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에게 안녕을!

 

  이것이 특집의 제목이다. 대안교육을 표방하는 격월간지인 '민들레'에서 갑자기 웬 '원자력?' 할지 모르겠다.

 

얼핏 원자력과 교육은 관련이 없을 듯하지만, 이 특집에 해당하는 글 중에서 학교 교과서에서 표현하고 있는 '원저력'에 관한 내용을 보면(원자력, 착한 에너지?-교과서 톺아보기<이지언>) 원자력은 교육과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교육이란 미래를 살아갈 사람들에게 현재에서 준비를 시키는 과정이라면, 현재의 문제점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하고,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고민하게 하는 것이 바로 교육이다.

 

따라서 교육에 관련된 잡지라면 현재의 문제를 건너뛰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교육이 학교에 관련된 문제만이 아닌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라는 인식을 가지고 모든 쟁점이 되는 문제에 대해서 다루어주어야 한다.

 

'세월호' 문제가 아직도 진행중인 상태에서, 문제는 발생했으나 도대체 해결을 하려고 하지 않는 지배집단을 보면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교육"은 정말로 중요하다.

 

우리 사회를 배로 비유한다면 배를 침몰시킬 수 있는 여러 위험 요소 중에서 지금은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원자력'(앞으로는 "핵"이란 말을 쓰겠다. 원자력이 아니라 핵이 정확한 이름이라고 말을 하니까)이고, 이 문제를 간과하고서는 배가 침몰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핵"을 특집으로 이번 호 전면에 내세운 민들레는 교육잡지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는 셈이다.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 폭발사건이 터졌고, 그것이 아직도 해결이 되지 않고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자력 르네상스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핵발전을 더 하려는 정부의 모습에, 온갖 자금을 동원하여 핵발전을 옹호하려는 '원자력 문화재단'의 홍보 앞에 핵발전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은 현실.

 

이런 현실이 이대로 방치된다면, 배는 침몰할 수밖에 없다는 위기 의식. 그런 위기 의식을 다루지 않고서야 어찌 교육잡지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여 이번 민들레의 핵발전에 관한 특집은 유용하고도 시의적절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디 우리 사회라는 배를 침몰시킬 수 있는 암초가 '핵발전' 뿐이겠는가. 군대도 있고, 비정규직 문제도 있고 알려지지 않는 많은 문제들이 있다.

 

여기에 책임을 지지 않는 정치권, 아니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정치구조... 뽑을 수는 있는데, 현실적으로 내릴 수는 없는 이런 정치구조 자체가 심각한 암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회, 정치적인 문제도 다 교육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니 앞으로 민들레에서 다뤄줄 것이라 믿고.

 

이번 민들레를 읽다가 요즘 논쟁이 되고 있는 경기도 교육청의 9시 등교. 상벌점제 폐지가 떠올랐다.

 

도대체 왜 학생들의 9시 등교를 반대하지? 자연과 역행해서 사는 삶, 아침밥도 못 먹고 등교하는 삶. 이것이 바로 아침 일찍 등교하여 수업을 받아야만 하는 학교 현실에서 비롯된 것 아니던가.

 

적어도 어른이라면 아이들이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식을 머리 속에 억지로 집어넣는 그런 구조부터 바꾸려고 해야 하지 않나?

 

9시 등교가 맞벌이 부부에게는 아이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라면, 이것을 학교의 9시 등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근무형태에 대해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이 자랑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 인구와 경제력으로는 6시간 노동만 해도 충분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직장의 근무 시간을 충분히 조정해서 아이도, 어른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려는 쪽으로 방향을 돌려야 하는데... 엄하게 9시 등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마찬가지로 상벌점제도 마찬가지다. 이번 호에 나온 대안학교 성추행 사건에 대한 글(교육의 길을 묻습니다-박복선)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교육은 계량화된 매뉴얼대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사람과 사람이 관계맺고 있는 행위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각 상황에 맞게 다양한 대처 방법이 나올 수 있다.

