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두르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1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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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생각하면서 읽으면 안 된다. 제목이 소설 내용에 전혀 없기 때문이다. 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도 모른다.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소설 내용은 현실에 없다는 얘기다. 소설에서 현실을 찾으려는 사실주의를 비꼬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소설에서 현실을 찾아야만 할까? 사실과 진실은 다를텐데, 소설은 사실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다루는 것일텐데...

 

사람들은 꼭 소설을 읽으며 사실을 찾으려고 한다. 무슨 역사소설도 아니고... 역사 소설에서도 마찬가지다. 큰 역사는 사실대로 표현되지만 나머지는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작가가 창조해 낸 허구일 경우가 많다.

 

그러니 소설에서 사실을 찾으려 하지 말자.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진실이 무엇인지 찾으려 하자. 그러면 된다. 그런데 진실을 드러내는 방법이 직설적이기도 하지만 우회적일 때도 많다.

 

빙 둘러간다. 아니면 모자이크처럼 여러 사건들이 나열되어 있기도 한다. 도대체 연관 없는 사건들이 왜 소설에 이리도 복잡하게 나오는지, 이 소설은 다양한 사건들이 얽혀 있다. 전혀 연관성 없이 보이는 사건들이 소설 속에 중구난방으로 나온다.

 

도대체 왜? 이런 생각으로 소설을 읽어가게 된다. 읽어가면서 역시 제목만큼이나 내용을 모르겠군 하는 생각을 한다. 에고, 이렇게 소설이 어려워서야... 그러니 자기 맘대로 해석을 할 수밖에.

 

소설가는 소설로 독자들을 우롱하지만 독자들은 자기 해석으로 소설가를 우롱한다. 서로 내뿜는 우롱들이 합쳐 소설이 존재하게 하는데...

 

이 소설을 그냥 두 부분으로 나눠 버리겠다. 한쪽은 학교, 다른쪽은 시골. 모두 전통으로 무장되어 있는 곳이다.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는 곳이다. 이곳에 있으면, 이 속에 파묻혀 있으면 도대체 이곳이 왜 답답한 곳인지, 왜 정체되어 있는 곳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이 두 곳은 전통사회를 이끌어가는 기본 축이 된다. 지금은 시골이 없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이 소설이 씌어진 당시에는 시골은 사회를 이루는 기본 축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여전히 귀족 잔재가 남아 있을 때고, 그 잔재는 시골에 있었을테니.

 

학교가 얼마나 고루한지 알려주기 위해서는 학교 생활에 안주한 학생들을 주인공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런 학생들 역시 고루한, 전통적인 학교를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 학생은? 이미 학교를 떠났으나 다시 학교로 돌아온 학생, 그것도 나이가 서른 살이 된 학생.

 

그의 눈에 비친 학교는 어떨까? 아마 학교는 전통과 현대가 싸움을 하는 곳이지만 늘 전통이 이기는 곳, 그래서 답답한 곳일 것이다. 주인공인 유조는 어느날 서른 살에서 열일곱 살이 되어 핌코에 의해 납치되어 학교에 간다.

 

그가 학교에서 겪는 일을 통해 학교의 고루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그가 전통적인 윤리로 무장되어 있고, 인문학적 예술적 지식을 자랑하지만 결국 주트카라는 여고생에게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학교의 위선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학교가 과거를 아무리 표방해도 현대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등장인물을 통해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주인공 유조가 핌코에 의해 납치되어 생활하면서 무려 자기 나이보다 열세 살이 어리게 생활을 하는데, 학교 모습이 얼마나 우습겠는가, 다음은 시골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유조의 친구인 미엔투스 - 그는 학교에서는 반항아다. 학교 정책에 반대되는 행동들을 많이 한다 - 와 시골로 도망치면서 겪게 되는 일이 시골에서 발생한다.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미엔투스는 머슴을 동경한다.

