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헌책방에 갔다. 언제나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곳. 그곳에서 나는 새로운 인연을 만난다.

 

나를 떠난 인연들과 새로이 나를 만난 인연들.

 

그런 인연들이 언제나 또다른 인연을 만들기 위해 있는 곳. 헌책방.

 

요즘은 헌책방 찾기가 많이 힘들어졌지만, 그래도 아직 곳곳에 헌책방이 남아 있어 다행이다.

 

아마도 지구를 살리는 몇 가지 대상들 중에 도서관도 있지만, 헌책방도 도서관 못지 않게 기여를 하리라.

 

책을 소장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와 책이 순환되어야 한다는 당위가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은 곳, 그곳이 바로 헌책방 아니던가.

 

참으로 많은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늘 하던 식으로 시집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을 중심으로 책들을 살핀다.

 

동네 서점이든, 인터넷 서점이든 시집을 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시집은 점점 뒤로 밀려나 아주 유명한 시인들의 시집이 아니면 서점에서 제 자리를 잡고 인연을 기다리기가 힘들다.

 

누군가의 손을 거쳐, 누군가의 마음에 담겨 있다가 새로운 사람의 손에, 새로운 사람의 마음에 담기기 위해 가지런히 꽂혀 있는 시집들.

 

시집을 고를 때 여러 시집을 펼쳐보아 마음에 드는 시가 있거나, 또는 제목이 마음에 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시인이 친숙하거나, 또는 출판사가 믿음직스러울 때 그 시집을 손에 들게 되는데...

 

이형기의 이번 시집은 이형기란 시인 이름만으로 고르게 된 시집이다.

 

제목이 "그해 겨울의 눈"

 

오래되어서 이제는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일테고... 이형기 시인은 아마도 국어 교과서에서 배운 시인이기에 너무도 유명하다고 할 수 있고.

 

시인들은 평생에 걸작을 단 한 편만 써도 좋다고 하던데... 이형기 시인은 자신이 걸작이라고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낙화"란 시로 이미 전국민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시인이니...

 

시인으로서 성공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번 시집에서는 올 여름, 이 계절에 맞는 시를 발견했다. 그래, 이것이 바로 꽃이다. 꽃을 보고, '낙화'를 노래한 시인에게서 이번에는 절정을 맞아 자신을 터뜨리는 꽃에 대한 시를 발견한 기쁨.

 

무더운 여름... 이 시 좋다.

 

 

 

얼마전 어느 곳에 갔을 때 나무에 새빨갛게 달려 있는 꽃들... 아, 배롱나무꽃이구나! 목백일홍이구나! 이제 정말 여름이구나 했었는데...

 

그 꽃에 대한 감상으로 이 시는 제격이다.

 

백일홍(百日紅)

 

지리산 산허리가 무너져 내린

그 해 여름

녹음은 징기스칸의 군대처럼

마을을 덮쳤다.

 

대낮에도 하늘을 가린 그들의 위압에

돌담은 주저앉고

지붕은 납작하게 엎드린 오후 세 시

팔월은 우중충한 웅덩이처럼

숨을 죽였다.

 

그리하여 여름은 두엄으로썩고

썩은 여름의 진액을 빨아들인

땅은 취했다.

더운 입김을 내뿜었다.

 

그러자 갑자기 나무 한 그루

온몸을 폭탄처럼 터뜨리고

꽃을 피웠다.

백일홍이었다.

 

이형기 시선, 그해 겨울의 눈. 고려원. 1988년 3판. 203쪽.

 

어떤가... 여름.. 그 여름에 자신의 꽃을 활짝 피운 목백일홍.. 배롱나무꽃.. 좋지 않은가.

 

덥다. 그 더움이 이렇게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도 있음을... 이 시를 통해 느낄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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