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없는 노동 - 플랫폼 자본주의의 민낯과 미세노동의 탄생
필 존스 지음, 김고명 옮김 / 롤러코스터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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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노동(microwork)'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이크로(micro)를 작다는 뜻의 미세라는 말로 번역을 했는데, 주를 보면 이 용어에 대한 통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microwork는 아직 우리 사회에 합의된 용어가 마련되지 않았다. 이 책에서는 '미세노동'이라고 번역한다-옮긴이. 12쪽)


그런데 미세노동이라고 번역을 해서인지 이 의미가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주 작은 또는 세세한, 아니면 사소한 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은 아주 작은 단위로 잘라서 전체를 볼 수 없게 만든 노동이라고 해야 한다. 


즉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 일을 왜 하는지, 그 일이 누구에게 어떻게 필요한지, 쓰임새는 어떠한지를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동이라는 말이다. 그냥 주어진 대로 아주 간단한 일을 짧은 시간에 해내야만 하는 노동. 그것도 적절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아주 적은 액수의 보수만을 받을 뿐이다.


왜 이런 노동이 만연하게 되었는지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선 플랫폼 자본주의다.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운영하는 플랫폼 기업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들은 수많은 정보를 얻어야 한다. 그런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사업을 운영한다.


다만 정보를 얻은 다음 그 정보들을 분류해야 한다. 이 분류된 정보들을 바탕으로 자동화, 또는 인공지능, 로봇들을 활용할 수가 있다. 자동화된 기계들이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이런 정보를 분류하고, 라벨링하는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확보할까? 두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로 잉여 인력의 양성이다. 자동화로 실직한 수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로 전락시킬 작업을 한다. 실직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에서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적은 보수에도 일을 할 수밖에 없다.


플랫폼 노동은 이렇게 잉여 인력을 기반으로 운영이 된다. 미세노동 역시 잉여 인력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화, 기계화로 인해 실직한 사람들이 다시 그런 자동화, 기계화를 강화하는 일에 투입이 되는 것이다.


자신들의 처지를 더욱 열악한 환경으로 몰아가는 일을 자신들이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 책에서는 잘 지적하고 있다.


'지금 가난한 피박탈자들은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들의 공동체를 겁박하기 위해, 혹은 노동 과정에서 그들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계들을 부지불식간에 훈련시키고 있다. 이른바 마르크스의 생생한 악몽보다도 더 악몽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 기계학습 시스템에 원료를 공급하는 것이 노동의 일차적 혹은 이차적 목적이 되는 세상이다. 따라서 미세노동은 매우 심각한 노동의 위기를 불러일으킨다고 볼 수 있다.' (128쪽)


이런 악순환을 어떻게 끊어야 할까? 당연히 노동자들의 단결이 필요하다. 단결을 통한 집단 행동이 필요한데, 미세노동은 노동자들이 모일 공간과 시간을 제약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상황이 더욱 안 좋아지면 이들은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들과 더불어 이런 자동화-기계화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이것을 사람들의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쪽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서 미세노동은 인류의 생존에 필요한 일들을 최소한의 노동력을 투입하는 쪽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한다.


이렇게 하면 노동을 적게 하면서 삶의 다양한 면들을 추구하는 생활이 가능해질 수 있다고 한다. 어쩌면 생산성이 발달해서 사람들의 생활이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미세노동'이란 말은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바로 임금노동에서 벗어났을 때나 가능하다.


이는 사회가 임금 사회가 아닌 무임금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이것이 가능할까? 저자는 희망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지만, 무임금 사회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기본소득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최소한의 생활을 기본소득이 책임져준다면 그때는 임금노동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임금노동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는 사회에 꼭 필요한 노동을 미세노동으로 만들어 한 사람이 4시간 할 일을 4사람이 한 시간씩 또는 40 명이 6분씩 할 수 있도록 하면 되지 않을까? 저자 역시 이런 노동방식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저자는 지금 플랫폼 자본주의에서 보이지 않는 미세노동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들이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쪽이 아니라 더욱 나빠지는 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근거를 들어서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을 토대로 저자는 미세노동이 반대로 사람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쪽으로 작동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게 되기 위한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겠지만, 이런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미세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단결이, 그들의 행동이 필요함도 간과하지 않는다. 이 책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우리의 편리 속에 다른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노동이 (혹은 노동력 착취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회적 전환이 필요한 때임을 주장하고 있는데... 우선은 보이지 않는 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갖춰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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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2024년 봄호 - 통권 185호
녹색평론 편집부 지음 / 녹색평론사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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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를 읽으면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강원도 양양에 있는 해변에 건물들이 들어선다는 것. 아니, 이미 들어섰다는 것.


