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시집을 읽으면 가능성이 보인다. 어떤 형태로든 고정이 되어 있지 않은 청소년들의 모습. 또 청소년들의 마음. 그들 마음이 하나가 아니고, 또 굳어있지 않기 때문에 성장하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노자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딱딱함, 굳음은 죽음이다. 그러니 우리가 청소년들에게 특정한 형태로만 있으라고 하면 안 된다. 그것은 청소년에게서 생동감을 빼앗는 일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성장을 가로막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시집을 청소년들이 읽으면 좋겠지만, 청소년보다도 어른들이, 기성세대들이 먼저 읽어야 한다. 그들이 청소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이렇게 문학을 통해야 한다.


직접 대면해서 이야기하다보면 청소년은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우선 어른들이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안다. 이 말을 뒤집으면 어른들이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지 안다는 말이다. 


그러니 자칫 잘못하면 청소년과 직접 이야기하는 일은 어른들의 일방적인 전달이 되거나, 또는 어른들 구미에 맞는 말을 늘어놓는 청소년들의 말을 듣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청소년시집은 그렇지 않다. 청소년들의 내밀한 마음들을 상상을 통해 표현한다. 우리가 쉽게 놓치고 있던 소소한 감정들을 시로 표현해 주고 있다. 또한 청소년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시인의 역할이다. 시인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감정들을 표현해낸다. 


시인이 꼭 청소년일 필요는 없다. 청소년시라고 해서 청소년이 써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청소년의 마음을 알고, 표현할 수 있는 감수성을 지닌 사람이면 누구나 쓸 수 있고, 써야 한다. 그런 시들을 통해서 우리는 청소년의 마음에 한발 다가설 수 있다.


오은 시집을 읽으며 청소년들의 마음이라는, 그 마음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고, 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수시로 변하며, 과거나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미래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보게 됐다. 제목도 '마음의 일' 아닌가.


그런 청소년들의 무한한 가능성, 마음의 가소성을 생각하면서 이 시를 읽었다.


그리지 않아야 그려졌다


내가 쓰고자 했던 것

내가 말하고자 했던 것

그릴 수 없다


내가 그리고자 했던 것도

쓰거나 말할 수 없다

온전하게는


창밖에는 나무가 있고

마음만 먹으면

몇 분 뒤에 나도 나무 아래에 있을 수 있다


나뭇가지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을 맞으며

아, 행복하다

여기가 따뜻하구나

여기가 시원하구나

따뜻하면서 시원할 수 있구나

말할 수도 있다


현장의 나만 아는

그때의 나만 아는

내 몸에 새겨지고 있지만

아무도 해독하지 못하는


나이테가 있다

지문이 있다


그리지 않아야 그려지는 부분이 있었다

안에 있어야 보이는 바깥 부분이 있었다


내뱉고 나면 사라지고 말까 봐

차마 말하지 못하는 꿈이 있었다


나는 아직 창 안에 있다

창 안에 있기에

백지 위에 한가득

창밖을 상상할 수 있다


오은, 마음의 일. 창비. 2020년. 초판 2쇄. 53-54쪽


청소년을 고정시키지 말자. 어떤 한 역할로 국한시키지 말자. 그들을 기대라는 이름으로 틀에 가두지 말자. 그들이 자신의 마음을 알고 행동할 수 있도록 지켜보는 일, 그들이 '백지 위에 한가득 / 창밖을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일. 그것이 어른이 해야 할 일이다.


오은 시집을 읽으며 이렇게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청소년들, 청소년의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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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하면 얼굴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웃음을 머금게 될까? 아니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찡그린 얼굴이 될까? 과연 아이들은 학교에 오고 싶어할까?


  학교란 공간은 학생들에게는 자유를 상실한 공간, 자신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는, 교사들의 목소리만 들리는 그런 공간일 수도 있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하는 말들이 '해라'와 '하지 마라'는 명령형으로 끝나는 말들이 대부분일텐데, 그런 공간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학생들의 말에 귀기울여 주는 교사들이 있고, 학생들이 원하는 일들을 할 수 있게 해주고, 무엇보다도 격의 없이 교사와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그런 학교라면 그 학교에 가고 싶을 수도 있겠다.


