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탈핵 - 대한민국 모든 시민들을 위한 탈핵 교과서, 2014 올해의 환경책 / 『한겨레』가 뽑은 '2013 올해의 책' / 『시사IN』선정 '2013 올해의 책'
김익중 지음 / 한티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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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반갑다. 이 책이 나온 것이. 탈핵에 관한 책이라면 일본 책이거나 서양 책이었는데... 우리나라도 원자력 발전소가 세계에서 많다면 많은 나라에 속하는데도 '탈핵'에 관한 대중적인 책이 나오지 않아 서운했었는데...

 

경주에 건설되고 있는 방사능폐기물처리장 반대 운동을 하다가 핵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후쿠시카 폭발사고로 인해서 탈핵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탈핵에 대해서 강연을 수없이 했던 저자가 강연 내용을 중심으로 책으로 엮어 출판을 했다.

 

우리는 원자력발전소라는 이름으로, 또 청정에너지라는 이름으로, 무엇보다도 안전하다는 선전으로 원자력에 대해서 알고 있고, 건설단가가 다른 에너지보다 싸다고 하여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이득이라는 광고 속에서 원자력에 대해 알고 있는데...

 

그런 원자력의 이면에 대해서, 아니 이면이 아니라 원자력의 진실에 대해서 쉽게 전달해 주고 있는 책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왜 우리는 탈핵을 해야만 하는가를 논리적으로 납득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의 현실을 중심으로 핵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으니, 내용이 추상적이지 않고, 또 의과대학의 교수에서 탈핵운동가로도 활동한 저자의 이력에서 알 수 있듯이 전문가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를 쓰고 있어서 원자력(핵)에 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원자력. 우선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 늘 정명(正名), 정명하는데, 사물이나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이름부터 부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출발점에서 시작할 수가 있다. 방향을 제대로 잡는다는 말이다.

 

원자력이라는 말이 어떤 긍정적인 이미지를 제공해주고 있기에, 우리나라에서는 기를 쓰고 원자력이라는 말을 쓰고 있지만, 정확한 개념은 '핵'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핵'이라는 개념이 우리가 말하는 원자력 발전의 진실에 더 다가간 개념이라고 하고.

 

하여 원자력 발전이라는 말대신, 핵발전이라는 말을 써야 하고, 원자력발전소가 아닌 핵발전소, 원자력폐기물이 아닌 핵폐기물이라는 말을 써야 한다. 이렇게 말을 바꾸어놓고 보면 우리의 시각이 어느 정도 교정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핵발전, 이것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도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지 않은가. 이 핵발전에서 나오는 전기를 대도시로 옮기기 위한 송전탑 문제.

 

밀양에서 평생을 살아온 노인들이, 사람들이 자신들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전력을 실어나르기 위한 송전탑 건설 문제로 삶터를 잃게 되어,  지금까지도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핵발전이 일으키는 문제 중의 하나다. 방사능이라는 것을 빼고도 핵발전은 우리 사회를 힘들게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세계를 놀라게 한 폭발사고는 세 건이라고 한다. 물론 자잘한(?) 폭발 사고는 있어왔지만, 전세계인의 경각심을 일으킨 사고는 세 건인데... 미국의 스리마일섬 폭발 사고, 소련의 체르노빌, 그리고 일본의 후쿠시마 폭발 사고. 

 

그런데... 이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폭발 사고가 일어난 나라의 공통점은? 없다. 그것이 정답이다. 그런데도 굳이 찾는다면, 아니 가장 개연성이 높은 공통점은 이 나라들이 핵발전소가 많다는 점이다.

 

핵발전소가 많기로 세계 5위 안에 드는 나라라는 점. 핵발전소가 많으면 많을수록 폭발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식 아니던가. 확률이 높아지니까...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역시 핵발전소의 숫자로 보면 세계 5위 안에 드는 나라 아닌가. 게다가 30년이 넘은 노후한 핵발전소가 있는 나라고...

 

한 번 폭발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것이 핵발전소 폭발 사고인데... 왜 우리는 확률을 낮추려는 운동을 하지 않고, 핵발전소를 더 많이 건설하려고 해서 확률을 높이는 것인지...

