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소중히 하라 - 생존과 저항에 관한 긴급 보고서
존 버거 지음, 김우룡 옮김 / 열화당 / 200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 표지에 있는 작은 제목을 그대로 따왔다. 이보다 더 이 책의 내용을 잘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 버거는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그 다양한 활동의 중심에는 늘 약자들에 대한 관심이 있다. 약자들과의 연대가 있다. 정의를 향한 그의 목소리. 존 버거의 어떤 책에서든 그것을 만날 수 있다. 이 책은 존 버거의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말한다. '장소에 관한 열 가지 보고서'(123-134쪽 )라는 글에서.


'누군가 내게 묻는다. 아직까지 마르크스주의자냐고.'(123쪽)로 시작해 '그래,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다'(134쪽)라고 맺는다.


마르크스주의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한물간 이론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공산주의권이 붕괴되었는데 무슨 마르크스주의?


하지만 굳이 주의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사회적 약자들을 생각하고, 그들과 연대하고 함께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있다. 그들은 사회의 기득권에 녹아들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망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잘못된 주의다. 이것은 단순화다. 이 단순화는 강자의 논리다. 생각을 하지 못하게, 질문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존 버거는 단순함과 단순화를 구분한다.


'단순함이란 필수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후자의 단순화란 권력 투쟁에서의 여러 책략 중 하나를 말한다. 단순화는 스스로의 이익만을 위한다.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은 어떤 사안을 단순화시킨다. 하지만 권력 없는 일반 사람들은 일어난 일을 단순함으로 받아들인다. 그 둘 사이에는 종종 깊은 심연이 가로 놓인다.'(140쪽)


간단하다. 더 생각하지 않게 한다. 생각함이란 곧 단순화에 반하는 일이 되니까. 계속해서 말한다.


'우리는, 단순화와 꼬리표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자들의 이익에만 봉사할 뿐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들의 권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단순화의 필요성 역시 커져 간다. 반면에 이런 맹목적인 권력 아래에서 고통받고 또 그 권력에 대항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이익은 다양성과 차별성, 복합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지켜질 수 있다. 오늘은 물론 머나먼 미래를 위해서도 그렇다.'(149쪽)


그러니 마르크스주의자냐 아니냐라는 질문도 단순화한 질문이다. 그러나 존 버거는 이 질문에 단순함으로 대답한다. 자신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왜냐하면 그것이 '권력 아래에서 고통받고 또 그 권력에 대항해 투장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니까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이제 논의가 잘 되지 않는다. 서울대학교에서도 정치경제학을 전공한 교수가 없다(?김수행 교수가 정년 퇴직한 이후 정치경제학 전공자를 뽑지 않았나는 기사를 보았는데, 그동안 뽑아서 가르치고 있어서 이 문장이 취소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었는데... 이보다 더 단순화해서 마르크스주의자는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는 빨갱이, 빨갱이면 종북좌파, 종북좌파면 이 나라에서 있어서는 안 될 존재.


이렇게 가고 있지 않나. 이념의 단순화, 사상의 단순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권력자들. 그러니 존 버거가 '모든 것을 소중히하라'고 했을 때 그는 우리에게 권력자들에 의해 가려진 진실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자세와 더불어 존 버거의 글에서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본다. 언어가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그것 자체도 바로 단순화다. 단순함이 아니라.


'제발 끝났으면 싶은, 그 끝없이 반복되는 연설, 발표문, 언론 회견과 위협에서 쓰이는 용어들이란 민주주의, 정의, 인권, 테러리즘 등이다. 저들의 맥락에서 그 용어들은 그 말들이 한때 지시했던 뜻과는 완전히 반대의 뜻을 가리키고 있다.'(53쪽)


왜 이 말들이 반대로 쓰이고 있는지를 그 다음 단락에서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의사 결정을 위해 제시된 한 방편이다. (실행되는 일은 드물지만) 선거운동과는 별 연관성이 없다. 민주주의는 지배받는 사람과의 협의를 거친 후에 그 협의에 따라 정치적 결정이 내려짐을 약속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배받는 사람들에게 쟁점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제공되어야 하고, 또 정책 결정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들은 것에 주의를 기울이고 숙고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민주주의는 양자택일의 '자유'와 혼동되어서는 안 되며, 여론조사 공표 행위나 사람들을 통계수치로 몰아가는 행위와 혼동되어서도 안 된다. 그것들은 민주주의를 빙자한 사기 행위다.'(53쪽)


우리는 자유, 민주주의, 인권, 정의를 원한다. 또 그런 세상에서 살기를 바란다. 누구도 자유, 민주, 인권, 정의가 박탈된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말이 왜곡된 사회에서는, 자신의 자유, 정의, 인권, 민주주의가 박탈되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게 된다. 


그것을 존 버거는 '살(殺)윤리제'란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 살충제가 아니라 살윤리제다.


'인간의 성품에는, 살충제 대신 윤리를 죽이고 역사와 정의에 대한 모든 개념을 죽이는 살윤리제(ethicides)가 조직적으로 살포되고 있다. 

  나눔과 물려줌과 위로, 애도와 희망, 이런 것들에 대한 인류의 기본적 요청으로부터 진화해 온 중요한 인간적 성품들이 특히 과녁이 되어 있다. 대중매체들로부터 이런 살윤리제가 밤낮없이 살포되고 있다.

  살윤리제는 조작자들이 원하는 것보다야 효과가 덜하고 또 그 파급 속도가 더딜지 모른다. 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공개토론의 장을, 그런 토론의 장에 의해 표현될 상상의 공간, 꼭 필요한 그 상상의 공간을, 땅 밑에 묻고 덮어 버리는 데는 성공하고 있다.'(94-95쪽)


이런 상황에서 생존을 위해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관심을 지니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한다. 존 버거는 2000년대 초반 그러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들을 우리가 없는 존재로 여길 수 없음을.


'모든 것을 소중히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낮은 곳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가려진 부분을 들출 수 있어야 하며, 감춰진 것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과연 이 문장이 과거의 문장인가? 우리와는 상관없는 몇몇 나라들에만 해당하는 말인가? 독재국가에서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아니다.


그래서 존 버거의 이 책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 시선, 귀 기울임, 행동하기. 어쩌면 지금 우리도 살윤리제의 살포를 온몸으로 맞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그런 살윤리제의 살포를 반대해야 한다. 막아야 한다. 이 점을 존 버거가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