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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반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ㅣ 창비청소년문학 78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생소한 병명 '알렉시티미아'라는 이름을 이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감정 표현 불능증이라고 한다는데, 특히 공포를 잘 느끼지 못하는 증세라는데... 편도체가 보통 사람보다 발달이 잘 안 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증세라고도 하고. 다만, 후천적인 훈련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다고 하니 ('일러두기' 참조)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무궁무진한 존재인지 알려주는 병일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기도 했다.
아스퍼거와 같이 남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하는 증세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는데, 알렉시티미아라... 그런 증세를 가진 이는 공포, 두려움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그 장면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사람의 얼굴이나 행동, 말에서 공포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 때와 다름없이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
공포나 두려움은 인간이 살아남는데 기여를 한 감정이기에 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다. 왜냐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같은 행동을 반복하기 때문이다.뜨거운 물이 담긴 빨간 주전자에 데었으면서도 다시 빨간 주전자와 뜨거운 물을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대하는 주인공의 행동이 이를 말해준다. 이는 자신을 위험에 처하게 만든다.
단지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는다.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는 다름 사람의 감정에 공감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와 통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기에 공포도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아이가 사회에 적응하게 하기 위해 엄마는 기본적인 태도를 교육한다. 소설을 보면 단지 공포만이 아니라 감정을 읽지 못하는 경우까지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는 말을 통해서 알 수 있게 된다.
말은 생각을 전달하지만 생각을 곧이곧대로 전달하지는 않는다.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가. 말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감정들을 배제하고, 그냥 말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세상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는가. 아마 세상 모든 예술이 사라질 것이다.
예술은 보이는 것 속에 들어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들어가는 대로만 나오게 하는 그런 기계적인 연산과 달리 사람들은 들어가는 것과 나오는 것이 무척 다르다. 그렇게 우리 인간은 살아왔다.
이런 인간 앞에 기계가 서 있는 것이다.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마치 인공지능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부모의 죽음 앞에서도 어떤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그냥 장면이 펼쳐질 뿐이다. 그리고 다음 행동을 할 뿐이다.
학교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많은 관계, 행동, 말 속에서 다른 의미를 찾아내지 못하는 주인공에게는 학교란 별다른 의미가 없는 곳이다.
그와 정반대 인물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아마도 주인공의 편도체를 키워줄 인물, 아니 편도체라는 인체 일부분으로만 성장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 오히려 주인공은 전혀 다른 사람과 관계를 통해 스스로 성장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곤이... 어려서 부모와 헤어지고 온갖 험한 일들을 겪은 아이. 이 아이 역시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주인공이 감정을 읽지 못해서 표현을 하지 못한다면, 곤이는 감정을 너무도 잘 읽어서 표현하지 못한다. 그렇게 살아왔기에... 자기를 인정받지 못하고 살아왔기에, 인정 욕구는 강하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내면에 있는 작은 천사가 외면에 있는 악마로 나타나는 것이다. 외면으로 보이는 악마, 그러나 속에 숨어 있는 천사... 주인공이 감정을 읽지 못한다고 했는데, 아니다. 곤이란 인물로 인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는 감정을 정작 읽지 못하는 것은 주인공이 아니라 우리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 역시 사람의 내면을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겉으로 나타나는 면만 보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나, 또 자기 감정을 감추기 위해 마음과는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나 하는 점을 곤이를 통해 보게 된다.
오히려 감정을 읽지 못하는 기계같은 주인공은 곤이를 이해한다. 왜냐하면 곤이를 어떤 판단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곤이와 친구가 된다. 나중에 곤이를 찾아가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사람, 그렇게 생활한 사람은 남을 받아들일 수 있다. 곤이가 변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에게 남긴 쪽지 '미안하다. 그리고 고마워. 진심.'이라는 말을 통해서 곤이는 자기를 그대로 받아들여준 친구가 있었기에 또 변하려는 아빠가 있기에 변해갈 것이다.
다른 한 축에 있는 인물, 이도라. 여학생이다. 주인공 마음에 이상한 파문을 일으키는 인물.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도라 역시 집에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육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꿋꿋이 육상을 한다.
이도라는 자기 길을 간다. 그냥 그렇게. 이런 이도라에게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어디에 있어도 이도라를 느낄 수 있게 된 주인공. 이것은 사랑이다. 마음의 흔들림. 그런데 사랑을 느끼게 되면 자연스럽게 공포를 느낄 수 있게 되지 않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잃게 될까봐 두려워한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사랑과 공포가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도라가 꺼져 라고 말해 곤이가 사라져버리고 난 뒤...
주인공에겐 사랑과 공포가 서서히 찾아들게 된다. 물론 공포는 여전히 잘 느끼지 못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은 표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주인공의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된다.
일탈행위를 하는 곤이를 찾아가고, 곤이를 위해 칼을 맞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그는 성장했다. 성장하게 된 이유가 바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았기 때문이다. 자기 관점에서 남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눈 앞에 있는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알렉시티미아'라는 병을 앓고 있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정상인이라고 하는 우리들이 어쩌면 자기만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는 '감정 공감 불능증'을 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는 생각을 했다.
감정을 읽지 못하는 주인공을 앞세워 봐라, 정작 감정을 읽지 못하는 것은 바로 너희들이라고... 곤이를 보라고. 곤이가 그렇게 외쳐댔는데, 누가 곤이의 감정을 읽어줬냐고? 오히려 곤이를 제 관점에서 내치기만 했지 않냐고... 그런 곤이를 받아들인 사람이 누구냐고... 바로 감정 표현 불능증에 빠진 주인공 아니었냐고.
감정 표현 불능증, 가만히 이 용어를 살펴보니 '표현'이다. '이해'가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내지 않았던가. 조금만 자기 뜻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 사람에게 인상을 찡그리고 말에 감정이 담겨 있고 막 그러지 않았던가. 그런데 주인공을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그냥 무덤덤하게 상대를 대했다. 그가 사회에서 나쁜 사람이라고 낙인찍혔든,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든 똑같이.
그런 주인공을 통해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했는지 반성하라는 듯하다. 소설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감정 이해 불능증'에 빠진 것이 아닌가 하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소설이었다.