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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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너무도 많이 들었던, 연극으로 상연이 많이 되었다고 이야기만 들었던 작품.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일했으나 결국은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노동자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는데...

 

내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주인공 윌리 로먼은 세일즈로 평생을 살아오지만 그다지 큰돈을 벌지 못한다. 물론 잘 나갈 때는 좀 벌 때가 있었지만, 그것은 그가 벌어온 돈을 평균냈을 때 이야기다. 그는 평생을 직장에 다니면서 물건을 팔면서 간신히 자기 집을 마련한다. 그것도 융자로.

 

융자가 끝날 때쯤 그의 인생도 끝난다. 아들 둘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자신은 해고되고, 그러나 그는 과거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단지 노동자들이 소모품처럼 소모되는 세상에 대한 풍자라고 하는데... 우선 윌리는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그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세상이 변해가는데 과거에만 사로잡혀 있다. 사실 노동자들이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기는 힘들다. 그래서 세상이 급격하게 변할 때 따라가지 못해 해고되는 노동자들이 많다. 이 희곡의 주인공 윌리도 그러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자식에 대한 기대도 변하지 않는다. 자식에 대한 무한한 기대로 인해 큰아들 비프는 아버지의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생각에 괴로워한다.

 

자식의 인생에 부모의 기대를 걸어놓음으로써 자식이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데 걸림돌로 작용하게 만든다. 우리들 대부분 부모가 하는 그런 실수를 윌리 역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도 그렇지만 아들들이 돈을 잘 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사업을 하면 성공할 것이라 생각하고. 예전에만 사로잡혀 있는 그에게 큰아들 비프는 현실을 바로보게 한다. 현실은 그리 만만치 않음을.

 

그러나 윌리는 아들이 잘 살 거라고 믿고 아들에게 돈을 마련해 주기 위해 자살을 택한다. 그가 들었던 보험료를 아들이 지니게 하기 위해서다. 그 아들이 그 돈으로 성공하기를 바라면서.

 

세일즈맨은 물건을 파는 사람이다. 영업사원이라고 하면 된다. 자기 회사 물건을 다른 사업체 사람에게 홍보하여 사게 만드는 사람이다. 이들이 물건을 판 대가로 돈을 받고 그것으로 생활을 해나간다. 그러다 그가 물건을 팔 수 없게 될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목숨밖에 없다.

 

자본주의는 노동할 힘이 있을 때는, 또는 영업을 할 능력이 있을 때는 자신의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보험이라는 이름으로 목숨을 팔 수도 있게 하고 있다. 대다수 노동자들이 노년을 불안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죽을 때까지 돈을 벌지만 죽을 때까지 집값을 값아야 하는 처지. 그렇다고 자식들이 번드르하게 출세를 하냐 하면 그것도 아닌 상태. 자식들의 앞날까지 걱정해야 하는 노년.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이다.

 

이 희곡의 주인공 역시 그런 상황에 처한다. 그럼에도 둘째 아들 이름이 해피로 나오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희망은 있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희곡에 나오는 해피는 윌리의 또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희망적인 소리를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만 하는 소리. 내면에는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

 

사실 우리의 현실도 그렇지 않은가. 노동자들의 자식들이 과연 미래에 대해 밝은 희망을 지닐 수 있는 사회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오히려 비프가 솔직하다. 그는 자신을 알게 된다. 대장으로 여기던 아버지의 위선적인 모습을 보고,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완전히 포기하고 만다. 하여 대학 진학도 물건너 가고. 또 가는 일터마다 도둑질을 하여 쫓겨나거나 감옥에 가기도 한다. 마지막에 전에 근무하던 사장을 찾아가지만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현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처음에 비프가 공을 훔쳐 왔을 때 윌리의 반응이 비프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윌리는 공을 훔친 비프를 크게 야단치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오히려 연습을 더 하면 된다고 한다. 거기에 유급 위기에 처한 비프에게 공부에 대해서, 적어도 유급을 하지 않아야 함을 제대로 인식시키지 않는다. 그러니 비프가 방황하는 것에 대한 책임은 윌리에게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아들 해피가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공허한 울림으로 들리는데, 비프는 그렇지 않다. 그는 이제 끝까지 갔다. 여기에 아버지의 죽음까지 겪었다. 그리고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게 됐다. 비록 앞으로의 삶도 힘들겠지만, 그는 이제 자기 삶을 살아갈 것이다.

