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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ㅣ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대는 셋. 하나는 만엔 원년이라고 할 수 있는 1860년. 이때 농민봉기가 일어난다. 폭력이다. 둘은 패전 직후. 우리나라로 치면 해방직후다. 이때는 조선인 부락을 습격하는 일본인들의 모습. 또다른 폭력이다. 셋은 1960년. 미국과 안보조약을 체결하는 것에 반대하는 시위. 이것 역시 폭력 시위다.
소설은 1960년대로부터 시작한다. 주인공이 거쳐온 시대를 거쳐 그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아니, 그 시대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지 못하는 지식인의 부끄러움 - 해설에서는 수치심이라고도 하는데 -이 나타나 있다.
전후 일본, 이제 경제발전이 되어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일본이지만 지식인들은 미국에 종속되어 있다고 느끼고, 또한 과거 자신들이 벌인 전쟁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는 생각도 지니고 있었으리라. 그것이 그들을 수치심 속에 살게 했을지도 모른다.
자신들을 패배시킨 나라에 의존하는 모습. 그러한 수치심을 만엔 원년에 일어났던 농민봉기와 연결짓는다. 농민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일으킨 봉기. 폭력이긴 하지만, 농민들을 누르고 있었던 것 또한 폭력 아니던가. 커다란 폭력에 대항하는 폭력. 여기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농민들. 학살당하는 농민들. 그들을 지도했던 서술자의 증조부의 동생은 행방불명이 된다. 홀로 다른 곳으로 갔다고, 하여 그 후손들은 수치심을 지니고 있었는데...
패전 직후 제자리를 잡아가는 조선인 마을을 습격하는 골짜기 일본 사람들. 이들에 의해 조선인 한 명이 죽게 된다. 과연 정당한 폭력인가? 자신들의 패전에도 잘살아가는 조선인들에게 증오심을 품는 것은 그간 자신들이 조선인들에게 가했던 폭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다. 하여 서술자의 형 S는 두번째 습격에서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는 폭력을 폭력으로 이어가는 것에 반대했던 것이다.
첫번째 조상은 폭력 저항을 주도하다 사라지고, 두번째로 형은 폭력 현장에서 목숨을 잃는다. 이에 다시 세월이 흘러 1960년대 동생 다카시는 마을 청년들을 선동해서 조선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을 습격한다. 또다른 폭력이다. 이 폭력은 양쪽으로부터 자신을 몰아 스스로 죽음의 길로 가겠다는 동생 다카시의 의도이기도 하다.
이런 폭력을 추적하면서 서술자는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사실. 그런 폭력이 아니라 폭력을 끊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현대에 동생 다카시에 의해 벌어진 폭력은 더이상 다른 폭력을 부르지 않는다. 조선인 주인은 그 일을 무마하고 자신이 할 일을 한다.
마찬가지로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던 둘째 형도 마찬가지다. 그 형 역시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양쪽 어디에 서지 않고 폭력의 한 가운데에 자신을 놓아두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농민 폭동, 아니 혁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을 주도했던 증조부의 동생은 어떤가?그는 폭력을 통해서 얻은 것도 있었지만, 많은 농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거기에 대한 책임. 결국 지하 골방에서 평생을 보내는 것으로 참회를 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참회가 되었을지는 의문이다.
다만, 그는 글을 통해 누구도 죽지 않는 혁명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하는데, 이는 오에겐자부로가 폭력이 아닌 평화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 그이기에 일본의 재무장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고, [오키나와 노트]나 [히로시마 노트]와 같은 폭력으로 인해 피해를 본 장소를 찾고 그런 민중들에게 지지를 보내게 된다.
만엔 원년의 폭동이 정당한 폭력이었는지의 여부를 떠나 폭력은 폭력을 부른다는 점, 혁명은 어떠해야 하는가, 혁명을 이끄는 사람을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행동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 결국 고민하고 번뇌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끝까지 민중을 책임진다는 것이 자신의 죽음으로 책임을 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죽음은 자신의 두려움, 책무를 똑바로 들여다보고 자신이 행한 결과이기는 하겠지만, 그것이 남들에게는 그러한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에 나온 친구의 자살 모습이 바로 그런 점을 보여주지 않을까.
진실을 말한다는 것, 진실을 본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그것이 어떠한 폭력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것, 어쩌면 진실은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더 힘든 과정을 거쳐 이루어진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