 

이건 그냥 위험하다는 정도에서 그쳐서는 안된다. 돌이킬 수 없는 피해, 일어나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그 대안은 '탈핵'이다. 즉, '탈핵'만이 살길이다.

 

이렇게 탈핵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당연하게도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지금처럼 전기를 물쓰듯이 쓰는 그런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전기를 덜 쓰는 방식으로 우리의 생활을 바꾼다면 전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핵발전소'를 건설해야 한다는 소위 말하는 '원자력 마피아'들의 주장을 일소할 수가 있다.

 

다음으로는 대체에너지, 즉 자연에너지를 개발하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자연에너지 사용율이 거의 세계 꼴찌라는데... 충분히 자연에너지를 쓸 수 있는 나라이니, 그 쪽으로 발전 방향을 돌려야 한다. 그러면 '탈핵'은 가능하다.

 

여기에 우리가 '탈핵'으로 가야 하는 이유 또 하나는 바로 '폐기물' 때문이다. 이 폐기물들은 그 자체로 방사능 덩어리라고 할 수 있는데, 넘쳐나는 폐기물을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별로 없다는데 문제가 있다.

 

지금 경주에 건설되고 있는 방사성물질폐기물처리장도 문제가 많다고 하는데... 암석은 너무도 약한 5등급이라고 하고, 그 주변에는 지하수가 흘러 지금도 물이 스며들고 있다고 하는데... 앞으로 핵발전소가 계속 가동이 되고, 증가가 된다면 이러한 폐기물처리장도 더 많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런 장소도 장소지만, 기술도 문제고, 또 장기간 유지해야 하는데, 비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고.

 

그러니 방법은 '탈핵'밖에 없다. 그것이 살길이다. 그런데, 왜 그 방법을 택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이익이 걸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이익? 그것 때문에 전국민의 삶이 위험에 처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후손들에게 위험을 안겨주어서는 안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우리가 '탈핵'으로 나아가야 할 이유이다.

 

'한국 탈핵'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핵에 대해서 관심을 지니고 행동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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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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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만이 책이 많이 번역되었는데... 이 책은 바우만의 책 중에서도 일찍 번역이 된 책이라 할 수 있다. 초판이 2009년에 나왔으니. 우리나라에는 2009년에 번역이 되어 나왔지만 이 책이 출간년도를 보면 1999년이니, 책이 서양에 소개된 지 10년만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셈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우리에게 왜 유용할까? 바로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사회학적 통찰력을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액체근대'라는 말, 영어로 liquid라고 하는데 어떤 이는 액체라고 번역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유동하는 이라고 번역을 하기도 한다. 어쨌든 이 말에는 움직이는, 고정되지 않은,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변화무쌍한, 정지되어 있지 않은 등등이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을 관통하는 기본 주제는 자유와 안전이라고 보면 된다. 인간은 자유를 추구하는 동물이지만, 그렇다고 무한대로 자신의 자유만을 추구할 수는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서로가 서로 자유만을 추구하다보면 자연스레 안전은 담보될 수가 없는데... 이 책이 "해방"으로 시작하는 이유가 바로 자유로부터 근대가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얽매여 있던 것으로부터 해방된다는 얘기는 자유를 획득한다는 얘기가 되니 그런 자유를 추구하는 근대에서는 "개인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개인성"의 강조는 "공동체"를 등한시 하는 경우로 나아갈 위험이 있는데, 이는 공동체의 책임을 외면하고 모든 것을 개인에게 책임지운다는 것이다.

 

이런 "개인성"의 극단화가 바로 소비사회로의 전이이고, 소비사회는 쇼핑으로 대표가 된다. 이런 쇼핑은 사람들을 철저하게 개인으로 만들게 되는데... 이런 개인성의 사회는 "시/공간"의 변화로 나타나게 된다.