 

평생을 노동에, 그리고 가족을 위해 일을 하고, 죽음도 가족을 위해 선택하는 세일즈맨. 그가 살아온 인생이 도덕적이고 위대하지는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산 삶임은 확실하다. 그런 사람들이 노년을 걱정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일은 가족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회가 책임져야 할 일이다. 이 희곡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삶의 무게에 짓눌려 살고 있다. 적어도 이제는 그래서는 안 되지 않나.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 요즘도 울림을 주는 희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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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삶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3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지음,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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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소설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는 살기 힘든 나라였을 것이다. 전쟁에서 패했고, 파시즘이 물러갔다고는 하나 민주적인 정부가 제대로 들어서지는 못했을 거고, 넘쳐나는 빈민들을 제대로 구제하지도 못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노동자를 위한다는 공산당이 제대로 활동을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소설에서 공산당 지부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빼돌리는지가 나오는데, 이것이 당시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나마 그들은 민중들이 고난을 당할 때 현장에 함께 있어주니, 민중을 위한다는 슬로건을 어느 정도 실천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은 민중들에게 절대로 우호적이지 않다. 경찰에게 체포될 위기에 처한 카고네를 마을 여자들이 단합하여 구해주자 다음 날 저녁 경찰들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간다.

 

심지어 옷을 건네주러 온 가족까지도 잡아가 버리는 횡포를 저지르는데, 없는 사람들은 공권력에게도 힘없이 당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이 도덕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전상국이 쓴 '우상의 눈물'에서 재수파 대장인 기표를 순수 악이라고 표현하는데, 이 소설에 나오는 톰마소가 사는 동네 아이들도 이런 순수 악에 해당한다.

 

그들에게 도덕은 의미가 없다. 당장 하루하루를 먹고 살기 힘든 그들에게는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해 그들은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한다. 도둑질부터 시작하여 강도, 몸 파는 일까지 안 하는 일이 없다.

 

이들을 도덕 잣대로 재면 이해할 수가 없다. 도덕이 이들을 밥 먹여 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나이를 먹어간다. 감옥을 제 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게 되고.

 

여기에 예외적인 인물이 주인공 톰마소이다. 톰마소 역시 부랑아일 수밖에 없다. 그 역시 온갖 못된 짓을 다 한다. 심지어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갈 돈을 마련하기 위해 창녀의 돈을 강탈하기까지 하고, 동성애자에게 몸을 팔고 위협해서 돈을 뜯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조금씩 변화해간다. 여자 친구인 이레네와 행복한 가정을 꾸밀 생각을 하는 것이다. 빈민촌에서 현재만이 있던 생활에서 미래를 보기 시작한다. 그에게 미래가 보인다. 그 순간 그는 현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고,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을 다시 보게 된다. 기독교민주당에 들어가 어떻게든 줄을 잡아 생활기반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이 결핵으로 인해 병원에 다녀온 뒤에는 공산당에 입당하게 된다.

 

자기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볼 수 있는 눈, 그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다만 여전히 못된 행동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한다. 사람이 어떻게 한번에 변하겠는가. 그러나 그는 나쁜 행동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하지만, 마지막에 홍수가 난 빈민촌에 자진해서 사람들을 구하러 간다. 친구들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그가 구한 사람이 창녀라는 사실,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피난을 온다는 서술, 가장 없는 그래서 몸밖에는 팔 것이 없는 창녀를 구하는 톰마소의 행동은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를 보여준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니 말이다.