이 시집을 낸 최은숙 시인은 교사다.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느꼈던 점들을 시로 표현했다. 이 시집은 청소년시집이고, 청소년들이 읽으면 '와, 우리 이야기네.' 할 수 있는 그런 시들이 많이 실렸다.


학생을 이해해주는 교사의 모습은 완벽한 교사가 아니다. 허점이 있는 교사다. 학생들에게 배울 수 있는 교사다. 그런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딱이다. 이 시들은 그런 교사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어서 읽으면서 배시시 웃음이 배어나온다. (선생님은 우리한테 딱이다, 비밀, 깜빡하기, 무서운 상민이, 선생님께 하는 부탁, 핵인싸각 등등)


또한 마을 사람들과 정겹게 지내는 모습도 표현되어 있고,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과 지내는 모습도 표현되어 있다. 그러니 이 시집을 읽으면 웃음이 있는 학교를 떠올리게 된다. 학교가 이렇게 웃음으로 충만한 곳이었으면 좋겠다. 학생이 졸업을 한 뒤에도 자기 자식들을 데리고 와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그런 학교. (우린 운이 좋다 언제나)


그 중에서도 아이들을 위해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하나가 되어 행동하는, 마을과 학교가 동떨어져 있지 않고 함께 하는 모습, 그야말로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떠오르는 그런 시가 있다.


정말 이런 학교, 이런 마을, 이런 사람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이 세상에서, 학교가 담장을 굳게 치고, 교문을 걸어 잠그고 외부인 통제를 하며, 심지어 학생들도 한번 등교하면 하교할 때까지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단절된 공간이 아닌, 열린 학교, 함께 하는 학교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이 시를 읽으면서 그 정경이 눈에 그려져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랬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학교를, 학생을 대하는 모습이.


      알고 보니


올봄에도 아이들이 쑥 뜯으러 나올 거라고

동네 어른들은 둑길에 제초제를 뿌리지 않았습니다

쑥 뜯는 동안 자동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은 것은

다들 뒷길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공부 안 하고 놀러 나온 게 좋아서

장난치고 도망가고 야단법석

그래도 쑥이 모자라지 않았던 것은

방앗간 사장님이 뜯어 놓았던 쑥을

한 소쿠리 보태 주셨기 때문이에요


학교 앞 솔로몬문방구랑 스마일분식, 독립상회까지

떡을 돌리고도 전교생이 실컷 먹을 수 있었던 것은

엄마들이 쌀을 듬뿍듬뿍 퍼 주셨기 때문이지요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선생도 자라고

마을은 깊어 갑니다


최은숙, 지금이 딱이야. 창비. 2021년.  87쪽. 


참 아름다운 정경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마음. 그렇다고 아이들이 어른들의 이런 마음을 알고 있느냐 하면 아니다. 아이들은 공부 안 하고 나와서 논다고 생각한다. 그 모습들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애늙은이처럼 어른들이 우리를 배려하고 있으니, 우리 최선을 다해서 쑥을 뜯자가 아니다. 


그냥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즐겁게 논다. 즐겁게 놀아도 된다. 이 놀이가 언젠가는 그들의 마음에서 서서히 자라리라. 그들도 남을 배려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리라. 굳이 지금 그렇게 하라고 도덕적인 말로 훈계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이 채우지 못한 쑥은 마을 사람들이 채우면 된다. 아이들과 함께 쑥떡을 먹는 그런 즐거움을 누리면 된다. 


그래서 이 시를 읽으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우리가 공동체를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이런 어른들의 마음을 자라면서 알게 되리라. 시 제목이 '알고 보니'다. 


왜 아이들이 이렇듯 편안하게 쑥을 뜯을 수 있었는가, 마음 놓고 놀 수 있었는가 하니,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아이들을 배려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공동체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학교와 마을의 관계다.


