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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리앗 삼성재벌에 맞선 다윗의 투쟁
김성환 엮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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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가슴이 먹먹하다.

 

21세기에 제대로 된 노조를 만들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하긴 X파일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인 노회찬이 의원직을 상실하기도 했으니...그 전에 국회의원도 아닌 일반 노동자가 겪을 일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는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아직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노조는 절대로 안된다' 이런 말이 통용이 되다니..

 

자신의 눈만이 아니라, 자식들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무노조 신화라고 하는데, 신화는 전근대적인,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미신에 의존하는 그러한 상태에서 나온 인간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그런 장치이지 않았던가.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업. 우리나라를 실질적으로 먹여 살린다는 기업, 대부분의 국민이 들어가고 싶은 기업. 삼성.

 

그런 삼성에서 겪은 일들을 모아놓았다.

 

그 겪은 일들이 예전에 전태일이 겪었던 일들과 어쩜 이리도 흡사한지. 이 책을 엮는 김성환 씨가 꼭 전태일 같다. 그만큼 그가 하는 일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그는 전태일이 겪었던 일보다도 더 심한 일을 겪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때는 그래도 재벌의 힘이 그렇게 세지 않았는데, 고 노무현 대통령이 말했듯이 이미 시장으로 권력이 넘어갔다는 2000년대는 정말로 노동자들이 대기업에 맞서기는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도 되지 않을 터이다.

 

정경유착을 넘어 법경유착이라는 말까지 이 책에 나오는데... 어떤 형태로든 노조를 만들려고 했던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일들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던 전태일의 외침이 떠오르게 한다.

 

전태일, 그가 만약 지금 살았더라면 그는 이 책을 엮은 김성환과 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까.

 

그와 같은 전태일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암울하게 한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전태일이 아직도 많이 있다는 사실이 희망을 발견하게 한다.

 

어떻게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를 할 수 있을까, 이러고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이 이후 쌍용차 노동자들이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면 삼성 노동자든, 쌍용노동자든, 떠 어디 노동자든, 이들은 아직도 전태일이 외쳤던 것들에서 많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기록으로서 가치가 있다. 이 책이 과거의 일로 그 땐 그랬었나, 그런 시절도 있었나 하는 이야깃거리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환상을 품어본다.

 

마음이 읽는 내내 편치 않았지만, 우린 알아야 한다. 적어도 현실에 대해서는. 이런 기록들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굳이 공자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하면 자신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난다는 사실을.

 

그리고 노동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노동자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자본가와 노동자는 처지가 다르다는 사실을. 노동자가 노동자를 배신해서 잘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이책에 나오는 정말 노동자 같지 않은 사람들. 사람같지 않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되지 않기 위해서도 이 책은 필요하다.

 

그것이 어떤 모습인지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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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봄 핵없는 세상을 위한 탈핵 만화
엠마뉘엘 르파주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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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체르노빌.

 

핵폭발의 대명사다. 이제는 후쿠시마라는 하나의 명사가 추가되었지만, 3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체르노빌은 여전히 핵폭발의 참사를 대표하고 있다.

 

인간의 어리석음, 어쩌면 인간 욕망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도시이기도 하겠지만, 이 도시가 3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20킬로미터가 금지구역이 되어 있다는 사실이, 인간이 추구하고자 했던 원자력 발전이 우리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고 있는지를 끝없이 환기시켜 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체르노빌에 관한 만화책이 나왔다.

 

만화라는 장르가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는데, 만화라는 시각적 요소를 통해, 체르노빌의 비극을 좀더 선명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이 만화 시작할 때, 역시 그렇겠지 하고 보았다. 체르노빌의 봄이라는 제목을 달았지만, 체르노빌에는 봄이 왔으되, 봄이 오지 않은 그런 비극, 원자력 발전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만화이겠지 했다.

 

그런데, 아니다. 그가 체르노빌에 대하여 지니고 있었던 공포, 선입관 등이 처음에 나타나지만, 그곳에 도착해 지내면서 그는 체르노빌의 비극을 보기보다는 체르노빌에 봄이 있음을 보고 있다.

 

물론 죽음과 함께 지내는 사람들, 그리고 함부로 돌아다니지 못하는 현실, 아직도 엄청나게 뿜어내는 방사성 등을 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들이 불러온 재앙, 그 재앙 속에서도 생명을 유지해가는 온갖 생명체들. 그 생명체들과 더불어 삶의 유지해가는 사람들.