해변이라고 해서 모래사장으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바로 모래사장 위에 건물을 짓고, 다른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파라솔이나 다른 것들을 설치할 수 없다고 한다. 게다가 그 건물을 이용하지 않고는 (주로 음식점이나 카페인데) 모래사장을 거닐 수도 없다고 한다.


바닷가에 있는 모래사장이 개인 소유가 아닌데, 마치 개인 소유처럼 이용하는 것. 그렇다고 소송을 걸어도 이길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하니, 이는 소송의 대상자가 명확하지 않고, 소송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은 특정하기 힘든데, 소송에 진 쪽은 피해가 명확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누구나 갈 수 있고 쓸 수 있는 모래사장을 이익을 위해서 독점하고 있는 현실. 녹색평론이 아니었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지나갔으리라.


그냥 누가 이렇게 백사장에 건물을 지었지? 이것이 어떻게 허가가 났지? 하면서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일.


가건물만 지을 수 있다고 하는데, 콘크리트로 전기시절이나 조리시절까지 다 갖춘 건물이 들어서니, 이젠 철거하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공유지의 비극도 아니고, 공유지를 사유지처럼 활용하는 자본의 논리가 무섭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 이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녹색평론 이번 호에서 다룬 지방자치(지역자치)다.


우리는 지방자치를 한다고 하지만 큰 단위의 지방자치기 때문에 실질적인 지역주민들의 자치는 이루어지기 힘들다는 사실. 그래서 지방자치라고 하지만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모래사장에 건물을 짓는 일도 그렇다. 지역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었다면 그런 건물이 들어설 수 있었을까?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지역자치를 살릴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녹색평론에 실린 글에 동의하는데, 이제 곧 선거가 다가온다. 지역구가 있지만, 국회의원의 지역구는 지방자치, 주민의 참여와는 관계가 없다.


많은 국회의원들이 당선 가능성을 쫓아 지역구를 옮기는 모습을 보라. 그들은 지역과 연계된 정치를 한다고 하지만, 지역구민들의 의사를 대변한다고 하지만, 지역에 머무는 기간이 얼마인지 살펴보면 공염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역을 대변한다고 지역구 국회의원을 늘리고 비례대표를 한 석 줄였는데, 지역구에 출마한 사람들을 보면 전국구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 지역 정치가 살 수 있는 길이 별로 없단 생각이 든다.


국회의원들이야 나라 전체를 본다고 쳐도, 그렇다면 지역구를 줄이고 비례대표를 늘려야 하지 않나? 지역구 의원과 비례대표 의원의 수가 반대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 그리고 지역을 살리는 일은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실질적인 지방자치로 바뀌어야 하지 않나?


그래야 각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난개발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들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주어야만 민주주의가 실현된다고 할 수 있다.


지역에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순간의 이익을 위해서 미래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역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공생하는 삶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번 호 양양 해변에 들어서고 있다는 건물들에 대한 글을 보면서 이것이 지방자치(또는 지역정치)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벌어지는 부작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점에서라도 녹색평론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하고, 그렇다면 자신들의 삶을 몇 년에 한번 돌아오는 선거로 결정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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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고도 달콤한 성차별
다시 로크먼 지음, 정지호 옮김 / 푸른숲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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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서의 성차별을 다루지 않는다. 가장 친밀한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부부 사이에서 벌어지는 성차별을 이야기한다. 


사회에서의 성차별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표시도 잘 난다. 따라서 대응하기가 쉽다. 하지만 가정에서 부부간에 일어나는 성차별은 쉽게 구분하기도 힘들고, 표시도 잘 안 난다. 대응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부부 간에 일어나기 때문에 사회가 개입하기도 그렇다.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되기 쉽지만, 그렇지가 않다. 가정에서의 성차별이 결국은 사회의 성차별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정에서의 성차별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책에는 다양한 가정에서의 성차별, 특히 가정에서 얼마나 일을 많이 하게 되는지, 또 양육에 관해서 누가 더 책임을 지는지를 보여주면서, 은밀하게 벌어지는 성차별을 이야기한다.


부부가 둘만 살 때와 아이가 태어났을 때, 누구의 일이 늘어나는가? 이런 질문을 하면 된다. 당연히(이 당연이라는 말이 당연하지 않아야 하는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연히라는 말을 쓴다) 여자의 일이 늘어난다.


아이에게 쏟는 관심과 아이를 챙기는 일을 여자들이 더 많이 한다. 그렇다면 직장일이 주는가? 아니다. 직장일은 줄지 않는다. 남자들은? 여전하다. 물론 함께 양육에 참여하는 남자들도 많다. 