이 시집에 실린 시 한편 한편이 따스하게 다가온다. 청소년들이 읽어도 쉽게 이해가 될 언어들로 시가 쓰였고, 또 자신들의 이야기가 표현되었으니, 시를 가까이하는 청소년들이 이런 시집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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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9-09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이 채우지 못한 쑥은 마을 사람들이 채우면 된다.
시가 아닌데 왜 시로 읽히죠?
아마도 아이들과 쑥이라는 단어가 함께 오는것이 드물어서 그런가봅니다.
시 읽기 좋은 계절이 왔네요~~♡

kinye91 2021-09-09 13:17   좋아요 0 | URL
네. 시를 읽기도 책을 읽기도 좋은 계절이 왔어요. 코로나 시국이 빨리 안정이 되면 아이들이 이렇게 밖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겠지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나선 사람들이 상대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에 자신과 경쟁을 하는 상대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듯이 함부로 말을 한다. 함부로... 정말로 보통 사람들은 입에 담지 않을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귀를 씻어도 씻어도 그 말들은 귀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왜? 말들이 얼마나 더러운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정치를 한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씻어서 밖으로 내보낼 틈도 없이 또다른 더러운 말들이 들어오니까.


  겨 묻은 개가 있나 싶을 정도로 똥 묻은 개들이 네 똥에서 냄새난다고 짖어대는 꼴이다. 표현이 개들에게 미안할 정도다. 아마, 개들은 네게서 사람 냄새난다 또는 사람처럼 욕한다, 사람처럼 행동한다 등을 욕으로 사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경쟁자이기 때문에 무조건 낮추고 비방해서는 안 된다. 경쟁자이기에 더욱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자신과 엇비슷하기 때문에 경쟁자가 되었으니, 거의 대등한 존재도 예의로 대하지 않으면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대할 때는 예의를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경쟁자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자신과 경쟁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예의를 갖출 수 있게 된다. 


사람이 사람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없는데 이들은 마치 경선 과정이 전부인 양 칼이 되는 말들을 쏟아붓고 있다. 영화 [신기전]에서 화살이 로켓처럼 날아가듯, 칼이 된 말들이 상대를 향해 수없이 날아가고 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의도 없다. 


아주 작은 예의도 없이 그렇게 정치판이 굴러가는데, 그와 반대로 우리에게는 예의가 필요하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만이 아니라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에서는 예의가 필요하다. 예의란 관계를 잘 맺게 해주는 기본 요소이기 때문이니.


그런 점에서 이 시집에 실린 문성해의 시... 요즘 정치인들이 꼭 읽어봤으면 하는 시다. 정치를 하려면 시인의 감성을 지녀야 하는데, 이들은 상대를 어떻게든 누르고자 하는 투사의 감성만 지니고 있으니... 그것도 미래는 보지도 않고 오직 현재, 내 앞에 있는 상대를 이겨내는 데만 관심이 있으니... 예의란 이들에게 승리하기 전까지는 꺼내지 않을 그런 판도라의 상자 속에 가둬두어야 할 존재일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이 과연 이 시를 읽으며 자신의 행동, 자신들이 뱉어낸 말들에 대해서, 또 상대에 대해서 생각을 해볼까 하는 의문은 있지만, 그래도... 문해력이 많이 떨어졌다고 청소년들을 비판하지 말고 자신들부터 이 시를 읽고 의미를 깨우쳤으면 한다.

   

   조그만 예의

- 문성해


새벽에 깨어 찐 고구마를 먹으며 생각한다

이 빨갛고 뾰족한 끝이 먼 어둠을 뚫고 횡단한 드릴이었다고

그 끝에 그만이 켤 수 있는 오 촉의 등이 있다고

이 팍팍하고 하얀 살이

검은 흙을 밀어내며 일군 누군가의 평생 살림이었다고


이것을 캐낸 자리의 깊은 우묵함과

뻥 뚫린 가슴과

술렁거리며 그 자리로 흘러내릴 흙들도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 대책 없이 땅만 파내려 가던 붉은 옹고집을

단숨에 불과 열로 익혀내는 건

어쩐지 좀 너무하다고


그래서 이것은

가슴을 퍽퍽 치고 먹어야 하는 게 조그만 예의라고 생각한다


허연 외,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2014 현대문학상수상시집, 현대문학 2013년. 65쪽)


고구마에게도 이런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그것이 '조그만 예의'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데, 과연 우리는 다른 존재들에게 예의를 지키고 있는가.