 

또 처벌이 먼저가 아니라 그 일을 성찰하게 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그러니 상벌점제는 편리성과 통제의 효율성만을 고려한 것이지, 교육을 우선시한 것은 아니다.

 

상벌점제는 학생에게 학생의 행위에 대해서 교육을 하기보다는 그냥 경찰서나 법원처럼 판결하고 처벌하는 방법일 뿐이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당연히 폐지되어야 할 것인데, 이게 논란이 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된다.

 

"민들레 94호"

 

학교 교육이나 대안 교육에 대한 글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교육이 무엇일까, 무엇이 교육되어야 할까.. 반대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어떻게 배워야 할까를 고민하게 만들어 주었다.

 

교육은 바로 삶임을 다시 한 번 깨우쳐주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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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이 생각나는 요즘이다.  정말로 절망한 자들은 대담해지는 법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일밖에는 없다.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니 대담해질 수밖에.

 

이 구절은 니체가 어느 책에서 했는지 잘 모른다. 다만, 최승호의 '인식의 힘'이라는 시에 작은 제목으로 딸려 있는 구절을 발견한 것이다.

 

니체가 참으로 마음에 와 닿는 경구들을 남겼지만, 이 말 역시 마음 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특히 요즘 세태와 관련해서는 더더욱 마음에 와닿는 말이다.

 

세월호...강정...밀양...평택...핵발전소...4대강...비정규직...군대내 폭력...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온갖 부정부패...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를 절망에 빠뜨리는 것들이다.

 

여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었다. 낮은 곳으로 임하려는 그. 그는 어려운 사람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는데...

 

어떤 사람은 이런 장면을 보고 우리나라 사람들이 마치 학대받는 아이들의 모습 같았다고... 누군가 자신을 위로해줄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같다고...

 

그래서 교황의 방문과 교황의 그런 모습이 더더욱 슬프게 다가왔다고...

 

교황이 방문해서 보인 모습과 대비되는 모습이 사회 곳곳에서 보이고 있어서 더욱 깊은 절망을 이끌어내고 있는데...

 

마음이 착잡하고, 무언가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만들어내고 있는 요즘... 답답함에 마음이 너무 무거웠는데...

 

우연히 다시 김수영의 시를 접하게 되었다.

 

그때 아, 바로 이것이구나... 이런 심정이구나. 이렇게 시가 내 마음을 표현해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

 

그의 시 '절망'이다.

 

절망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김수영전집1.시 , 민음사. 1984년 5판. 247쪽

 

 

가만히 생각해 보면 풍경이나 곰팡이나 여름, 속도는 김승희의 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 들어간다. 그런데 이런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 '졸렬과 수치'와 같이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당연과 물론이 되어서는 안되는데... 지금까지 우리는 졸렬과 수치처럼 우리 자신에게 해당하는 것들도 우리 자신에게 속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졸렬과 수치가 반성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절망이 반성을 할 이유가 없고, 절망이 반성을 하지 않으니 세상은 그냥 그대로 그렇게 '당연과 물론의 세계'로 굴러가고만 마는 것이다.

 

하여 우리가 이렇게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 물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구원은 우리 스스로 찾을 수가 없다. 따라서 이 시에서 말한 것처럼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게 된다.

 

이를 우리는 교황에게서 구원을 바라고 있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교황에게 그렇게 열광하고, 교황이 떠난 다음에도 교황에 대한 이야기가 끝을 보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구원은 이렇게 밖에서 오지 않는다. 교황은 우리에게 많은 위안을 주고 갔지만, 결국 우리 자신을 구원할 주체는, 절망에서 벗어나게 할 주체는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이 시에서 처럼 구원이 '예기치 않게' 온다면 절망은 결코 반성하지 않는다. 그렇게 반성하지 않는 절망을 반성하게 만들 수 있으려면 대담해져야 한다.

 

절망한 자들이 대담해지지 않으면 절망은 절대로 반성하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는 절망에 빠져 그 절망조차도 '당연과 물론의 세계'로 받아들이게 된다.