가정에서의 일을 공평하게 나누려고 노력하는 남자들도 많다. 그럼에도 성차별이 일어난다고 보는 이유는, 사회 전반적으로 육아에 대한 책임을 남자보다는 여자들에게 더 묻는 관행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도와준다는 말을 쉽게 하는 반면에, 그래서 남편들이 집안일을 하면 아내들은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여자들은 집안일을 하면서 도와준다는 소리를 전혀 하지 않으며, 여자들이 육아에 힘쓴다고 해서 남편들이 고맙다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물론 남편들도 아내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면 이 고맙다는 말은 '온화한 성차별'이라고 할 수 있단다. 이런 말을 통해서 아내들이 집안일을 더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기게 한다는 것이고, 성차별을 내면화한다고 한다.


눈에 보이는 차별은 대응하기가 쉽다. 저항도 쉽게 일어난다. 그러나 은밀하게 일어나는 차별은 대응하기가 힘들다. 가정에서 남편들이 집안일을 돕는다고 나서면서, 아내들이 더 많은 일을 하는 현실이 고착될 때 성차별은 공고화된다. 


이 책에 많은 사례들이 나와 있는데, 직장에서 성공한 여성이 가정에서도 평등하게 살지는 않는다는, 더욱 충격적인 사례는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들의 이혼율이 높다는 사실, 이는 아직도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편견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남성보다 돈을 많이 벌어오는 여성이 집안일을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도 이러한 편견을 더욱 부추기고 있는데, 이는 직장일로 인해서 가정에 충실하지 않다는 말을 듣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노력이 나타는 결과라 할 수 있다.


즉, 여성들은 직장에서 아무리 일을 잘해도 가정에서 맡은 일을 해내야 한다는 관념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 통념도 그런 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집안일이 과연 여성만의 일인가? 산술적으로 똑같이 집안일을 나눌 수는 없지만, 서로 의논해서 적절한 일의 분배는 가능하지 않을까?


아이들을 돌보는 일도 그렇다. 아이 돌보는 일에 본성은 없다고 이 책은 주장하고 있으며, 지금 이 시대에 아이 돌보기는 여성의 일이라고 대놓고 주장하는 사람은 드물 텐데도, 여전히 육아의 부담은 여성이 더 많이 지고 있으니, 그 점을 개선하려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이 책의 끝부분에 나와 있는 말,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어떤 형태의 가정이든 이처럼 한다면 (성)차별은 사라지지 않을까 한다.


'양육이 의식적인 협동 작업일 때 남자는 여자와 똑같이 자기의 책임을 점검하고 아이들이 무엇이 필요한지 미리 챙긴다. 아내가 명령이나 지시를 내려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견실한 성 평등주의란 아빠나 엄마에게 더 적합한 활동이 무엇인지, 누가 그 활동을 해야 하는지 미리 정해주지 않는 가정생활을 의미한다.' (368-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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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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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많은 사람들이 시청했던 드라마에서 남자 인물이 여자 인물에게 한 말이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라는 대사.


사랑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소설[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돈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나. 떠난 사랑을 돈으로 잡을 수 있을까?


돈으로 환산한다면 얼마면 될까? 그렇다면 비싼 가격을 부르는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세상이 과연 행복한 세상일까?


아닐테다. [위대한 개츠비] 역시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한다. 왜냐하면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한때 사랑을, 아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지위를 얻을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


예전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 흔히 다루어지던 사법고시에 붙은 가난한 사람 이야기.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소위 마담뚜들이 달라붙는다고 했다. 돈은 있으나 사회적 지위가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겼던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사법고시에 합격한 가난한 사람에게 재산을 미끼로 결혼을 하자고 한다.


(농담 식으로 판-검사, 의사와 같은 '사'자들과 결혼을 하려면 열쇠가 세 개는 필요하다는 -집, 사무실, 차- 말들이 있었으니, 이런 사고방식이야말로 돈이면 다 된다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을 돈으로 산다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사랑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방법이 많이 있었다고 해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돈이 우리 삶에 너무도 깊숙이 들어왔다. 대부분이 금전으로 환산이 된다. 돈이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이러한 편리를 돈으로 사는 세상, '얼마면 돼?'라는 질문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래 얼마만 줘'가 되는 세상이다.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미국 사회를 뒤쫓아가는 경우가 많은데, 돈이 사회를 잠식하는 모습도 미국을 따라간다고 볼 수 있다. 아주 씁쓸한 현실이지만.


