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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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었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소설은 상상을 통해서 장면을 떠올려야 한다면, 그래픽 노블은 그림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에 소설을 읽었다면 자신의 상상과 비교하면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내용의 전개를 그림에 따라서 따라가기 때문에 다른 맥락의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다.


길리어드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 여성을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수단으로 대하는 세상.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행위들.


한 순간에 경제적 무능자로 만들어버릴 수 있고, 그 다음에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오로지 수단으로서만 지낼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제도.


상상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상상 속에만 있지 않다.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전락해버리는 사람들. 그렇지만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도 벗어날 꿈을 꾼다. 노력을 한다.


메이데이. 그렇다. 구해달라고, 아님 약자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암호로 통용이 된다. 그런 상황을 마냥 감내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세상이 아니므로.


소설로 읽었을 때도 좋았지만, 그래픽 노블로 보는 것도 좋았다. 오히려 더 섬뜩했다고 할까? 그런 세상이 오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 그리고 [시녀이야기]의 후속편인 [증언들]에 대한 그래픽 노블도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암흑인 세계를 벗어나는 모습을 우리는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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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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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설이다. 잔잔하다. 특별한 갈등도 없다. 그렇다고 사건이 없지는 않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치 물결의 흐름에서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강한 물의 흐름이 있듯이, 이 소설 역시 그 잔잔함 속에서도 갈등이 있다. 다만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일본 사람들의 특징으로 드는 말 중에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들은 직선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남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만 말하고 행동한다고 한다. 지금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대등하다고 여기는 상대에게는 이런 태도가 여전히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서에서도 마찬가지다. 감정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말투로 눈짓으로, 행동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그것을 알아채는 쪽으로 서술이 된다.


건축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으면서 이런 일본인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인물로 소설의 중심인물인 무라이 슌스케를 들고 있다.


건축가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사무소를 차린다. 이 사무소에 직원을 뽑지 않다가 소설의 서술자가 직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여름, 별장으로 가서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을 준비한다.


이 여름에 겪었던 일들이 소설의 중심이다. 그런데 사건의 갈등보다는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서술된다.


어떤 건축을 하려고 하는지, 건축은 사용자 중심이어야 한다는 무라이의 사상을 중심으로 국립현대도서관을 어떻게 설계하는지, 그리고 그동안 무라이가 설계하고 건축한 집들이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연과 배치되는 건축이 아닌 자연 속에 녹아들어가는 건축, 그렇다고 자연의 일부가 아닌, 건축은 인위적인 결과물이니까, 인위적이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하려고 한다.


또한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건축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건축하는 사람은 반드시 요리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무소 직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요리를 한다. 요리를 해야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이해하고, 그에 합당한 건축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위압적이지 않은, 그렇다고 너무 구태의연하지도 않은 그런 건축. 서술자는 여름 별장에서 그런 건축의 묘미에 푹 빠져들게 된다.


무라이 선생이 짚어주는 것들을 스케치하면서 느끼게 되는 건축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이 소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읽으면서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또 건축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고.


국립현대도서관 경합을 위한 설계를 할 때 소설 속에서 표현된 이용자들이 어떻게 느끼고 활용할지를 고민하면서 설계하는 장면을 보면서,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기적의 도서관'을 설계할 때도 이런 고민을 하면서 설계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정기용 건축가가 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들을 이 소설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마음이 잔잔해지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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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 생존과 저항에 관한 긴급 보고서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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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에 있는 작은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이보다 더 이 책의 내용을 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 버거는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그 다양한 활동의 중심에는 늘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 약자들과의 연대가 있다. 정의를 향한 그의 목소리. 존 버거의 어떤 책에서든 그것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존 버거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말한다. '장소에 관한 열 가지 보고서'(123-134쪽 )라는 글에서.


'누군가 내게 묻는다. 아직까지 마르크스주의자냐고.'(123쪽)로 시작해 '그래,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다'(134쪽)라고 맺는다.


마르크스주의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한물간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공산주의권이 붕괴되었는데 무슨 마르크스주의?