 

머슴은 곧 길들여지지 않은 자연인이라고 할 수 있다. 머슴은 하인이 아니다. 자기 생활을 해나가는 강인한 인물이어야 한다. 그런 머슴을 만나러 시골로 도망가는 유조와 미엔투스.

 

귀족인 이모 집에 머물게 된 유조와 미엔투스는 곧 머슴을 발견하게 된다. - 이름은 동유럽이나 러시아쪽 이름은 좀 길어서, 또 잘 안 외워져서 생략하기로 한다 - 이 머슴과 친구가 되겠다고 나선 미엔투스로 인해 시골에서 지켜지고 있던 위계질서가 깨지게 된다.

 

철저한 위계가 미엔투스의 행동으로 인해 무너져 내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귀족들을 지탱하고 있던 두려움이 하인들의 행동으로 표출되고, 유조는 탈출을 하게 된다. 탈출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또 한 번의 납치가 발생한다.

 

이번 납치는 유조가 납치되는 것이 아니라 유조가 조시아를 납치하는 것이다. 수동에서 능동으로, 그것은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는 표시가 된다. 물론 조시아를 납치하는 것이 그런 생각으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머슴을 납치하는 것보다는 귀족인 조시아를 납치하는 것이 자신에게 어울린다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납치는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납치라고 할 수 있다.

 

첫번 납치는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내는 역할을 했다면, 두번째 납치는 세상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제 자리를 찾아가는 납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납치, 그리고 서술 속에서 궁뎅이와 장딴지가 나오는데, 궁뎅이는 머무름, 정체, 과거에 속한다면, 장딴지는 나아감, 미래,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다리는 우리를 내달리게 하고, 그 내달림의 힘은 장딴지에서 오기 때문이다. 반대로 궁뎅이는 우리는 눌러 앉게 한다. 그 자리에 주저앉히는 궁뎅이. 하여 이 소설에 자주 나오는 궁뎅이와 장딴지는 과거와 미래, 정체와 발전, 머무름과 나아감을 대비한다고 할 수 있다.

 

많은 사건들, 장면들이 막 나오는 듯하지만 읽으면서 이렇게 과도기에 처한 사회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서술한 소설로 해석하면서 읽으면 읽는 재미가 있다.

 

작가가 소설 속에 수많은 퍼즐 조각들을 흩뿌려 놓았는데, 그것을 나는 내 맘대로 모아 완성시키고 있다. 작가가 그려놓은 퍼즐 그림이 아니라 내가 모아놓은 퍼즐 그림으로.

 

그게 어쩌면 제목이 뜻하는 페르디두르케가 아닐까 한다. 없는 것을 서술하니,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것은 독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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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라피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2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임미경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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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책을 함부로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든다. '포르노그라피아'라니... '유토피아'가 우리가 갈망하는 세상이라면, 포르노그라피아는 그렇다면 포르노를 갈망하는 사회라는 뜻 아닌가. 선뜻 집어 읽기 민망한 제목이다.

 

하지만 우리가 '포르노'를 거부한다고 해도 '포르노'는 이미 우리 일상에 너무 깊게 들어와 있다. 스마트폰 시대에 나이를 가리지 않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포르노 세계다.

 

물론 포르노 세계는 현실세계가 아니다. 가상으로 연출된 세계다. 인간이 지닌 가장 적나라한 몸만을 욕망하는 세계를 화면을 통해서 교묘하게 잘 보여주는 세계다. 이런 세계에서 우리는 자신이 지닌 욕망을 배출하고자 한다.

 

화면을 통한 배출, 그러나 많은 세계에서 포르노는 금지 구역이다. 여기에 접근하면 도덕적인 비난을 받는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육체적인 향락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릴지라도 현실 세계에서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포르노 세계다.

 

금지되니 더 욕망하게 된다. 은밀하게 유통되던 포르노가 이제는 대놓고 버젓이 유통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유통이 성적 일탈을 더 많이 만들었을까? 과연 우리 인간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을까.