 

미래를 살아갈 어린이를 구해주는 모습에서도 마찬가지를 느낄 수 있고. 그러나 그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지지리 가난한 생활에서 변변한 학력도 없고, 기술도 없고, 배경도 없는 톰마소가 청렴하지 않은 사회에서 과연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가 한 이타적인 행동은 결핵을 심화시키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죽을 수밖에 없다. 빈민촌에서 살아가는 삶은 나쁜 짓을 끝까지 해도 사살되거나, 자살로 삶을 마감하거나 감옥에 수감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고, 여기서 벗어나 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려 해도 결국 사회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니 톰마소는 죽을 수밖에 없다. 그가 살 장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홍수가 끝난 뒤 정치인이 와서 '노상 하는 약속을 남발하고 갔다'는 표현처럼 이들이 살아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

 

'순수 악'이 생기지 않게 하는 방법은 단순하다. 이들이 생계로 인해 고민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다. 생계 문제가 해결이 된 다음에 생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도덕은 생계가 해결된 다음에 나오는 것이다.

 

톰마소 역시 이레네와 만나는 것, 새로운 생활을 설계해나가는 것 역시 생계가 해결된 다음, 생활의 문제로 접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생계는 스스로도 해결하려고 노력해야지만, 제도,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함께 가야 한다.

 

함께 가지 않고 개인의 노력으로만 맡기면 해결되지 않는다. 톰마소처럼 결국 죽음에 이를 뿐이다. 우리나라 빈곤 문제가 많이 해결되었고, 복지 정책도 점차 풍성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갈 길은 멀다.

 

힘든 사람들이 힘들게 살아가는 것을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지 말고 사회제도적인 측면에서 바꿀 수 있는 면을 함께 고민하고 실행해 나가야 한다.

 

파솔리니가 쓴 "폭력적인 삶".  

 

도시 변두리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 최소한 도덕이라는 윤리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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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人 - 2003.제1호
시인 편집부 지음 / 시인(도서출판)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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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 들러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제목이 한자로 되어 있는 책 '詩人'을 만났다. 어, 이런 잡지가 있었네. 1호부터 몇 권이 있었는데 우선 1권을 펼쳐보니 '조태일' 편이다.

 

내게는 '국토'의 시인으로 기억에 남은 시인. 사서 읽다보니, 시인이라는 시잡지를 조태일 시인이 만들고 운영했더란다. 까맣게 모르고 있던 사실.

 

엄혹했던 시절 없는 돈으로도 시 전문지를 냈던 조태일 시인이 단지 편집자로만 남지 않고 자신도 많은 시집을 냈으니... 그의 시집 중에서 '국토'는 내가 젊었을 적 많이 읽은 시집이었는데... 여전히 '국토'에 실린 '국토 서시'라는 시는 기억 속에 남아 있고.

 

그러니 다시 시인이 복간되면서 1권에 조태일 시인을 특집으로 삼은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이미 고인이 된 시인이기에 더욱 그렇다.

 

이 잡지는 조태일 시에 대한 평이 앞에 나온다. 조태일 시인이 우리나라 시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그가 쓴 시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비평가들이 밝혀주고 있다.

 

다음에는 이동순 시인이 선정한 조태일 시35편이 실려 있다. 조태일 시인이 생전에 발간한 시집 중에서 이동순 시인이 고르고 고른 시들이니, 이 시들을 읽는 재미도 좋다.

 

조태일 시 다음으로는 인간 조태일을 이야기하는 글들이 실렸다. 인간적인 모습에서부터 시인으로의 모습 등 다양한 조태일 시인의 모습이 나온다. 그렇게 그를 추모하는 글들이 이 잡지에 실려 있고, 또 조태일 시문학 기념관을 짓는 과정에 대한 글도 있다.