하지만 굳이 주의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사회적 약자들을 생각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함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들은 사회의 기득권에 녹아들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망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잘못된 주의다. 이것은 단순화다. 이 단순화는 강자의 논리다. 생각을 하지 못하게, 질문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존 버거는 단순함과 단순화를 구분한다.


'단순함이란 필수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후자의 단순화란 권력 투쟁에서의 여러 책략 중 하나를 말한다. 단순화는 스스로의 이익만을 위한다.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은 어떤 사안을 단순화시킨다. 하지만 권력 없는 일반 사람들은 일어난 일을 단순함으로 받아들인다. 그 둘 사이에는 종종 깊은 심연이 가로 놓인다.'(140쪽)


간단하다. 더 생각하지 않게 한다. 생각함이란 곧 단순화에 반하는 일이 되니까.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는, 단순화와 꼬리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자들의 이익에만 봉사할 뿐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들의 권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단순화의 필요성 역시 커져 간다. 반면에 이런 맹목적인 권력 아래에서 고통받고 또 그 권력에 대항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익은 다양성과 차별성, 복합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지켜질 수 있다. 오늘은 물론 머나먼 미래를 위해서도 그렇다.'(149쪽)


그러니 마르크스주의자냐 아니냐라는 질문도 단순화한 질문이다. 그러나 존 버거는 이 질문에 단순함으로 대답한다. 자신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왜냐하면 그것이 '권력 아래에서 고통받고 또 그 권력에 대항해 투장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니까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논의가 잘 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에서도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교수가 없다(?김수행 교수가 정년 퇴직한 이후 정치경제학 전공자를 뽑지 않았나는 기사를 보았는데, 그동안 뽑아서 가르치고 있어서 이 문장이 취소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이보다 더 단순화해서 마르크스주의자는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는 빨갱이, 빨갱이면 종북좌파, 종북좌파면 이 나라에서 있어서는 안 될 존재.


이렇게 가고 있지 않나. 이념의 단순화, 사상의 단순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권력자들. 그러니 존 버거가 '모든 것을 소중히하라'고 했을 때 그는 우리에게 권력자들에 의해 가려진 진실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와 더불어 존 버거의 글에서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본다. 언어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그것 자체도 바로 단순화다. 단순함이 아니라.


'제발 끝났으면 싶은, 그 끝없이 반복되는 연설, 발표문, 언론 회견과 위협에서 쓰이는 용어들이란 민주주의, 정의, 인권, 테러리즘 등이다. 저들의 맥락에서 그 용어들은 그 말들이 한때 지시했던 뜻과는 완전히 반대의 뜻을 가리키고 있다.'(53쪽)


왜 이 말들이 반대로 쓰이고 있는지를 그 다음 단락에서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의사 결정을 위해 제시된 한 방편이다. (실행되는 일은 드물지만) 선거운동과는 별 연관성이 없다. 민주주의는 지배받는 사람과의 협의를 거친 후에 그 협의에 따라 정치적 결정이 내려짐을 약속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받는 사람들에게 쟁점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제공되어야 하고, 또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들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숙고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양자택일의 '자유'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여론조사 공표 행위나 사람들을 통계수치로 몰아가는 행위와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민주주의를 빙자한 사기 행위다.'(53쪽)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인권, 정의를 원한다. 또 그런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 누구도 자유, 민주, 인권, 정의가 박탈된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말이 왜곡된 사회에서는, 자신의 자유, 정의, 인권, 민주주의가 박탈되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을 존 버거는 '살(殺)윤리제'란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살충제가 아니라 살윤리제다.


'인간의 성품에는, 살충제 대신 윤리를 죽이고 역사와 정의에 대한 모든 개념을 죽이는 살윤리제(ethicides)가 조직적으로 살포되고 있다. 

  나눔과 물려줌과 위로, 애도와 희망, 이런 것들에 대한 인류의 기본적 요청으로부터 진화해 온 중요한 인간적 성품들이 특히 과녁이 되어 있다. 대중매체들로부터 이런 살윤리제가 밤낮없이 살포되고 있다.