 

포르노에 대해 논란이 일어나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포르노가 미성년들에게 또는 유약한 정신을 지닌 - 그럼 포르노다 아니다 판단하거나 유통해도 된다 안 된다를 판단하는 법조인들과 윤리학자들은 강하고도 높은 정신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지, 원... 그들이 벌이는 비도덕적인 모습을 너무도 많이 봐왔는데... - 사람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쪽과 아니다 오히려 이런 매체를 통해서 해소하기 때문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쪽으로 나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제목을 지닌 책을 들고 다니기엔 좀 그렇다. 아직 정리가 안 된 분야기이 때문이다. 제목이 민망하긴 하지만 읽어보면 '포르노'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인간이 지닌 욕망에 대해서, 그 파멸적인 모습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는 소설일 뿐이다. 물론 포르노가 인간 욕망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 역시 인간이 지닌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바로 젊음, 그래서 젊음이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보고자 하는 욕구다. 작가의 말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인간에게는 절대를 향한 갈망이 있습니다. 완전함, 충만함에 대한 갈망. 말하자면 진실, , 총체적 성숙 등에 대한 갈망이지요. 이 경우 인간에게 요청되는 건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포르노그라피아』에서는 인간의 또 다른 갈망 하나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더욱 은밀한, 어떤 의미로는 법에 배치되기도 하는 것으로, 미완성, 불완전, 열등함, 젊음 등에 대한 욕구입니다. (299쪽)

 

독일군에 점령당한 폴란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야 하는데, 이야기가 참 이상하게 전개된다.

 

성적인 욕망을 실현하는 장면이 하나도 나오지 않음에도 자꾸만 포르노를 연상하게 만든다. 이유는 바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오던 관계인 헤니아와 카롤을 어른인 나와 프레데릭은 이들을 자신의 욕망에 맞게 바꾸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즉 이들은 젊음의 욕정을 거리낌없이 발산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약혼을 했든, 안 했든 그들 젊음은 이미 육체의 욕망을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는 헤니아와 카롤은 그들 각본에, 그들 시각에 맞지 않는 것이다.

 

이건 어른들 욕망에 맞지 않는 그런 행동이다. 이 행동은 잘못된 것이다. 이들은 욕망에 따라, 즉 젊음이라는 불완전한, 완성되지 않은, 그래서 어른에 비해 열등한 욕망을 발산해야 한다. 거리낌없이. 그래서 프레데릭은 세세한 각본을 짜서 이들을 자기 구미에 맞게 움직이게 한다.

 

이에 대한 희생양으로 알베르트를 삼는데... 헤니아의 약혼자인 알베르트가 희생양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이미 어른이기 때문이다. 어른이기 때문에 같은 어른인 나와 프레데릭의 관심을 끌 이유가 없다.

 

오히려 그가 헤니아와 카롤에 의해 몰락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또다른 어른들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

 

여기에 이런 욕망은 조국이니 민족이니 하는 것을 뛰어넘는다. 독일군에 대항하던 사람, 시에미안을 죽이는 일에 이들을 가담시키는 것에서 어른들이 지닌 욕망을 극한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알베르트, 도덕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그는 자신이 시에미안을 죽이고 카롤의 칼에 죽는다. 이것으로 소설이 끝나는데...

 

젊음을 바라보는 어른들의 관음... 그들이 불완전하게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싶은 갈망, 그 갈망을 이루기 위해 젊은이들의 행동을 유도하는 치밀함. 그리고 그것을 은근히 즐기는 어른들의 모습.

 

성적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는 포르노가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어른들의 욕망을 가감없이 그러냈다는 점에서 이 책 제목이 어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숨겨져 있는 어른들의 욕망,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되는 그런 욕망을, 전쟁 중에서도 버리지 못하는 인간 본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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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08: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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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2 10: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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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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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읽으면서 왜 이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하는지 이해를 못 했다. 그냥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 아닌가 하는 생각만 했다.