 

이렇듯 우리나라도 시인을 대우하는 사회가 된 것인지, 각 지방에서 지방을 대표하는 시인들의 기념관을 만들고 있는데...

 

조태일 기념관은 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 나중에 머물기도 한 곳에 기념관이 들어섰으며, 그의 시가 출발한 지점이라 할 수 있는 곳에 기념관이 있고, 또 조태일은 우리가 기념할 만한 시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면 굳이 '시인'이란 잡지를 복간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시 전문지라는 위상에 맞게 그것도 시인들이 직접 쓴 시들이 실려 있다.

 

한편 한편 시들을 감상할 수도 있고, 시인들의 글씨 속에 묻어나는 시정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좋다.

 

물론 시 전문지를 내면 돈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돈이 되지 않더라도 우리 삶을 풍요롭게는 할 수 있다. 그것이 아직도 시가 사라지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겠다. 꾸준히 시집이나 시 전문지를 내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렇듯 우리나라 시인을 기리고, 또 새로운 시들도 만나볼 수 있는 시잡지 '詩人'... 읽으면서 무척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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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0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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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5 10: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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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를 놓치다 - 2012년 제1회 민중문학상 수상작품집
이경자 외 지음 / 민중의소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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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민중문학상 수상작품집이라는 이름을 지닌 책이 중고 서점에 나왔다. 망설이지 않고 구입했다. 제1회 아니던가. 그러면 제2회, 제3회가 있어야 하는데, 1회가 2012년이니 지금 2018년이면 여러 책이 나왔어야 하는데, 들은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책 소식을 접하는 경로가 좁기도 하겠지만, 이상하게 제1회 민중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있다는 것도 우연히 알게 되었으니... 검색을 해보는데 2회, 3회 책이 나오지 않는다. 공모한다는 기사도 없다. 단 한 번으로 끝나버리고 만 민중문학상인가?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귀한 책이다. 내게는. 민중들 삶에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한 작품들이 이 수상집에 실려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다. 수상집이라는 이름이니 단편소설들이 묶여 있다. 여기에 시 수상작도 있고.

 

민중문학상을 이경자가 수상했다는데, 수상작은 "순이"라고 한다. 장편소설이라고 하는데, 이 수상집에는 "순이"는 실려 있지 않고 작가가 뽑은 '언니를 놓치다'라는 소설이 실려 있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다룬 소설인데, 여전히 진행형인 이산가족 문제를 마냥 기쁨의 차원에서 서술하지 않고 이산가족이 만날 때 느낄 수 있는 위화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위화감에도 불구하고 핏줄이란 것이 얼마나 짠한지를 결말 부분에서 느낄 수 있는데...

 

의도하지 않는 헤어짐이 55년이란 세월을 갈라놓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한 언니를 기다리면서 평생을 살아온 동생이 이산가족 상봉장에서 언니를 만났을 때 느끼는 이질감, 위화감, 그리고 속절없음 등이 잘 드러나고 있다.

 

다른 세계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에도 다른 세계 속에서도 핏줄이라는 어쩔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우리가 해결해야 할, 이렇게 드문드문 만나는 것이 아니라 늘 만날 수 있는, 이산가족 상봉이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일상이 된다면 이들이 처음에 느낀 이질감은 곧 동질감으로 바뀔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한다.

 

다른 소설들도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신인상을 받은 송하경의 '가족의 힘'은 요즘 '#미투 운동'과 연결지어 생각하면 과연 무엇이 가족인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 소설이 2012년 작품이 지니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면, 지금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묻어야 하는 비밀은 없다. 어리숙한 삼촌이라는 설정은 가족을 해체할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일어나는 폭력이 일상에 묻혀, 가족에 묻혀 얼마나 많이 자행되고 있는지를 이 소설은 생각하게 해준다. 할머니의 삶, 그리고 소설의 화자인 내가 살아가는 삶이 이상하게 겹쳐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마음을 서늘하게 하는 소설들이 많이 실려 있다. 신인 우수작 작품들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기에 마음에 찬바람이 일게 한다.

