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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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먼저 다가온 밀란 쿤데라의 첫작품이라고 한다. 소설 끝에 '1965년 12월 5일에 마침'이라는 글이 있다.

 

1965년이면 프라하의 봄이 일어나기 3년 전이다. 그만큼 공산주의가 많이 희석되던 시대라는 얘기다.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서서히 변해가던 때, 두 시대에 걸쳐 있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소설에 나온다.

 

'루드빅, 헬레나, 야로슬로브, 코스트카'가 각 장의 제목으로 나오는데, 이들이 '나'라는 관점을 취해 자기 입장에서 소설을 이끌어간다.

 

이 네 사람이 모두 한데 얽혀 있게 되는데, 읽어갈수록 이들의 관계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럼에도 전체적인 주인공은 루드빅이라고 할 수 있다.

 

열렬한 공산당원이었지만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녔다고 평가받던 루드빅은 여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농담 - 그는 농담이라고 하지만 남들은 절대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 세상에 스탈린이 정권을 잡고 있던 그 시대에 트로츠키 만세를 글로 썼으니 -으로 인해 전락하게 된다.

 

농담이 한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인데, 그는 그 농담으로 인해 증오심을 품게 된다. 바로 자신을 심판한 제마넥에 대한 증오, 그 증오를 덮을 수 있었던 루이체와의 사랑, 그러나 그는 자기 처지에서 루이체를 사랑한 것이지 루이체 처지에서 사랑한 것은 아니었음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한다. 결국 루이체가 떠나고, 그 이유를 나중에 코스트카에게서 듣게 된다.

 

그만큼 젊은 시절 그들은 모두 가면을 쓰고 그 가면에 맞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가면, 다른 사람이 기대하는 자신의 모습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사회주의에서 -또는 공산주의라고 해도 좋으리라 - 원하는 인간상을 자신의 모습에 실현시키기 위해 사는 삶, 그것이 밖에서 또 멀리서 보면 참으로 우스워보이는 마치 농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농담이 아닌 치열한 삶일 수밖에 없음을 루드빅이 겪는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그런 루드빅의 경험과 같이 야로슬로브가 하는 일, 민속음악을 계승해 발전시켜 나가는 것 역시 자신들에게는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되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이미 지나간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소설은 야로슬로브의 아들인 블라디미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젊은이들이 현대적인 것에 열광하는 것 역시 가면 속의 삶일 수 있다는 것, 무엇이 가면을 벗어던진 삶인지는 결국 모른다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말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것도 위험하지만 모든 것을 농담으로 처리하는 것도 역시 위험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경직된 사회에서는 농담이 통할 리가 없으므로, 이 소설은 당시 공산주의 사회였던 체코의 모습을 비판한다고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가면 뒤 자신의 모습을 찾고자 한다. 진실한 자신의 모습, 그렇지만 과연 가면 뒤에 자신의 얼굴이 있는지 알지 못한다. 루드빅도, 야로슬로브도 그리고 헬레나도 마찬가지다.

 

헬레나, 아마도 평생을 가면 속에서 살아야 할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제마넥에게 반해 결혼했고 확고한 공산주의 신념을 지니고 있는 여자. 제마넥이 시대의 변화에 영합하는 것을 보면서 실망하고 자기 신념대로 살아가려 하지만, 제마넥에게 복수하려고 자신에게 접근한 루드빅에게 마음을 주고 결국 욕망을 받아들이게 되는 여자.

 

루드빅은 복수를 위해 헬레나를 이용하지만 결국 자신이 한 일은 환영에 불과했다고 깨닫게 된다. 마치 야로슬로브가 평생을 추구했던 민속음악이 사그라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듯이.

 

결국 루드빅이 농담으로 편지에 쓴 글로 인해 이들은 모두 하나로 엮이게 된다. 엮이게 되면서 체코의 당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과연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해준다. 어떤 사회가 우리가 사람답게 - 이 사랍답게란 말, 너무도 어려운 말이다. 답이 없다- 살 수 있는 사회인지 생각하게 해준다.