 

체코를 침공한 소련군에 의해 생활이 깨뜨려진 사람, 토마시. 그는 능력있는 외과의사이지만 소련의 침공으로 스위스로 간다. 그러나 자기 곁을 떠나는 테레자를 따라 다시 체코로 오게 되고, 외디푸스에 대한 글을 썼다는 이유로 의사 자리에서 쫓겨나 유리 닦는 사람으로 살아간다.

 

나중에 테레자와 농촌으로 가서 살다가 트럭 사고로 죽었다고 나오고, 여섯 번의 우연으로 토마시와 살게 된 테레자 역시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켜주는 사람으로 토마시를 생각하고, 그와 함께 살지만, 그녀 역시 망가진 삶을 살게 된다.

 

여기에 화가인 사비나가 나오는데, 이 사비나만이 끝까지 살아남는다. 그리고 사비나가 사귀던 남자 토마시가 아닌 프란츠 역시 죽음에 이르게 되는데...

 

소설은 이 네 사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주인공은 토마시와 테레자이다. 이들의 삶은 어떻게 보면 무겁다. 정치적인 격동기에 자기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를 결정해야 하는 때, 어떻게 삶이 가벼울 수가 있는가.

 

여기에 영원회귀와 일회성이 나온다. 우리 삶이 영원회귀하는가, 아니면 일회로 그치고 마는가. 작가는 우리 삶은 일회적이라고 한다. 그것도 우연으로 점철된 삶이라고.

 

그러므로 우리 삶은 무거울 수가 없다. 삶이 반복된다면 가벼울 수가 없다. 내가 살았던 삶을 또 살게 되는데, 어떻게 가벼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래서 종교를 가진 사람들, 삶이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들 삶은 무겁다. 그들은 내세를 생각하고 지금 삶 건너 편을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우리 삶이 그럴까.

 

삶은 순간의 연속이고, 그 순간은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우연들일 뿐이다. 혹 반복되더라도 그것은 우연이지 필연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 삶은 가벼워야 한다.

 

하여 소설 제목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삶은 우연이다. 우연의 반복일 뿐이다. 그렇게 가볍다. 그 가벼움이 우리를 참을 수 없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에서 어떤 의미를 발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왔다가 사라지는 인간이 자신이 존재했다는 의미를 찾지 못하면 그것은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토마시나 테레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 토마시가 테레자와 살면서도 여러 여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바로 자신의 존재를 가볍게 하기 위해서다.

 

한 곳에 정착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 이는 삶은 순간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해준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 보자.

 

삶은 순간의 연속이고, 우연의 연속이다. 그렇게 가볍다. 가볍기 때문에 그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음은 없다. 다음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순간에 충실하기 위해서 얼마나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하는가.

 

토마시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또 순간의 사랑으로 테레자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는데... 그 삶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다만, 최선을 다해도 비극에 빠질 수 있다. 이를 소설에서는 외디푸스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토마시가 외디푸스를 예로 들어 모르고 행동했다고 잘못이 없다고, 또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듯이, 우리 삶도 일회적이고 순간적인 우연의 연속이지만, 결과는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

 

그러므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그렇게 삶은 가볍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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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 소설을 둘러싼 일곱 가지 이야기 밀란 쿤데라 전집 13
밀란 쿤데라 지음, 박성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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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무엇일까? 소설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껴야 할까? 과연 여기에 대한 답이 있을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우리나라에서 유명해진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소설에 관해서 이 생각, 저 생각을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제목이 '커튼'이다. 커튼이 무엇인가? 가리는 것이다. 가리는데 뒤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가리는 것이다. 그래서 커튼은 뒤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커튼을 들추었을 때 나타나는 것, 그것은 다른 세상일 것이다. 그런 다른 세상을 다 보여주지 않고 커튼으로 가리면서 그 세계를 탐구하도록 하는 것.

 

그렇다면 소설은 바로 이것이다. 분명 무언가가 있다. 그 있는 것을 살짝 가리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들춰보라고. 들춰서 뒤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라고. 그렇다. 커튼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우리의 삶. 그런 삶에 대해서 모두 아는 사람은 없다. 삶은 미지의 세계이고, 늘 변하는 세계이다. 고정되어 있지 않고 미리 만들어져 있지 않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소설은 종점이 아니라 종점에 도달하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정류장이다.