  살윤리제는 조작자들이 원하는 것보다야 효과가 덜하고 또 그 파급 속도가 더딜지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공개토론의 장을, 그런 토론의 장에 의해 표현될 상상의 공간, 꼭 필요한 그 상상의 공간을, 땅 밑에 묻고 덮어 버리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94-95쪽)


이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관심을 지니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존 버거는 2000년대 초반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들을 우리가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없음을.


'모든 것을 소중히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낮은 곳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가려진 부분을 들출 수 있어야 하며, 감춰진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이 문장이 과거의 문장인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몇몇 나라들에만 해당하는 말인가? 독재국가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니다.


그래서 존 버거의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 시선, 귀 기울임, 행동하기. 어쩌면 지금 우리도 살윤리제의 살포를 온몸으로 맞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그런 살윤리제의 살포를 반대해야 한다. 막아야 한다. 이 점을 존 버거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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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질문들 - 마거릿 애트우드 선집 2004~2021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재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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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이야기][증언들]이 내게 애트우드란 소설가를 각인시켰다. 몇 편의 작품을 더 읽었고, [나는 왜 SF를 쓰는가]와 같은 에세이도 읽었다.


읽을 때마다 실망하지 않았다. [페넬로피아드]만 봐도 그렇다. 타고난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타고난 이야기꾼은 그냥 되는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이 책을 읽어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관심, 노력, 포기하지 않는 끈기 등등 작가에게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그 중에서 질문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다. 


질문은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만 보지 않고, 그 이면에 있는 무엇을 찾으려는 노력이다. 질문이 없는 삶은 수동적인 삶이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질문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전체주의 정권은 늘 질문을 막았다. 질문은 곧 자유와 연결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자유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 중 하나가 작가가 아닌가 한다.


이 책에서는 애트우드의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는데, 작가에 대한 글, 작품에 대한 글, 그리고 사회 문제에 관한 글, 자신의 글쓰기에 관한 글 등등.


어떤 글을 읽어도 좋지만, 이 책의 순서에 따라서, 시간 순서에 따라서 글들을 배치해 놓았기 때문에 순서대로 읽으면 더 좋을 거란 생각이 든다.


역사의 흐름을 되돌리려는 순간에 대한 애트우드의 분노, 그렇지만 그것들이 작품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글들.


글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도 자신의 신념을 보여주는 애트우드, 특히 레이철 카슨에 대한 글을 보라. 그 글을 통해서 레이철 카슨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남겨주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옹호, 이런 것들이 이 책에 너무도 잘 나와 있다.


분명하고 명쾌하게, 그러나 너무 단정적이지는 않게. 작가는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는 사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읽으면 사람들이 변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애트우드 역시 많은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고, 자신이 사는 세상이 좀더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희망을 품고 살아왔으며, 작품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애트우드가 어슐러 K 르 귄에 대해서 한 말을 고스란히 애트우드에게 돌려주고 싶다.


'다행히도 르 귄은 우리에게 다차원적 작품, 힘들여 얻은 지혜, 본질적 낙천주의를 남기고 갔다. 그녀의 분별 있고, 명석하고, 교묘하고, 서정적인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 요긴하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그리고 그녀에게 감사해야 한다.' (524쪽)


여전히 애트우드는 우리 곁에 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녀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질문들]


방대한 책이지만 읽기 시작하면 손을 떼기가 힘들다.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애트우드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또 애트우드 작품이 어떻게 창작되었는지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은 사회에 대해서 질문을 할 수 있다는 것. 


질문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좀더 깊이 있게 볼 수 있다는 것. 단지 서양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를 보는 눈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이 책이다.


우리 역시 질문을 해야 한다. 아직도 해야 할 질문, 찾아야 할 문제들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서 이 책은 다른 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수많은 책들과 연결시켜 주는 책. 좋은 책이란 바로 이런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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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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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연하다. 이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총 여섯 편 소설이 실려 있는데, 서술자로 남자가 셋, 여자가 셋이다. 균형을 이루고 있다. 


어느 성을 따르더라도 사랑을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 사랑이 이상하게 어긋나고 있다. 어긋남 속에서도 만남을 찾아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겠지만, 그런 사랑이 어디 쉬운가.


