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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평점 :
일본 소설이다. 잔잔하다. 특별한 갈등도 없다. 그렇다고 사건이 없지는 않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치 물결의 흐름에서 겉으로는 잔잔해 보이지만, 속에서는 강한 물의 흐름이 있듯이, 이 소설 역시 그 잔잔함 속에서도 갈등이 있다. 다만 표면에 잘 드러나지 않을 뿐.
일본 사람들의 특징으로 드는 말 중에 겉으로는 잘 드러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들은 직선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남들이 알아차릴 수 있게만 말하고 행동한다고 한다. 지금은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대등하다고 여기는 상대에게는 이런 태도가 여전히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서에서도 마찬가지다. 감정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별로 없다. 말투로 눈짓으로, 행동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그것을 알아채는 쪽으로 서술이 된다.
건축을 주요 소재로 삼고 있으면서 이런 일본인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인물로 소설의 중심인물인 무라이 슌스케를 들고 있다.
건축가로서 명성을 얻은 그는 사무소를 차린다. 이 사무소에 직원을 뽑지 않다가 소설의 서술자가 직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여름, 별장으로 가서 국립현대도서관 설계 경합을 준비한다.
이 여름에 겪었던 일들이 소설의 중심이다. 그런데 사건의 갈등보다는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서술된다.
어떤 건축을 하려고 하는지, 건축은 사용자 중심이어야 한다는 무라이의 사상을 중심으로 국립현대도서관을 어떻게 설계하는지, 그리고 그동안 무라이가 설계하고 건축한 집들이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자연과 배치되는 건축이 아닌 자연 속에 녹아들어가는 건축, 그렇다고 자연의 일부가 아닌, 건축은 인위적인 결과물이니까, 인위적이되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하려고 한다.
또한 건축물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편리하게 쓸 수 있는 건축을 하려고 한다. 그래서 건축하는 사람은 반드시 요리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사무소 직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요리를 한다. 요리를 해야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을 이해하고, 그에 합당한 건축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위압적이지 않은, 그렇다고 너무 구태의연하지도 않은 그런 건축. 서술자는 여름 별장에서 그런 건축의 묘미에 푹 빠져들게 된다.
무라이 선생이 짚어주는 것들을 스케치하면서 느끼게 되는 건축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연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이 소설에 잘 표현되어 있다.
읽으면서 숲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고나 할까? 또 건축이 어떠해야 하는지도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고.
국립현대도서관 경합을 위한 설계를 할 때 소설 속에서 표현된 이용자들이 어떻게 느끼고 활용할지를 고민하면서 설계하는 장면을 보면서,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기적의 도서관'을 설계할 때도 이런 고민을 하면서 설계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정기용 건축가가 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점들을 이 소설을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고나 할까. 마음이 잔잔해지는 소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