 

함께 있어도 그들은 함께 있지 않은 상태가 되고, 이런 액체 근대에서는 공간은 사라지게 된다. 즉 시간만이 존재하게 되는데...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 근대 사회에서 지배적인 계급이 되게 된다고 그는 주장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를 보아도 공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함께 있어도 함께 있지 않은 그런 모습을 우리 사회도 보이고 있으니, 그가 1999년부터 우려했던 사회의 모습이 지금 극명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에는 사람의 생명을 유지해주는 "일"의 문제로 넘어간다. 사회학에서 "일"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는 없을테니...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액체 근대에서는 일이란 유동적인, 즉, 노동의 유연성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더욱 힘들게 한다고 한다.

 

하여 마지막에 "공동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람의 삶이 자유와 안전이 문제가 된다면, 결국 자유와 안전의 균형이 이루어지는 상태가 바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방부터 공동체까지 바우만은 사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근대, 우리는 이를 현대라고 할 수 있는데, 현대 사회의 문제를 자유와 안전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는 셈이다.

 

이 책의 보유에서 그는 '거리를 두고 시간을 내는 것-숙명과 타고난 처지를 구분하기 위해, 숙명을 타고난 처지로부터 해방하여 숙명이 자유롭게 우리의 타고난 처지와 대면하고 이에 도전할 자유를 주기 위하여-이야말로 사회학의 맡은 바 임무이다(336쪽)'라고 하고 있다.

 

그가 사회학을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사회학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사회학 책을 읽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고.

 

그는 또 말한다.

 

'사회학을 하고 사회학에 관한 글을 쓰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함께 살되, 덜 불행하게 혹은 전혀 불행하지 않게 살 가능성, 나날이 억제되고 간과되고 믿지 않게 된 이 가능성을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343-344쪽)'

 

갈수록 살기 힘들어진다고 한다. 액체라는 말을 우리말로 쉽게 옮기면 물이다. 물의 속성은 끊임없이 움직인다. 낮은 곳으로 흐른다. 그러나 고여 있으면 썩는다. 또 너무 많아지면 곁에 있는 존재들을 휩쓸어버린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 물이 어떤 상태로 흐르고 있는 것일까? 뭇생명들이 다들 만족하고 살 정도로 적당한 양으로 넓고 느리게 흐르고 있을까? 아니면 뭇생명들을 휩쓸어버릴 정도로 많은 양이 빠르고 높게 흐르고 있을까?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 사회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판단해야 한다.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학자의 임무이기도 하겠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임무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권투선수 얘기가 생각이 났다. 권투를 배울 때 눈 뜨고 맞는 법을 배운다고. 맞을 때 맞더라도 눈을 똑바로 뜨고 맞아야 한다고. 그래야 상대의 주먹이 어디에서 어떻게 날아오는지 알 수 있게 된다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맞는 것은 아프겠지만, 액체 근대 사회로 접어든 우리 사회를 똑바로 직시해야 한다. 그 앎 속에서 행동이 나와야 한다.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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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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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아닌가? 이 말은 텔레비전에서 심심치 않게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주로 일본인들이 망언을 했을 때 우리가 하는 말로.

 

그러나 이 말은 다른 민족을 향해서 하기보다는 자기 민족을 향해서 해야 한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그 민족의 행복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민족과 얽힌 문제라고 하더라도 역사를 기억하자는 말은 그 민족이 그 민족을 향해서 행해야만 한다.

 

우리의 예를 들어보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제점령했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일본 지배층이 인정을 안 한다. 이 때 우리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는 말로 경고를 한다. 그 경고는 유효하고 필요하다. 그렇다고 이렇게 경고만 해서 되는가? 안 된다. 이 경고를 우리에게도 향해야 한다.

 

우리는 식민지배를 당한 뼈아픈 경험을 안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식민지배를 당하게 되었는지 철저하게 공부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이유이다.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가해 민족에게 너희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잊지 말라고 해야만 하지만, 피해 민족도 그들이 겪었던 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들이 역사를 잊었을 때 그들은 또다시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홍구의"유신"을 읽으며 일본 지배층에게 하는 이 말을 바로 우리에게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한 해가 지났다. 한홍구가 온몸으로 유신에 대한 글을 쓴 지가. 그리고 역사는 반복(?)되었다. 이 책의 논리대로 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유신의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현 대통령에게 유신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유신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요구할 수 있고, 정확한 역사 인식 속에서 과거를 확실하게 청산하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요구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무엇하러 역사를 공부하겠는가?

