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이 마음에 든다.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 안과 밖으로 나뉘었다는 물리적인 이야기말고, 우리네 삶 자체도 안과 밖으로 나뉠 수 있다는 이야기.
자신 속으로만 침잠하는 사람과 사회 속에서만 자신의 삶을 발견하는 사람.
그러나 사람은 안과 밖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존재이니, 우리는 안에 있으면서 밖에도 역시 있어야 한다.
시인은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우리가 지닌 껍데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껍데기가 무거워서, 또는 무서워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 말에 나는 껍데기를 아직도 지고 사는 내 자신의 삶이 떠올랐다. 나에게 껍데기는 무거운 걸까? 아니면 무서운 걸까?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얼핏 보면 우리가 안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은 <껍데기가 무거워서> 혹은 <껍데기가 무서워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껍데기가 그렇게도 무거워서 껍데기가 그렇게도 무서워서 우리는 밖으로 솟구쳐 날으지 못하는가? ...습관적으로 자기 영토(땅)를 고정하고 공간만들기를 좋아하고 권력이 만들어놓은 제도와 관습 속에서 속령화된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고자하는 정주민의 욕망이 우리가 안에서 밖으로 나가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이 시집은 아마도 우리를 제도화된 욕망 속에 가두고 그럼으로써 우리를 폐쇄된 코스모스(안)에 주둔시킴으로써 우리를 마음껏 지배하고 있는 얼굴 없는 권력의 마수, 혹은 그것에 질질 끌려가는 내 욕망의 파시즘에 관한 해부의 기록이다.
(김승희,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계사.1993년 1판 5쇄 '자서'에서
그래... 어쩌면 안이 주는 편안함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밖을 그냥 관음증 환자처럼, 또는 텔레비전의 중계방송처럼 보기만 하려고 하는지도 모른다. 참여는 하지 않은채.
세상이 변하지 않음을 개탄하면서, 밖의 위험성에 대해, 밖의 야만성에 대해서 말만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편안함에 이끌려서.
시가 찰나를 노래하지만, 그 찰나가 영원하다는 생각을 했는데...이 시집에서도 지금...바로 우리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 시를 보고서 역시, 시는 찰나를 노래하지만 영원을 보여주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안과 밖... 그것을 가로지는 벽. 그 벽에 대해서...
벽지 바꾸는 시대
지금은 벽을 부수는 시대가 아니다
벽을 부수는 시대가 아니다
기울어진 벽을 부수고
새벽을 짓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벽을 부수려는 시대는
지나갔다
상복을 입은 여인들이 울고 있다
4월에도 울었고
5월에도 울었고
6월에도 울었고
상복을 입은 여인들이 일년 내내 달력
속에서 울고 있는 울먹임의 역사
이런 역사를 만장과 더불어
벽장 속에 깊이 올리고
지금은 새로운 벽지를 바꾸려고
도배집 앞에 줄지어 서서
새로운 무늬 벽지를 고르는 시대
어떤 아름다운 무늬의 벽지가
벽의 결함을
감춰줄 것인가
(벽의 파손을 막아줄 것인가)
그런 것을 꿈꾸는
넋 나간 시대
그런데, 너, 너,
너는 또 뭐냐?
충치로 구멍 숭숭 뚫린 썩은 이빨과
풍치로 화농 흘러 뭉그러진
검은 잇몸(구강의 총체적 난국)
위에
아침 낮 저녁으로
치석 방지 치약
니코틴 제거 치약
딸기향을 첨가한 향긋한 후르츠 향의
온갖 치약거품들을
쓰러질 듯 갸우뚱 걸린 벽거울 앞에 서서
황홀하게 황홀하게 도배하고 있는 너는?
김승희.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계사. 1993년 1판 5쇄. 74-75쪽
벽을 바꾸어야 할 시대에 겨우 벽지만 바꾸고 있는 모습. 우리가 지금 그렇지 않은가. 내가 그렇지 않은가. 이 시에서 처음에는 사회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다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온다.
벽지만 바꾸는 사회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없이 겨우 치약만 바꾸는 나는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안과 밖이 이렇듯이 맞물려 돌아가기 때문에 세상은 벽지만 바꾸고도 근본적인 것이 바뀐 양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이 시에서처럼,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았는데, 벽지만 바꾸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제는 벽지가 아닌 벽을 바꿀 생각도 해야 하는데... 20년 전에 쓰여진 시가 지금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니...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어야 햇는데, 우리는 그동안 벽지만, 무늬만 바꾸고 있었단 말이지...참...
그래서 벽지가 아닌 벽을 바꿀 수 있는 시대(밖)가 되기 위해서는 안에서 나와야 한다. 나와서 살아야 한다. 그래야 밖이 변한다.
그 점을 이 시집에서 마지막 시로 이야기하고 있다. 희망의 끈, 놓지 않고 있다.
그 시(보리수나무 아래로)의 마지막 부분.
(전략)
쓰러질 때까지 사랑했던 사람
쓰러질 때까지 일했던 사람은
그가 어느 나무 아래 길을 걸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보리수나무 아래 길을 걸은 것이라고
이제야 비로소 난
모든 사람의 길과 나 자신의 길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듯하다.
모든 길이란, 아마도, 나,
자신의 보리수나무 아래로 가는
길이므로.
김승희.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계사. 1993년 1판 5쇄. 122쪽. '보리수나무 아래로' 부분
깨달음의 길... 그것은 나와서 걷는 일이다. 껍데기를 깨고 나와 사는 일이다. 어떤 삶? 자신의 전생애를 건 삶을 사는 삶. 그것이 바로 깨달음의 길이고, 그러한 깨달음의 길에는 하나의 길만이 존재하지 않는다.
너무도 많은 깨달음의 길이 있다.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길, 껍데기를 깨는 길... 하나가 아니다. 다ㅏ 자기만의 길이 있다. 이 길들을 가는 순간 벽지만 바꾸던 삶에서 벽을 부수는 삶으로, 벽을 부수어 길을 내어 그 길을 가는 삶으로 바꿀 수가 있다.
그래 나에게 무슨 껍데기가 그리도 무겁고, 무섭겠는가.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하고, 밖의 권력에 휘둘리거나, 안의 편안함에만 안주하는 그런 삶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20년 전에 나온 시집이지만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