 

비극 속에서도 웃음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 그럼에도 그들의 내면에 들어 있는 어떤 비극적 요소. 그 비극적 요소로 인해서 더욱 사람들이 숭고해보이는 그런 모습. 그런 만화.

 

작가 자신의 경험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르포 만화라고 할 수 있는데, 다큐멘터리 만화라고 해도 좋은데, 이 만화를 보다보면 체르노빌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그 모습을 통해서 체르노빌의 비극을, 핵발전의 위험을 더욱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비극이 몇 십년 뒤에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일어났고, 아직도 핵발전이 포기되지 않고 있는데...

 

딱히 핵발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그냥 사실적으로 체르노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충실하게 만화에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러기에 더욱 핵발전을 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땅에 떨어진 그림도구, 음식물을 집어들 엄두를 내지 못하는 모습들이 표현됨으로써, 얼마나 핵발전이 위험한지 보여주고 있으며, 그럼에도 희망이 있음을, 핵폭발이 일어나도 그 곳을 떠나지 못할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또 그 곳에서 사는 사람들도 우리들과 똑같은 사람임을 보여줌으로써 더욱 핵발전을 하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가 이어지는 만화. 그러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게 하는 만화. 체르노빌에 대한 보고서보다도 더욱 쉽게 핵발전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만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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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충이 나타났다! 핵없는 세상을 위한 탈핵 만화
신기활 지음 / 길찾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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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재미있게 만화를 봤다. 첫장을 보면서 어, 맞춤법이 이상하네 하는 생각을 했는데... 바뀐 맞춤법을 적용하지 않아서, 작가가 일부러 이렇게 표기를 했나 하는 의문점을 남기고 보기 시작.

 

이런 걸 풍자라고 해야 하나?

 

풍자를 이해하려면 풍자를 하는 대상에 대한 우선 기본적인 지적인 바탕이 있어야 하는데, 핵에 관한 기본적인 사회적 배경에 대한 지식이 없다면 아마도 이 만화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리라.

 

이 만화가 핵에 대해서 비판적인지 아닌지, 그리고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지 알지 못한다면 만화를 보나마나라는 생각이 든다.

 

맞춤법을 보았을 때 꽤 오래된 만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출판 년도가 올해라서 그냥 올해, 특히 후쿠시마 사태를 보고 나서 만화로 그렸구나 하는 생각밖에 못 했으니...

 

이 만화가 80년대 만화라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2010년이 넘은 지금 보아도 시대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고, 그 상상력이나 비판의식이 지금에도 빛을 발하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작품은 시대와 상관없이 살아남는다고 하더니, 고전이란 그래서 고전이라고 하더니, 핵에 관한 문제의식이 본질을 관통하고 있기에, 이 작품이 지금도 생명력이 잃지 않고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특히, 체르노빌을 거쳐, 후쿠시마에 이른 지금 시대에 원자력이라는 고상한 이름을 쓰려고 하지 말고(요즘 유행하는 정명(正名)이라는 말 그대로, 제대로 된 이름을 붙일 필요가 있다), 핵이라고 명확하게 규정을 하면, 핵을 바라고 사는 핵버러지들, 또는 핵충들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얼마나 불필요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먼 미래, 핵전쟁으로 인해 인류는 멸망하고 핵충들만 존재하는 시대, 인간적인 것들이 핵충들에겐 치명적인 독이라는 사실...

 

이것을 뒤집어서 핵충에게 좋은 것이 인간에겐 치명적인 독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부품 납품 비리부터, 부품 실험 결과 조작까지, 작은 비리 하나가 인류에게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이 만화에서 나오듯이 핵충들에게 한반도가 신세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원자력의 폐해에 대해서 명확히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만화다.

 

원자력으로 인해 사람에게 얼마나 피해를 주는가 하는 것보다는 이미 그 피해를 기정사실로 하고, 그 이후의 세계를 그리고 있는 이 만화.

 

정말로 인류가 맞이하고 싶지 않은 디스토피아(distopia)이지 않은가. 핵충의 총통이 민들레 씨앗으로 인해 죽듯이, 우리 인류는 그들의 식량인 핵으로 인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핵충이 산다는 것은 인간이 살지 못한다는 얘기니, 이 책을 거꾸로 읽으면 우리 살 길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풍자가 의미가 있다.