 

1960년대에 쓰여진 김수영의 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제시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절망에 빠진 마음... 절망에서만 허우적대고 있던 나... 그러나 니체의 말처럼 '대담'해져야 한다. 그래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시는 그것을 말해준다. 김수영은 자신이 비록 '작은 것에만 분노한다'고 스스로 자책하기도 했지만, 그는 시를 '온몸으로 썼'던 시인... 그래서 대담했던 시인이다.

 

그런 대담성... 절망의 이 시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 대담해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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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마음에 든다.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안과 밖으로 나뉘었다는 물리적인 이야기말고, 우리네 삶 자체도 안과 밖으로 나뉠 수 있다는 이야기.

 

자신 속으로만 침잠하는 사람과 사회 속에서만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 사람.

 

그러나 사람은 안과 밖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존재이니, 우리는 안에 있으면서 밖에도 역시 있어야 한다.

 

시인은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우리가 지닌 껍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껍데기가 무거워서, 또는 무서워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 말에 나는 껍데기를 아직도 지고 사는 내 자신의 삶이 떠올랐다. 나에게 껍데기는 무거운 걸까? 아니면 무서운 걸까?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얼핏 보면 우리가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껍데기가 무거워서> 혹은 <껍데기가 무서워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껍데기가 그렇게도 무거워서 껍데기가 그렇게도 무서워서 우리는 밖으로 솟구쳐 날으지 못하는가? ...습관적으로 자기 영토(땅)를 고정하고 공간만들기를 좋아하고 권력이 만들어놓은 제도와 관습 속에서 속령화된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하는 정주민의 욕망이 우리가 안에서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이 시집은 아마도 우리를 제도화된 욕망 속에 가두고 그럼으로써 우리를 폐쇄된 코스모스(안)에 주둔시킴으로써 우리를 마음껏 지배하고 있는 얼굴 없는 권력의 마수, 혹은 그것에 질질 끌려가는 내 욕망의 파시즘에 관한 해부의 기록이다.

 

(김승희,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계사.1993년 1판 5쇄 '자서'에서

 

그래... 어쩌면 안이 주는 편안함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밖을 그냥 관음증 환자처럼, 또는 텔레비전의 중계방송처럼 보기만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참여는 하지 않은채.

 

세상이 변하지 않음을 개탄하면서, 밖의 위험성에 대해, 밖의 야만성에 대해서 말만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편안함에 이끌려서. 

 

시가 찰나를 노래하지만, 그 찰나가 영원하다는 생각을 했는데...이 시집에서도 지금...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시를 보고서 역시, 시는 찰나를 노래하지만 영원을 보여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안과 밖... 그것을 가로지는 벽. 그 벽에 대해서...

 

   벽지 바꾸는 시대

 

지금은 벽을 부수는 시대가 아니다

벽을 부수는 시대가 아니다

기울어진 벽을 부수고

새벽을 짓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벽을 부수려는 시대는

지나갔다

 

상복을 입은 여인들이 울고 있다

4월에도 울었고

5월에도 울었고

6월에도 울었고

상복을 입은 여인들이 일년 내내 달력

속에서 울고 있는 울먹임의 역사

이런 역사를 만장과 더불어

벽장 속에 깊이 올리고

 

지금은 새로운 벽지를 바꾸려고

도배집 앞에 줄지어 서서

새로운 무늬 벽지를 고르는 시대

어떤 아름다운 무늬의 벽지가

벽의 결함을

감춰줄 것인가

(벽의 파손을 막아줄 것인가)

그런 것을 꿈꾸는

넋 나간 시대

 

그런데, 너, 너,

너는 또 뭐냐?

충치로 구멍 숭숭 뚫린 썩은 이빨과

풍치로 화농 흘러 뭉그러진

검은 잇몸(구강의 총체적 난국)

위에

아침 낮 저녁으로

치석 방지 치약

니코틴 제거 치약

딸기향을 첨가한 향긋한 후르츠 향의

온갖 치약거품들을

쓰러질 듯 갸우뚱 걸린 벽거울 앞에 서서

황홀하게 황홀하게 도배하고 있는 너는?