 

하여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알리는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하고, 사람들이역사를 잊지 않고,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어 현재를 바르게 살아가도록 해야 한다.

 

오죽했으면 태사공 사마천이 자신의 역사서에 자객열전이라든지, 또는 간신들의 이야기까지 집어넣었겠는가. 타산지석이라고 역사에서는 배우지 못할 일이 없음을 이미 먼 옛날 역사가들이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지금 한국 현대사를 공부한 사람들, 또 지식인이라는 사람들, 그들은 과연 역사를 기억하고,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무슨 일을 했는가? 이 책은 그런 질문을 또 하게 만든다.

 

읽어가면서 너무도 가슴이 먹먹해져서, 더 읽고 싶지 않아지는 책이기도 했는데... 이미 한겨레 신문에 연재가 된 글이고, 가끔은 읽어본 글이기도 하지만, 책으로 묶여 나오고, 유신에 관한 역사를 이어서 주욱 읽으려니 마음이 너무도 무겁다.

 

이 책에 나오는 사건들만 살펴보자. 유신시대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는지.

 

국회의원의 일정비율을 대통령이 임명(소위 유정회), 김대중 납치사건.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 장준하 의문사. 동일방직 인분 사건. 반도상사 노동조합과 중앙정보부. 도시산업선교회. 자유언론실천선언.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 무등산 타잔. 베트남 파병. 기지촌. 통일벼. 원자력발전. 중학교 입시폐지와 고교평준화. YH사건. 남민전 사건. 김형욱 실종 사건. 부마항쟁 등등

 

이게 1972년부터 1979년에 일어난 우리 역사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이 책은 유신에 대해서, 유신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서, 그러나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또는 잘못 알고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현대사 전공자답게 구체적인 자료들을 동원해서 알려주고 있다.

 

여기에 글쓴이인 저자의 감정까지도 실려있어, 객관적인 역사 서술책이라고 하기보다는 동시대를 살았던 역사가가 자신이 체험했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서 온몸으로 쓴 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좋겠단 생각이 드는 책이다.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그것을 다른 민족에게만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하자고.. 정말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겨울공화국'이라고 불렸던 유신시대를 기억하고 있는가? 그 때 죽어간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똥물을 뒤집어쓴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는가? 파업을 했다는 이유로 온갖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 그들의 그 투쟁에 힘입어 민주노조가 건설되었음을 기억하고 있는가?

 

유신시대... 글쓴이는 이 유신을 쿠테타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두 번이나 쿠테타를 일으켰는데... 그 역사 사건을 단죄하지 못했기에 또 다른 쿠테타가 일어나(12.12사태)이 되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이런 역사를 통해서 배웠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우리가 먹고 사는 일에 침윤되어서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한다. 아마 글쓴이는 요즘 한국현대사 교과서 문제를 바라보면서 참담한 심경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현대사에서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유신시대에 대해서도 이렇게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는 둥의 판단유보 또는 그래도 그 시절이 있었기에 우리가 먹고 살 수 있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유신시대보다 조금 먼 일제시대에 대해서 온갖 왜곡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정말 우리는 역사를 기억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래서 글쓴이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이 책을 썼을 터인데... 이렇게 책을 쓴 이유는 우리가 역사를 잊어서는 안되기 때문일텐데...

 

우리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내일은 없다." 

 

우리 역사를 기억하자.

적어도 안 좋은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꼭 기억하자.

우리가 어떤 세상을 겪어왔는지...

그 때 우리는 어떤 꿈을 꾸었는지...

그 꿈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루려고 노력하고 있는지.