 

모두가 하나로 흘러가는 사회는 분명 아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농담이 통할 리가 없다. 농담이 통하지 않는다는 얘기는 웃음이 사라진 사회라는 것이니 그런 사회는 꽉 막힌 사회다.

 

반대로 농담만 난무하는 사회도 분명 아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진실이 없다. 서로가 서로를 가볍게만 대할 뿐이다. 서로 스치고 지나가는 관계.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농담이 통하는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 아닌가. 사람 사이에서 농담이 통한다는 얘기는 서로 소통이 된다는 얘기다. 소통이 되지 않는 관계에서 농담은 치명적인 위험을 일으키게 된다.

 

바로 루드빅이 모든 것을 진지하게만 받아들이던 첫 여자 친구 마르케타에게 농담을 편지 내용으로 써 전락하게 되듯이.

 

그런데 읽으면서 묘한 생각이 떠올라 사라지지 않았는데, 어쩌면 쿤데라는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 사회'를 농담으로 생각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그래서 마르크스의 그 농담이 전세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 치명적 농담이 세계사적 사건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루드빅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그건 아닐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을 농담이라고 하기보다는 그의 말을 교조적으로 그대로만 따르려는 사람들이 다시 마르크스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농담일 거라고 말하려 하지 않았을까.

 

전체의 흐름 속에서도 개별적인 흐름은 존재하니, 그런 개별적 흐름을 존중하지 않고서는 전체 흐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소설에서 그 점을 이야기하고 싶었겠지.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화두'가 떠올랐고. 화두 중에 부처를 욕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불손한가. 그러나 이런 말들을 불교를 모독하는 말이 아니라 불교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말들로 받아들이고, '벽암록'이니 '무문관'이니 하는 책으로 엮어낸 것이 아니겠는가.

 

'부처가 무엇입니끼?' 라는 질문에 '똥막대기'라고 대답해도 용납이 되는 종교. 그것이 직설적인 욕이 아니라 돌려서 말하는 농담, 즉 말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찾으라는 권고로 받아들이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소통이고, 농담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리라.

 

그러므로 농담으로 인해 한 인생이 확 바뀌는 사회는 사람들이 살기 힘든 사회다. 소통이 안 되는 사회다. 그렇다고 소통이 안 되는데, 모든 것을 농담이었어라고 눙치는 사회는 더욱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 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말을 한 루드빅은 아주 사적인 편지에서, 그것도 자신의 여자친구에게만 보내는 편지에서 농담을 한 것이다. 사적인 것을 공적인 것으로 바꾸어 처벌하는 사회는 문제지만, 반대로 공적인 자리에서 한 말을 농담이었다고,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한 말을 농담이었다고 눙치는 사회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그것은 농담이 아니라 공격이고 자신을 위장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 점은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관계, 각자 '나'로 등장해 자기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야기들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잘 엮여 한 편의 소설을 이루고 있다. 쿤데라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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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겔 스트리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2
V.S. 나이폴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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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배경은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고 나서 근대화를 이루는 시대와 같다. 2차대전이 끝난 직후 어린시절에 경험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트리니나드 토바고... 영국의 식민지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원주민이나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백인들에게 지배를 당하고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나라에서도 빈민가에 해당하는 미겔 스트리트... 여기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 모음이 바로 이 소설이다.

 

우리나라 소설에서 표현된 빈민가 사람들의 생활이 그렇듯이 미겔 스트리트에 사는 사람들 역시 그 도시에 푹 절어 살고 있다.

 

도무지 전망이 없는, 희망이 없는 그런 나날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에게서 어떤 윤리를 바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인데, 기가 막히게도 도덕하고는 거리가 먼, 또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무시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함께 살아간다.

 

불우한 상황이고,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하지만, 또한 폭력이 난무하는 동네이긴 하지만 이들은 서로 어울려 살아간다. 어찌하겠는가. 그렇게 함께 살아가지 않으면...