 

김승희.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계사. 1993년 1판 5쇄. 74-75쪽

 

벽을 바꾸어야 할 시대에 겨우 벽지만 바꾸고 있는 모습. 우리가 지금 그렇지 않은가. 내가 그렇지 않은가. 이 시에서 처음에는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다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벽지만 바꾸는 사회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이 겨우 치약만 바꾸는 나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안과 밖이 이렇듯이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세상은 벽지만 바꾸고도 근본적인 것이 바뀐 양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시에서처럼,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벽지만 바꾸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는 벽지가 아닌 벽을 바꿀 생각도 해야 하는데... 20년 전에 쓰여진 시가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니...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어야 햇는데, 우리는 그동안 벽지만, 무늬만 바꾸고 있었단 말이지...참...

 

그래서 벽지가 아닌 벽을 바꿀 수 있는 시대(밖)가 되기 위해서는 안에서 나와야 한다. 나와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밖이 변한다.

 

그 점을 이 시집에서 마지막 시로 이야기하고 있다. 희망의 끈, 놓지 않고 있다.

 

그 시(보리수나무 아래로)의 마지막 부분.

 

(전략)

쓰러질 때까지 사랑했던 사람

쓰러질 때까지 일했던 사람은

그가 어느 나무 아래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보리수나무 아래 길을 걸은 것이라고

 

이제야 비로소 난

모든 사람의 길과 나 자신의 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듯하다.

모든 길이란, 아마도, 나,

자신의 보리수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므로.

 

김승희.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계사. 1993년 1판 5쇄. 122쪽. '보리수나무 아래로' 부분

 

깨달음의 길... 그것은 나와서 걷는 일이다. 껍데기를 깨고 나와 사는 일이다. 어떤 삶? 자신의 전생애를 건 삶을 사는 삶.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길이고, 그러한 깨달음의 길에는 하나의 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도 많은 깨달음의 길이 있다.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길, 껍데기를 깨는 길... 하나가 아니다. 다ㅏ 자기만의 길이 있다. 이 길들을 가는 순간 벽지만 바꾸던 삶에서 벽을 부수는 삶으로, 벽을 부수어 길을 내어 그 길을 가는 삶으로 바꿀 수가 있다.

 

그래 나에게 무슨 껍데기가 그리도 무겁고, 무섭겠는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밖의 권력에 휘둘리거나, 안의 편안함에만 안주하는 그런 삶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20년 전에 나온 시집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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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우리나라 우파를 불가사리에 비유한 이 책.

 

죽지도 않는, 가리지 않고 쇠란 쇠는 모두 먹어치우는 그런 괴물.

 

하여 불가살(不可殺)이라고 한다고 하지.

 

도대체 제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사라져야 할 때가 되어도 사라지지 않는 괴물. 이 괴물이 불가사리인데...

 

왜 요즘 다시 불가사리란 말이 떠올랐지.

 

지금도 우리 사회엔 이런 불가사리가 살아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지.

 

세월호.

 

야당이 합의를 해줬단다. 수사권도 없는 그런 특위를... 지금대로 나가면 하나마다한 수사를 하게 될 것이고, 또 제대로 된 책임규명도 못하게 되어 유야무야 넘어갈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마치 불가사리 같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게걸스럽게 먹으며 죽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의료민영화 작업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것도 역시 불가사리다. 우리들의 피를 빨아먹을 것이 뻔한데, 추진하겠다는 집단이 있다.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죽었다 싶었는데, 다시 살아남아 우리를 괴롭힌다. 그걸 추진하는 자들... 불가사리 같다.

 

군대 폭력... 정말 불가사리다. 없어지지 않는다. 단지 은폐되었을 뿐이다. 지금과 같은 제도의 군대는 불가사리처럼 젊은이들의 목숨을 빨아들일 것이다.

 

싱크홀... 정말.. 왜 싱크홀이 일어나는지 규명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무언가 막는 집단이 있나? 그런 불가사리 같은 집단.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불가사리들.

 

지금 조금씩 나타나는 싱크홀이 어느 순간 거대해지면 그 때는 대책이 없을텐데...