 

역사는 바로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가 나갈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가 바로 이것이라고 절규하고 있다. 이 절절한 외침... 듣자. 그리고 기억하자.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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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최소한의 정치 상식 - 국회 기자들이 들려주는 대한민국 국회 정치의 모든 것
양윤선.이소영 지음 / 시공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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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요즘은 이 말의 앞 뒤를 바꾸어서 '정치는 전쟁의 연속이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만큼 정치는 전쟁과 비슷한 면이 많다는 얘긴데, 일례로 전쟁과 마찬가지로 지도부가 있고, 또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때가 있으며, 상대방을 이겨야 하는 목표가 있다. 이것보다도 더 중요한 공통점은 자기들이 지켜야 할 대상이 있다는 점인데, 전쟁은 대체로 한 국가, 한 민족을, 정치는 자신들의 지지집단을 지켜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전쟁이든, 정치이든 자신들의 목적을 잃은 셈이 된다. 그래서 전략과 전술이 중요하고, 커다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작은 것을 양보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지켜야 할 집단을 잃는다면 그 다음에는 전쟁이든 정치든 할 수가 없게 된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전쟁이든 정치든 거기에 관계되는 당사자들은 일반 사람들이다. 국민이라고 해도 좋고 민족구성원이라고 해도 좋고, 민중이라도 해도 좋다. 사람들이 전쟁과 정치의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심하게는 자신의 목숨과 자신의 생활방식, 그리고 자신의 가치관까지 잃을 수도 있는 지경에 처하기도 한다.

 

이만큼 정치는 중요하다.

 

하지만 중요한 만큼 정치에 대해서 사람들이 전쟁만큼이나 관심을 가질까? 아니 정치의 영향력을 전쟁에 비유한다는 것 자체를 거부하지 않을까. 그렇게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토록 정치에 무관심한 것 아닐까.

 

아니면 정치에 관심을 가져봤자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어차피 변하지 않을 거고, 자신에게는 어떤 영향력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치를 책임지고 있는 국회에 대해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냉소적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 냉소적 시선만이 아니라 아예 자기들만의 리그라고 무관심하지 않은가. 선거 때만 반짝 국민을 위한다고 하지, 실상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집단이 국회의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럼에도 국회의원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우리의 일상생활에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무심하게 지내지 않았는가.

 

이 책은 이 점에서 참고할 사항이 많다. 국회에 대해서 우리는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만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고, 여기에 더한다고 해도 뉴스에서 보는 그런 비판을 받는 국회의 모습이 전부인 경우가 많다.

 

국민을 대변한다고 하는 국회가 국민에게서 멀어진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국회가 국민의 대의기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직접민주주의가 힘들다고 하는 이 때(꼭 그렇지도 않다고 오히려 지방자치를 확대해서 직접민주주의를 확대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명심하고) 국민을 대변한다는 국회는 현대 우리나라 정치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대통령이 실질적인 권한을 쥐고 막강한 권려을 휘두르는 대통령 중심제인 우리나라에서는 행정부를 견제하는 국회의 역할은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중요한 국회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알아야 우리가 무언가를 제대로 주장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여 이 책에서는 국회의 모든 것이 설명되어 있다. 그것도 국회방송의 기자들이 자신들이 가까이에서 지켜본 국회를 이야기해주고 있으므로,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어서 국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선거에서부터 지역구 관리, 출판기념회, 그리고 현충원 참배, 미용실, 식사하는 곳, 하다못해 '목욕당'이라는 모임까지... 또 국회에서 일하는 사무처 직원들이라든지, 국회의원 보좌관, 그리고 국회방호직원에, 통역사까지...국회에 관련된 직업에 관해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두 가지를 알게 되었는데... 하나는 국회방송이 있다는 것. 케이블 텔레비전을 설치하지 않은 나로서는 이런 방송이 있는 것조차도 몰랐는데... 국회방송의 시청률이 0.067%가량(이 책 288쪽)이라고 하니, 국민들 중에서 국회방송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도 태반일 것이고, 또 알더라도 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국회방송은 국회의 일상을, 국회의 모습을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공영방송으로 존재한다는 점,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의 신뢰를 얻기 시작하면 자연스레 국회방송의 시청률도 오르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신뢰하는 정치인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고, 그런 정치인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도 알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국회방송의 존재가 미미한 것은 어쩌면 국회의원들의 지금 모습이 국민들의 신뢰에서 좀 멀어져 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또 하나 알게 된 사실은 호칭 문제. 그렇게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하는 국회의원들이,이 책에도 나오지만 국회의원, 또는 정치인들의 패션부분에서 유시민 전 의원이 당선된 다음 처음 등원했을 때 다른 국회의원들의 반발로 선서를 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런 그들이 기자들에게 불리는 호칭이 '선배'라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고는 씁쓸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어떻게 한 나라의 입법기관에 종사하는 정치인이라고 하는 국회의원들이 언론에 종사하는, 그것도 자신들을 취재하는 기자들에게 '선배'라고 불릴 수 있는지... 선배란 호칭은 적어도 같은 직종에서 먼저 근무하거나 또는 가까운 사이에서나 불릴 수 있는 호칭이 아닌지.