 

정류장에 내릴 수도 있고, 잠시 머물다 떠날 수도 있다. 그만큼 소설은 우리에게 많은 정류장을 제공해주고 있다. 종점까지 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정류장을 거쳐야 하는지...

 

그 정류장에서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한다. 다만, 쿤데라가 체코인이지만 프랑스인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이 책에 나오는 작품들이나 작가들이 거의 유럽의 작가들과 작품들이다.

 

그런 문화에 친숙하지 못하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힘들 수도 있다. 특히 그가 자주 언급하는 카프카에 대해서는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다면 그가 말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소설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을 하고 있으므로 이 책은 읽을 만하다.

 

커튼은 마냥 가리기만 해서는 자기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없다. 커튼은 분명 뒤에 있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커튼을 젖히도록 해야만 한다. 젖혀지지 않는 커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커튼을 젖힐 수 있도록 하는 것, 소설은 바로 이런 커튼 역할을 한다. 소설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보지 못했던, 또는 가려져 있던 삶의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일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영속적인 소설을 통해서 자기 삶을 발견해나가도록 하는 것, 그것이 소설이 하는 역할이기도 하리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 쿤데라는 커튼이라는 제목으로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자, 우리 앞에 커튼이 있다. 그 커튼 뒤에 무엇이 있을까? 한번 커튼을 젖혀보고 싶지 않은가.

 

커튼을 젖혀보도록 한다면 그 소설은 성공한 것이다. 우리 일상에 균열을 내는 것, 그 균열을 통해서 우리는 삶에 대해서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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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에 갇힌 김소월 구하기 - 새롭게 읽는 소월의 시 한티재 교양문고 5
박일환 지음 / 한티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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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는 순간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과 같은 판소리계 소설과 '홍길동전'이 떠올랐다. 김소월이 누구던가.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시인 아닌던가. 우리나라 시인 이름을 대 보시오 하면... 처음 나오는 이름이 아마도 김소월, 윤동주 쯤이 아닐까 한다.

 

이 이름들이 나오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교육열이 높아도 너무 높은 우리나라에서, 교과서가 정전으로 취급받고 있는 이 나라에서, 국어 시간에 배운 시인, 그것도 비중있게 배운 시인, 시보다는 시험을 잘보기 위해서는 꼭 배우고 외워야 하는 시인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행복한 시인들이다. 어떤 시인은 단 하나의 시로 기억되기를 바랐다고도 했는데, 이들은 단 하나의 시가 아니라 여러 시들, 많은 시들로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꾸로 이야기하면 이들은 교과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험 때문에 외웠던 몇몇 단어들(민요조 서정시, 부끄러움의 미학 등)만 기억 속에 있고, 정작 시들은 마음 속에 자리잡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 책에서 저자는 김소월과 윤동주의 시를 단순해서 비교하고 있다. 이는 비교를 위한 단순화이지 절대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윤동주의 시가 '부끄러움의 미학'에 기대고 있었다면, 김소월의 시는 '그리움의 미학'에 기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소월의 시를 평할 때 많은 사람들이 현실 극복의 지향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곤 한다. 이러한 견해가 소월 시의 전체를 아우르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경향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 166쪽 

 

아니다. 마음 속에 자리잡은 시가 있기에 이들이 우리나라 대표 시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김소월 하면 '진달래꽃' 윤동주 하면 '서시' 하고 금방 튀어나온다. 한번 암송해 보라고 하면 끝까지는 몰라도 몇몇 구절은 누구나 읊조릴 수 있다.

 

가히 우리나라 대표 시인이고 대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나라 사람치고 춘향전이나 홍길동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도 끝까지 읽은 적이 별로 없는 작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소설, 춘향전, 홍길동전 아니던가.