 

김대현이 쓴 "김상훈전"은 학교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결국 독재정권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의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그들과 가장 다른 쪽에 있는 수구들을 뽑아줄까 하는 것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는 소설이다.

 

이들은 폭력을 벗어날 수 없다면 기존의 폭력을 선호한다. 바꾸어서 다시 폭력을 당하느니, 습관이 된 폭력은 만성이 되어 편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바로 시민이 신민(臣民)이 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폭력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시민이 되기 힘듦을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당할 수밖에 없는 처절함, 희정이 쓴 '지구 멸망 하루 전'이다. 지구가 멸망하기 하루 전이라도 비정규직은 출근해야 한다. 일해야 한다. 그들에게 지구 멸망보다는 바로 눈 앞에 닥친 일을 우선 처리해야 한다.

 

정규직인 출근하지 않았는데, 비정규직은 출근해서 정규직 일까지 해야 하는 상황, 당장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르는데, 그것은 있는 사람들 이야기일 뿐이다. 얼마나 비참한가! 소설을 읽으며 비정규직들이 겪는 설움이 죽음 앞에서까지도 이어진다는 사실에 분노하게 된다. 이는 평등한 세상이 아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하는데, 아니다. 죽음 앞에서도 인간은 절대 평등하지 않다. 죽음도 있는 자와 없는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한다. 이 차별이 있음을 인정한 상태에서 출발해야 한다. 소설은 그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민중문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하나 읽으며 6년이 지난 지금 민중들의 생활은 나아졌을까 하는 생각. 이 소설에 나온 모습들이 과거에 있었던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니다.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더 슬프다. 문학이 해야 하는 역할이 형상화를 통해 사람들 감정을 흔드는 일이라면, 민중문학상은 민중들이 살아가는 삶을 잘 보여줘서 그런 역할을 충분히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학이 삶에서 떠날 수 없으므로... 이 작품들은 우리 삶을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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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09: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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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21 09: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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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스 불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1
니콜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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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역사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소설은 역사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작가가 결론을 바꿀 수가 없다.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러나 결론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읽는데 흥미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결과가 나타나기까지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을 작가가 허구적인 상상력으로 메워넣기에 더 흥미롭고 재미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이 역사 소설이나 또는 역사적 사건을 다룬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이미 알고 있는 결과지만 그 과정을 채워넣는 작가나 감독의 상상력에 감탄하기 때문이다. 고골이 쓴 소설 '타라스 불바'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을 나는 지금까지 '대장 부리바'로 알고 있었다. '타라스'라는 말을 '대장'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었던 것. (소설 시작 전에 있는 일러두기에 이런 말이 있다. [타라스 불바]는 [대장 불리바]로 번역된 경우가 많았는데, 이 때문에 러시아 문학 전공자들까지도 '타라스'에 '대장'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타라스는 인물의 이름이고, 불바는 인물의 성이다. 6쪽)   역시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한데, 대장 부리바로 알고 있었던 이유는 어린 시절에 본 율 브린너가 부리바 역으로 나온 영화가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영화가 그래도 197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검색을 해봤더니 1962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한다.

 

오래 전에 만들어진 영화고, 이 소설의 말미에 번역자가 영화도 소개하면서 영화와 소설이 지닌 차이를 설명해 주고 있다. 눈이 부리부리한 율 브린너의 연기가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데, 소설을 읽으면서도 자꾸 율 브린너의 모습이 떠올랐다.

 

결국 영화를 먼저 본 나에게 불바는 율 브린너의 모습으로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불바의 이미지가 꼭 그렇게 고정된 것은 아니다. 이것이 소설과 영화의 차이다. 소설에서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훨씬 많다. 특히 인물에 대해서는. 