 

의원님이라고 깎듯이 존칭을 쓰는 일도 좀 그렇지만, 기자들이 '선배'라고 부르는 호칭보다는 차라리 의원님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국민을 대변하는, 대표하는 의원이니 기자들도 의원님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지금도 기자들이 국회의원을 '선배'라고 부르나? 이 책이 2014년 판이니 아직도 그렇겠지.

 

이 책을 쓴 사람들은 국회방송 기자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그런 자부심이 그들 스스로 '의정전문기자'라고 하는데서 나타나는데... 이런 자부심이 계속 유지되고, 국회의 활동을 일반 국민들도 잘 알 수 있도록 이들이 계속 노력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국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겠지.

 

국회의원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국민의 생각을 대표해서 행동하는 사람이니까.

 

덧글

 

읽으면서 나랑 생각이 다른 부분이 조금 있었는데.. 이걸 생각 차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사실관계의 문제라고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79쪽. '이명박 정부 초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내걸고 당시 야당인 통합민주당이 주도한 촛불집회는 유모차, 넥타이 부대까지~'라고 되어 있는데... 나는 이 때 촛불집회는 시민들이 주도했고, 민주당 등 정치인들은 나중에 합류했다고 기억하는데... 분명 통합민주당이 촛불집회를 주도하지 않았는데.. 그들은 그냥 합류했을 뿐인데...

 

126쪽. 단일화에 대해 설명하면서 단일화의 위력에 대한 징크스에서... '가깝게는 2002년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라고 했는데... 이들이 단일화에 합의한 것은 맞다. 그러나 투표일 직전 정몽준이 단일화 합의를 파기하는 선언을 했다. 결과가 이렇게 되었는데... 이것을 단일화라고 해야 하나? 단일화의 위력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287쪽. '결국 민주당은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후광을 노리고 문재인 의원을 후보로 밀었다' 민주당 경선을 통하여 문재인 의원이 후보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후광을 노리고'란 표현은 글쓴이의 주관적인 판단이다. 즉 이 문장에는 사실과 주관이 섞여 있다. 이런 표현은 하지 않는 게 더 좋지 않을까?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을 리포터(사실을 취재만 하는)이지 저널리스트(분석 평가까지 하는)가 아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은 다음에 292쪽 '기자의 또 다른 이름은 '역사가'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역사가'는 단순히 사실만을 나열할 수가 없다. 역사가는 자신의 관점에서 과거의 사건들을 재구성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기자의 또 다른 이름이 역사가란 말은 기자는 어떤 사건을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해서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지닌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이 되는 말이다.

 

앞과 뒤가 좀... 차라리 '역사가'라고 하지 말고 조선시대의 '사관'처럼 사실을 기록하여 남기는 사람이라고 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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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퀴드 러브 - 사랑하지 않을 권리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권태우 &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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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그림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같은 사람의 사진을 모아 커다란 하나의 사람을 만드는 사진.

작은 사진 하나하나는 동일한 인물인데, 이렇게 각자 다른 인물들이 여럿이 모여 동일한 하나의 인물을 만든다.

 

과학을 잘 모르지만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는 이론을 아마 이런 데 적용하지 않았나 싶다.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아마도 유동하는 사랑 정도로 해석이 될 이 책은 이렇게 이런 그림 사진과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책에 속한 글들은 모두 하나하나의 독립된 글이다. 그냥 단편적인 글이다. 그러나

<사진출처 :http://news.naver.com/main/imagemontage/index.nhn?gid=966192#967384>

 

읽어보면 전체 글과 하나가 된다. 즉 부분들과 전체가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엄밀히 말해서 사회학 이론서라고 하기도 그렇고, 철학책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수필집이라고 하기도 그렇다. 형식을 파괴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한 책이다.

