은 자신의 수업을 멀리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데, 그런 필요를 느낄 수 있는 자극을 줄 수 있는 책이다.

 

교육은 교사의 질을 넘어설 수 없다고 했듯이 교사들의 교육도 역시 수업의 질을 넘어설 수 없다. 물론 교사는 수업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도 교육을 하지만 무엇보다도 학생에게 영향을 주는 분야는 수업이다.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교사가 어떻게 다른 분야에서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하여 수업은 교육의 시작이자 전부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수업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는 이 책.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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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 깊이 읽기 - 동양의 정치적 상상력
위중 지음, 이은호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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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풀'

 

이것이 이 책의 원래 제목이라고 한다. 바람은 군주이고, 풀은 백성이다.

 

또다른 제목은 '동양의 정치적 상상력'이다. 그만큼 이 책은 '상서'를 읽으면서 정치를 생각한 책이다.

 

상서는 서경의 다른 이름이라고 하니까, 결국 서경을 통해서 동양의 정치적 사고의 원형을 탐구하는 책이다.

 

상서 50편을 읽으면서 각 편의 내용을 곰곰이 생각하고, 그것을 정치와 연결시킨 독후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정치의 관점으로 읽은 상서라고 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에 상서의 원문이 없다는 사실이다. 글쓴이가 독후감의 형식으로 쓴 글이기에 상서를 읽지 않았으면 그냥 글쓴이의 주장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글쓴이가 주장하고 있는 글읽기와 모순된다. 따라서 이 책을 읽을 때는 서경을 함께 펼쳐놓고 읽는 것이 좋다.

 

서경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 읽기가 곤란하다면(대부분의 사람은 읽을 수가 없다. 과거 경전의 한문은 참 어렵다. 그리고 우리는 한문 교육에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왔다. 옛날 우리나라 책들을 한문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역시 한문으로 된 책은 읽지 못한다. 해석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의 해석도 힘든데, 그 글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 현실이 슬프다) 한글로 풀이해 놓은 책을 펼쳐 놓고 읽으면 된다.

 

적어도 원문을 알아야 그 원문에 대한 해설을 읽으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이 책은 그냥 죽 읽어도 된다. 상서의 순서대로 자신의 감상을 펼치고 있기에 상서가 역사 순으로 편집되어 있어 이 책만을 읽고 이렇게 상서의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구나 해도 된다.

 

옛날 동양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했구나 하면 된다.

 

하늘을 대신해 세상을 다스리는 군주에서, 군주의 힘을 어느 정도 빌린 방백으로, 그러한 방백의 힘을 다시 빌린 제후로 가는 과정이 상서의 정치 권력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제후의 힘이 강성해진 시대가 바로 춘추전국시대이고, 이 상서는 춘추전국시대가 막 시작될 무렵 끝나게 된다.

 

그러므로 상서의 정치적 상상력은 하늘로 대표되는 진리를 체현하고 있는 인물이 어떻게 세상을 다스리는가 하는 문제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명을 받은 사람은 성공해서, 그를 도울 현명한 사람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지만, 현명한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오직 저만을 믿어 제 멋대로 행하는사람은 하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 되므로, 하늘이 다른 사람에게 천명을 주어 그를 멸망시킨다는 내용.

 

한 사람의 성인이 세상을 다스릴 때의 행복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면 갈수록 세상은 혼탁해지는 모습이 상서에 나타나 있다. 이는 이미 세상은 성인 한 명으로는 다스려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반증이 아닐까 싶다.

 

나라가 교체되지만 갈수록 성인의 힘은 미약해지고, 그래서 현인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갈수록 이러한 현인도 줄어든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현인을 알아볼 줄 아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다고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세상은 혼란으로 치닫고, 이것이 춘추시대를 거쳐 전국시대에 이르게 된다.

 

상고시대에는 법이라는 제도보다는 사람의 덕이 더 중심이 되었다고 한다면 천명이 작아지는 후세 시대에서는 덕보다는 법과 같은 제도가 더 중심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인들도, 또 노자, 장자, 묵자와 같은 사람들도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게 되지 않았을까.

 

이제는 추상적인 도(道)나 덕보다는 눈에 보이는 제도가 더 중시되는 사회가 되었으니, 이러한 고전을 읽으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제도에 도나 덕을 담으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직까지도 사람을 중시하는 사회가 동양 사회이니, 이것은 이러한 고전의 정치적 상상력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는 얘기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아직도 사람, 사람 하는 그 모습이 우리 동양의 오래 된 전통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해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고전을 읽는 방법을 알려준 책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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