 

소설에 등장하는 열여섯 명의 인물들(소설의 서술자를 제외하고, 각 인물은 하나의 장을 차지하고 있다)은 각자의 개성으로 살아간다. 이들 중에서 죽게 되는 사람도 있고, 동네를 떠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 동네에서 살아간다.

 

그냥 그렇게, 별다른 희망 없이. 아마도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 해트일 것이다. 해트는 처음부터 등장해 마지막까지 등장한다.

 

소설의 서술자인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마지막 장 바로 전이 바로 '해트'에 관한 장인 것을 보면, 그가 미겔 스트리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이들을 많이 거느리고 있고, 도박을 좋아하는 그, 여자를 멀리했던 그가 여자에게 배신당하고 결국 감옥에 가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고, 해트가 감옥에 가게 되는 순간, 소설의 서술자인 나는 자신이 성장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 서술자는 아이의 눈으로 동네 사람들을 바라보던 것에서 어른의 눈으로 동네 사람들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것은 전망 없는 이 동네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동네에 계속 머무른다면 난폭해지고 결국 알콜 중독이나 여자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게 됨을...

 

서술자의 어머니는 이 동네를 떠나라고 한다. 떠날 수 있는 길, 그것은 바로 유학이다. 개천에서 용 나듯이 그곳을 떠나야만 하는 것.

 

참으로 슬픈 것은 개천을 떠난 용은 결코 개천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개천은 그에게 생각하기도 싫은 곳이라는 점.

 

이 미겔 스트리트라는 소설이 나이폴의 자전적인 소설이라면, 그가 얼마나 이 동네를 떠나고 싶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자기 성장의 밑거름이 된 이 동네는, 또 동네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지워버려야 할 동네이자 사람들인 것이다.

 

그점이 느껴져 그렇게 감동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어려운 시절을 회상하며 그래도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그런 점이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어쩌면 건조하게 당시 사람들의 행동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1940년대 후반 트리니나드 토바고, 특히 빈민가였던 미겔 스트리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왜 주인공이 이곳을 떠나야만 했는지 생각하면서 읽으면,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ㅡ 우리는 마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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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5 09: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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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25 10: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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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클래식 레터북 Classic Letter Book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육후연 옮김 / 인디북(인디아이)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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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꾸러기 아이가 성장하는 이야기. 일본 근대문학을 이끈 나쓰메 소세키의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이기에 작가의 경험이 많이 녹아 있다고 봐야 하는데, 작가가 한 해 동안 영어 교사로 근무했다고 하니 이 소설에도 어느 정도는 작가의 경험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 내용이야 경쾌하게 빠르게 진행이 되어 읽기에 부담이 없다. 짤막한 문장들로, 또 다양한 사건들로 읽기에 전혀 부담이 없는데...

 

성장소설이니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일본 근대 문화를 알 수 있겠거니 하지만, 사실 일본 근대문화에 대해서는 잘 나와 있지 않다. 학교 교육이 중시되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우선 성장에 절대적인 지지자가 필요하다는 것. 엄마가 일찍 죽고 아버지에게 못난 놈으로 취급받는, 형에게조차도 인정받지 못하는 주인공을 하녀인 기요가 전폭적으로 지지해 준다. 도련님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 사람을 온전히 받아주는 사람이 있는 성장기를 거친 사람. 그런 사람이 악한 행동을 할 수가 없음을... 비록 성급하고 즉흥적으로 행동하는 주인공이지만 표리부동한 사람을 싫어하고 옳다고 하는 것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주인공에게 그래도 기요라는 주인공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저기서 잔소리를 듣고 야단만 맞고 넌 쓸모 없는 놈이야라는 소리를 들으며 지내는 환경에서 그나마 자신을 인정해주는 단 한 사람도 없는 상태라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런 인정을 해주는 사람의 중요성, 이 소설에서 그 점을 찾을 수 있다.