 

하지만 전해주는 말은 분명하다. 어느 한 부분을 읽어도 전체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고 똑같은 내용이 아니다. 다 다른 내용이다. 이런 내용들이 모여 하나의 글을 이루고 바우만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하나다. 지금 사회는 일회성이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이는 소비자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 담을 쌓고 있으며, 이 담으로 인해 너와 나를 구분하고, 공동체는 파괴되었으며, 일명 쓰레기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다.

 

지금이 그런 사회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 바우만의 저서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이야기다.

 

만남이 얼마나 일회서인가는 성적인 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지속적인,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라는 말은 우스워지는 시대가 되었고, 사랑도 인스턴트 사랑, 언제든지 만나고,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 문화를 우리가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 만남. 또는 연애를 쇼핑처럼 하는 시대.

 

인터넷이 이렇게 우리 사회를 변화시켰다면 휴대폰은 가족간의 모습도 변화시켰다. 하여 우리는 함께 살면서도 함께 살지 않는다. 또한 늘 만나면서도 늘 만나지 않는다. 접속이 가능한 만큼 접속을 끊는 것도 늘 가능한 사회.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가 되었다.

 

이것은 정착할 수 없는 유동적인 근대의 모습이고, 지속성이라는 것은 과거에만 속하는 일이 되었다.

 

우리의 사랑조차도 그러하니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래도 우리는 우리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 칸트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지구는 둥글다. 우리는 이 둥근 지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둥근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얘기는 누구에게서 멀어진다는 얘기는 곧 누구에게 가까워진다는 얘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차피 이 지구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을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인간은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 우리가 쓰레기를 양산할수록, 그 쓰레기로 인해 우리의 삶이 더욱 힘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 쓰레기란 결국 우리 자신의 다른 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식하는 순간.

 

우리가 우리에게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한 윤리가 된다. 윤리를 넘어 이제는 우리의 생존이 된다.

 

그리고 지금 시대는 우리의 생존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때이다. 이 점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라도 소통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언제라도 소통을 멈출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그것을 인식하고...

 

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 그것을 고민해야 한다고 한다. 그것을 유동하는 사랑이 아니라, 이제는 함께 할 수 있는 사랑을 찾아야 하는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그는 이 책의 한 부분에서 자신이 원하는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그럿을 코뮤니타스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아마도 공동체 정도로 해석이 되지 않을까 한다. 우리 역시 이러한 공동체를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코뮤니타스(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소시에타스도 마찬가지지만)의 생존과 번영은 인간의 상상력과 발명심 그리고 상투적인 일상성을 깨부수고 시도되지 않은 방법들을 시도해보려는 용기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리스크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떠안을 수있는 인간의 능력에 의존한다. 바로 그러한 능력들이 '도덕 경제', 즉 서로 돕고 보살피며, 타자를 위해 살고, 상호 헌신의 조직을 짜내며, 인간들 간의 유대를 단단히 하고 수리하며, 권리를 의무로 해석하고 모두의 운명과 행복에 대한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즉 뚫린 구멍을 막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구조화 작업이 방출한 홍수를 막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이런 것들을 지탱해준다. (178쪽)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경제의 모습이고, 공동체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지 이 글에 비추어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기존에 읽은 바우만의 책과 겹치는 내용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 겹침은 앞에서 본 사진처럼 각자 다른 것이 모여 또 하나의 같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부분이 모여 전체가 되는데.. 부분 역시 부분으로써 제 역할을 다한다.

 

이것은 우리네 인간들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지만, 이 사람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다른 사람들이 사회를 만들어낸다.

 

이 책은 바로 앞의 그림과 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삶도. 그러니 남의 삶을 우리와 똑같이 만들려는 자세를 지녀서는 안된다. 다름이 바로 사회를 이루는 기본요소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이 책이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앞의 그림 파일과 같은 것들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사회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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