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피투성이 연인
정미경 지음 / 민음사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처연하다. 이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가 없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을.


총 여섯 편 소설이 실려 있는데, 서술자로 남자가 셋, 여자가 셋이다. 균형을 이루고 있다. 


어느 성을 따르더라도 사랑을 주를 이루고 있지만, 그 사랑이 이상하게 어긋나고 있다. 어긋남 속에서도 만남을 찾아 함께 살아가는 것이 사랑이겠지만, 그런 사랑이 어디 쉬운가.


첫소설 '나릿빛 사진의 추억'에서 나오는 남자 서술자. 그러나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이 벌어진다. 그는 진실과 상관없이 진실을 만들어내야 한다. 즉,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진실이다.


자신들이 믿고 있는 사실을 진실로 만들어야만 하는 시대, 그런 시대에서 진실이 있냐 없냐는 중요하지 않다. 진실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조차도 만들어내서 자기 만족을 삼으려는 모습.


어쩌면 사랑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보고 싶은 면만 보는 그런 모습들. 그래서 사랑은 눈을 가린다고 했던가. 눈을 멀게 한 사랑이지만, 곧 눈을 뜬다. 그렇게 눈을 떴을 때, 어떤 사랑이 보이는가.


눈 멀었을 때 본 사랑이 보이는가? 아니다. 자신이 그동안 보아왔던, 느꼈던 사랑이 전혀 다른 사랑이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점을 여자 서술자가 등장하는 '나의 피투성이 연인'에서 볼 수 있다. 남편의 죽음 이후, 자신이 생각했던 사랑이 사랑이 아니었음을(이상하게 김광석이 부른 노래 가사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 떠오르는데..) 알게 된다.


자신이 알고 있던 남편. 그들의 사랑. 그러나 그 사랑 밖에 또 다른 사랑이 있음을. 소설에서는 이런 모습을 전등사에 갔으나 전등사까지 가지 못했던 기억, 그러나 전등사에 갔던 날로 말하는 장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서로 같은 사랑을 하지 못하지만, 그들이 느끼는 사랑의 교집합은 있지만, 그것이 하나가 아니고, 서로 느끼는 교집합이 다를 수 있음을. 그럼에도 그런 사랑을 포기하지 못하는 서술자의 모습을 통해서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경험하게 한다.


사랑이라는 착각 속에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어쩌면 맹목적인 사랑은 실질적인 죽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 '비소 여인'인데, 좀 섬뜩하다.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없겠지만, 이 소설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서로를 옭죄고 서로를 갉아먹는 모습으로 읽으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천천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독이 되는 비소처럼, 사랑 역시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깨달은 순간이 이미 너무 늦어버릴 수도 있고, 빠져나오기 힘들어지거나 빠져나오지 않으려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비소 여인'의 서술자가 남자라면 그래서 비소에 중독되듯이 자신이 생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면, 여자가 서술자인 '달은 스스로 빛나지 못한다'는 다른 생활을 경험하고 그 생활에 매력을 느끼지만, 안락한 생활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인다.


즉, 이미 자신의 사랑이 끝났음을, 그런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모습을 드러내는 소설.


많은 사람들 삶이 그렇지 않은가. 자신이 속한 세계의 문제점을 알고는 있지만,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사랑에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랑은 온전히 하나가 되는 일이 아니라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소설집에서 인물들은 사랑 속에서 하나가 되지 못한다. 누군가는 떠나가거나 죽거나 죽이거나 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사랑임을, 우리의 사랑은 그런 변화, 갈등 속에 있음을 이 소설집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집 제목이 된 '나의 피투성이 연인'의 끝부분에서 작가는, 바로 그런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사랑이 아름답고 따스하고 투명한 어떤 것이라고는 이제 생각지 않을래. 피의 냄새와 잔혹함, 배신과 후회가 없다면 그건 사이보그의 사랑이 아닐까 싶어.' (136쪽)


이런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사랑이 아닐까. 이것들을 없애려고 하는 사랑이 과연 사랑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달은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에서 남자 등장인물인 윤조를 보라. 이 인물은 희노애락이 없다. 무언가로 포장된 듯한, 그러면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그런 인물일 뿐이다. 과연 이런 인물과 살아가는 일이 사랑일까? 작가는 그런 의문을 제시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끝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그런 사랑은 사랑이 아님을 알게 해주는 구절. 


'나는 이제 빛나지 못할 것이며 저녁의 그림자처럼 사라질 거야,. 너와 나의 틈 사이, 거기 희미한 빛이 있었을 뿐.'(244쪽) 


우리 삶에서 사랑이 이렇게 그림자처럼 사라지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스스로 빛나지는 못할지라도 서로를 빛나게 비춰주는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이 힘들지만, 바로 그런 사랑의 어려움을 이 소설집은 보여주고 있다. 언급하지 않는 소설도 그렇다. 읽어보면 좋다.


잘 읽히는 소설이다. 그리고 울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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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2-10 1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무척 좋아하는 소설집인데,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kinye91 2023-02-10 11:35   좋아요 0 | URL
많은 작품을 읽지는 않았지만 정미경 작가의 소설은 어떤 울림을 마음에 주네요. 다른 작품들도 읽어야겠단 생각을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