 

마찬가지로 4대강 녹조... 핵발전소...군사기지...개발이라는 명목의 환경 파괴... 노동유연화란 이름의 정리해고 등등

 

정말로 우리나라 국민들을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불가사리들이 많다. 이 불가사리들... 어떻게 퇴치해야 하나...

 

이를 퇴치하기 위해서 불가사리들의 습성을 명확히 파악해야 하는데... 그걸 해야 할 정치권은 불가사리들에 속수무책이니... 결국 설화 속에서도 불가사리는 지배층이 아닌 쪽에서 해결을 했으니.. 우리도 우리가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하겠지.

 

풀뿌리 민주주의... 우선은 그것부터 시작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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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헌책방에 갔다. 언제나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

 

나를 떠난 인연들과 새로이 나를 만난 인연들.

 

그런 인연들이 언제나 또다른 인연을 만들기 위해 있는 곳. 헌책방.

 

요즘은 헌책방 찾기가 많이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아직 곳곳에 헌책방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아마도 지구를 살리는 몇 가지 대상들 중에 도서관도 있지만, 헌책방도 도서관 못지 않게 기여를 하리라.

 

책을 소장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와 책이 순환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곳, 그곳이 바로 헌책방 아니던가.

 

참으로 많은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늘 하던 식으로 시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책들을 살핀다.

 

동네 서점이든, 인터넷 서점이든 시집을 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시집은 점점 뒤로 밀려나 아주 유명한 시인들의 시집이 아니면 서점에서 제 자리를 잡고 인연을 기다리기가 힘들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누군가의 마음에 담겨 있다가 새로운 사람의 손에, 새로운 사람의 마음에 담기기 위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시집들.

 

시집을 고를 때 여러 시집을 펼쳐보아 마음에 드는 시가 있거나, 또는 제목이 마음에 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시인이 친숙하거나, 또는 출판사가 믿음직스러울 때 그 시집을 손에 들게 되는데...

 

이형기의 이번 시집은 이형기란 시인 이름만으로 고르게 된 시집이다.

 

제목이 "그해 겨울의 눈"

 

오래되어서 이제는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일테고... 이형기 시인은 아마도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이기에 너무도 유명하다고 할 수 있고.

 

시인들은 평생에 걸작을 단 한 편만 써도 좋다고 하던데... 이형기 시인은 자신이 걸작이라고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낙화"란 시로 이미 전국민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시인이니...

 

시인으로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번 시집에서는 올 여름, 이 계절에 맞는 시를 발견했다. 그래, 이것이 바로 꽃이다. 꽃을 보고, '낙화'를 노래한 시인에게서 이번에는 절정을 맞아 자신을 터뜨리는 꽃에 대한 시를 발견한 기쁨.

 

무더운 여름... 이 시 좋다.

 

 

 

얼마전 어느 곳에 갔을 때 나무에 새빨갛게 달려 있는 꽃들... 아, 배롱나무꽃이구나! 목백일홍이구나! 이제 정말 여름이구나 했었는데...

 

그 꽃에 대한 감상으로 이 시는 제격이다.

 

백일홍(百日紅)

 

지리산 산허리가 무너져 내린

그 해 여름

녹음은 징기스칸의 군대처럼

마을을 덮쳤다.

 

대낮에도 하늘을 가린 그들의 위압에

돌담은 주저앉고

지붕은 납작하게 엎드린 오후 세 시

팔월은 우중충한 웅덩이처럼

숨을 죽였다.

 

그리하여 여름은 두엄으로썩고

썩은 여름의 진액을 빨아들인

땅은 취했다.

더운 입김을 내뿜었다.

 

그러자 갑자기 나무 한 그루

온몸을 폭탄처럼 터뜨리고

꽃을 피웠다.

백일홍이었다.

 

이형기 시선, 그해 겨울의 눈. 고려원. 1988년 3판. 203쪽.

 

어떤가... 여름.. 그 여름에 자신의 꽃을 활짝 피운 목백일홍.. 배롱나무꽃.. 좋지 않은가.

 

덥다. 그 더움이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도 있음을... 이 시를 통해 느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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