샌델은 이 책에서 돈이 얼마나 많은 분야를 잠식해 들어왔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결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우선 '새치기'라는 제목으로 1장을 시작한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움직일 것 같지만, 아니다. 새치기라는 말에는 도덕적인 비난이 들어 있지만, 우대권이라는 말에는 그런 비난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우대권. 무엇으로 우대를 받는가? 돈이다. 이것이 보통은 새치기인데, 이들은 표나지 않게 움직인다. 이미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가를 지불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비행기 탑승을 생각해 보라. 이제는 대부분의 항공사에서 실시하고 있는데, 돈을 더 많이 지불하면 대기하는 시간이 줄어든다. 아예 없어지기도 한다. 남들이 서는 줄에 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비행기 탑승만 이러면 문제가 안 되는데... 의료 문제로 가면 심각해진다. 누구가 평등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비대면진료가 활성화되면, 또 의료민영화가 이루어지면 돈에 따라 진료의 차별이 발생한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한 사람이 빠르게, 편리하게 진료를 받게 된다. 이를 샌델은 새치기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인센티브'라는 장에서는 이 인센티브가 결국 돈으로 사회를 왜곡하는 현상일 뿐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인센티브는 잘못에 대한 벌금을 지불하고 책임져야 한다는 개념을 돈으로 그것을 덮을 수 있는 요금이라는 생각으로 이끈다고 한다.


지각자에게 벌금을 부과하면 지각이 줄까? 아니라고 한다. 오히려 돈으로 지각을 대체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조차도 없어진다고 한다.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 인센티브를 돈으로 지급하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이렇게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문제에서 시작해서 우리들 삶 곳곳에 침투하고 있는 돈으로 바뀌는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선물을 주는 문제... 선물을 현금으로 주면 쉽게 해결될 듯한데, 왜 사람들은 굳이 선물을 주려고 할까? 이것은 바로 돈으로만 환산되지 않는 '선물의 경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함께 사는 사회에서는 돈으로만 계량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이 점을 깨닫지 않으면 사람과 사람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과학문명의 발달로 사람과 사람이 접촉하는 시간과 빈도가 점점 줄고 있는데, 기껏 만나더라도 돈이 개입을 한다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는 벽이 존재하게 된다.


심하게는 죽음(보험)까지도 돈으로 생각하는 사업이 생겨났다고 하니, 이거야 원, 마지막 장에 '명명권'이라는 이름으로 광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광고야말로 돈으로 모든 것을 환산하는 (공익광고는 예외다)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아주 많은 사례들을 들어 돈으로 환산되는 사회가 왜 위험한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경제학으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는 샌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샌델은 경제학이야말로 도덕, 철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고, 돈으로 환산되는 눈에 보이는 수치화된 이익만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많은 요소들이 오히려 사람들의 삶에 더 필요함을 이 책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자. 내 삶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는가? 나는 그런 것들을 얼마큼 지니고 있는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많이 지니고 있으면 있을수록 내 삶이 더 행복한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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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1-29 0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중학생, 초등학생 아이들하고 토론했어요.^^

kinye91 2024-01-29 11:35   좋아요 1 | URL
토론이 아이들에게 좋은 경험이었을 것 같아요. 그런 토론하는 기회가 많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요.
 
4·3이 나에게 건넨 말
한상희 지음 / 다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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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에 대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말하는 세상이 되었다. 적어도 4.3에 대해 말한다고 끌려가 고문을 받지는 않으니까.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4.3에 관한 소설을 썼다고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았던 현기영 작가도 있으니,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세상이라고 해도 좋겠다.


하지만 과연 4.3이 완전히 우리들 마음에 자리잡았는가? 4.3은 4.19를, 5.18을, 6.10을 이끌어내지 않았던가.


한때의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이루는 토대로 늘 작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만 과연 완성되었는가? 아니다. 그래서 4.3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4.3을 통해 인류의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추구할 수 있어야 하고, 4.3을 통해 회복적 정의를 구현해야 하는데, 자꾸만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4.3을 통해서 또는 다른 수많은 민주화투쟁을 비롯한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과 함께 공존하는 방법을 배워왔다고 생각했는데, 다르다는 이유로 아예 배척해 버려야 한다는 생각, 또는 그러한 행동들이 여전히 나오고 있으니... 4.3으로 인해 확립해야 할 회복적 정의는 아직도 우리에게 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가족들이 4.3을 겪은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가 왜 4.3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관심을 지니게 된 고1 때부터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리고 4.3의 역사적 사실과 예술(영화 '지슬', 소설 '순이 삼촌, 돌담에 속삭이는')을 통해서 4.3을 좀더 구체적으로 보여주며, 그런 학살의 과정에서도 용기를 발휘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지옥 속에서도 천국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그런 사람들이 모여 '선의 시민성'을 발휘한다면 '악의 평범성'이 자리잡지 못하게 됨을 이야기해준다.


그렇다. 4.3은 단지 과거의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4.3은 우리의 현재이고 미래여야 한다. 4.3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특히 청소년들이 읽기 쉽게 쓴 책이니, 교과서 밖에서 이렇게 4.3을 만나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렇게 책을 읽으면 제주도에 갔을 때 눈에 보이는 풍광과 더불어 그동안 관심을 두지 않고 지나쳤던 다른 것들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풍광 속에 가려져 있던 제주도의 역사까지... 그 역사를 통해 민주주의의 미래로 나아가야 함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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