 

또 하나는 지방 교육의 문제... 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수학교사로 부임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아이들을 무시한다. 도시 출신이라는 이유로 시골 아이들을 무식하다고 자기와 동급으로 대하지 않는다. 실수를 하고도 그냥 넘어가는 모습, 동료 교사들을 무시하는 모습 등은 도시인이 지방을 대하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편견을 가진 사람을 학생들이 교사로 인정할까? 학생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과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을. 그들은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은 교사로 인정하지만(이 소설에 나오는 멧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교사처럼)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은 교사로 인정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도쿄에서 와 학생들에게 인정받기까지는 꽤나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니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학생들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다. 그가 먹는 음식부터 하는 행동까지. 그러나 익명에 익숙했던 도시인은 사생활이 완전히 까발려지는 시골 생활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주인공도 그랬다. 그는 학생들과 갈등을 한다. 자신이 우위에 있다는 생각으로 학생들과 하나가 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것은 교사는 학생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교사 우월주의를 보이는 근대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학생들과 친해지는 것은 패싸움을 통해서다. 물론 주인공은 학생들의 반응을 칭찬인지 아닌지 구분을 못하지만... 자신들과 함께 싸우는 교사를 보면서 학생들이 마음을 열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는 어찌해야 하는가. 바로 멧돼지 선생처럼 바른 말을 할 줄 알아야 하고, 또 학생들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20대 초반에 교사 생활을 하면서 주인공은 사람을 알아가게 된다. 겉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를 다양한 교사 군상들을 만나면서 깨달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장소설이다.

 

성장소설을 읽는 것, 그것은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비춰보는 일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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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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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하나의 몸짓에서 시작한다.

 

'그 몸짓 덕택에,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그녀 매력의 정수가, 그 촌각의 공간에 모습을 드러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감동했다. 그때 나의 뇌리에 아녜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11쪽)

 

예순이나 예순 다섯으로 보이는 부인이 하는 몸짓 하나가 시간을 초월하게 한다. 시간을 초월하는 몸짓, 그것은 불멸을 향한 몸짓이다. 쿤데라는 소설 속에 직접 등장한다. 여인의 몸짓을 보고, 그는 아녜스라는 이름을 떠올린다.

 

'아녜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이름의 여자를 만난 적이 없다.'(11쪽)고 하면서. 그렇게 소설은 시작된다. 특이하게도 등장인물들과 소설가, 그리고 소설가 친구가 소설 속에서 서로 만난다. 이런 일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만, 쿤데라는 이를 통해 과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일을 겪는다. 수많은 일들이 우리 인생을 감싸고 만들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 많은 일들 중에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일들은 얼마나 될까?

 

소설 뒷부분에 가면 '루벤스'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온갖 여자와 잠자리를 갖지만 결국 나중에 남는 것은 사진 몇 장으로 기억되는 여자들뿐이라고 한다. 여자와의 만남이 영화로 남는 것이 아니라 사진으로 남는 것. 연속이 아니라 단절된 장면으로만 기억되는 것.

 

사랑이 불멸일 수 있을까? 불멸의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영화가 되어야 할까, 사진이 되어야 할까? 영화가 되면 우리는 굳이 기억하지 않는다. 자신이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이 되면 그 장면에서 많은 것을 떠올리려 노력한다.

 

불멸이 되기 위해서는 연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단절되어야 한다. 단절되어야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하고, 찾으려 노력한다. 결국 루벤스가 만난 류티스트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여자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아니라 사진이다. 몇 개의 장면으로 남은.

 

그리고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류티스트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죽음으로 그 여인과의 사랑은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다. 몇몇 장면으로. 그리고 류티스트가 아녜스임을 전화통화에서 밝히고 있는데...

 

아녜스... 쿤데라가 창조해낸 인물이다. 몸짓으로 보고, 그는 아녜스를 창조했고, 아녜스로 하여금 그 몸짓을 하게 한다. 그런데 아녜스를 죽음으로 몰아간다. 죽음으로 몰아갔음에도 아녜스의 몸짓이 동생인 로라에게서 나타나게 한다.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남게 된다. 그 점을 괴테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베티나 이야기를 곁들인다.