예의란 상대를 존중하는 일. 그렇게 내가 먼저 상대를 존중해야 상대도 나를 존중하지 않겠는가. 관계에서 일방은 없다. 쌍방이 있을 뿐이다.


최근 정치판에서 난무하는 비방, 욕설, 상대를 깎아내리는 폄훼 등등을 보면서 이 시를 생각한다. 정말 우리 '조그만 예의'를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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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읽을 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들을 이어주는 표현을 만나게 된다. 그런 구절을 만나면 와! 하는 감탄사와 함께, 시의 내용이 아니라, 그 표현이 마음에 자리잡는다.


  가령 서정주 시 '푸르른 날'에 나오는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라는 표현... 단풍을 초록이 지쳤다고 표현할 수 있다니... 


  여기에 다양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이육사 시 '절정'에 나오는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는 구절.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시 전체 내용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특정한 구절때문에도 그 시를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래도 도무지 연결이 되지 않는 말들이 나열될 때,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을 때, 이런 말을 어디서 찾아야 하지 할 때, 시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시가 이렇게 시인에게만 또 몇몇 비평가들에게만 통용되면 되는 존재일까 하는 생각. 시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으면 안 된다. 시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시를 사람들에게 다가가게 하는 역할은 시인이 해야 한다.


시인, 그러니 시인은 이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존재, 또 인식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알려준다. 시적 표현을 통해서. 그렇다면 시적 표현은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몇 개의 징검다리가 있어야 한다.


징검다리 없이 강 건너편에 그냥 이것이 바로 시다라고 하면 시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배를 타고 건널 수 있는 사람 몇 외에는 없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강 건너에서 멀찍이 떨어져 시는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존재구나 하고 포기하게 된다. 그러면 시인은 사람들 사이에 있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문보영 시집을 산 이유는 '김수영 문학상 수상시집'이라는 제목이 있어서다. 김수영이 누군가? 시는 온몸으로 써 나가야 한다고 외쳤던 사람 아닌가. 자신만의 세계가 아니라 그 세계를 사람들에게 가져온 시인 아니던가. 그러니 그는 '폭포'를 쓰고 '풀'을 쓰고,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라는 시에서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절규하지 않았는가. 


조그마한 일... 그래서 시인은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고.(인터넷을 찾아보면 적으냐와 작으냐가 혼재되어 있다. 민음사에서 나온 김수영 전집(시)에 보면 적으냐로 나와 있으니... 작다는 개념과 적다는 개념이 차이를 보이는데,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인은 언어를 통해 낯설게 하기를 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시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살았던 시인 아닌가. 그런 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받았으면 이 시집 역시 무엇인가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기대를 한다.


이 기대는 시인의 말에서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콘페니우르겐의 임신 기간은 / 사십 년으로 / 지구에서 가장 길다 그런데 / 콘페니우르겐의 평균수명이 / 이십칠 년인 것은 / 하나의 수수께끼다 (2017년 겨울 / 문보영)


콘페니우르겐... 동물이다. 임신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그런데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만들어낸 동물인데...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낸 동물인지 알 수가 없다. 시인의 말을 따라가보면 수명보다 긴 임신을 한다. 어떻게 출생을 하지? 조산? 그렇다면 콘페니우르겐이 '시'라면 모든 시는 자신의 수명 기간보다도 더 긴 세월을 지내다 사람들 곁으로 와야 하는데... 결국 모든 시는 '조산'이다. 그러니 그 '조산된' 시를 돌보고 보살펴서 성숙하게 하는 역할은 다른 사람들이 해야 한다? 