 

핵에 대해서 절대로 낭만적인 생각을 갖지 말자. 그것은 그야말로 인류를 망치는 독일 뿐이다. 인류를 살리는 무공해 에너지가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 천 마디, 만 마디 말보다도, 어려운 원자력 이론보다도 이런 만화, 훨씬 재미있게, 그리고 충격적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다.

 

핵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만화. 재출간이 반가운 만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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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신확인, 차별이 내게로 왔다 - 평범하지 않지만 평범한 소수자들의 이야기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1
인권운동사랑방 엮음 / 오월의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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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지 않지만 평범한 소수자들의 이야기

라고 한다. 그런데 읽으면서 이 말들의 순서가 바뀌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소수자들의 이야기라고.

 

왜냐고, 사람들은 누구나 같지 않기 때문이고, 누구나 평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평범을 바탕으로 비범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비범이 평범하지 않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비범하다.

 

사람이라는 공통점 위에 우리는 서로 다른 자기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개성으로 인해 우리는 나와 너를 구분할 수 있게 되는데, 이런 개성이 없다면 '사람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맑스의 유명한 말이 성립할 수 없었으리라.

 

이런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소수자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 그리고 이들과 만남을 추구한 일을 '변두리스토리 프로젝트'라고 했단다. 변두리라고 한 이유는 이들의 삶이 중심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은 모두 변두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드는데, 이 말은 우리들 삶이 모두 변두리라면 이는 우리들 삶이 모두 중심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를 생각하면 된다. 물론 라이프니츠는 창문이 없는 단자(monad)를 생각했지만, 우리들의 삶은 창문이 있는 단자다.

 

그래서 이 단자들은 그 자체로 완결된 존재고, 다른 어떤 존재에 비해서 열등하다거나 우월하다거나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인권의 출발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차별을 이야기하고, 변두리를 이야기하고, 소수자란 이야기를 한다. 왜 그럴까? 이는 눈에 보이는 차별 말고도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들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다.

 

21세기가 되고, 전세계적으로 인권 인권 하다보니 이상하게 인권을 겉으로는 흉내를 내고 있는데, 이것이 단지 흉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소수자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겉으로만 드러나지 않을 뿐이지알게 모르게 우리는 많은 차별 속에서 살게 되는데, 이 차별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래서 책 제목이 수신확인이다. 차별이 어떤 건지 이들은 이야기를 한다. 끊임없이 말을 통해서, 행동을 통해서, 표정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말을 건네는데, 이 말이 상대방에게 수신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수신이 되는 경우는 바로 상대방의 귀가 열려 있을 때다. 귀가 열린다는 얘기는 마음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상대방이 완결된 단자이지만, 이 단자에 다른 단자와 소통할 수 있는 창문이 있다는 얘기다.

 

소수자는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내보내고 있다. 그것을 상대가 받아주길 바라면서. 그럼에도 많은 경우 지나치고 만다.

 

이 책에 나와 있는 트랜스젠더, 이주민, 장애인, 레즈비언, 비정규직 노동자, 비혼모, 감염인들이 겪은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쩌면 내가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차별의 순간들이 무척 많았겠단 생각이 든다.

 

나에게는 아직 수신이 되지 않았던 거다. 그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삶이. 또다시 이런 책을 통해 그들의 삶을 엿본다.

 

호기심이 아니라 그들의 신호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니기 위해서. 나라는 단자에 창문을 달기 위해서.

 

나라는 단자에 창문이 달리면 그 때는 이제 좀더 많은 소통들이 이루어지겠지. 단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라는 사실.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관계들이 삶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 그래서 차별도 단순하게 다가오지 않고 상당히 복합적으로 다가온다는 사실. 때로는 풀지 못하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게 다가온다는 사실.

 

그럼에도 그 매듭은 풀려야 한다는 사실. 매듭이 풀리지 않으면 그들의 삶만이 힘든 것이 아니라 내 삶도 힘들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누구나 평범하다. 이 평범에 남들과 다른 것들을 하나 이상씩 가지고 있는데, 우리들은 그것들을 빼는 것이 아니라 더해야 한다는 사실. 그것들을 더했을 때 우리들의 삶은 다양해지고 풍부해진다는 사실을 이 책은 깨닫게 해주고 있다.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우리 사회는 더하기보다는 빼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으며, 사회구조가 아직도 차별 쪽으로 탄탄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가 얽혀 있다는 마지막 이야기처럼, 서로가 얽혀 있음을 아직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가야 할 길을 가지 않아서는 안되지 않은가? 책 표지에 있는 눈물 한 방울, 이런 눈물 한 방울의 의미를 이해하고, 앞으로 이러한 차이들이 우리들의 삶을 더 풍부하게 한다는 더하기 정신을 가질 수 있게, 그래서 다음 책은 수신확인, 그래놓고 환하게 웃는 표지가 되게...