 

그렇다면 김소월이나 윤동주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시인이라고 하면서도 이들이 낸 시집을 다 읽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사실 이들이 낸 시집이라고는 시집에 실리지 않은 시나 유고시를 빼고는 단 한 권에 불과한데 말이다.

 

김소월은 시집 "진달래꽃"을, 윤동주는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냈을 뿐이다. 그러니 단 한 권 시집을 낸 우리나라 대표 시인들의 시집을 다 읽은 사람이 적다는 것은, 그들이 너무도 유명해서 또 너무도 유명한 시들이 있어서 그 유명한 몇몇 시에 그들이 갇혀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니 이 제목, 정말 잘 지었다. "진달래꽃에 갇힌 김소월 구하기"

 

다른 말로 하면 제발 김소월이 쓴 다른 시들도 좀 읽으라는 얘기다. 그냥 김소월=진달래꽃, 이 등식에 안주하지 말라는 얘기다. 우리가 문화인이 되려면 적어도 교과서 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는 김소월을 '진달래꽃'으로만 기억하지는 않는다. 교과서에도 진달래꽃만 실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 비슷한 정서를 지닌 작품들을 실어놓고 있다. 가끔 민족시라고 해서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은 시를 싣기도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다. 이런 경우 말고도 김소월은 다양한 시들을 썼으나 교과서에서는 고만고만한 시들만 싣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김소월을 특정 시경향의 시인으로만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김소월=진달래꽃'의 등식은 비유로 여겼으면 한다)

 

교과서에서 벗어나는 일, 김소월을 특정 시에 가두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김소월처럼 이렇게 '진달래꽃'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것도 좋은 일이다. 다른 시인들이 꿈꾸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김소월은 이미 하나의 시에 갇혀서는 안 되는 시인이다. 그런 시인을 더 알아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은 너무한 일이다.

 

이 책은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더 많은 시를 읽지 않는 시인. 김소월=진달래꽃, 이 등식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김소월이 '진달래꽃'으로 우리나라에서 정점을 찍은 시인임은 확실하지만, 그가 쓴 다른 시들을 더 많이 읽을수록 왜 김소월이 뛰어난 시인인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김소월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김소월 시 중에 좋은 시들이, 마음을 파고드는 시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한 '한(恨)의 정서, 민요조 서정시' 등으로 그를 제한하기에는 다양한 시들이 더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많은 시들이 소개되고 있고, 이 시들에 대한 소개글이 있다. 그냥 시만 읽어도 좋지만 그 시에 대한 해설들, 다양한 쟁점들, 그리고 김소월의 삶 등이 함께 씌어 있기 때문에 김소월 시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점점 더 많은 김소월 시를 읽으면서 김소월의 시맛을 맛보게 된다. 그게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다.

 

이렇게 이 책은 '진달래꽃'으로 시작해서 '진달래꽃'으로 끝난다. 단지 김소월 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김소월과 다른 시인들의 시를 비교하는 글도 실려 있는데, 김소월이 쓴 '진달래꽃'으로 시작해서 그 시를 변용한 김언희의 시로 끝나고 있다.

 

그렇게 우리가 알던 '진달래꽃'의 애잔한 정서는 김언희의 시에서 낯섬으로 변주가 된다. 그리고 이런 변주가 김소월 시를 더 풍요롭게 함을 깨닫게 된다. 여기에 더해 김소월을 과거의 김소월로만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김소월, 미래의 김소월로 불러낼 수 있고, 불러내야 함을 깨닫게 한다.

 

그렇다. 이제 김소월을 이야길 할 때 '김소월=진달래꽃'의 등식을 벗어나야 한다. 그는 어느 한 시로, 또 어느 한 경향으로 가둘 수 있는 시인이 아니다. 그를 그 틀에서 빼내었을 때 우리 시도 더 풍성해질 수 있다. 우리들 감상 능력도 마찬가지고.

 

김소월 시에 대해서 다양하게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 있는 이 책, 시를 이해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들, 김소월을 교과서적으로만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 읽으면 다양하고 새로운 김소월 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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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12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7-12 09: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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