첫소설 '나릿빛 사진의 추억'에서 나오는 남자 서술자.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이 벌어진다. 그는 진실과 상관없이 진실을 만들어내야 한다. 즉,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진실이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사실을 진실로 만들어야만 하는 시대, 그런 시대에서 진실이 있냐 없냐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조차도 만들어내서 자기 만족을 삼으려는 모습.


어쩌면 사랑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면만 보는 그런 모습들. 그래서 사랑은 눈을 가린다고 했던가. 눈을 멀게 한 사랑이지만, 곧 눈을 뜬다. 그렇게 눈을 떴을 때, 어떤 사랑이 보이는가.


눈 멀었을 때 본 사랑이 보이는가? 아니다. 자신이 그동안 보아왔던, 느꼈던 사랑이 전혀 다른 사랑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점을 여자 서술자가 등장하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서 볼 수 있다. 남편의 죽음 이후, 자신이 생각했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음을(이상하게 김광석이 부른 노래 가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떠오르는데..) 알게 된다.


자신이 알고 있던 남편. 그들의 사랑. 그러나 그 사랑 밖에 또 다른 사랑이 있음을. 소설에서는 이런 모습을 전등사에 갔으나 전등사까지 가지 못했던 기억, 그러나 전등사에 갔던 날로 말하는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로 같은 사랑을 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사랑의 교집합은 있지만, 그것이 하나가 아니고, 서로 느끼는 교집합이 다를 수 있음을. 그럼에도 그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서술자의 모습을 통해서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경험하게 한다.


사랑이라는 착각 속에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어쩌면 맹목적인 사랑은 실질적인 죽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 '비소 여인'인데, 좀 섬뜩하다.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이 소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옭죄고 서로를 갉아먹는 모습으로 읽으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천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이 되는 비소처럼, 사랑 역시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깨달은 순간이 이미 너무 늦어버릴 수도 있고, 빠져나오기 힘들어지거나 빠져나오지 않으려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비소 여인'의 서술자가 남자라면 그래서 비소에 중독되듯이 자신이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면, 여자가 서술자인 '달은 스스로 빛나지 못한다'는 다른 생활을 경험하고 그 생활에 매력을 느끼지만, 안락한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즉, 이미 자신의 사랑이 끝났음을, 그런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모습을 드러내는 소설.


많은 사람들 삶이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속한 세계의 문제점을 알고는 있지만,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에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랑은 온전히 하나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 인물들은 사랑 속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다. 누군가는 떠나가거나 죽거나 죽이거나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랑임을, 우리의 사랑은 그런 변화, 갈등 속에 있음을 이 소설집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 제목이 된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끝부분에서 작가는, 바로 그런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이 아름답고 따스하고 투명한 어떤 것이라고는 이제 생각지 않을래. 피의 냄새와 잔혹함, 배신과 후회가 없다면 그건 사이보그의 사랑이 아닐까 싶어.' (136쪽)


이런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사랑이 아닐까. 이것들을 없애려고 하는 사랑이 과연 사랑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에서 남자 등장인물인 윤조를 보라. 이 인물은 희노애락이 없다. 무언가로 포장된 듯한, 그러면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그런 인물일 뿐이다. 과연 이런 인물과 살아가는 일이 사랑일까? 작가는 그런 의문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끝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구절. 


'나는 이제 빛나지 못할 것이며 저녁의 그림자처럼 사라질 거야,. 너와 나의 틈 사이, 거기 희미한 빛이 있었을 뿐.'(244쪽) 


우리 삶에서 사랑이 이렇게 그림자처럼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스스로 빛나지는 못할지라도 서로를 빛나게 비춰주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이 힘들지만, 바로 그런 사랑의 어려움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언급하지 않는 소설도 그렇다. 읽어보면 좋다.


잘 읽히는 소설이다. 그리고 울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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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2-10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척 좋아하는 소설집인데,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kinye91 2023-02-10 11:35   좋아요 0 | URL
많은 작품을 읽지는 않았지만 정미경 작가의 소설은 어떤 울림을 마음에 주네요. 다른 작품들도 읽어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