 

괴테가 베티나와 사랑에 빠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베티나는 괴테가 살아 있을 당시 많은 편지를 썼고, 괴테가 죽은 다음에는 그 편지들을 책으로 엮어냈다. 책으로 엮어냄으로써 베티나는 괴테의 연인으로 영원히 남게 된다. 그들의 관계가 지속적이지 않고 순간적이고 어느 순간 끝났다는 데서 불멸은 시작한다.

 

베티나는 괴테의 죽음으로 괴테에 대한 사랑의 불멸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면 쿤데라가 괴테의 이야기를 소설에 집어넣은 이유는 무엇인가? 불멸의 사랑이 있다는 것인가? 아니, 사랑은 순간적이고 일회적임일, 그래서 사진처럼 장면으로만 남음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 아닌가.

 

아녜스라는 인물을 창조한 쿤데라는 남편으로 폴을, 그리고 여동생 로라를 만들어낸다. 로라는 언니의 뒤를 좇는다. 언니가 하는 몸짓을 따라한다. 아녜스를 그를 보고 그 몸짓을 그만둔다. 여기서 우리는 로라가 언니를 대신하게 됨을 예측할 수 있다. 언니를 대체하는 로라, 그렇다면 아녜스는 어디에 자리해야 할까?

 

동생에게 제 자리를 빼앗긴 아녜스는 죽음으로 사라져야 한다. 죽음으로 사라져야 로라의 몸짓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게 여러 개 사랑 이야기가 겹쳐지면서 소설 '불멸'은 전개된다.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아녜스는 물망초 한 가지를, 물망초 오직 한 송이를 사고 싶어 했다. 눈에 잘 뵈지도 않는, 아름다움의 마지막 자취로서, 그것을 두 눈 앞에 간직하고 싶어 했다.' (520쪽)

 

물망초...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꽃말을 지닌 꽃. 아녜스는 이 물망초를 갖고 싶어했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불멸에의 욕망이다. 자신은 삶을 마감하지만 기억되고 싶은 욕망. 기억되기 위해서는 떠나야 하는 것.

 

참으로 다양한 이야기들이 교차하고 있다. 일관된 줄거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야기들이 순서없이 나오고 있다. 중심 이야기가 아녜스를 중심으로 펼쳐진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괴테 이야기, 그리고 뒤에 루벤스 - 우리가 아는 화가 루벤스가 아니다 - 이야기가 펼쳐진다. 여기에 실명으로 나오는 쿤데라 자신과 친구인 아베나리우스 교수가 나오고, 실제 인물들과 작중인물들이 서로 만나고 이야기하고... 참 난해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명확하다. 인간은 유한하다. 생명이 유한하고, 사랑 역시 영원하지 않다. 그런 유한과 순간에서 영원을 추구하는 것, 불멸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불멸이 되기 위해서는 절대로 영원해서는 안 되는 것. 순간에서 멈춰야 하는 것. 파우스트 박사가 순간을 멈추라고 했던 것, 비록 악마에게 영혼을 빼앗기게 되더라고 멈출 수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이 멈출 때, 멈춰서 하나의 장면으로 기억될 때 불멸이 된다.

 

그런 불멸을 우리가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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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반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78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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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생소한 병명 '알렉시티미아'라는 이름을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 한다는데, 특히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하는 증세라는데... 편도체가 보통 사람보다 발달이 잘 안 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세라고도 하고. 다만, 후천적인 훈련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고 하니 ('일러두기' 참조)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무궁무진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병일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스퍼거와 같이 남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는 증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알렉시티미아라... 그런 증세를 가진 이는 공포, 두려움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그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행동, 말에서 공포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 때와 다름없이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

 

공포나 두려움은 인간이 살아남는데 기여를 한 감정이기에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 왜냐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뜨거운 물이 담긴 빨간 주전자에 데었으면서도 다시 빨간 주전자와 뜨거운 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대하는 주인공의 행동이 이를 말해준다. 이는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단지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는 다름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와 통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기에 공포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아이가 사회에 적응하게 하기 위해 엄마는 기본적인 태도를 교육한다. 소설을 보면 단지 공포만이 아니라 감정을 읽지 못하는 경우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말은 생각을 전달하지만 생각을 곧이곧대로 전달하지는 않는다.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가. 말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감정들을 배제하고, 그냥 말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아마 세상 모든 예술이 사라질 것이다.