40년을 지내야 온전하게 출생할 수 있는 콘페니우르겐이 멸종하지 않고 종족을 유지하려면 조산밖에는 없다. 조산한 콘페니우르겐이 죽지 않고 살아가게 하려면 다른 존재들이 보살펴야 한다. 그것도 기를 쓰고. 그만큼 시는 간단하지 않다. 어렵다. 살리기 어렵다. 그렇게 봐야 하나? 나, 참...


그래서 이 시집에 있는 '멀리서 온 책'을 생각한다. 그냥 내쳐버리고 싶은 생각. 하지만 아무리 내치려고 해도 없앨 수가 없다. 그렇게 꾸준히 살아남는다. 조산해서 도무지 어떤 존재인지 알 수가 없어서 알게 되기까지 특별한 보살핌을 줘야 하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다. '멀리서 온 책'을 보자. 그냥 이 시를 읽으며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시들이 어떻게 되는지, 그럼에도 왜 시들이 살아남는지, 마치 시인의 말에서 나온 '콘페니우르겐'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멀리서 온 책


  책을 펼치자 문장들이 이중 매듭 만들기에 몰두하고 있다. 끊임없이 몸을 비비 꼬고 있다. 무의미한 움직임만을 수년간 반복하는, 바위에 깔린 벌레들처럼. 문장들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느라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주변을 신경 쓸 재간도 없이, 미래를 도모하지도 않고, 오직 한 자리에서 홈을 파며, 어쨌뜬, 바닥에 흔적을 내고, 그것을 위해 몸을 꼴 대로 꼬며 깊어지는 동작만을 반복하고 있다.


  어린이는 책을 가져다준 어린이가 너무 멀리서 온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한다. 어린이는 이런 책은 필요치 않다. 어린이는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 나는 이런 책을 읽었다, 고 외칠 수 있는 책이. 너무 멀리서 온 책은 세상에 없어도 된다고.


  멀리서 온 어린이는 모든 문장이 동일해 보이는, 똑같은 수준으로 몸을 비비 꼬고 있는 문장들 중 하나를 흰 손가락으로 콕 짚으며,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든다, 너는? 하고 묻는다. 그래, 이 문장은 다른 문장에 비해 더 오랜 기간 외롭게 매듭을 만들고 있으며 고유한 방식으로 몸을 꼬고 있는 것 같다, 고 어린이는 동조의 뜻을 가장한다.


  어린이와 멀리서 온 어린이는 저녁놀이 비치는 창가에서 함께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사이 석양빛이 몸을 꼬는 벌레들의 잿빛 줄을 붉게 적셨다. 둘은 무릎을 꼭 붙이고, 책을 들여다본다. 어린이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책과 멀리서 온 어린이를 창밖으로 던진다.


  나무로 된 현관문을 잠근다. 더 잠글 것이 필요해 머릿속으로 몇 개의 문을 상상해 낸다. 문을 하나하나 잠근다. 아무도 살지 않는 섬의, 아무도 모르는 나무 그늘에 뜻 모를 바위가 숨 쉬고 있으며, 그 바위는, 셀 때마다 다리의 개수가 달라지는 검정 벌레들을 키운다. 어린이는 그것을 잊기 위해 더 많은 문을 닫는다. 두개골의 작은 틈 사이, 불편하게 나앉은 바위 위로 벌레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보영, 책기둥, 민음사. 2018년 4쇄. 134-135쪽


이상하게 시인의 말에 나오는 '콘페니우르겐'이 이 시에서 '멀리서 온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버리고 싶은, 그러나 아무리 버리려고 해도 이미 내 뇌속에 자리를 잡은, 그런 존재... '콘페니우르겐'이나 '멀리서 온 책'이나 모두 '시'로 바꾸어도 말이 성립된다. 