 

자유를 추구하는 카자크 족. 그들은 이교도들, 특히 폴란드와 타타르인들을 싫어한다. 그리고 소설에 또 하나의 축 유대인이 나오는데, 어떤 식으로든 돈을 버는 그들의 모습이 이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세익스피어의 샤일록이 얀켄이라는 이름으로, 극한 상황에서도 돈을 생각하는 유대인으로 나오는데, 유대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끝없은 미움을 엿볼 수 있다.

 

영화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카자크 족은 야만인이었는데, 아니었다. 소설을 읽어보니 이들은 그리스정교를 독실하게 믿는 신앙인이었다. 마치 십자군 원정을 유럽 기사들이 떠났듯이 카자크 족은 그리스정교를 믿지 않는 가톨릭이나 이슬람교를 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과 공존하지 않으려 한다. 평화협정을 맺었음에도 자식들에게 카자크 족의 용맹을 일깨워주려는 불바. 결국 이들은 폴란드를 침공하고 전쟁을 하게 되는데, 전쟁 중에 아들들의 용맹을 확인하고 흐뭇해 하는 불바.

 

참 호전적이다. 이들에게 용서는 없다. 오로지 학살과 약탈뿐이다. 이런 그들이기에 평화로울 때는 먹고 마시고 논다. 그것이 다다. 미래를 위한 저축, 그런 것은 없다. 이상하게 그리스정교를 믿는다고 하면서, 죽을 때 신에게 의탁하면서, 평소 생활은 우리가 야만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과 같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감정, 욕망에 충실한 자유인이다. 다만 그들 자유를 위해 상대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 문제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이라고 하고, 과거에 이런 전쟁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니, 꼭 이들을 탓할 것은 아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이들은 결국 해체되고 사라지고 만다. 이것은 역사의 흐름이다. 이렇게 호전적인 집단이 계속 존재한다면 인류가 얼마나 불행하겠는가.

 

이런 불행을 불바의 두 아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아버지와 똑 닮은 큰아들 오스타프는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사형을 당하는데, 전사답게 당당하게 죽게 된다. 반면 둘째 아들 안드리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져 카자크 족을 배신하고 폴란드 군에 서서 전투에 임하게 된다. 그래서 아버지 불바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불바는 두 아들을 모두 전쟁에서 잃는다. 이들이 아무리 전투를 좋아해도 자기보다 먼저 자식들이 죽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는 이미 이 사실을 예견하듯이 불바와 떠나는 두 아들을 눈물로 보내게 된다.

 

어떻든 전쟁은 비극이다. 전쟁은 눈물을 부른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무용담으로 남을지 모르겠찌만, 가족들에게는 비탄만 남기게 되는 행위이다. 

 

불바의 죽음으로 카자크 족은 더이상 호전적인 전투를 할 힘을 잃어버린다. 마지막 장면에서 불바의 부대가 패배해 부하들이 간신히 도망가고 불바는 화형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불바는 카자크 족 마지막 전사가 된다.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불바를 영웅으로 만든 소설을 읽으면서 이 소설에서 결국 불바의 죽음으로 끝나는 결말을 보면서, 사람들은 전쟁이란 비극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전쟁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유럽에서는 고골이 죽은 다음에 더 큰 전쟁이 두 번이나 일어났다. 또 종교로 인한 분쟁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타라스 불바도 전쟁을 벌이는 원인이 바로 종교 아니던가.

 

사람을 구원한다는 종교가 이편 저편을 가르고 그들이 서로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여기에 사랑은 끼어들 틈이 없음을 '타라스 불바'를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평화에 도달하는 길은 여전히 멀다.

 

카자크 족 마지막 전사라 할 수 있는 불바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전쟁이 일으키는 비참함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카자크 족들이 전쟁을 통해서 하나하나 사라져 가는 모습을 통해서도.

 

이 소설은 단순히 영웅소설로만 읽을 수는 없다. 오히려 전쟁의 비극을 알려주는 소설로 읽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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