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라 - 2024 제7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작
김아인 지음 / 허블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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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전세계가 팬데믹을 겪었다. 아마도 이러한 질병이 코로나19로만 끝나지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한다. 암울한 현실이 반복될 수도 있다. 이것이 인간과 다른 존재들의 거리가 무너진 데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거리의 붕괴는 바로 인간이 추구한 과학기술에 있다.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인간의 삶이 예측하지 못하는 질병을 유발하고, 그것이 인간의 삶을 옥죄게 된다.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자 하는 일들이 인간을 더 힘들게 하는 역설. 그럼에도 그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


이제는 인공지능이다. 이보다 더한 기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지금도 쓰이고 있는 기술을 더욱 밀어붙이고 있다. 인간 냉동기술. 죽음을 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


예로부터 있었다. 영생을 추구하기 위한 많은 방편들, 약물들을 발견 또는 개발하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런데도 모두 실패했다.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니까. 아니, 유한해야 하니까. 그것을 깨뜨렸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할 수 없다.


이 지구에 죽지 않은 인간들이 계속 태어나고 살아간다면? 과연 지구가 버틸 수 있을까? 우주를 개척하면 된다고? 하지만 우주 역시 무한하지 않다. 죽음이 없는 존재는 무한증식할 수밖에 없다. 그들을 채울 공간이 있을까? 


이런 상상은 하지 않는다. 육체를 지닌 인간이 무한하다면 문제가 되니, 소설은 육체를 소멸시키고 영혼(정신)만 남긴다. 인간을 데이터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유한한 공간에 무한을 수용할 가능성이 있다. 


뇌 또는 영혼, 정신이 데이터로 남아 있다고 살아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하지 말자. 그렇게라도 인류를 살아남게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라는 질문은 윤리, 철학과 연결되는 질문이다.


소설은 그 질문은 독자에게 남겨두고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육체와 분리된 정신이 아니라 육체까지도 보존하는 기술이 있다면? 지금 냉동기술이 사실 그러한데, 지금보다 발전한 모습이 무엇이냐면, 이 소설에서는 냉동된 육체를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정신은 데이터화되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세대에 전염병을 치유할 수 있는 치료제가 나오면 육체를 깨어나게 해서 계속 살아가게 하면 된다. 여기까지가 소설에서 나온 과학기술의 발전이다.


이런 과학기술을 토대로 운영되는 집단은 권력을 지닌다. 인간에게 신과 같은 위치에 선다. 과학기술이 신이라면 이를 다 받아들일까? 세상에서 신을 섬기는 자들 중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학기술을 파괴하는 것이 신에 대한 인간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집단들. 


또한 과학기술이 이윤으로만 쓰이는 것을 막고, 많은 사람을 구하는 쪽으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본래 추구했던 목표로 나아가게 해야 한다고 여기는 집단도 있다. 그리고 인간의 유한한 생명을 받아들이고, 무한을 추구하는 행위가 잘못되었으니 그러한 과학기술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자, 당신은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소설 속 인물인 페이, 하라바야시 가스미, 황신부는 이들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자신이 어떤 입장에 설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웨이쉬안이 있다. 거대 기술 회사에서 장의사로 일하는(장의사라고 하기보다는 정신이 추출된 나머지 육체를 처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 웨이쉬안. 그가 페이의 죽음 이후에 겪게 되는 일들이 바로 이 다양한 관점의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엮이면서 겪게 되는 일이다.


소설은 어떤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페이도, 가스미도. 다만 웨이쉬안 스스로 결정한다. 자신의 의지로 자신은 어떤 세상을 살아가려 하는지를...


그는 자신의 선택과 같이 남들에 의해서 다른 사람의 삶도 선택되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긴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한다. 스스로 결정하도록. 거대과학기술 회사인 AE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던 페이의 삶, 육체를 보존하면서 정신과 연결시키는 기술을 개발한 가스미, 그러한 기술은 파괴되어야 한다고 하는 황신부. 이들 역시 자신들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웨이쉬안의 선택도 마찬가지다. 다만, 그는 다른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길을 놓아두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내가 내 삶을 결정하듯이, 다른 사람들도 각자의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결국 세상은 더욱 발전할 것이고, 온갖 과학기술이 나올 것이다.


그러한 세상에서 선택은 온전히 내 몫이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이 온전한 내 몫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하고, 어떤 집단의 이익에만 종사해서도 안 되며,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인류가 대처할 수 없는 감염병이 유행하는 디스토피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이 소설에서,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를 이 소설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현실에서 상용되고 있는 기술들도 있으니, 그것이 꼭 먼 미래의 일은 아니라는 생각. 그래서 더더욱 선택의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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