 

각자, 자기가 있는 장소에서 한 번 자신들의 삶을 되돌아보길...

 

나 역시 내가 있는 장소에서 내 삶을, 함께 하는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단지 생각만이 아니어야 한다는 생각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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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치매 - 머리를 쓰지 않는 똑똑한 바보들
만프레드 슈피처 지음, 김세나 옮김 / 북로드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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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뒷표지에 자극적인 문구가 실려 있다.

 

"미쳤군! 학교에서 전자 교과서를 사용한다고?"

 

우리나라에서 모든 학교에 디지털 교과서를 사용하겠다는 발표를 한 지가 얼마 지나지 않았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학생들 개개인에게 노트북을 지급하는 일을 목표로 삼고 있기도 하다.

 

하긴 전자 교과서가 도입이 되면 자연스럽게 학생 개개인은 노트북이나 아니면 다른 전자기기를 지닐 수밖에 없다.

 

이것이 미래 교육의 모습이라고 한다.

 

한 때 유행했던 말, '유비쿼터스'가 학교 현장에서도 적용이 되기 시작한다고 봐야 하는데...

 

디지털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들이 있다. 또한 디지털 매체의 사용에 대해서는 찬반 연구가 있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입장에 서야 하는가?

 

디지털 시대를 비판하는 사람은 산업혁명 초기의 '러다이트 운동'을 하는 사람처럼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산업혁명의 부작용을 미리 읽어내고 다른 대안을 마련하는 사람일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

 

여기에 "디지털 치매"란 책이 나왔다. 사회가 점점 컴퓨터에 익숙해질수록 사람들의 뇌는 점점 치매에 가까워진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책.

 

사람의 뇌는 퇴화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퇴화의 속도는 정신의 높이에 반비례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신의 높이가 높은 사람은 뇌의 퇴화, 즉 치매에 걸릴 확률도 그만큼 준다는 얘긴데, 정신의 높이는 디지털로는 이룰 수 없다는 주장을 한다.

 

독일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연구자료들을 가지고 디지털이 결코 우리의 정신적 능력을 높여주지 않는다는 주장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고 있다.

 

한 가지 놀란 점은 이 '디지털 치매'라는 말을 우리나라에서 먼저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도 이러한 디지털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는 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앞서서 초고속 인터넷망을 건설했으며, 국민들 개개인들이 휴대전화(스마트폰)를 지니고 있고, 이것도 모자라서 모든 학교에 전자기기를 도입했으며, 이제는 교과서마저도 디지털 교과서를 쓰겠다고 하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마치 사람들이 충치에 잘 걸리니 수도물에 불소를 넣어서 충치를 예방하자는 주장이 생각났는데,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 충분히 검토도 하지 않고 좋다고 알려지면 추진하려고 하는 그 모습, 과연 이것이 전문가들의 모습인지.

 

전문가라면 쉽게 하지 못할 일이지 않나 싶은데...

 

이러한 디지털의 광범위한 사용으로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졌다고 우쭐했었는데, 이런 멀티태스킹은 오히려 정신의 높이를 낮추는 일을 한다고 이 책에서 주장하고 있으니,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나라는 게임 중독이라는, 다른 말로 하면 컴퓨터 중독이라는, 스마트폰 중독이라는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이를 단지 미디어 사용교육으로 무마하려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책을 보라.

 

그런 미디어 교육은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다양성이, 인간의 복잡성이 디지털이라는 0과1로 조합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우리의 몸은, 우리의 정신은 아날로그라는 사실을 이 책은 알려주고 있다.

 

이 책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말은 다음과 같다.

 

"정신은 생각이 선택한 색깔을 드러낸다." (361쪽)

 

그렇다. 디지털은 오히려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고, 우리 정신의 높이를 낮추는 역할만을 할 뿐이다. 그러니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들의 정신은 어떠하겠는가...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미쳤군! 학교에서 전자 교과서를 사용한다고?"

 

이런 말이 나오지 않도록 무엇이 정말로 사람을 위한 것인지, 무엇이 나를 위한 것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우리의 정신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들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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