문보영 시집 [책기둥]을 통해서 알지 못하는, 알 수 없는 '콘페니우르겐들'을 만나는 일도 한번쯤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아직까지 나는 이런 시를 이해하려고 하면 김수영 말처럼 '얼마큼 적으냐'는 한탄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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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스턴트 시대라고 한다. 또는 패스트푸드의 시대라고도 한다. 일회용이 넘치는 사회. 코로나19로 인해 일회용 사용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졌다.


  일회용 사용만큼이나 빨리빨리가 더 심해지고 있다. 배달이 많아지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참지 못한다. 더 빨리 배달해야 한다. 과속은 기본이다. 신호위반도 기본이다. 


  그러나 사고가 나면 책임은 그렇게 만든 사회에 있지 않다. 책임은 오로지 개인이 져야 한다. 개인으로 하여금 빨리빨리, 늦으면 비난을 받고, 거기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하게 하면서, 혹 사고가 나면... 참.


  그런데 이런 모습이 사랑에서도 나타난다면... 우리 심장이 너무 빨리 뛰면 사람은 살 수가 없다. 심장은 적당한 속도로 뛰어야 한다. 왜 사랑하면서 심장? 우리는 사랑의 표시로 심장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표현도 있지만, 심장이 뛴다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심장이야 당연히 뛰는데,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당신을 보면서 내 심장이 두근거렸다든지, 심장이 뛴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사랑과 심장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심장이 울렁거린다. 심장이 뛴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심장은 마음이고, 마음이 움직이면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랑에 빠지는 일, 심장이 뛰는 일이다. 권혁웅 시집을 읽으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 제목은 '뛰다'가 아니라 '떨다'지만.


  떨다

        - 심장3


네모난 기름통 안에서 굳은 선지를 퍼내듯

마음을 덜어 내야 할 때가 있다네

떠낸 자리에 서둘러 모여드는 물도 없이

천천히 다독이는

저 수평의 손길도 없이

떼꾼한 구멍을 들여다봐야 할 때가 있다네

각 잡은 마음이 슬며시 갖다 댄 딜도처럼

부르르 흔들릴 때가 있다네

잘못 퍼다 준 숟가락이 있었나?

풀 죽은 우거지는 누구 얼굴이었나?

양철 판에 어룽대는 신열(身熱)은

지나는 발자국 소리에도 벌건 제 몸을 

바람벽에 기댄다네


권혁웅, 그 얼굴에 입술을 대다. 민음사. 2007년. 37쪽.


사랑은 떨림이다. 이 떨림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공명해 떨린다. 몸이 떨린다. 사랑이 마음의 일이라고 하지만, 아니다. 몸이 떨린다. 마음 떨림이 몸의 떨림으로 이어진다. 바로 '마음을 덜어 내야 할 때'다.


내 마음을 덜어내야, 빈 곳이 있어야 다른 존재가 들어올 수 있다. 그렇다고 아무런 존재나 들어와서는 안 된다. 바로 내 마음 빈 곳에 딱 맞는 존재, 그 존재는 이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덜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각 잡은 마음이 ... 부르르 흔들릴 때가 있'고, '지나는 발자국 소리에도 벌건 제 몸을 / 바람벽에 기대'게 된다.


마음 떨림. 사랑의 울림이다. 심장이 뛴다. 심장이 떨린다. 떨림은 사랑이다. 일회용 시대에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그 마음과 함께 떨릴 수 있는 존재를 찾는 일. 그런 사랑을 하는 일.


하긴 사랑에 일회용이 어디 있는가? 모든 사랑은 이런 떨림을 받아들여 함께 떨 때 이루어지지 않나. 그 기간이 길고 짧음은 중요하지 않다. 함께 떨 수 있는 존재, 그런 사랑이니, 앞에서 언급한 일회용 사랑이라는 말은 취소하자.


사랑은 모두 떨림이고, 떨림의 시간과 상관없이 모두 소중한, 아름다운 사랑이다. 


그래도 우리나라 종처럼 길게 그 떨림이 울림이 되는 그런 사랑이면 더 좋겠다. 떨림의 시간을 기다리면서 함께 더 길게 울리는, 떨리는 그런 사랑이면 좋겠다. 권혁웅 시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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