 

예술은 보이는 것 속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들어가는 대로만 나오게 하는 그런 기계적인 연산과 달리 사람들은 들어가는 것과 나오는 것이 무척 다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살아왔다.

 

이런 인간 앞에 기계가 서 있는 것이다.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마치 인공지능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어떤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냥 장면이 펼쳐질 뿐이다. 그리고 다음 행동을 할 뿐이다.

 

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많은 관계, 행동, 말 속에서 다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주인공에게는 학교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곳이다.

 

그와 정반대 인물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아마도 주인공의 편도체를 키워줄 인물, 아니 편도체라는 인체 일부분으로만 성장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 오히려 주인공은 전혀 다른 사람과 관계를 통해 스스로 성장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곤이... 어려서 부모와 헤어지고 온갖 험한 일들을 겪은 아이. 이 아이 역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감정을 읽지 못해서 표현을 하지 못한다면, 곤이는 감정을 너무도 잘 읽어서 표현하지 못한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자기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왔기에, 인정 욕구는 강하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면에 있는 작은 천사가 외면에 있는 악마로 나타나는 것이다. 외면으로 보이는 악마, 그러나 속에 숨어 있는 천사... 주인공이 감정을 읽지 못한다고 했는데, 아니다. 곤이란 인물로 인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감정을 정작 읽지 못하는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역시 사람의 내면을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겉으로 나타나는 면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또 자기 감정을 감추기 위해 마음과는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을 곤이를 통해 보게 된다.

 

오히려 감정을 읽지 못하는 기계같은 주인공은 곤이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곤이를 어떤 판단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곤이와 친구가 된다. 나중에 곤이를 찾아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사람, 그렇게 생활한 사람은 남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곤이가 변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에게 남긴 쪽지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진심.'이라는 말을 통해서 곤이는 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여준 친구가 있었기에 또 변하려는 아빠가 있기에 변해갈 것이다.

 

다른 한 축에 있는 인물, 이도라. 여학생이다. 주인공 마음에 이상한 파문을 일으키는 인물.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도라 역시 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육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육상을 한다.

 

이도라는 자기 길을 간다. 그냥 그렇게. 이런 이도라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어디에 있어도 이도라를 느낄 수 있게 된 주인공. 이것은 사랑이다. 마음의 흔들림. 그런데 사랑을 느끼게 되면 자연스럽게 공포를 느낄 수 있게 되지 않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사랑과 공포가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도라가 꺼져 라고 말해 곤이가 사라져버리고 난 뒤...

 

주인공에겐 사랑과 공포가 서서히 찾아들게 된다. 물론 공포는 여전히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표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주인공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된다.

 

일탈행위를 하는 곤이를 찾아가고, 곤이를 위해 칼을 맞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그는 성장했다. 성장하게 된 이유가 바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 관점에서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 앞에 있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알렉시티미아'라는 병을 앓고 있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정상인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어쩌면 자기만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는 '감정 공감 불능증'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을 읽지 못하는 주인공을 앞세워 봐라, 정작 감정을 읽지 못하는 것은 바로 너희들이라고... 곤이를 보라고. 곤이가 그렇게 외쳐댔는데, 누가 곤이의 감정을 읽어줬냐고? 오히려 곤이를 제 관점에서 내치기만 했지 않냐고... 그런 곤이를 받아들인 사람이 누구냐고... 바로 감정 표현 불능증에 빠진 주인공 아니었냐고.

 

감정 표현 불능증, 가만히 이 용어를 살펴보니 '표현'이다. '이해'가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내지 않았던가. 조금만 자기 뜻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 사람에게 인상을 찡그리고 말에 감정이 담겨 있고 막 그러지 않았던가. 그런데 주인공을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냥 무덤덤하게 상대를 대했다. 그가 사회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혔든,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든 똑같이.

 

그런 주인공을 통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했는지 반성하라는 듯하다.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감정 이해 불능증'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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